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beopbo.com/article/view.php?Hid=58256&Hcate1=2&Hcate2=267&Hcmode=view

분석적 사유는 원자를, 화엄은 우주를 발견했다

28. 부분의 분석에서 총체성의 미학으로<상>

서양 사람들은 나뭇잎을 따서 관찰을 하고 분석을 하여 나뭇잎에서 엽록체를 찾아내고 광합성작용과 탄소동화작용을 설명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나뭇잎의 본질과 식물의 생장원리에 다가갈 수 있다. 서양의 과학자들은 지구와 달 사이의 중력을 계산해낸다. 이로 우리는 우주의 본질에 다가가고 천체의 운행원리를 깨닫는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분석적 사유와 자연과학을 발달시켰고 이것이 정치의 영역에서 사회문화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현대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이런 사고에 익숙하다.

서양철학 무의식 탐색에 한계
하지만, 현미경 앞에 놓인 나뭇잎과 나무에 달려 수많은 다른 나뭇잎과 관계하면서 영양분과 기(氣)를 주고받고 있는 나뭇잎은 같지 않다. 가까이로는 화성이나 소행성에서 수천억 광년 떨어진 은하계 너머의 별들, 존재하지만 규명할 수 없는 암흑물질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온 별과 먼지들이 지구와 달 사이의 인력에 관계한다. 이 때문에 탈현대의 사유는 관계적이고 총체적이며 카오스적인 사유를 지향한다.

예술은 대상을 무의식과 이미지를 통해 총체적으로 포착한 것과 부분을 의식과 언어를 통해 분석한 것이 합쳐져 이루어진다. 분석적 사유를 하는 서양의 사유가 바탕이 되다 보니, 서양의 예술론과 미학은 치밀하게 부분을 분석하여 작품의 의미를 드러내는 데는 탁월하지만 무의식이 이미지를 통해 보이지 않게 숨어있는 것을 드러내는 데는 한계를 지닌다.
불교는 부분의 사유에서 벗어나 총체성의 사유를 행한다. 이는 단순히 부분을 보는 것을 지양하고 전체의 차원에서 인식하는 것이나 분석적 사고에서 종합적 사고로 전환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것은 부분 속에서 전체를 보고, 부분을 보는 동시에 전체를 아우르며, 전체를 조망하면서 부분을 놓치지 않는다. 이것이 잘 나타난 것이 화엄철학이다.
“한 털 끝에 한량없는 세계가 있고/부처님과 겁과 중생 말할 수 없어/이런 것을 분명하게 두루 보나니/걸림 없는 눈 가진 이 머무시는 곳//한 생각에 그지없는 겁을 거두어/국토와 부처님과 모든 중생을/걸림 없는 지혜로 바로 아나니/이런 공덕 갖춘 이의 머무시는 곳//시방 세계 부수어 티끌 만들고/큰 바닷물 털끝으로 찍어낸 수효/보살의 세운 원이 이와 같나니/걸림 없는 이들의 머무시는 것//(『화엄경』, 「입법계품」)
이 게송을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의상의 십전유(十錢喩)를 들어보자. 지면관계상 인용을 생략하고 이를 풀면, 일(一)이라 하는 것은 일정한 상(相)으로서 스스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열과의 관계 속에서 열의 1/10의 가치를 갖는, 10보다 아홉째 아래에 있는 수인 일(一)은 비로소 십(十)이 아닌 일(一)이 된다. 십이 없다면 일 또한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도 못한다. 십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나와의 관계 속에서, 하나에 대해 열 배의 가치를 갖는, 하나보다 아홉 째 위에 있는 수인 십은 비로소 일이 아닌 십이 된다. 일이 없다면, 십은 1의 열 배의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다른 숫자들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로 드러나 자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가 열과의 관련 하에서 이전에는 없었던 무엇인가를 드러낸 것일 뿐이다. 무엇이 새로이 생성되었기에 자성이 있는 것으로 가정하지만, 자성이 있다고 가정하게 된 것은 십과 관계 속에서 그렇게 드러난 것이지 하나 자체에 자성이 있기에 그런 것은 아니다.

