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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 카슨은 인류가 택한 길이 결국은 자기들이 사는 땅을 오염시키고, 나무들을 시들게 하고, 지저귀던 새들마저 떠나게 함으로써 마침내 '침묵의 봄'을 불러올 것임을 예언하였다. 불행히도 그 예언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상황은 별반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레이첼 카슨의 "...성숙한 눈으로 자연과 우주를 바라볼 수 있도록 먼저 우리 스스로의 문제를 깨달아야 합니다."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게리 스나이더의 <지구, 우주의 한 마을>)

그 성숙한 눈이란 우주의 작은 한 곳인 지구와 그 지구에 깃들여 사는 아주 미세하게 아름다운 것들, 아주 연약한 존재들, 덧없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모든 존재들을 깊은 시선으로 보는 것에 다름아니다.  그렇지만 게리 스나이더는 생태계에 감상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경계한다. 또한 이 복잡다단한 세계에서 자연과 문화를 건강하게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일종의 정치적,사회적 활동에 참여할 것을 요청받고 있음을 또한  말하고 있다. 우리는 공공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자기 자신 또는 자기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웰빙으로는, 타인 더 나아가서는 다른 생명체를 그다지 고려하지 않고 곤경에 처하든 말든 별로 상관하지 않는 웰빙으로는 자연공동체, 인간공동체를 지속해 나갈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고, 우리의 아이들이 살아갈 땅과 물과 하늘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이 가장 정치적이며 경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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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무엇에 대한 욕구 또는 결핍을 내면화한 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쁜 옷을 보면 사고 싶고, 남이 나보다 좋은 차를 가지고 다니면 그보다 더 나은 차를 사고 싶고, 내가 사는 집은 늘 좁은 것처럼 느껴져 더 큰 집으로 이사가고 싶고, 남의 아이가 우리 아이보다 공부를 잘 하면 괜히 샘나고..

이러다 보면 우리 생활은 늘 불만족스럽기 짝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불만은 상당 부분 남과의 비교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물질적 욕망에서 내 마음이 자유롭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생활명상은 만족하라고 말합니다.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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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미서리공동체 영적지도자 유진박· 마샤 보글린 부부는 행복의 비결에 대해서 이렇게 단언한다. "자기가 자기를 챙겨서 행복해진 사람은 인류 역사에서 한 명도 없었다"고. 자기가 이기적으로 자기만 챙긴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곧 행복은 추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진 본성을 발현할 때 저절로 얻어지는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꽃들이 예뻐지려고 피느냐. (자신의 본성대로)피는 꽃처럼 자기 생명이 드러날 때 행복은 저절로 온다!" (기사원문)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관찰하여 본래의 성품을 알아가야 한다는 것에 다름 아닐진대, 직장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인간관계에서 비롯한 여러 일상생활이 그리 녹록치는 않다.  성성적적(惺惺寂寂·)하기를 바라는데, 이게 어디 말이 쉽지. 그렇다 해서 세속의 삶에 매몰되어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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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의 측면보다 실천이 우선되어야 하는 게 생태적 삶이다. 결국 '욕망의 문제'인데 어디 이 사회가 사람을 욕망없이 살 수 있게 하는가? 자본은 늘 소비를 부추기고 물질적 허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한다. 그에 대한 깨침을 주는 기사와  관련 책들. 한겨레21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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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내가 읽은 문학서적들에는 많은 해직교수들의 이름이 있었다. 백낙청, 송기숙, 문병란과 같은 이름들이 아직도 기억난다. 민주화 과정 속에서 진실을 향한 외침을 멈출 수 없었던 그런 분들에게 주어진 명예로운 주홍글씨가 해직교수였다. 명예롭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선생이 강단으로부터 추방되어 거리에서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면, 그것은 비정상적인 사회인 것이 분명했다.

시간이 흘러 그들은 복직되었고, 고적한 정년을 맞았다.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형식적인 민주화가 쟁취되고 난 이후였다. 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또 자칭 타칭 ‘재야비평가’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또다른 유형의 해직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가령 오랜 싸움 끝에 서울대에 복직한 김민수 교수라든가, 지난해 전남대에 임용된 김상봉 교수가 그 분들이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신념에 따라 대학을 뛰쳐나온 분도 있었다. 가령 철학 아카데미의 이정우 선생 같은 분이 그렇다. 다시 그런가 하면, 대학이 학문 공동체로서의 순기능을 상실했다는 날카로운 비판을 던지면서 새로운 지적 패러다임을 건설하자는 고미숙 선생 같은 이도 만날 수 있었다. 왜 대학이 문제인가.

사회 민주화는 어느 수준에서 진척된 게 분명한데, 아이러니하게도 대학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 체제의 가장 보수적인 습속과 제도를 내면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경쟁논리’의 명암을 균형잡힌 시각에서 통찰하기보다는, 대학 자체가 ‘무한 경쟁의 이데올로기’를 체계화된 담론으로 생산하고, 제도화한다. 대학의 운영방식은 이 사회의 많은 부분이 민주화되는 것에 오히려 역행하고 있다.

큰 대학은 거대 기업자본에 포섭되고, 작은 대학은 족벌 간상배 집단에 장악당한다. 비판적 지성인으로서의 본분에 철저하고자 하는 선생과 학생들은, 그들의 대학에서 추방되어 쉰목소리로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건만, 그 반향은 넓지도 깊지도 않다. 국민소득은 높아간다지만, 신자유주의의 구호들은 우리들의 일상 전체를 오히려 악다구니판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듯하다.

최근에는 강남대의 이찬수 교수가 해직되었다. 아무리 기독교가 배타적인 유일신론을 교리의 원천으로 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의 윤리야말로 다른 것에 대한 고통스런 관용까지를 포용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 교수의 종교적 관용은 그것대로 포용하면서, 기독교적 유일신의 섭리를 마음 깊이 견지할 것을 권유하는 것이 대학의 성숙한 태도 아닌가.

내가 재직하는 대학에서도 재경회계학부의 오문성 교수가 불과 임용 1년 만에 전자우편으로 재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 재임용 탈락의 표면적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전임교수가 한 기업의 비상임 사외이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 둘째, 전임교수가 총장의 허가 없이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비상임 사외이사가 해임의 이유라면, 대한민국의 수많은 대학교수들은 이미 대거 해임되었을 것이다. 회계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더 깊은 학문을 위해 ‘세법’을 또다시 공부하는 교수를 격려는 못해줄지언정 ‘불신임 총장’의 허가가 없었다고 해임하는 행위는 소와 말이 함께 웃을 일이다. 그런데 소와 말이 함께 웃을 일이 벌어진 것은, 해임당한 교수가 교수협의회의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학원 민주화의 신념을 결코 꺾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겨레신문. 2006.6.28


문제는 우리사회에서 비판적 지성들이 설 자리가 자꾸만 협소해지고 있다는 데 있다. 자본의 논리는 대학마저도 집어삼키려고 한다. 정신마저 신자유주의화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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