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인생 편의점 (양장) - 내 삶의 철학이 되는 지혜의 모든 것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김문성 옮김 / 스타북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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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인생편의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김문성 옮김

 

이처럼 극명하게, 명료하게 알려주는 지침이 있을까? 이대로 따라 하고 싶다. 인생은 그리 복잡하지 않고, 혼자 사는 세상이라는 것.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믿음으로 서로를 배려해야 한다는 건 개소리라고 말하는 책

 

 

[남을 신경쓰지 말고 호감가는 사람이나 좋은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라.

출세 등 타인의 기준이 아닌, 나만의 기준으로 인생을 살고 오직 나를 위해 내 자존감을 높이는 삶을 살아라.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우선 처리하는 것이다.

당신 자신이 자신의 한계를 믿으면 그게 한계가 된다.

걱정이나 후회하는 시간은 얼마든지 짧아도 무방하다.

불행에 꺾이지 말라.

오히려 대담하게 불행에 도전해 나가라.

그러므로 굳세게 살아나가라.

역경을 향해 용감하게 대결하라

비겁함은 지나친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직 자기를 의지하고, 자기 자신 속에 모든 것을 소유하는 사람이, 완전히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이 자신에게 충실할수록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그만큼 가치가 적어 보인다.

실제로 훌륭한 사람은 세상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고, 존경을 받는 사람은 아무 쓸모도 없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개성을 가진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고 지내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삶은 값싼 희극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손에 넣으려는 대상은 모두 다 우리에게 저항한다.

그 누구도 오랫동안 가면을 쓰고 있을 수는 없다.

동물은 언제나 실제의 쾌락이나 고통을 느낀다.

인간은 지적 수준이 얕을수록 삶에 더욱 만족을 느끼고 있다.

개체의 의식은 죽음으로 일단락이 나서 영원히 끝장을 보아야 할 것이다.

생활을 되도록 간단히 내 나간다면.

 

언제나 미래를 내다보고 행복은 앞날에만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현재를 돌보지도 않고 즐기지도 않는 사람은 혼자서 원대한 계획에 따라 지혜를 숭상하고 있는 것으로 자부하더라도, 실은 이탈리아의 노새와 비슷한 족속들이다. 이탈리아에서는 풀잎을 묶어 노새의 머리 앞에 매어 두는데, 노새는 이것만 쳐다보며, 한 반짝만 더 나가면 이 풀잎을 삼킬 수 있을 줄 알고 발길을 재촉하여 잘 걷는다.

 

우리는 언제나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재앙에 대해서는 절대로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재앙에 대해서는 곧 닥쳐올 것으로 보고 빈틈없이 대책을 세워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오늘 하루는 오직 한 번밖에 오지 않을 뿐이고, 다시는 오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이라는 날이 내일 또 오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내일도 오직 한 번밖에 오지 않는 또 다른 하루이다.

 

우리는 현재의 아름다운 날들을 느끼지 못하고 낭비해 버리고, 달갑지 않은 날들이 닥쳐왔을 때 비로소 우리는 예전과 같은 날이 돌아와 줬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우리의 몸뚱이가 옷으로 싸여 있는 것처럼 우리의 정신은 거짓으로 싸여 있다. 우리의 이야기나 행위, 우리의 모든 거동은 거짓에 가까우며, 사람들이 이 덮개를 통하여 겨우 이리의 진정한 의향을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마치 옷을 통하여 신체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인간을 사교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에게 고독을 참아 나가거나 고독 속에 자기를 가두어 나갈만한 능력이 없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인간의 사교 본능도 그 근본은 직접적인 본능이다. 왜냐하면, 사교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고독이 무섭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뇌는 모두가 혼자서 있을 수 없다는 데서 오는 것이다.

 

시간을 내어 고독을 가까이하고, 다시 이것을 사랑하게 된 사람은 금광을 얻은 것과 다름없는 이득을 본 셈이다. 음식을 절제하면 건강을 되찾을 수 있고, 되도록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다. 사회는 모닥불로 비교할 수 있다. 현명한 사람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불을 쬐며 바보처럼 손을 불에 데는 일이 없지만, 어리석은 자는 손을 데고 나서 고독이라는 찬방에 가서 불이 자기에게 화상을 입힌 것을 원망한다.

 

인간이 질투한다는 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얼마나 불행하게 느끼고 있는가를 말해 준다. 그들이 타인의 행위를 끊임없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얼마나 권태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모든 일이 우리의 뜻대로 되어가도 오직 한 가지 일만 우리의 의도에서 어긋나면 그것이 하찮은 것이라도 우리의 머리를 계속 자극한다. , 우리는 이에 대하여 몇 번이고 생각해 보지만, 뜻대로 되어가는 다른 모든 소중한 일들에 대해서는 별로 염두에 두지도 않는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됨됨이를 무작정 공격하면 그는 우리 가운데 있는 불구대천의 적을 만들어 힘들게 물리치려고만 할 것이다.

 

그 경우 전혀 문전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주저할 필요도 없이 의리를 저버리는 사람은 나라의 법률도 어길 것이며, 자기 신상에 위험이 닥치지 않는다면 어떠한 잘못도 저지를 것이다.

 

우리의 동료나 사귀고 있는 사람이 우리에게 불쾌하게 굴거나 귀찮게 군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이와 비슷한 일을 다시 몇 번이고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상대방은 우리에게 쓸모가 있는 존재인가 아닌가.

 

만일 우리가 자기가 알고 지내는 사람 대부분이, 자기가 없는 데서 자기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를 귀로 분명히 들을 수 있다면 벌써 그들과 한 마디도 나누고 싶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평범한 자가 상석을 차지하고 실력이 있는 자들은 이들보다 한결 처지거나 혹은 배척을 당하게 마련이다. 이런 현상을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다.

 

궁핍은 하류층의 끊임없는 채찍이며, 권태는 상류층의 채찍이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는 일요일은 권태를 대표하고 나머지 6일은 궁핍을 대표한다.

 

불안과 괴로움에 시달리는 생물들이 오직 서로 물어뜯기를 일삼으며, 모든 맹수는 무수한 생명을 삼키면서 연명하고 있다.

생물들이 이지가 발달할수록 괴로움에 대한 감각이 증진하며, 따라서 인간은 그 감각이 최고도로 발달해 있다.

 

욕구를 갖는다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욕구를 갖게 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삶은 본질적으로 괴로운 일이다.

 

그들은 안락한 삶을 누리게 되면 그 삶 자체가 일종의 형벌이 되어 권태의 채찍에 시달리게 되므로, 여기에 벗어나려고 여기저기 명승지를 찾아 여행이라도 다니면서 세월을 보내는데, 그 모습은 한 곳에서 다른 곳을 찾아 구걸하러 다니는 거지와 다른 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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