또 일 속에 이미 십의 가치가 담겨 있기에 일은 십과 견주어 그 1/10의 가치를 형성하며, 십 속에 일의 가치가 담겨 있기에 십은 일의 열 배의 가치를 지닌다. 십이 없다면, 일은 그 가치를 지니니 못한다. 마찬가지로, 일이 없다면 십 또한 가치를 못 갖는다. 십으로 예를 든 것일 뿐, 억이나 조, 경, 무한대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관련을 맺고 조건을 이루고 있으며,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는 데 온 우주 삼라만상이 관계를 하고 조건이 된다는 말은 얼핏 과장으로 들린다. 하지만, 저 꽃은 이 땅에 씨가 떨어지는 인연이 있어서 그런 것이며 바람은 흙을 밀어 적당히 씨를 덮어 추위를 나게 하였고, 햇볕은 알맞게 따뜻하여 싹을 틔우게 하였으며 구름은 비를 내려 수분을 주고, 수천억 마리의 미생물이 양분이 되어 싹을 키우고 꽃을 피우게 하였기에 지금 꽃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어느 짐승이 싹을 밟았거나 따먹었다면 꽃은 없다. 바람이 덜 불었다면 씨는 한겨울에 얼어 죽었을 것이며, 더 불었다면 흙에 파묻혀 빛을 보지 못하여 싹을 틔우지 못하였을 것이다. 비도, 구름도, 햇빛도, 양분도 마찬가지다. 더 넘쳤다면, 더 모자랐다면 지금 꽃은 없다. 태양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생장, 바람의 흐름과 구름의 운행에 관계를 하고 조건이 되며, 가까운 별부터 먼 별까지 온 우주의 별들이 태양의 운행과 핵융합작용에 관계를 하고 조건이 된다. 온 우주의 삼라만상은 각각 개별성을 가지면서도 서로 깊이 관계를 맺고 서로가 조건을 형성하는 하나이다.

“진성은 참으로 깊고 지극히 미묘해(眞性甚深極微妙)/자성을 지키지 않고 연(緣)을 따라 이루더라(不守自性隨緣成)/하나 안에 일체 있고 일체 안에 하나 있으니(一中一切多中一)/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일세(一卽一切多卽一)/한 티끌 그 가운데 시방세계 머금었고(一微塵中含十方)/일체의 티끌 속도 또한 역시 그러해라(一切塵中亦如是)(義湘, 『華嚴一乘法界圖』)

사면이 거울로 된 방에 촛불을 비추면 촛불이 수없이 비춰진다. 그 방안에 수정구슬을 가져다 놓으면 그 수정공 안에 무수한 촛불이 다 들어가 비춰진다. 옆에 수정구슬을 또 가져다 놓으면, 한 수정구슬 속에 있는 무한대의 촛불이 다른 수정구슬에 담기고 이것이 다시 다른 수정구슬에 담긴다. 이 순간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촛불이 수정구슬 안에서 반짝이며, 반사되는 것과 반사하는 것의 구분이 사라진다.

하나는 일체와의 관계 속에 형성

이렇듯, 내 몸 안에 있는 체세포는 100조개의 세포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를 복제하면 온전한 나, 곧 나와 생김새는 물론이거니와 목소리와 성격, 지능까지 닮은 또 하나의 사람이 만들어진다.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가 한 티끌이 대폭발을 하여 만들어졌다. 우주가 한 원자에 압축되어 있고 우주의 구조와 원자의 구조가 상동성을 갖기에, 천체물리학자들은 원자의 구조를 연구하여 우주의 비밀을 해명하려 한다. 전자가속기를 이용하여 원자 안의 작은 미립자에 대해 새로운 사실이 추가되면 우주의 비밀이 한 꺼풀 벗겨지고, 허블 망원경을 통해 우주의 비밀이 밝혀지면 원자의 실체를 밝히는 연구도 한 걸음 진전된다. 망망한 우주가 곧 하나의 원자이고 하나의 원자가 곧 망망한 우주이다. 의상의 말대로 하나 중에 일체 있고 일체 중에 하나 있다(一中一切多中一).

하나는 일체와 관련지을 때 하나이다. 하나에 열이 있고 인다라망의 구슬처럼 하나에 일체가 담겨 있으니 하나가 전체이다. 국화 꽃 한 송이에서 무상(無常)을 읽고 연기의 법을 깨닫듯, 하나에서 전체를 보니 하나가 곧 전체이다. 우주 삼라만상의 무한한 조화가 연기 아닌 것이 없으니 전체가 곧 하나이다. 우주 삼라만상 일체가 인다라망의 구슬처럼 서로 비추고 조건이 되고 관계를 하고 있으니 일체가 하나이다.

내 앞에서 깜박이고 있는 촛불은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인 동시에 공기의 흐름에 따라 춤을 추는 아름다운 무희(舞姬)이자, 색(色)과 공(空)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대상이다. 촛불이 등불인 것과 무희인 것과 깨달음인 것이 전후가 없이 동시에 일어난다. 이처럼 서로 다른 계(界)에서 서로 다른 실재들이 모두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동시에 일어난다. 세계는 동시돈기(同時頓起)한다.

