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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가꾸기의 즐거움 - 헤르만 헤세 산문집 ㅣ 반니산문선 9
헤르만 헤세 지음, 배명자 옮김 / 반니 / 2019년 12월
평점 :
정원 가꾸기의 즐거움
헤르만 헤세 지음
마음에 들어오는 글들이었다. 밑줄그은 글들을 컴퓨터에서 글자를 만들어 피워내는 일은 또 다른 감각을 불러온다.
이럴 때일수록 자연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걸 의식적으로 챙겨야 한다. 의식하고, 기억해야한다.
[모든 소유는 구속이었고, 모든 이해는 포기였으며, 모든 죄는 미소와 생각 안에서 미화되었다.
건강, 상실, 생각 없는 낙관주의. 모든 심각한 문제 따위는 웃으며 외면하기, 공격적인 질문 삼가기, 순간을 즐기는 기술, 이런 것들이 우리 시대의 슬로건이다.
당시 독일 국민들은 모두 소위 건전한 낙관주의에 젖어 모든 것이 훌륭하고 황홀하다고 여겼고, 마침내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전쟁은 매우 위험하고 폭력적인 일이며, 전쟁이 결국 독일을 비참하게 만들고 끝날 거라고 말하는 모든 비관주의자를 벽에다 밀어붙이고 위협했다. 이렇게 비관주의자들은 조롱당하고 때로는 벽에 밀쳐졌지만, 낙관주의자들은 다가올 위대한 시대를 축하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얼마나 많은 친구가 올해 내 곁은 떠났던가! 그러나 오늘 나는 슬픔 없이 그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내 생각과 꿈속에서 여전히 살고 있다. 그들이 살았을 때와 똑같이.
강한 햇살에 눈이 부셔 고개를 돌리던 순간, 푸른 잎새 속 깊숙한 곳에서 거무스레한 뭔가가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새가 아니라 나비였다. 지난 3,4년 동안 본 적 없는 아주 회귀한 들신선나비였다. 크고 아름다우며 허물을 벗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보란 듯이 몇 번 날개를 파악이더니 멀리 날아갔다가 다시 돌아와 냄새를 맡고 주변을 맴돌다가 왼손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나비는 날개를 포개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날개 아랫부분은 칙칙한 갈색과 잿빛을 띠었지만, 날개를 다시 활짝 펴자 벨벳처럼 부드럽고 진한 자주색이 화려하게 드러났고, 그 위에는 샛노란 줄무늬와 푸른색 점들이 멋지게 줄지어 있었다. 노란 줄무늬는 날개의 밝은 가장자리 색과 물감을 칠한 듯한 검붉은색 사이에서 너무도 고상하고 우아하게 돋보였다. 나비는 리듬을 타듯 숨을 쉬며 부드러운 날개를 천천히 접었다 폈다 하면서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다리 여섯 개로 내 손들을 단단히 딛고 몸을 지탱했다. 잠시 후 눈 깜짝할 사이에 나비는 뜨겁고 밝은 햇살 속으로 멀리 사라졌다.
사랑하는 벗이여! 너무도 멋지고 조금은 별난 이번 여름도 마침내 끝나려나 봅니다. 아침이면 초원은 다시 흠뻑 젖어 있고, 벚나무 잎은 자줏빛으로. 아카시아 잎은 황금빛으로 벌써 물들어가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들을 부러워하며 경탄합니다.
더위가 가시지 않은 7월 저녁에 평온하게 다시 읽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이여. 이 작은 책이 얼마나 매혹적이고 매력적인지 모릅니다!
그림자가 지금처럼 부드러우면서도 흐릿해지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삶의 무상함을 슬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소중히 받아들입니다. 가장 무상한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꽃이며 가장 사랑스러운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겉보기에 아주 튼튼하고 저주스러울 만큼 건강해 보이는 돈과 기계의 인간들은 한 세대를 행복하고 멍청하게 지내다가
궂은 날씨, 아픈 몸, 그리고 이런저런 일들이 나의 여름 대부분을 앗아갔다.
나비채를 손에 들고 돌아다니느 소년, 양철 식물 채집통
이 무렵 며칠 동안 계속된 숨막히는 무더위에도 개의치 않고 더 자주 밖으로 나간다.
이 풍요로운 여름이 내 감각에 제공하는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냄새 맡고, 맛보고 싶다.
이처럼 갑작스러운 소유욕에 사로잡혀 휴식도 잊은 채
평소에도 소유욕이 그다지 강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고 쉽게 놓아주는 편이지만, 지금은 온통 붙들고 싶은 열망에 괴로워한다.
일생일대의 거창한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날마다 조금씩 작은 죽음을 겪는다.
우리는 너희들을 사랑하지.
그럼에도 너희들의 목을 꺾는다
죽이고, 아무런 후회도 하지 않는다
커다란 비밀이 죽어가는 것들을 감싼다
가는 나이테는 그해애 폭풍우의 거센 공격을 받아 힘들었음을 나타내고, 굵은 나이테는 잘 지냈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농촌 아읻르은 가장 강인하고 고귀한 나무가 가장 가는 나이테를 가졌다는 걸 안다. 그런 나무는 높은 산꼭대기와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는 곳에서 자란다.
그가 갈망하는 것은 오로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이다.
나의 오랜 친구였던 복숭아나무가 서 있던 자리에는 이제 구덩이가 생겼다. 내 작은 세계에 균열이 생겨 그 틈새로 공허와 어둠, 죽음과 공포가 기웃거렸다. 부러진 나무 줄기가 서글프게 누워 있었다. 어쩐지 조ㅁ푸석푸석하고 물렁물렁해 보였고, 가지들도 꺾이고 부러져 있었다. 2주만 더 있었더라도 그 가지에는 다시 분홍빛 꽃이 피어 파란 하늘이나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꿋꿋이 서 있었을 것이다. 이제 나는 그 나무에서 꽃가지를 걲지도 못하고 열매도 따지 못할 것이다. 독특하고 환상적인 나뭇가지를 그림으로 그릴 수도 없고, 무더운 여름날 계단을 내려가 나무의 옅은 그늘 속에 잠시 쉴 수도 없을 것이다.
도시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생활을 표현하고 찬양한다. 그것은 도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거칠지도 않고 평온하지도 않지만,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고향처럼 정신적인 인간과 영웅적인 인간의 마음을 가장 깊은 곳까지 끌어당긴다.
성급함이나 걱정 따위는 없다.
노인도 되었다가 청년이 되기도 하고, 난쟁이가 되었다가 거인도 된다. 정원에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너무 빽빽하게 들어찼고, 너무 많은 세계가 그 안에 있었다.
주위는 고요하고 뜨거운 한낮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그래서 혹시라도 외부 세계가 몰락한다고 해도, 우리 중 누군가가 그 세계를 다시 세울 수 있다.
우리는 한 시대의 늦가을, 몰락하면서 해체되어가는 세계에 살고 있다. 그 세계는 많은 사람에게 지옥이 되었고, 거의 모든 사람에게 불안한 것이 되었다.
모두가 미친 듯이 바빴다.
형편이 나아지게 하려고 애쓰느라 자신을 혹사했다. 모두가 힘들게 일했고, 거의 모두가 물건을 만들거나 물건을 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