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행으로 하늘은 내게 밝은 눈을 주시어 고희의 나이에도 여전히 행간이 촘촘한 책을 읽게 하셨다. 천행으로 내게 손을 내리시어 비록 고희에 이르렀지만 아직까지 잔글씨를 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점을 두고 천행이라 하기에는 아직 미흡하겠지. 하늘은 다행스럽게도 내게 평생토록 속인을 만나기 싫어하는 성격을 주셨다. 덕분에 나는 한창 나이 때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친척이나 손님의 왕래에 시달리지 않고 오직 독서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천행으로 나는 한평생 가족들을 사랑하거나 가까이 하지 않는 무딘 감정을 타고났다. 그 덕분에 용호에서 말년을 보내면서 가족을 부양하거나 그들에게 핍박당하는 고통에서 벗어나 또 일념으로 독서에 전념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따위 역시 천행 운운하기에는 아직 미흡해보인다. 천행으로 내게는 마음의 눈이 있어 책을 펴면 곧 인간이 보이곤 하였다. <이탁오, ‘분서’>



책을 안 읽는 이들은 ‘책을 읽을 수 없는’ 천만 가지 이유를 댄다. 돈도 벌어야 하고, 만날 사람도 많고, 몸도 피곤하고, 걱정거리도 많고, 여하튼 이래저래 시간이 없다는 것. 그러다 나이가 들면, 곧 죽을 텐데 책은 읽어 뭐하나, 라며 서둘러 포기한다. 하지만 실은 이 모든 게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돈이 있든 없든 돈에서 자유롭기 위해, 능동적으로 타인과의 관계를 구성하기 위해, 일신의 안락을 구하지 않기 위해, 매순간 자신의 한계를 넘기 위해, 죽음 앞에서 편안하고 의연해지기 위해. 우리에겐 책을 읽어야 하는 천만 가지의 이유가 있다! 또한 이탁오의 천행에는 못 미칠지언정(!) 하늘은 우리에게도 책을 읽을 수 있는 갖가지 천행을 주시지 않았는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렵다는 로또에 당첨이 되고서도 절도와 사기를 일삼다 붙들린 청년의 기사를 보았다. 사유할 수 있는 능력과 비전이 없다면 10억원이 아니라 100억원도 우리를 구원해주지 못한다. 인생이 쉽게 역전될 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혹시 ‘인생역전’을 꿈꾸신다면 로또보다는 책을 사시라. 게다가 책읽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 되었으니.

<채운 연구공간 ‘수유 + 너머’ 연구원> 2008.10.1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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