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야의 책을 읽고 나서 매일 시를 한 편씩 낭독해보리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물론 생각은 생각으로 그쳐 몇 권 안 되는 시집들은 책장안에서 제 차례를 기다리며 낡아가고 있다.

그래서 그런가, 좋아하는 시에 자기 감상을 보탠 이런 책에 관심이 많다.

'올드걸의 시집'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시에 관심도 없고 잘 읽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경험에 얹혀 시를 이해해보려는 얄팍한 꼼수는 집어쳐야 한다고.

시를 읽고 난 후의 감상은 온전히 읽은 자의 것이고, 뭔가를 느끼고 싶다면 스스로 읽어야 한다.

그걸 더 확실히 깨닫도록 끝까지 읽어야겠다.

 

박경원의 '지금, 이 시대'를 읽고서 '아무것도 아닌 것의 위대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신을 알아갈수록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겸허함을 느꼈다고 했다.

나이들어 신을 받아들였는지, 부모의 신앙에 따라 습관처럼 신앙생활하다가 새삼 깨달았다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 그때까지 그렇게 큰 의미의 덩어리로 존재하던 내가, 사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깨달음. -86쪽

 

나이 들어 스스로 신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신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더 강하게 느끼는 것 같다.

나같은 경우는 교회가 강요하는 바로 그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 시키는 대로 해라' 때문에 신과도 멀어져 버렸다.

하찮아져야 신과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인가.

신은 정말 그걸 원할까?

글쓴이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가 하며 읽어가다 이렇게 쓴 대목에 이르렀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찮고 무의미해서가 아니라, 너무 고귀하고 무한해서 나 자신조차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86쪽

 

음?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신을 바닥까지 내려놓은 게 아니라 하느님과 동급으로 생각한거야?

아니, 처음에 언급한 글을 다시 보니 하느님보다는 조금 더 아래인가?

하느님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선언했으니까.

내가 신에게 엎어졌던 이유는 신이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을 줬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의 너, 부족하고 초라하다고 느끼는, 늘 투덜대고 징징대는 너를 그대로 인정한다는 위로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글쓴이와 같은 생각이다.

하찮고 무의미해서가 아니라 너무 고귀하고 무한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아아-

그러니 나는 이 책을 계속 읽어야 한다.

게으르게 시 읽어주는 사람의 생각과 감상에 얹혀가야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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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3부로 이루어진 이 책의 첫 1부를 읽는데 여러 날이 걸렸다.

읽어가면서 든 생각은 이걸 계속 읽어야 하나?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계속 반복해서 읽어야 했다. 옮긴이는 기자생활을 20년하고 현재는 전문번역가로 활동한다고 했다. 그런데 읽기가 너무 힘들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글.

 

"우리는 가끔 무례한 야만성과 신선한 공기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무례한 야만성'이란게 도대체 뭔가. 그것 말고도 문맥을 다듬기위해 의역하거나 덧붙임, 생략 등이 전혀 없이 원문을 그대로 번역했나 싶게 어색한 부분이 많았다. 거기다 역주를 문장 안에 괄호로 집어넣어 놓은 바람에 끊어진 문장을 찾아 읽는 것도 힘들었다. 글자 크기라도 줄여 놓았다면 구분하기가 더 쉬웠을 것이다. 몇 번을 포기할까 하다가 참고 다 읽었던 것은 꼭 읽고 싶어서 산 책이었기 때문이다. 이전 '자기만의 방'을 읽을 때에도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서 포기하려고 했던 경험이 있어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울프의 글이 조금 난해하고 문장이 긴 것은 아닐까. 어떤 글은 한 문장이 여섯 줄이나 되는 것으로 보아 그럴 수 있겠다 싶다. 꾹 참고 읽은 보람이 있어 2부 부터는 마치 다른 글을 읽는 것처럼 술술 읽혔다. 어쩌면 한 번역자의 글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이 글은 울프의 회고록이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 전혀 놀랍지 않을 만큼 고통과 슬픔이 많았다. 둘 다 재혼이었던 울프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각 한 명, 세 명의 자녀가 있었고 둘 사이에서 네 명이 더 태어났다. 열 세 살 되던 때에 어머니가 죽은 후, 엄마를 대신했던 큰 언니(아버지가 다른)까지 2년 후에 아파서 죽은 후 많은 충격과 고통을 겪는다. 아내와 딸을 잃은 아버지를 묘사하는 부분은 매우 신랄했는데 공감 가는 부분이 있었다.