촛불을 하나 더 켜놓자. 방안은 훨씬 더 환해진다. 한 살의 빛이라도 서로 부딪히지 않기 때문이다. 촛불에서 나온 수많은 빛들이 서로 부딪히지만 이쪽의 촛불과 저쪽의 촛불에서 나온 빛이 서로를 조금도 방해하지 않고 서로를 넘나들고 비춰주면서 방안을 환하게 밝힌다. 서로의 빛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서로를 관통하고 서로를 이끌어 들이고 있다. 세계는 동시호입(同時互入)한다.

두 개의 수정구슬 속의 촛불처럼, 우주에 있는 일체는 서로 의존하고 서로 포섭하고 있기에 서로 반사경인 동시에 영상이다. 나는 온 우주와 관계하면서 존재하는 동시에 지금 우주를 바라보며 글을 쓰는 체험을 하고 그 체험이 우주를 이룬다. 이렇듯,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할 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존재하게 하고 포섭한다. 세계는 동시호섭(同時互攝)한다.

거울 속 촛불처럼 서로를 비춘다

여기 호랑이 한 마리가 있다. 호랑이 전체가 총상(總相)이라면, 팔다리, 눈, 털은 별상(別相)이다. 팔과 다리가 있고 눈과 호랑이 무늬의 털이 있어야 호랑이를 이루고, 호랑이가 있어야 호랑이의 팔다리와 눈과 털들은 의미를 갖듯, 별(別)을 떠나서 총(總)이 없고 총(總)을 떠나서 별(別)이 없다.(總卽別 別卽總 總中別 別中總)

비호(飛虎)라는 표현처럼 산천을 빨리 내달리고 멧돼지도 한 방에 죽일 수 있는 강한 팔다리, 눈빛 하나로 뭇 생명을 벌벌 떨게 하는 눈, 검정 줄 무늬와 하양, 노랑 털이 조화를 이룬 호랑이 문양의 털 등이 모여 호랑이를 이루고, 이들이 있어서 호랑이는 사냥을 하고 생존을 유지하며 맹수의 왕으로 군림한다. 반대로, 호랑이가 맹수의 왕으로 군림할 때 팔다리와 눈과 털은 각각의 성질을 드러낸다. 이처럼 각각이 모여 연기의 원리인 동상(同相)을 이루고, 각각이 달리고 짐승을 잡고 호랑이 문양을 드러내는 성질인 이상(異相)을 유지한다.(同卽異 異卽同 同中異 異中同).

호랑이 감각기관은 각각의 기능인 괴상(壞相)을 유지한다. 눈은 짐승을 인식하고 두렵게 하고, 팔다리는 짐승을 잡고 달리는 기능을 수행하고, 털은 호랑이를 추위와 충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또 이들 감각기관의 기능이 모여 호랑이는 짐승을 한 눈에 발견하고 비호처럼 달려 한 방에 숨지게 하는 호랑의 기능을 수행한다. 각각의 호랑이의 괴상이 모여 호랑이란 성상(成相)을 만들고, 이 성상을 유지할 때 호랑이의 각각의 감각기관은 괴상을 발휘한다.(成卽壞 壞卽成 成中壞 壞中成) 이렇게 육상(六相)은 하나로 원융(圓融)한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2008년 09월 22일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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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0808/h2008080702421539780.htm

나는 선생의 작품을 즐기지 못했다. 그저 허영심이나 의무감으로 읽었다. 단편 <눈길>을 읽었을 땐 주책없이 눈물을 쏟았지만, 그 눈물은 일본열도를 울음바다로 만들었다는 구리 료헤이(栗良平)의 <우동 한 그릇>을 읽고 흘린 눈물과 별다를 바 없었다. 사실 <눈길>은 선생의 문학세계 변두리에 고명처럼 덧놓인 소품일 뿐이다.

선생은 젊어서부터 최인훈과 함께 한국 지식인문학을 대표했지만, 나는 선생의 지성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최인훈의 세계가 나와는 한결 더 맞았다. 두 분의 문학세계는 ‘지식인문학’이라는 헐거운 말로 뭉뚱그리기엔 너무 다르다. 두 분 다 관념을 부리는 데 능했지만, 최인훈의 관념이 근대적이라면, 선생의 관념은 고전적이었다. 묻고 되묻고 거듭 캐묻는 ‘지식인문학’의 임무 수행에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인 것일까?

