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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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은희경'이라는 작가를 만나게 해 준 책은 '새의 선물'이있다. 제 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다운 책이었다. "정말 잘 썼다."라는 말이 나오게 만드는 책이었다. 한편으론, 작가가 걱정되기도 하는 책이었다. 등단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렇게 좋은 글로 세상의 문을 열기 시작하였으니, 그녀에 대한 기대 또한 만만치 않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그녀의 책들을 계속 만나기 시작했다. '타인에게 말걸기',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그것은 꿈이었을까', '마이너리그'를 읽었다. 괜찮았다. 그러나, 첫인상보다 더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그러다 '비밀과 거짓말'을 읽었다. 이 책에서 은희경이라는 가면을 쓴 작가를 만나고, 자신이 잘났다는 것을 뼛속부터 알고 있는 작가를 만나고, 수많은 나무들을 그려놓은 듯한 작가를 만나, 그 책을 끝까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은희경을 덮었다.  

'소년을 위로해줘'를 읽었다. 기대하지 않았다. 여전히 수많은 양의 글들을 내포하고 있지만, 소년이라는 주인공과 힙합이라는 대변이 이 책을 더이상 무겁지 않게 하고, 읽어내려가게 했다. 그러다, 은희경이었어. 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들어줬다. 여전히 기대하지 않지만, 정이 갔다.

이 책, 읽어봄직한 좋은 책이다.  

p55 그때는 잘 몰랐지만, 정확히 따져보면 엄마한테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육교 아래로 끌려갔을 때 내 주머니에는 이천원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그 정도의 돈을 뺏기 위해 자기보다 약한 상대를 골라 마구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는 치사함, 그리고 그런 일이 예사로 벌어지는 후진 세상이라니. 그런데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겨우 엄마에게 화를 내는 것뿐이었다. 정당하게 맞서지 못하고 만만한 데에 화풀이를 하는 나는 또 얼마나 비겁한가. 한심한 놈이라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그날 나는 한참을 거울 앞에 서 있다가 침대에 엎드려 울었다. 거울을 뒤집어놓은 채.  

p67 재미없는 걸 왜 할까요. 

p69 신민아씨는 이따금 흰 셔츠와 검은 바지 차림의 웨이터가 시중을 드는 고급 양식당에 나를 데려간다. 그런 장소에서는 포크를 떨어뜨리면 금세 새로 갖다주고 빈 물잔은 어느 틈엔가 채워져 있다. 편하긴 하지만, 어쩐지 그곳에서는 그곳만의 질서 같은게 있어서 반드시 거기 따라야만 할 것 같은 억압도 느끼게 된다. 식기를 올바로 사용하고 목소리를 낮추고 맛을 음미하고, 그런 일들이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런 태도를 지켜야만 하는 분위기가 불편하다. 공손한 대접을 받지만,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곳의 어떤 질서를 위한 것 같고.  

p100 언젠가 엄마는 전생에 가장 빚을 많이 진 사람들이 그 빚을 갚기위해 부부로 만난다는 말이 있더라고 했다. 결혼이 빚 갚는 일이라니. 더구나 사람 사는 게 기억나지도 않는 빚을 갚는 청승맞은 일이라니. 전생 따위는 더욱더 안 믿게 됐다나. 하지만 만약 전생이란게 있다면 나는 그곳에서 한번쯤 태수를 만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빚 같은 건 지지 않았을 것 같다. 다만 다른 생에서 한번 더 만나보자고 약속한 거 아닐까. 시간이란 어딘가로부터 오는 것이고 그리고 어딘지 모를 무한대로 흘러들어가겠지. 우리는 잠시 거기 실려서 떠가고 있는 중이고. 그곳이 어디일까. 어디로 가게 될가. 나는, 또 태수는. 우리는 그렇게 흘러가면서 잠깐씩 서로 스치고, 스치는 순간 다시 각자의 방향으로 튕겨져나가는 걸까.  

p177 -이혼 왜 한거야? 갑작스러운 질문인데도 엄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곧바로 대꾸한다. -아빠가 하자고해서. -엄마는 안 하고 싶었는데? -난 그런 방법이 있는 줄 몰랐지. 

p460 그래서 그렇게 방에 혼자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한 다음 마음의 준비까지 마치고 차분히 침대 헤드에 기대서 비로소 통화버튼을 누르는 거다. 설레는 마음. 그러나 받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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