 

이리하여 어머니는 아버지의 의존성을 우리에게 유산으로 물려주게 되었다. 그녀의 죽음 뒤에 이것이 아주 힘든 책임이 되었다. 만일 어머니가 아버지를 스스로를 지킬 줄 아는 존재로 우리에게 남겼다면, 우리의 관계는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197쪽

 

마치 우리 시부모님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을 관리하던 시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시아버지는 젖 떨어진 어린애처럼 응석받이가 되고 말았다.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갔을 아버지의 단점들이 한꺼번에 너무 많이 보이자 솔직히 감당이 되지 않을 만큼 혼란스러웠었다. 지금은 그러려니 하고 이해하고 넘어가지만 솔직히 견디기 힘든 때도 있다.

 

아버지에 대한 불만은 구(舊)시대,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인 시대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진다. 여자들은 공식적인 교육기관에 갈 수 없는 것은 '자기만의 방'에서 이야기 했던 부분이지만, 여기에서도 주체적이지 못하고 남자의 부속품, 장식품 역할 밖에 하지 못하게 했던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생각에 충실하게 따랐던 큰 오빠(아버지가 다른) 조지에 대한 회상은 참 '화끈하다'.

글을 읽어보면 상당히 솔직하고 직선적인 성격인 것 같은데 어떤 부분에서는 그렇지 못한가보다.

 

여하튼 거울을 쳐다보는 데 대한 수치심은 말괄량이 단계가 끝난 뒤에도 나의 인생 내내 이어졌다. 나는 공공장소에서 코에 분조차도 바르지 못한다. 옷과 관련 있는 모든 행위들, 이를테면 치수를 맞춘다든가 새 옷을 입고 어떤 방에 들어가는 일은 지금도 나를 소스라치게 만든다. -78쪽

 

이런 부분.

나도 평소에 거울을 잘 들여다보지 않고, 특히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화장을 고치지 못한다. 밥 먹은 자리에서 바로 거울을 꺼내 화장을 고치는 여자들을 보면 부담스럽다. 옷도 잘 사 입지 않는데 옷을 사려면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 거울에 비춰봐야 하기 때문이다. 울프는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도 거울에 얽힌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것일까? 내 얼굴인데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게 어색하다.

 

나는 예전 기억, 특히 어릴 때 기억이 거의 없다. 어렸을 때분터 꾸준히 썼던 일기는 결혼 후에 다 태워버렸다. 솔직히 있었다고 해도 들춰가며 기억하고 싶은 추억도 별로 없긴 하다. 울프는 어떤 충격으로 인한 기억을 글로 표현함으로써 고통을 지워버린다고 하는데 기억력도 별로인데다 글재주까지 없는 내가 매번 같은 일로 괴롭고 슬픈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이겠다.

 

첫 순간에 한 번 놀라고 나면 그 즉시로 나는 언제나 그 기억들이 특별히 소중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충격을 흡수하는 능력이 나를 작가로 만든 바로 그 요소라고 짐작한다. 나의 경우에는 충격에 뒤이어 그것을 설명하려는 욕구가 일어나는게 아닌가 싶다...... 나는 그것을 단어로 표현함으로써 현실로 만든다. 내가 그것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그것을 단어로 표현함으로써만 가능하며, 완전하다는 것은 곧 그것이 나를 해칠 힘을 상실했다는 의미이다. -86쪽

 

'존재의 순간들'을 먼저 읽었다면 '자기만의 방'을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는 울프가 마흔 살 넘어서까지 벗어나지 못했던 죽은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된 계기로 '등대로'의 집필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책도 읽어 보고 싶다.

 

연이어 계속되는 가족의 죽음은 회고록을 포함하여 많은 글로 표현해도 그의 고통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 없었나보다. 주머니에 돌을 집어넣고 강으로 걸어 들어갈 때의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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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의자에 어질러 놓은 옷을 며칠 째 치우지 않는 큰 딸에게 나름 무안하지 않도록 하면서 치우게 하려고 장난치듯 행동했다.

장난을 받아치는 유쾌한 반응을 기대한 내게 돌아온 건 거친 말과 행동.

