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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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10

The April Bookclub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몇 주 머물다 가는 날 위해 귀한 주말 시간에 긴 산책을 함께해주고, 아늑한 홈파티에 한 자리를 내어준 분들의 환대가 얼마나 깊은 마음에서 나왔는지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감사하게 되었다. 그분들께 안부를 전하고 싶다. 내가 아는 뉴욕 사람들, 이제는 뉴욕에 없는 뉴욕 사람들에게.

역시 사랑스럽다.

인생 최고의 소풍이었다.]

 

[시선으로부터] 초반을 읽고, ‘글을 잘 만지는 사람이구나싶었다. 이 책도 초반에 끌어당기는 힘이 너무 강해서 매료될 수 밖에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압도적인 작품을 만나면 만날수록 더 원하게 되는 것 같다] 책이든 드라마든 처음에 강렬함도 중요하지만 이끌어가는 힘이 더 중요하다. 이 책은 잘 읽히고,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지나치게 다 좋은 점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여행한 곳마다 각각의 색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어디를 가도 같은 곳을 간 것 같은 다 좋았다는 결론이 현실이 아닌 판타지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아서 씁쓸해졌다. 그런데 그 지나친 밝음이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자양분이기도 했다. 역설적이면서도 철학적이다. 근사하다가 씁쓸해졌다는를 반복했다. [인생의 빛과 어둠을 동시에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초췌하게 얼어 있던 나를 다정히 포옹해주어, 긴장과 두려움과 피로가 씻겨나갔고 그렇게 얻은 용기로] 세상을 살아야겠다는 마음의 싹이 고개를 내밀게 해준다. 내가 쓰는 문체, 방향이 비슷했다. 다른 점이라면 나는 부정의 단어들로 향연하고, 작가는 긍정의 단어들로 향연하는 것. 부정적인 것도 최대한 긍정적인 단어의 언저리에서 찾아 쓰는 것이었다. 작가는 생소한 단어를 적제적소에 잘 섞어 우려내고, 다독하고 성장해야겠다는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세계가 얼마나 크게 변하는지, 나쁜 쪽으로 변할 수 있다면 좋은 쪽으로도 변할 수 있기를 늘 바랄 뿐이다] 작가는 세상을 이렇게 바라보고 있구나. 나는 온통 부정적인 단어와 문장으로 채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누군가를 좋아하면 확실히 무리하게 된다]라니. 나는 누가 나에게 먼저 다가와서 좋아한다고 매달려주기만 바라고, 무리는커녕 재지나 않으면 다행인 삶인데. 나는 여전히 그 자리다. [무엇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이 쉬워진 세상이지만, 좋아하는 것이 많은 사람이 분명 더 행복하지 않을까?] 전적으로 맞는 말이다. 이 책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를 기르게 돕는다.

 

얼마 전부터 브런치에 글을 올리고 있다. 에세이 형식이지만, 자체 검열 속에서 무뎌지다 못해 더 이상 칼의 역할을 할 수 없을 정도의 글을 매만지고 있는데, 작가는 고백하며 [놀라움과 해방감을 느꼈다. 말해도 되는구나. 왜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까? 약한 부분을 햇볕 아래 드러내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그때 알게 되었다]라니. 내가 쓰는 글이 무슨 시사포럼도 아니고, 무슨 자체검열을 그리도 해서 살을 모조리 파먹고 있는지. [표현하고 싶은 사람은 표현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몸이 아프니까]. [내가 쓰는 언어의 요철을 없애면서도 예각을 잃지 않는 것]. 그 중용의 힘을 기르는게 필요하다.

 

둘째가 찾아오고, 봄의 먼지처럼 공황이 왔다. 숨을 쉬지 못해서 창문에서 뛰어내려 죽는 게 낫겠다 싶은 날들이 이어졌다. 공황이 오기 전의 신체증상(목이 아프고, 감기 증상)을 알아차리고 공기정화 식물을 사들였다. 공황 약을 먹지 않아도, 신체 증상을 미리 조절하고 호흡을 하면서 나름 잘 이겨냈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할 운명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니까.

베란다에는 식물이 많다. 화분, 흙을 사다가 거기에 씨앗부터 심는다. 물을 주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식물들이 올라온다. 올해 5월부터 집안에 안 좋은 일들이 연달아서 계속 피어났는데, 그만큼 식물들도 죽어갔다.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아도 잘 지내던 식물들이 전염병에 걸린 것 마냥 다 죽어갔다. [느슨한 동행이 있어 한층 즐거웠다]. 그러다가 소강된 상태, 용암의 불이 덮여 있는 휴지기에 이르자, 식물들이 다시 살아났다. 신기하면서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식물들을 좀 더 자주 보게 된다. 식물들도 다 느끼고 있구나. [화분에 새잎이 나면 기분 좋은 충격을 받는다]. 충격까지는 아니어도, 이 기분 좋음을 만끽할 필요가 있구나.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구나. 식물들이 나에게 위로를 준다. [경이를 경이로 인식할 수만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 특별해질 것이다. 덧없이 사라진다 해도 완벽하게 근사한 순간들은 분명히 있다]

 

[폭력이 근사하게 나아갔던 것들을 하루아침에 뒤로 돌려버린다는 사실을 몇 년에 걸쳐 알게되었다.] 과장의 신임을 얻은 후임이 갑자기 나를 불러 직무를 다하지 않았으니 나가라고 했다. 일의 방식을 계속 논의해왔고, 열심히 해왔다. 그런데 익명의 게시판에 욕을 한 이들과 한패가 되어 나가라고 했다. 가해자들이 휘두르는 횡포는 이미 결론이 나 있었다. 나갈 수 없다고 버티고 있지만, 내 마음은 떠나라고 한다. 휴일이 끝나는 날이 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뒤로 물러나 버린다. <어느 독일인의 삶>에서처럼 삐뚤어진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얼마나 무고한 사람들을 무차별하게 죽일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조금만 경계를 낮추면 악의는 습기 높은 계절의 곰팡이처럼 기세를 떨치며 확산하고 지우기 어려운 얼룩을 남긴다] 정직하게 살아가는 내 삶을 매도하는 이들에게 휘둘리지 말아야 하는데, 내가 잘 지내는 것 같을 때면 무참히 폭격을 해온다. 무시하고 있는데, 내 마음은 실상 그렇지 못해 인권센터에서 상담을 받고 있다. 인권센터에서는 휴직을 하거나 이직 이야기를 건냈다. 고발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을 토로하는 시간이었기에, 상담사도 실상을 담담하게 이야기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발끈했다. 그런데 그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요즘 들고 있다. 그들과 싸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버티는 것도 힘들다면, 벗어나는 것도 방법이다.. 내 운명은 나를 사랑하고 있는데, 가혹하게 내몰 필요가 있나 싶은 것이다. 히틀러, 괴벨스같은 무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빨리 손절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인데.

 

[아끼는 사람들에게 기댄 채, 지나치게 좌절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마음 속의 저울이 잘 작동하는 사람들과만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것 같다. 마음속의 저울은 옳고 그름, 유해함과 무해함, 폭력과 존중을 가늠한다. 그것이 망가진 사람들은 끝없이 다른 사람들을 상처 입힌다. 사실 이미 고장 난 타인의 저울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별로 없는 듯하다. 그저 내 저울의 눈금 위로 바늘이 잘 작동하는지 공들여 점검할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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