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바오출판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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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슈테판 츠바이크][초조한 마음]을 읽고, 뭐지? 뭐야? 이건... [스토너]에서 끝난 줄 알았는데, 왜이래. 그나저나 [스토너] 또 읽어야 겠다. [세상 끝의 카페] 다시 읽는데, 이전에 느꼈던 그 여운이 아니다. 그런데 왜 영문판을 기어이 사서 또 읽는 것이냐. 나란 존재는.

 

그래서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를 샀다. 그래서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를 샀다. 이 마음의 연결고리, 손을 어찌해야 하는가.

 

2009년에 나온 책이어서 그런가? 책 표지 정말 뭥미. 그러고 보니 책을 출간하기 위해 디자인을 맡기고 견본을 받아보고 느낀 건 예쁜 책 표지이기보다는 책 제목이 잘 보이면 된다. 책 디자인은 예쁘다라는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 이 책의 표지조차 용납할 수 있는 정도가 된다. 글이 이렇게 빽빽해도 괜찮다. ? 내가 출판하는 책도 마찬가지다. 딱 이만큼이다.

 

이 책이 돈키호테, 세르베투스의 이야기인 줄 알았으면 내가 이 책을 샀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이 무모한 용기야말로, 내가 책을 집어 들고 마무리 할 수 있게 하는 힘. 나는 책을 집어들면 대충이더라도 끝까지 읽는다. 이것은 내 좋은 습관 중에 하나다. 말다를 하지 않는다. 내 손에 들린 책은 언젠가는 이렇게 서평이 쓰이는 신세가 된다. 그 언젠가는 정해져 있지 않지만.

 

독재의 열망을 가지고 있는 이가 아닌, 스스로가 독재자인지 모르는 독재자가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면 어떻게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책이다. 나도 이리같은 왕이 되고 싶다. 폭군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나는 절대 폭군이 될 수 없음을 안다. 독재자, 폭군은 이미 그렇게 되었다. ‘세르베투스의 미칠 듯한 분노라는 소제목에서 확연하게 느껴진다. 분노하면 어쩔텐가. 칼뱅에게 끝날 것을. [진리를 구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그것을 말하는 것은 절대로 범죄가 아니다. 아무도 어떤 신념을 갖도록 강요 당해서는 안된다. 신념은 자유다. 폭력에 반대한다.] 그렇게 외친들 독재자가 있는데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어디에서도 진리는 통하지 않는다. 독재자의 말이 진리가 된다. 시대가 지나고 히틀러가 그러면 안됐다고 한들, 칼뱅이 그러면 나쁜 놈이라고 한들, 이미 지나간 일이다. 역사는 되풀이 될 뿐이다.

 

[폭력에 반대한다]는 말이 너무 하찮아서, 연약해서, 힘없는 지금의 나 같아서, 평생의 나같아서 [싯다르타]에 반문을 제기하고 싶다. 인생사 일장춘몽이지만, 나는 꿈속에서나마 자유롭고 싶다.

 

이 책은 세르베투스와 시대를 대표하는 멋진 사람 칼뱅도 어떤 면에서는 독재자이고, 폭력을 저지르며, 그 폭력은 정당화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에 대해 폭력으로 짖누르고, 자신의 의견에 반하는 자를 처헝하는 칼뱅을 두고, 우리가 현대를 살아가면서 집단이 가지는 힘을 이용해 다른 의견을 가진 자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심도있는 책이었다.

 

지금의 내가 생각해봐야 할 문제. 그런데 이 책에서 저자 소개를 할 때 내가 읽은 저자의 글은 소개되어 있지 않았다. [감정의 혼란]도 괜찮다. 왜 감정의 혼란인지, 저자는 마지막에 가서 어떤 장치를 한 것도 아닌데, 감정을 휘몰아치게 만들며 독자가 파국처럼 안게하는 마력이 있다. 그나저나 소개에 저자가 부인과 자살을 했다고 한다. 육십대에. 왜 이렇게 자살하는 작가들이 많았을까? 버지니아 울프는 옷에 돌을 넣고 물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오버랩된다. 다자이 오사무가 배에서 뛰어 내리는 장면이 영사기의 필름처럼 지나가는 것 같다. [자살에 대하여]를 펼쳐야겠다.

