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이제 나는 서른아홉 살이 됐다. 앞으로 살 인생은 이미 산 인생과 똑같은 것일까? 커피를 마시며 창 밖을 바라보면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그 즈음 창 밖을 내다보면 뭔가 지나가는 게 언뜻언뜻 눈에 보였다. 바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이었다. 낯선 곤충의 껍질처럼 무감각해졌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경우는 어둠 속에서 멀리 불빛이 보일 때다.

 

누구도 믿을 수 없어.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어. 그해, 계절이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는 동안 내가 수없이 되뇌었던 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참을 울고 나니 그제야 가을 햇살이 무척 노랗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주는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 견디면서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것. 삶이라는 건 직선의 단순한 길이 아니라 곡선의 복잡한 길을 걷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때다. 힘든 일을 견디지 못하고 싫은 마음을 얼굴에 표시내는 종류의 인간이다. 하지만 글을 쓸 때, 나는 한없이 견딜 수 있다. 매번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두 손을 들 때까지 글을 쓰고 난 뒤에도 한 번 더 고쳐본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그 때 내 존재는 가장 빛이 나기 때문이다. 시야에 있는 것들, 쉽게 바뀌는 것들,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여전히 내 마음을 잡아끈다. 내게도 꿈이라는 게 몇 개 있다. 그 중 하나는 마음을 잡아끄는 그 절실함을 문장으로 옮기는 일.

 

소리내 읽다 보면 입에서 향기가 날 것 같다. 햇살을 받은 이파리들은 초록색 그늘을 우리 머리 위에 드리웠고 바람에 따라 그 그늘이 조금씩 자리를 바꿨다. 금방이라도 초록색 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지금 내가 가진 기대 중 가장 큰 기대는 그런 모습이었다. 탐스런 초록색으로 물든 들판이 좌우로 펼쳐졌다. 그리고 내 머릿속으로는 어릴 적 일들이 떠올랐다.

 

나의 첫 번째 여름이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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