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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    담

                                                                     이 문 재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로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 보내기 위하여

종은 아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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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집에 전화를 한다.

전화를 하기만 하면

언제나 전화를 받던 어머니

아무리 기다려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매일매일 전하던 안부를 어찌할까.

그래도 나는 전화 앞에 우두커니 앉아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귀에 대고

행여나 어머니 음성 들릴까

숨죽여 전화벨 소리를 듣는데

전화벨 소리 저쪽 끝

너무나 넓고 아득한 쓸쓸함만

전화 줄을 타고 와

나를 덮는다.

 

어머니!

-시집 <위험한 향나무는 버릴 수 없다<(시학). 2006.8.30한겨레 신문 <시인의 마을>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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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

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 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 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작가세계 200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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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비

강을 건너자 비가 가늘어졌다

산발치에 닿아선 하늘까지 맑아졌다

땅은 이미 충분히 젖어

검고 부드럽게 나무뿌리에 담았던 향을 풀어냈다

포클레인이 모래흙 한 무더기

내키만큼 쌓아놓은 뒤였다

새로 파낸 사토(沙土)는 새 봄비를 맞아 빛이 더 맑았다

이미 마음을 궁글렸으니

세상 전부가 함께 묻힌다 한들 이상할 게 없었다

흙을 가리고 방향을 잡아 자리를 정한 다음

조용히 내려놓았다

내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평온한 세계로 듣고 있었다

구름 걷히고 햇살 펴지면서 흙내음 진한 달구노래 들렸는지

어머니는 하나님을 믿었으니

그후 어찌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포르릉 산새가 날아간 것인지

산역을 마친 이들이 햇무덤에서 내려오고 나서야

나는 문득 손이 텅 비었다는 것을

상처가 아리다는 걸 느꼈다

봄비 걷히고

내 알몸 위로 눈물이 쏟아졌다


어머니를 산에 묻고 내려오는 화자의 심정이 그저 평온하기만 했겠는가? 내려오고 나서야  문득 손이 텅 비었다는 것을. 상처가 아리다는 걸 느끼고, 거기에 눈물까지 쏟아졌으니. 오히려 담담한 어조로 인해 슬픔의 정서는 더 깊게 느껴진다.  

담담하게 풀어내는 듯하지만 끝없이 무너져 내리는 아비의 심정을 잘 드러내고 있는 또다른 시,

 

掌篇            김종삼

작년 1월 7일

나는 형 종문이가 위독하다는 전달을 받았다

추운 새벽이었다

골목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허술한 차림의 사람이 다가왔다

한미병원을 찾는다고 했다

그 병원에서 두 딸아이가 죽었다고 했다

부여에서 왔다고 한다

연탄가스 중독이라고 한다

나이는 스물둘, 열아홉

함께 가며 주고받는 몇 마디였다

시체실 불이 켜져 있었다

관리실에서 성명들을 확인하였다

어서 들어가보라고 한즉

조금 있다가 본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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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

 

달팽이 지나간 자리에 긴 분비물의 길이 나 있다

얇아서 아슬아슬한 갑각 아래 느리고 미끌미끌하고 부드러운 길

슬픔이 흘러나온 자국처럼 격렬한 욕정이 지나간 자국처럼

길은 곧 지워지고 희미한 흔적만 남는다

물렁물렁한 힘이 조금씩 제 몸을 녹이며 건조한 곳들을 적셔 길을 냈던 자리, 얼룩

한때 축축했던 기억으로 바삭 마른 자리를 견디고 있다.


 이 바싹 마른 자리를 견디게 하는 것은 근육질의 단단한 힘이 아니라  개펄처럼 말랑말랑한 것들이다. 한때 축축했던 기억들이다.

함민복은 말한다. "말랑말랑한 힘이지요. 뻘이 사람의 다리를 잡는 부드러운 힘이요. 문명화란 땅 속의 시멘트를 꺼내서 수직을 만드는 딱딱한 쪽으로 편향돼 있습니다. 뻘은 아무것도 안 만들고, 반죽만 개고 있고요. 집이 필요하면 뻘에 사는 것들은 구멍을 파고 들어갈 뿐 표면은 부드러운 수평을 유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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