평소에도 감정이 극과 극을 오가는 편이긴 하나 너무 제 감정에만 충실한 딸의 태도에 화가 나 한마디 안 할 수 없었다.

그러고 나니 얼마전 남편과 감정싸움에 만신창이가 된 마음상처가 다시 터진 듯 급 우울해져 버리고 말았다.

일주일 중 5일은 직장에서, 2일은 집에서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하는 것도 화가 나고,

온 식구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서비스를 받으려고만 하는 것에도 화가 난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기 싫어서 가족들이 해야 할 일을 다섯가지로 정리한 다음 저녁시간에 발표했다.

내가 정리한 내용을 읽어주고, 그 글을 적게 된 동기(큰 딸과 있었던 일)를 이야기했다.

가족들은 그 글을 꼼꼼하게 읽었다...... 읽어주기만 했다. ㅠㅠ

가족 중 가장 배려심이 많은 작은 딸만 엄마를 위로해주었다.

 

  그러나 마음상함이나 우울증 같은 상태는 며칠, 몇 주, 몇 달 동안 지속되는 경우가 잦은데, 강도에 변화는 있지만

  완전히 사라지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상함 같은 정서적 상태를 이해하고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와 결부된 감정들을 찾아내어 본인이 그것을 확실하게 체험하고 표현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 75쪽

 

내가 가족들에게 화가 날 때는 무슨 일에 내 탓을 하거나 무시하는 반응을 보일 때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내 탓을 하며 비난할 때 반응이 격렬해지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나의 이런 반응은 비난 받는 그 순간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지금 앓고 있는 상처는 대개 이전의 상처받은 경험, 자존감을 건드린 경험과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이지요.

  말하자면 이런 기억들을 미해결 과제가 되어, 해결이 되지 않은 채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겁니다.

  무의식 안에서 '상처난 부위'로 있다가, 비난이나 퇴짜를 맞든지 버림받거나 무시를 당하면 미처 해결되지 않은

  옛날의 상처가 되살아나면서 마음상함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 83쪽

 

이전의 어느 때, 아주 어린 시절에 받았던 상처가 건강하게 해결되지 못하고 무의식으로 가라앉아 있다가 그와 비슷한 자극을 받으면 다시 살아나 분노나 좌절을 겪게 만든다는 것이다.

저자는 사과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사과를 씹어 맛 보고 삼키게 되면 위 속에서 사과가 소화되면서 우리 몸에 필요한 것은 받아들이고 필요없는 것은 배출한다.

사과를 씹지 않고 그냥 삼킨다면 사과는 제대로 소화되지 않아 몸의 일부가 되지 못한채 이물질이 되어 자극받을 때마다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내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체험'이 소화되지 않은 사과처럼 내 몸 어디엔가 자리잡고 있다는 건데.

도대체 내 기억 어디쯤에 비난 받고 무시당한 경험이 숨어있기에 이토록 질기게 나를 괴롭힌단 말인가.

그 시작점을 찾지 못하면 난 계속 이런 감정 소용돌이에 빠져서 상대를 비난하거나 자책을 해야 하나?

 

  이상적인 경우라면, 아마도 우리는 이렇게 심하게 마음을 다쳤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게 가장 의미있는 일이며

  실현가능하고 자존감을 강화시켜줄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겁니다.

  내가 아프다고 해서 남들을 상처내는 대신에 말입니다. - 127쪽

 

내가 내 감정을 들여다보며 생각한 것은 나의 이런 마음을 가족들에게 알려야겠다는 것이었다.

매주 혼자서 집안일을 다 해야하는 것도 스트레스고, 자기 방이라고 매일 엉망으로 어질러만 놓는 딸들에게도 자율만큼 책임감을 주어야했다.

그리고 큰딸 때문에 화가 났다고 해서 그 감정을 직접적인 원인제공자가 아닌 다른 가족들에게 투사하는 것도 옳지 못하기 때문에 내 기분에 대해서 설명하고 싶었다.

 

   무엇때문에 그렇게 마음이 상했는지, 또 그로 인해 어떤 욕구가 채워지지 못한 채 방치되었는지를 깨닫고

   표현할 수 있다면, 이것은 오히려 그 사람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일을 책임지는 사람이 되는 동시에, 남들이 그를 이해하기도 쉬워집니다.

