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의 맛 - 교정의 숙수가 알뜰살뜰 차려 낸 우리말 움직씨 밥상 한국어 품사 교양서 시리즈 1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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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의 맛

교정의 숙수가 알뜰살뜰 다쳐낸 우리말 움직씨 밥상

김정선 지음

 

[하물며 사람이 지난 자리야. 시친 듯 지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친 듯 지난 사람도 있고, 공그른 듯 지나는가 하면 기운 듯 지나기도 하며, 때로는 온통 누비고 다니는 사람도 있으리라.

 

때로는 마음의 근육이나 관절도 접질리고 겹질려 옴짝달싹 못하게 될 때도 있다. 우울감이 심해지면 남자는 몇 날 며칠을 새벽녘까지 잠들지 못하고 힘들어했단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천장이 마치 활짝 갠 하늘처럼 새파랗게 보이더라고. 이미 병원 치료까지 받아 본 지인은 그럴 때가 더 무서운 거라고 잔뜩 겁을 주었지만, 어쨌든 남자에게 그날은 우울감으로 늘 우중충하던 궂은 날들 속에서 반짝하고 활짝 갠 어느 날이었다.

 

앞으로 고꾸라졌지만 아직 거꾸러진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려나. 그때가 되면 이 지질한 삶도 그만 걷어치울 수 있겠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전철역으로 내려가는데 반대편에서 지인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나도 모르게 몸을 돌려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거술러 올랐다. 몇 걸음 오르고 나서 내가 바보짓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몸을 돌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간 다음 반대편으로 옮겨 타고 지상으로 올라가 지인과 인사를 나누었다. 괜스레 내 마음이 다 오그라든다.

 

오목한 곳엔 물이든 흙이든 괴기 마련이다. 사람의 마음 또한 그렇게 오목해질 때가 있는 모양이다. 마음속에 무언가 괴어 흘러넘칠 것만 같을 때가 있으니까. 남자가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마침내 흘러넘치는 것을 막을 수 없어서.

 

엉엉 꺼이꺼이 울었다. 덕분에 한 가지 배운 건 있어요. 그렇게 울고 나면 속이 후련해진다는 말. 믿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마치 신물까지 다 게워냈을 때처럼 몸의 기운은 물론 마음의 기운까지 다 빠져나가 껍데기만 남은 느낌이더라고요.

 

봄날 아침에 눈떠서 물 한 모금 마시고 밖으로 나가면 앞집 감나무와 대추나무에 어느새 연둣빛 새순이 눈튼게 보인다. 세상엔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모습들도 많고 내가 미처 눈뜨지 못해 알지 못하는 것들도 많다. 하지만 이렇게 봄날에 눈트는 새싹을 볼 수 있다면 눈 뜨고 보지 못할 것들을 봐야 하는 괴로움도, 세상일에 눈뜨지 못하고 미련스럽게 구는 나 스스로도 얼마든지 참아 줄 수 있다. 새싹이 눈틀 때 나또한 눈뜨면 그만이니까.

 

삶에 주어진 시간은 함부로 당길 수도 늦출 수도 없죠. 몸으로 좁히지 못하는 거리를 마음으로만 다그며 조금씩 조금씩 다가가는 시간

 

 

자꾸 뒤처지다 보면 자신이 뒤쳐져 더 이상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물건처럼 여겨지기도 하겠다. 어느새 쉰을 코앞에 둔 나이가 되었다. 딱히 이뤄 놓은 것도 없이 사십대를 지나게 생겼다. 먹고살다 보니 그리되었다. 말해놓고 보니 이런 말을 앞으로 얼마나 더 하게 될까 싶어 민망해진다. 먹고 살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는 핑계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그럴듯한 핑계 아닌가. 먹고살다 보니, 또는 가족을 먹여 살리려다 보니 먹고사는 일이 무슨 신성불가침의 영역처럼 느껴진다. 가장 기본적인 일인데 가장 높이 들린 귀한 목적처럼 여겨진다고나 할까. 참담한 일이다. 혹여 그것이 신성불가침이 아니라 치외법권 지역같은 곳은 아니었을까. 도망가 숨기 딱 좋은 곳

 

바람이 부는 순간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라지만, 가슴속에 부는 바람은 여전히 무수한 가지들처럼 몸부림치고 있다. 뿌리를 뽑아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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