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석탄일 

서울에 계신 시어머님께서 석가 탄신일이니 가까운 절에 가서 가족 이름으로 등이라도 하나 다는 것이 어떻겠냐고 전화하셨다. 작년부터 부쩍 불심이 깊어지시더니, 은근히 내게도 권유하시는 것인가?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어제는 작은애와 함께 갑사에 갔다.  '가까운 절'이 아니라, 평소에 좋아하는 절로 석탄일을 핑계삼아 나들이 한 것이다. 어머님의 분부대로, 온 가족 이름으로 3만원짜리 등을 달고, 나중에 불우 노인들에게 전달된다는 공양미도 샀다. 

작은애는 "엄마, 오늘 왜 절에 온거야? 부처님이 태어나셨다고 왜 와? 연등은 왜 달아야 해?"
일요일에 엄마랑 산에 오는게 못마땅한지 계속 묻는다.  실은, 석탄일이라고 절에 간 것은 나도 처음이라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한다. 시어머님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도 있고, 핑곗김에 바람 쏘이는 것도 있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좋은 면도 있지만, 이런 속내를 아이에게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가 생일이 되면 '생일 축하해'라고 인사하고, 설날에 '복 많이 받으세요' 하는 것처럼 부처님 생일이니까 축하드리는거지. 그리고 기왕이면 '복 많이 받으세요' 서로 축복하는거고. "  ---- ㅎㅎㅎ, 궁색하다.  ^^;;

근데, 공양미라는 것을 사기는 샀는데, 이것을 어디다가 내는 건지 몰라서 절을 두바퀴나 돌았다.
아마도 예배나 미사중에 헌금하는 순서가 있는 것처럼 예불 행사중에 내는 순서가 있는건지, 
행사 시작 전인 오전시간에는 공양미 접수한다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할수없이 집에 가져와서 쪽방지역에 위치한 진료소 입구에 놓아두었다.
누구든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겠지.

2.  리포트 쓰기

장로교 권사이자, 신학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계신 형님이 요즘 논문이랑 레포트 때문에 무척 바쁘시다. 
하다하다 안되셨는지, 신학 논문집을 요약해달고 하셔서, 레포트 몇 개 써드리기로 했다.
'신앙고백교회사관', ' 영암 김응조 목사의 성서해석' 등, 제목부터 기독교 관점이 투철한 논문들이다. 

개혁신학 계통의 문건을 대할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대단히 진지하고 투철하다.
단지, 그 기반이 "성서"라는 신성불가침의, 의문 제기가 불가능한 권위에 기반해있다는 것이 문제다. 
논리적으로는 closed loop를 이루고 있고, 사후 합리화의 편견, 확인의 편견이 깔려 있다. 
투철한 신앙심을 무어라 할 수는 없지만, 과연 이렇게 해서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걸까?
하느님은 이를 반기실까? 

3.  기특한 편도선   ^^

어제는 큰애가 '하루 종일' 마음대로 게임을 하도록 약속한 날이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하루는 그렇게 하기로 약속을 했었는데,
그동안 휴일마다 어린이날(아버님 생신), 어버이날 겸 어머님 생신이 있어서 어제로 미루어졌었다.

아주 단단히 벼른 듯, 아침 9시가 되기 전부터 컴 앞에 앉아서 하루 종일 게임을 원없이 했다. 

"건아, 혹시 '내가 도대체 지금 뭐하는 짓이지?' 라는 생각은 안드니?"라는 질문에
" 어? 정말 그런 생각도 했는데..." 라면서도 줄기차게 컴을 놓지 않더니.... 

저녁 9시에 보다못한 남편이 그만 하라고 해서야 컴퓨터를 껐다.  장장 12시간이다!  ㅡㅡ;;

새벽 3시, 건희가 깨운다.
목 아래 있는 설하편도가 양쪽이 다 탱탱 부어서 아프다고 온 것이다.

오라~!  좋은 핑곗 거리 생겼다!  
" 하루종일 게임하느라 무리하더니! 너무 무리를 해서 병났잖아! "

ㅎㅎㅎ, 앞으로는 시험 끝이라도 무제한 게임의 날은 없을 거다. 

설하편도야, 고맙다.   ^^

4. 진료

오랜만에 당번이었다.

날씨가 추울 때는 5겹, 6겹 입은 옷을 들추고 진찰하는 것이 문제였는데,
날씨가 더우니 이제는 땀냄새, 발냄새가 문제다. 

계속 방에 있으면 냄새가 차는지도 잘 모르는데,
어떤 분은 스스로 냄새가 날까봐 신발을 벗기 미안해 하고, 
젊은 사람들은 방으로 들어오면서 코를 쥐고 인상을 찌푸린다.

개중에 일용직이라도, 리어카를 끌더라도, 일을 하는 사람들은 좀 낫다.