   솔직하고 분명하게 자기 표현을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의 반응을 예상할 수 있게 되지요. - 232쪽

 

그리하여 저녁식사 시간에 나의 기분과 함께 가족들이 해주었으면 하는 일들을 설명할 수 있었다.

반응은 우호적이었으나 하루가 지난 오늘까지 가족 누구도 눈에 띄는 행동변화는 없다.

뭐 큰 기대를 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일단 내 기분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만도 나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큰 딸과는 늘 같은 패턴으로 문제가 불거지는 편이라서 이제부턴 돌려말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요구할 생각이다.

 

'따귀 맞은 영혼'은 사놓은지 오래되었고, 몇 번 읽기를 시도하다 실패했던 책인데 큰딸 덕에 다 읽을 수 있었다.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다 내 탓이 아니며, 내 탓이라 하더라도 내가 얻고자 하는 좋은 결과를 위해 노력한다면 늘 빠지는 우울감, 분노, 좌절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조언을 받았다.

곁에 두고 감정의 늪에 빠질 때마다 들여다 볼만한 책이다.

번역이 매끄러워 마치 국내 저자의 글을 읽는 것 같다.

마지막 옮긴이의 말은 책의 내용을 정확하게 요약해 주었고, 그 자체로도 '따귀 맞은 영혼'을 충분히 위로할 수 있을만한 좋은 글이다.

 

아래의 글은 따로 적어놓고 늘 마음에 새길란다. 읽을수록 마음에 와 닿는다.

  

   우리 자신이나 남, 그리고 세상에 대해 우리가 적당한 정도로만 기대한다면, 다시 말해 잠재적으로 실현가능한 만큼만

   이상화한다면, 이 기대는 우리에게 만족감과 긍정적인 자존감을 주는 한편, 불필요하게 마음상하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 주기도 할 겁니다. - 259쪽

 

   무언가를 남에게 줄 자세가 내면적으로 갖추어져 있을 때에야 바로 그것을 남들에게 받을 수 있습니다. - 2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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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틀동안의 명절 노동을 끝내고 방전되어버린 주말 동안 두 권의 책을 읽고, 한 권은 읽는 중이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유시민의 책 '청춘의 독서'에서 소개된 글을 읽고 사두었던 책이다.

명절기간에는 집중하기 힘드니까 소설이 좋겠지 하는 생각으로 들고 다녔는데 시댁에 있는 동안에는 책 펼칠 시간이 없었다.

유시민의 글을 읽으면서 소설(작가는 '이야기'라고 함)의 내용이 2013년 온 나라를 시끄럽게 했던 어떤 사건과 겹쳐져 꼭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등장인물들이 이름이 익숙해지지 않아- 독일 이름은 좀 어렵다 - 앞 장을 여러 번 되집어가며 읽어야했지만 내용만은 굉장히 익숙하다.

국민의 알 권리 운운하면서 개인의 자유를 짓밟고, 왜곡된 정보를 진짜처럼 유통시키면서 사람들의 삶을 한 순간에 망가뜨리는 거대 언론.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조금 진부한 표현밖에는 할 것이 없다.

 

입센의 '인형의 집'은 정말 몰두해서 읽었는데 왠지 결말이 좀 허망했다.

1막 끝부분부터 2막까지 갈등이 완전 고조되었는데 3막에서는 너무 허무하게 결론이 났다.

그 시절에 가정주부가 남편과의 관계를 그렇게, 무 자르듯이 딱 끝내고 폼나게 짐싸서 집을 떠날 수 있었을까?

남편에 대한 실망과 남겨질 애들에 대한 걱정, 뭐 그런 분노의 표출, 고뇌 과정 없이,

한 순간에 아버지, 남편의 인형노릇을 그만두겠노라 하고 나가 버린다는 것이 좀 이해가 안 된다.

너무 서둘러 결론을 내버린 것 같다.

검나게 폼나고 멋있기는 하다.

남편이 어느날 달랑 편지 한 장 남기고(너랑 더 이상 안 살아!) 파리로 가버렸는데도 돌아오기만 한다면 없었던 일로 하겠다는 '달과 6펜스'의 에이미보다 멋있기는 하다만 나에겐 에이미가 훨씬 더 이해되는 캐릭터다.

