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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책 독서 모임 - 오늘의 철학 탐구 ㅣ 민음사 탐구 시리즈 1
박동수 지음 / 민음사 / 2022년 6월
평점 :
오늘의 철학 탐구
박동수 지음
민음사
정체성의 편집자들,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건너기, 어색한 관계의 생산성, 우리 너머의 우리, 온몸으로 후퇴하기 헤드라인을 잘 뽑아내는 기사를 쓰기에 적합한 저자다. 그리고 너무나도 황홀하게 반어를 사용하여 세상에나 어쩜 그런 말을 할 수 있어?라고 감탄마저 하게 한다. 그런데 문제는 글이 잘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명 한글이고 그리 어렵지도 않은 것 같은데 잘 읽히지 않는다. 그나마 [사람, 장소, 환대] 스토리 요약 부분은 괜찮게 했다. 그 정도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저자일지는 몰라도 글이라는 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독자들이 읽는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았으면 좋겠다. 비록 아주 형편없는 글일지라도 내용 파악은 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형편없는 수준을 논하기에도 어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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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읽는다는 것은 현실에 불성실해지기 위한 독서모임을 하는 기분이랄까. 마치 해외로 관광 여행을 떠나 그곳에서 예기치 못했던 장소나 물건을 우연히 마주하는 경험과 비슷하다.
편집자를 위한 철학 독서회의 회원은 총 열 명인데, 고작 열명의 편집자들이 무려 네 종의 잡지를 만들고 있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이 모여 펼친 공상은 현실이 되고, 현실이 된 공상은 또 다른 공상과 또 다른 현실을 불러온다.
당면한 현실에만 매몰되어 버린 관점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유연하고 경박한 사고가 필요하다. 우리는 없던 길도 만들지
뼛속까지 다원화된 개인들이 살아가는 사회, 정체성의 불안정성이 결코 해소될 수 없는 사회,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세계관이 없는 사회, 이것이 21세기 다원화 사회의 현실이다.
훈계하는 조랑말과 분노하는 호랑이
인터넷, 주의 산만함, 다양한 형태의 유혹들과 멀어져서 자신의 권태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그 권태의 바다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내는 영웅적인 투쟁이 필요하다.
여러분이 선택한 것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 집중할 수 있다면 아마 상황을 달리 볼 수 있음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의미의 원천이 되고, 자아를 확장하는 것이 우리 사람의 영원한 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끌어당기는 외부의 힘에 우리가 열려 있을 때만 최선으로 행동할 수 있다.
즐거운 술자리에서 맛있는 삼겹살을 먹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건 반짝이는 경험이지만, 우리는 그 경험의 일부인 삼겹살이 어떤 과정을 통해 생산되고 어떤 폭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지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열광과 환희의 순간이 우리에게 삶의 의미라는 빛을 던져 줄 때, 그 빛으로부터 소외되고 배제된 자들의 경험은 잘 보이지 않는다.
상사나 클라이언트와 의견이 부딪칠 때 얼마나 감사를 전하고 어떻게 적절하게 대응할 것인가?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받아들여진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에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사람이 된 것인가
나를 돼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한 명 뿐이라면, 나는 그를 무시해 버릴 수 있다. 하지만 하나둘 그에게 동조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마침내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이 나를 돼지라고 부르기 시작한다면, 나는 실제로 돼지가 된다. 물리적 폭력을 동반하지 않는 무시와 모욕이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런 말과 몸짓이 한 사람의 인격성을 부정함으로써 그를 사회 바깥으로 내모는 배제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람다움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다움은 서로가 서로에게 사람대접을 할 때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어떤 것이다.
실제로 누가 포함되고 누가 배제되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는데 있다. ->실제로 누가 포함되고 누가 배제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자신의 위치를 자각할 수 있다.
어디에 착륙하고 싶은가
누구와 함께 장소를 공유하며 살아가기로 했는가
인류세, 동물권
인간이 아닌, 내가 아닌 그 밖의 모든 살아 숨쉬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
혹은 눈을 돌려서 초록을 머금은 잎, 노랗고 발간 꽃잎들, 가슴을 넓어지게 하는 하늘ㅇ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나에 매몰되는 것에서 벗어나 내가 아닌 타인을, 타자를 타물을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을 열게 된다.
나는 이런 것들과 함께 장소를 공유하며 살아가고 싶다. 아직도 퇴근하고 집에 가는 길에 폰을 들여다보느라 세상을 바라보지 못한다. 그러나 출근길에는 명상을 틀고 호흡에 집중하기도 하고 주변의 벚꽃이 피었다가 이내 초록색 잎들로 바뀐다던가, 갈색이었던 앙상한 쭉정이 같았던 가지들이 어느새 초록잎을 머금고 꽃을 드리우고 있다든가 하는 자연이라는 이름의 식물들이 내가 걷는 길을 동반하고 있음을 알아가고 있다.
나는 좋은 것들을 최대한 미루고 심지어 잊고 살려고 하는 나쁜 습관이 있다. 좋지 않은 것은 욕심이 생겨 자꾸만 사들이고 톡톡히 인류세를 치르고 있다.
얼마전 A 동료가 대학교다닐 때는 어떻게 지냈냐고 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냈다고 하니, 힘들겠다고 했다. 그래서 옷도 사고 신발도 사고 즐겁게 지냈다고 하니,
“그때 산 옷들이 아직도 있나요?”라고 물었다. 그때는 없지요 하고 웃었는데, 하루가 지나고 나니, 그 말이 머리에 들어와 훑고 지나간다. 그때 내 노동력과 바꾼 수많은 옷가지들은 지금 내곁에 없다. 그렇다고 그 당시에 산 옷이 나를 기쁘게 했냐하면 그렇지만도 않다. 나는 먹는 것보다 입는것에 열을 올렸고, 그렇게 산 옷들은 이내 어디론가 버려졌다. 나는 그렇게 인류세를 톡톡히 치르면서 성장했다.
그때는 나만이 이 세상을 사는냥 겉멋이 들어 지냈지만, 그렇다고 꾸밀줄도 몰라서 애꿎은 돈과 자연만 낭비한 꼴이 되었다. 어제도 그제도 오늘도 집앞에 택배는 쌓여있고, 작은 알맹이 하나를 얻기 위해 과대포장된 박스를 몇 번을 풀어야 할지 모른다. 인간이라는 이유로 나는 폭군이기를 자처하고 있다.
이 종착지는 묻지 않아도 생각해보지 않아도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지 불보듯 뻔하다. 왜 불보듯 뻔하다라는 말이 나왔을까? 불은 어떤가? 아주 밝다. 어두운 곳에서도 작은 불빛 하나만 있어도 더할 나위 없이 명명백백히 그것은 불이요, 주변이 밝아진다. 그럿듯 명백한 것을 말할 때 불보듯 뻔하다라는 말을 쓴다. 내 간략한 이야기는 누가 들어도 내 삶의 종착지를 알게한다. 나는 여기서 멈추고 멈추는 것을 익히면 후퇴하는 것을 익혀야 한다.
나는 불보듯 뻔한 내 종착지에 작약 한 방울을 흘려 아주 조그만한 곳, 어느 한 곳이라도 누군가에게 약이 될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다. 나는 흘러가되 앞이 아닌 뒤로 흘러가는 사람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