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보이는 것을 다시금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게끔 한다."

-파울 클레(Paul Kle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진화론,생존경쟁론이 생겨난 이래 문명인의 이상은 '자연의 정복'에 있었다. 자연의 정복은 곧 땅의 파괴이다. 땅의 파괴는 곧 우리 자신의 파괴이다. 문명생활이 인간생활의 퇴폐를 초래하는 까닭은 바로 거기에 있다. 문명생활은 바로 땅에 대한 반역이다.

石川三四郞 <近代土民哲學>(19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봄 비

강을 건너자 비가 가늘어졌다

산발치에 닿아선 하늘까지 맑아졌다

땅은 이미 충분히 젖어

검고 부드럽게 나무뿌리에 담았던 향을 풀어냈다

포클레인이 모래흙 한 무더기

내키만큼 쌓아놓은 뒤였다

새로 파낸 사토(沙土)는 새 봄비를 맞아 빛이 더 맑았다

이미 마음을 궁글렸으니

세상 전부가 함께 묻힌다 한들 이상할 게 없었다

흙을 가리고 방향을 잡아 자리를 정한 다음

조용히 내려놓았다

내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평온한 세계로 듣고 있었다

구름 걷히고 햇살 펴지면서 흙내음 진한 달구노래 들렸는지

어머니는 하나님을 믿었으니

그후 어찌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포르릉 산새가 날아간 것인지

산역을 마친 이들이 햇무덤에서 내려오고 나서야

나는 문득 손이 텅 비었다는 것을

상처가 아리다는 걸 느꼈다

봄비 걷히고

내 알몸 위로 눈물이 쏟아졌다


어머니를 산에 묻고 내려오는 화자의 심정이 그저 평온하기만 했겠는가? 내려오고 나서야  문득 손이 텅 비었다는 것을. 상처가 아리다는 걸 느끼고, 거기에 눈물까지 쏟아졌으니. 오히려 담담한 어조로 인해 슬픔의 정서는 더 깊게 느껴진다.  

담담하게 풀어내는 듯하지만 끝없이 무너져 내리는 아비의 심정을 잘 드러내고 있는 또다른 시,

 

掌篇            김종삼

작년 1월 7일

나는 형 종문이가 위독하다는 전달을 받았다

추운 새벽이었다

골목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허술한 차림의 사람이 다가왔다

한미병원을 찾는다고 했다

그 병원에서 두 딸아이가 죽었다고 했다

부여에서 왔다고 한다

연탄가스 중독이라고 한다

나이는 스물둘, 열아홉

함께 가며 주고받는 몇 마디였다

시체실 불이 켜져 있었다

관리실에서 성명들을 확인하였다

어서 들어가보라고 한즉

조금 있다가 본다고 하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글쓰기와 상상력의 유비쿼터스 네트워크
최재목 지음 / 知&智(지앤지)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책머리에 "온갖 더러운 것들을 받아들여 맑고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내는 늪, 늪은 끊임없이 생성하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파괴되고 있다.", "나의 시적, 생태적, 생명적 상상력의 근원이 되고 있는 늪. 그것은 오랫동안 내가 찾고 있었던 어떤 매력적인 개념 즉 내 사색과 글쓰기의 시야에 '장르 통섭적, 문화 통합적 글쓰기, '새로운 인문학적 상상'의 모형으로서 포착된 착상이다."라고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늪의 깊은 가치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고자 한다.     

이러한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통합적, 네트워크적 글쓰기는 저자의 약력에 나와 있는 것처럼 시와 철학의 두 영역의 융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문학과 철학 이 분야는 고유의 성격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데서 또는 상대 학문영역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자칫 대립각을 세우기가 쉬운데, 뜻밖이면서도 신선하다. 다만, 책에서 말하고 있는 발상은 매우 새로운 데 반해 그 발상들을 엮어내는 사유의 전개는 너무 소략한 감이 있다. 비근한 예로 <華엄的, 緣起的 성찰>에서 "늪은 불교의 삶과 세계의 연기적 현실을 상징적으로 잘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에, 늪의 글쓰기는 연기적 글쓰기라 정의해도 좋다"고 하는데, 그에 대한 단편적.선언적 기술만 따르지 설득력 있는 깊은 이해로 이끌지는 못한다. 이와 관련해서 책머리에 저자 역시 자신의 글 어떤 부분에 논거가 부족한 점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아마 저자가 구상하고 사색한 내용을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욕이 앞선 데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이 사유들을 보다 치밀하게 가다듬은 역작이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이첼 카슨은 인류가 택한 길이 결국은 자기들이 사는 땅을 오염시키고, 나무들을 시들게 하고, 지저귀던 새들마저 떠나게 함으로써 마침내 '침묵의 봄'을 불러올 것임을 예언하였다. 불행히도 그 예언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상황은 별반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레이첼 카슨의 "...성숙한 눈으로 자연과 우주를 바라볼 수 있도록 먼저 우리 스스로의 문제를 깨달아야 합니다."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게리 스나이더의 <지구, 우주의 한 마을>)

그 성숙한 눈이란 우주의 작은 한 곳인 지구와 그 지구에 깃들여 사는 아주 미세하게 아름다운 것들, 아주 연약한 존재들, 덧없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모든 존재들을 깊은 시선으로 보는 것에 다름아니다.  그렇지만 게리 스나이더는 생태계에 감상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경계한다. 또한 이 복잡다단한 세계에서 자연과 문화를 건강하게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일종의 정치적,사회적 활동에 참여할 것을 요청받고 있음을 또한  말하고 있다. 우리는 공공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자기 자신 또는 자기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웰빙으로는, 타인 더 나아가서는 다른 생명체를 그다지 고려하지 않고 곤경에 처하든 말든 별로 상관하지 않는 웰빙으로는 자연공동체, 인간공동체를 지속해 나갈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고, 우리의 아이들이 살아갈 땅과 물과 하늘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이 가장 정치적이며 경제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