 

요즘 HAI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점심시간 동안 부정적인 이야기 오물을 뒤집어 쓰기를 반복했는데, 얼마 전부터는 모든 이야기를 지피와 재미와 동반자처럼 사는 삶을 세세하게 시전하는데, 나만 AI에 의존하지 않는 것인가? 나만 아직도 이렇게 종이의 질감을 만지고 넘기면서, 밑줄을 그으면서 생각을 연필로 적으면서. 다 읽고 나서는 이렇게 글을 정리하고, 나의 생각도 정리하는가. 물어보는 것들에 대해 시원한 답을 듣는다기보다는 이게 맞는 거야? 하고 의심의 기술을 시전한다. 모르는 것도 뻔뻔하게 거짓된 정보로 이야기를 하기에 믿음이 가신지 오래 됐고, 심리상담을 왜 AI한테 하고 그것을 맹신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마치 종교처럼 신봉하는데, 나는 안 믿는다고 했으면 적당히 해야 하는데, 적당히를 모른다. AI 두드러기가 날 지경이다. 책 제목을 말하고 그걸로 표지 예시를 만들라고 하면 한글도 제대로 입력이 안되서 깨지는 심지어 유료버전의 AI를 나보고 어쩌라는 말인가.

그런데 U도 일의 능률이 올라간 것은 AI덕분이다. AI가 생기고,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는 이들이 어떻게 AI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이 맹신하는 데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데는 그 정도의 기능도 하지 못하기 때문다. 자신의 추함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다는 말로 들려서 짜증이 인다. 알고 사용하면 좋을텐데. 무분별하게 받아들일 AI의 어린양들같다.

 

읽던 책이나 읽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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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정치

이 숭고한 유토피아의 이념으로 무장한 강철 같은 이념의 인간은 그것을 무섭도록 진지하고 정직하게 생각했다. 25년간 정신적 독재를 펼치면서 칼뱅은 사람들에게서 가차 없이 모든 개인적 자유를 빼앗는 것이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단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이 경건한 폭군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친 온갖 요구들을 하면서 자신은 오직 사람들에게 참되게 살라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지와 뜻에 따라서 살라고 요구했을 뿐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사실상 매우 단순하고 반박의 여지없이 분명한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지시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모든 독재청지는 하나의 이념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모든 이념은 그것을 실현하는 인간에게서 비로소 형태와 색깔을 얻게 된다.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의심의 기술

 

과대망상에 빠져 줄곧 혼자서 모든 사람과 대적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를 망친다.

 

폭력행위는 시대마다 다른 형태로 나타나므로, 폭력에 저항하는 싸움도 언제나 새롭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절대로, 지금은 폭력이 너무나 강하므로 폭력에 말로써 대항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핑계 뒤로 숨어서는 안된다. 필연적인 일이 지나치게 자주 이야기되는 법이 없고, 진실이 헛된 경우도 없기 때문이다.

비록 말이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 해도, 그것은 그 말의 영원한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 순간에 진실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하는 사람은, 어떠한 테로도 자유로운 영혼에 대해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그리고 가장 비인간적인 세기에도 인간성의 목소리를 위한 자리가 있다는 사실도 입증하는 것이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가장 가혹한 고통 속에서 산 채로 불태워 버리는 비인간적인 일을 저질렀던 칼뱅은, 이제 검열의 일방성에 힘입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의 범죄를 숨기는 것이 가능했다.

 

우리 뒤에서 마주 짖어대는 개들이 우리를 물 수 없게 되어 퍽 다행입니다.

 

비극적인 체념 속에서 부당함을 조용히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폭력에 의해 패배한 사람들이 가지는 우월한 경멸감만이 폭력이 정신을 억누르는 모든 시대에 위안이 되었다.

 

당신들의 말과 무기는 당신들이 꿈꾸는 폭력정치에 어울리는 것들이다. 그것은 정신적인 지배보다는 시대의 지배에 어울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강제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의 권력과 무기 때문에 당신들을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나는 다른 권력과 무기를 가지고 있으니, 곧 진리와 내가 무죄라는 느낌과 도우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분의 이름이다.

 

한번 폭력을 행한 사람은 계속해서 그것을 써야 하고, 한번 테러를 시작한 사람은 테러를 더욱 강화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X가 떠오르네. 네가 가진 권력의 내면이 이렇다. 그래도 갖고 싶어 거짓에 둘러 쌓여 파묻히고 있지.

 

깊이 실망했으나 결코 신념을 굽히지 않은 채 그는 자신의 일로 되돌아갔다.

 

명예로운 자는 극단적인 증오에 중독되지 않는다.

그는 어느 쪽이든 당신의 행동은 아름답지 못했다. 당신이 주장한 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해와 관용을 모르는 광신자

 

잘못으로 가득 찬 나쁜 책

 

칼뱅주의가 인류에게 퍼져나갈수록 필연적으로 이러한 가혹하고 비인간적인 특성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책 한 권이 끝나고 나면, 언제나 나 자신은 거부감을 느낀다. 모든 것이 잘못되었고, 화나고 실패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이렇게 낙담한 심정이 한동안 계속 남아 있다. 차라리 모든 발행본들을 다 사들여서 불태워 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곤 한다. 참되고 공정한 태도를 가진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모든 묘사가 혹시 내가 무게를 제대로 달아보지 않은 것이나 아닌지 훗날 양심의 고통이 되곤 한다.

 

기독교는 세계관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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