지성의 피륙과 청승의 속살

추리소설 형식을 즐겨 취한 것도 선생의 문학에 지성의 무늬를 아로새겼다. 그러나 선생의 문학에는 기지나 풍자나 냉소나 해학 같은 지적 장치들이 없었다. 그것들이 최인훈에게는 있었다. 발랄함과 재바름의 결여는 선생의 삶과 문학이 지녔던 진지함과 따스함의 뒷면일 수도 있겠으나, 그것이 (내 경우에) 선생의 작품에서 잔재미를 앗아갔다.

문체도 그렇다. 이성의 투명함으로 반들반들한 최인훈 문장에 견줘, 선생의 문장은 자주 어눌하고 청승맞았다. 그 청승은 어쩌면 선생이 ‘진짜’ 전라도 사람이라는 데서 나왔으리라. 고향이 서로 멀지 않았던 문학평론가 김현이나, 함경도에서 전라도를 거쳐 서울로 온 최인훈과 달리, 선생은 끝내 서울 사람이 되지 못했다.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선생의 고향 장흥은 내 선대들의 누백 년 세거지지(世居之地)였다. 내 본향이 그 곳이다. ‘제주 고씨 장흥 백파’가 내 부계 혈통의 라벨이다. 장흥은 ‘약빠른 서울내기’인 나와 전라도 사람이었던 선생을 이어주는 거의 유일한 고리다.


내가 선생의 작품을 즐기지 못했다는 것은 선생의 문학이 예사로웠다는 뜻이 아니다. 취향과 품질을 분별할 정도의 판단력은 내게도 있다. 읽기의 편식이 심해 극히 주관적인 평가가 되겠지만, 해방 뒤 소설가 가운데 셋만 꼽으란다면, 나는 주저없이 선생과 최인훈, 이인성을 꼽겠다. 그것은 한국문학이 지난주 대상(大喪)을 당했다는 뜻이다.

나는 생전의 선생과 친분이랄 만한 게 거의 없었다. 먼발치에서 뵌 것까지 셈해도, 여남은 번이나 뵈었을까? 그러나 내겐 거의 스무 해 전 선생께 받은 편지가 하나 있다. 선생의 어떤 작품을 읽고 반해 신문에 호들갑스러운 서평을 썼는데, 거기 고마움을 표한 편지다.

몇 년 전, 그 알량한 친분마저 금이 갔다. ‘전라도’ 발언(본인은 이를 부인한다)으로 한창 물의를 일으키고 있던 소설가 이문열씨가 민주당 추미애 의원과 사나운 말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 그 때 선생은 한 신문 칼럼에서 이문열씨를 두둔했다. ‘전라도’가 정체성의 큰 부분인 나는 이문열씨를 비판하는 칼럼 끝머리에서 거칠게 선생을 거론하고야 말았다. “이청준씨께 묻는다. 문인까지 갈 것도 없이 한 시민의 처지에서, 이문열씨의 발언은 받아들일 만한가? 아니 전라도 사람으로서, 이문열씨의 발언은 받아들일 만한가?”라고.

해방 이후 한국문학의 大喪

그 뒤, 선생은 나를 볼 때마다 외면하셨다. 나도, 겸연쩍음과 오기가 겹쳐, 선생을 피하게 됐다. 마지막으로 뵌 것이 두 해 전 어느 상가(喪家)에서였는데, 우연히 선생과 등을 맞대고 앉게 된 나는 일어설 때 인사도 없이 그 곳을 나왔다. 이따금 그 칼럼을 되새기며, 내가 옳았는지 글렀는지 곰곰 생각해보곤 한다. 모르겠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이 다시 벌어진다면, 나는 똑같은 방식으로 처신할 것 같다. 지난주, <눈길> 이후 처음으로 선생님 때문에 울었다. 선생님이 저쪽 세상에서 늘 평안하시길 빈다

2008.8.7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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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행으로 하늘은 내게 밝은 눈을 주시어 고희의 나이에도 여전히 행간이 촘촘한 책을 읽게 하셨다. 천행으로 내게 손을 내리시어 비록 고희에 이르렀지만 아직까지 잔글씨를 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점을 두고 천행이라 하기에는 아직 미흡하겠지. 하늘은 다행스럽게도 내게 평생토록 속인을 만나기 싫어하는 성격을 주셨다. 덕분에 나는 한창 나이 때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친척이나 손님의 왕래에 시달리지 않고 오직 독서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천행으로 나는 한평생 가족들을 사랑하거나 가까이 하지 않는 무딘 감정을 타고났다. 그 덕분에 용호에서 말년을 보내면서 가족을 부양하거나 그들에게 핍박당하는 고통에서 벗어나 또 일념으로 독서에 전념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따위 역시 천행 운운하기에는 아직 미흡해보인다. 천행으로 내게는 마음의 눈이 있어 책을 펴면 곧 인간이 보이곤 하였다. <이탁오, ‘분서’>