그런데,  40년 평생 중에 30년을 교도소나 정신병원에서 보낸 사람,
불구가 되어 일할 수 없는 사람,
알콜 중독이 되어 있는 사람들.....     

이들은 무엇을 붙잡고 희망을 세울 수 있을까?

5.  역시 프로는 다르다.

통/번역 책들을 다 읽었다.
최정화 교수의 책은 주로 통역사의 생활을, 서계인씨의 '영어 번역의 기술'은 번역사의 관점에서 쓰여졌다.
읽다보니 통역과 번역은 비슷한 듯 하지만 전혀 다른 전문 분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통역사의 경우, 관련 분야의 실력, 순발력과 현장에서의 에티켓 등이 중요한 것 같았고,
번역의 경우,  글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정확하면서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이었다. 

'영어 번역의 기술'을 보면, 찔리는 부분이 적지 않다. 

"... 출판사에 찾아오는 번역 지망생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대부분 고학력인데다 외국에서 다년간 공부하고 돌아온 해외 유학파들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출판사의 편집자들이 그들에게 거는 기대는 그리 크지 않다고 한다."

" 내가 느끼는 가장 곤혹스러운 점은, 그들이 자신의 외국어 실력이 곧바로 번역 실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듯할 때다. .... 번역가의 3대 요건을 외국어 해독력, 모국어 문장력, 조사 능력으로 볼 때 이 중 최대의 관건이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말 문장력이며, 이는 출판을 염두에 둔 번역을 한 페이지라도 진지하게 해본 사람이라면 곧바로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다."  

---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다. 원문 뜻은 아는데, 이를 우리 말로 제대로 표현하자니 머리가 아픈 것이다.

뒷부분은 '해석이 아닌 번역을 위한 사례' 및 '번역영문법'이 있다. 

원문과 문제역(아마추어들이 잘못 번역한 글), 그리고 바람직한 번역, 그리고 그에 대한 설명이 차근차근 되어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나도 모르게 한국어 답지 않은 문장으로 글을 옮기면서도 그것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조차 못느끼고 있던 부분이 속속들이 드러나서 얼굴이 달아오르곤 했다.

특히 영어에서는 '형용사+ 명사'형으로 표현된 것을 우리 말에서는 '부사+동사' 형태로 바꾸는 것과 같이, 품사 자체를 바꾸는 것에 익숙치 않은 것 같다.

예를 들면,

Only then did he permit his mind to consider the possibility of an accident.
문제역: 그때서야 비로소 그는 사고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수정역: 그때서야 비로소 그는 사고가 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It takes eight hours to get to Seoul and back by train.
문제역: 서울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데는 여덟 시간이 걸립니다.
수정역: 서울까지는 왕복 여덟 시간이 걸립니다.

수정역을 보고 나면 '당연히 그랬어야지" 라는 생각이 들지만, 수정역을 보지 않고 문장을 옮기다 보면 문제역처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모든 문제는 우리말 실력, 원문에 대한 충실함과 함께 더 좋은 표현을 찾아내는 발상의 전환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6. 책상 정리를 한게 엊그제 같은데....

책장을 완성하면서 깔끔해졌던 책상이, 몇 주 되지도 않아 또 지저분해지고 있다.
이제는 책장 짜넣을 공간도 더이상 없는데....   ㅡㅡ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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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5-16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 아버지는 등도 안다셨다네요 ㅠ.ㅠ;;;

마냐 2005-05-16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한 건희, 대단한 부모...승리의 기쁨은 설하편도가~ ㅋㅋㅋ
가을산님...대단히 죄송하지만, 순식간에 어지러워진 님의 책상이 제게는 묘한 안도감을 주고 있슴다. 이거 어쩌죠? ^^;

瑚璉 2005-05-16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참 책상이 깨끗하시군요(문장 그대로의 뜻입니다).

날개 2005-05-16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책상 그런거, 정말정말 이해합니다....^^

가을산 2005-05-16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아버님께서 불교 신자신가요? 등을 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죠? 실은 저도 잘 몰라요.

마냐님/ 호정무진님 / 날개님 / 그래요? 그렇다면 저도 맘 놓아도 되겠네요.
실은, 지저분한 걸 보면 머리 한쪽이 늘 무거우면서도 잘 치우게 되지는 않아요.

부리 2005-05-16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우리말 실력이 번역에는 더 중요하죠. 글구... 가을산님은 언제 뵈도 멋지게 사시는 분이세요.

물만두 2005-05-16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교신자신데 돈 아까워 안다셨다는 ㅠ.ㅠ;;;

가을산 2005-05-16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리/마태님도 언제 뵈도 재미있게 사시는 분이세요. ^^
물만두님/ 헉! 그렇구나~! 존경스러워요! 저도 담부턴 그래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