 

중학생 시절 글자체도 작고 세로로 인쇄된 세계문학전집 읽던 생각만으로 좀 멀리 했던 외국소설들인데 술술 읽혀서 좀 놀랐다.

종이 질, 글자체, 번역 등도 좋아졌고, 나이 들어 이해력도 좀 높아졌겠지.

명절동안 속 상한 일이 있어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그러다보니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는 것조차 사실인 것처럼 단정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지레 짐작은 그만두고, 사실만, 일어난 일만 생각하기로 하자.

세계문학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짐작 그만 두고, 다양하게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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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4-02-03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가자' 하고 생각하면
물도 불도 보지 않고
그대로 한 점 바람이 될 수 있겠지요.
시대와 사회가
아무리 굴레와 수렁이 가득하다 하더라도..

가상 2014-02-04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겠죠.뭘 먼저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를거에요
 

 

대학 들어가는 딸이 보면 좋을 것 같은 프로그램이길레 권했더니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대학이 결정되고 난 후 딸의 모습에서 모든 것을 끝낸 사람의 여유를 본다.

대학은 시작일 뿐인데.

 

6부작인데 어제서야 알게 되어 2부를 봤다.

대학생 또는 취업준비생 5명의 멘토링을 통해 진정한 인재상에 대해 알아보는 내용.

그 중 제일 눈에 띄는 사람은 북경대 재학 중이면서 다양한 스펙쌓기에 열중하는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재'다.

학점 관리하면서 높은 공인영어, 중국어 점수 유지하고, 다양한 공공기관과 기업에서 인턴으로 경험 쌓고.

스스로도 꽤 자부심이 높다. 그럴테지.

원하는 미래는 대기업에 취업하여 국내, 해외 영업하면서 돈은 많이 벌고 야근은 별로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단다.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던 그는 멘토의 우려와 전 대기업 인사담당자의 '나 같으면 저 사람 안 뽑습니다'라는 소리를 듣고 좌절한다.

화면에 비친 그의 얼굴은 처음과 달리 정말로 당황하고 절망한 것처럼 보였다.

멘토 중 한 사람은 그런 말을 했다.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 것인지는 잘 아는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는 잘 모르는 것 같다고.

정확한 지적이라고 본다.

우리의 교육은 '무엇'은 묻지만 '어떻게'는 묻지 않는다.

뭐 해먹고 살래라고 묻지 어떻게 살거야라고 묻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주관이 아닌 타인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서 '스펙'을 쌓는 거다.

그 북경대 청년처럼.

나 같으면 안 뽑겠다고 했던 전 인사담당자의 설명은 그랬다.

'너무 기둥이 많다, 많은 기둥을 좀 정리해서 한 두개의 기둥을 잘 세우면 좋을 것 같다.'

얼마전에 읽은 신문 칼럼에서 글쓴이는 사람들은 직장과 직업을 혼동한다고 했다.

직장이란 건 정해진 어떤 업무를 하기 위해 급여를 받고 일하러 가는 곳이고,

직업이란 자신이 가진 기술로 일하는 것이라고 한다.(대충 그런 뜻이었다. 정확한 문장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직장은 나 말고 다른 사람으로 대체가 가능한 것이고, 직업은 그렇지 않다는 거다.

그 청년이 하늘을 찌르는 자부심과 스펙을 가지고도 부정적인 반응을 얻게 된 것은 직업을 가지려는게 아니고 직장을 가지려 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실제적으로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잘 하고, 어떤 일에 흥미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뛰어난 인재인지 보여주기 위해 사람들이 말하는 이런 저런 자격증, 점수, 경험을 많이 쌓으면 될 거라고 생각한 듯 하다.

근데 그게 아니라고 하니 당황스러울 밖에.

하지만 우리네 교육 어디 쯤에도 그런 고민을, 직업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데가 없다.

자기의 인생에 대해 고민할 시간과, 자유와, 조언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 삶에 대해 조금 더 깊게 질문을 하면 대답하기가 어렵다.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대기업에 들어가서 '글로벌'하게 세계를 누비면서 돈 많이 받고 야근은 없는 삶을 원하는 거다.

 

에잇, 쓰다 보니 이렇게 좋은 프로그램을 안 보겠다고 한 딸이 얄밉다.

다그쳐서라도 보게 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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