책을 안 읽는 이들은 ‘책을 읽을 수 없는’ 천만 가지 이유를 댄다. 돈도 벌어야 하고, 만날 사람도 많고, 몸도 피곤하고, 걱정거리도 많고, 여하튼 이래저래 시간이 없다는 것. 그러다 나이가 들면, 곧 죽을 텐데 책은 읽어 뭐하나, 라며 서둘러 포기한다. 하지만 실은 이 모든 게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돈이 있든 없든 돈에서 자유롭기 위해, 능동적으로 타인과의 관계를 구성하기 위해, 일신의 안락을 구하지 않기 위해, 매순간 자신의 한계를 넘기 위해, 죽음 앞에서 편안하고 의연해지기 위해. 우리에겐 책을 읽어야 하는 천만 가지의 이유가 있다! 또한 이탁오의 천행에는 못 미칠지언정(!) 하늘은 우리에게도 책을 읽을 수 있는 갖가지 천행을 주시지 않았는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렵다는 로또에 당첨이 되고서도 절도와 사기를 일삼다 붙들린 청년의 기사를 보았다. 사유할 수 있는 능력과 비전이 없다면 10억원이 아니라 100억원도 우리를 구원해주지 못한다. 인생이 쉽게 역전될 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혹시 ‘인생역전’을 꿈꾸신다면 로또보다는 책을 사시라. 게다가 책읽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 되었으니.

<채운 연구공간 ‘수유 + 너머’ 연구원> 2008.10.1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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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와서야
바다가 나를 보고 있음을 알았다.

하늘을 향해 열린 그
거대한 눈에 내 눈을 맞췄다.

눈을 보면 그
속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바다는 읽을 수 없는
푸른 책이었다.

쉼 없이 일렁이는
바다의 가슴에 엎드려
숨을 맞췄다.

바다를 떠나고 나서야
눈이 
바다를 향해 열린 창임을 알았다.

                  <<수련>>  문학과 지성사 2002

 일상에서 바다를 생각할 일은 없다. "바다에 와서야/ 바다가 나를 보고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될지라도... 내가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바다가 나를 바라보는 일. 바다와 나와의 경계가 無化되는 일.

그리고 "바다는 읽을 수 없는 푸른 책". 어찌 바다만 그렇겠는가. 우리의 삶 또한  읽을 수 없는 미지의 질문으로 가득찬 책이다. 

위안이 있다면 "바다를 떠나고 나서야/눈이/바다를 행해 열린 창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 지리멸렬한 일상에 찌든 마음들이 바다의 가슴에 숨을 맞춤으로써 얼마간은 치유될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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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와 밤새 그짓을 하고

지쳐서 허적허적 걸어나가는

새벽이 마냥 없는 나라로 가서

생각해보자 생각해보자

무슨 힘이 잉잉거리는 벌떼처럼

아침 꽃들을 찬란하게 하고

무엇이 꽃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지

어째서 얼굴 붉은 길을 걸어

말도 아니고 풍경도 아니고

말도 지나고 풍경도 지나서

어떤 나무 아래 서 있는지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 지성사. 1991.


새벽에  읽을 때의 그 생생한 느낌은 소멸하고 지금은 손에서 슬며시 빠져나가는 바람처럼 그렇게 사라진 느낌, 감각들.  그저 빔(空), 아스라한 흔적, 그림자뿐......

 안에 있으면서 안을 관찰할 수는 없는 법. 새벽이 없는 나라로 가서 볼 때, 즉 아주 낯선 시선으로 새벽을 응시할 수 있을 때,"무슨 힘이 잉잉거리는 벌떼처럼/아침 꽃들을 피어나게 하고/무엇이 꽃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지/어째서 얼굴 붉은 길을 걸어/말도 아니고 풍경도 아니고/말도 지나고 풍경도 지나서/어떤 나무 아래 서 있는지" 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닌지. 詩의 그림자......

 말이면서 말이 아니고 풍경이면서 풍경이 아닌, 말도 지나고 풍경도 지나서 한 그루 나무가 되어 서 있는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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