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딸이 놀러왔다.

아이들과 모두 같은 도시에 사는데 재주(?)가 좋아 분가를 시켰다.

'근황토크'를 하는 중에 딸이 '해야하는데'라는 말을 계속하기에 뭘 그리 열심히 사냐고 했다.

딸 말이 요즘 젊은 사람들은 '갓생'살기에 열심이라고 한다.

직장에서 온 몸을 불사르고는 집에 오면 에너지가 소진돼 늘어져 먹고 자고 출근하는 삶이 아니라, 새벽에 일어나 '미라클모닝'을 하고, 운동도 하고, 외국어 공부도 하는 등등 자신을 위한 삶을 산다는 거다.

뭔가 와~ 대단한데? 가 아니고 그렇게까지? 라는 생각이 든다.

그처럼 '나를 위한 삶'에 온 힘을 쏟으며 사니까 연애를 해도, 결혼을 해도, 애를 낳아도 나와 애인, 나와 배우자(및 그 주변사람), 나와 아이의 이익이 계속 충돌하는 걸까?

주변에 손주 키우는 중년여성이 몇 있는데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결혼한 자식들이 육아를 너무 힘들어 한다는 거다.

할머니가 되면 당연히 손주를 봐줘야하는 상황이 된단다. 그 할머니가 일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말이다.

항상 내가 흥분하는 부분은 그 '당연하다'라는 거다.

아무리 부모 자식간이라도 당연한게 어디 있담. 


이야기가 이리 저리 튀다 보니 딸이 좋네, 아들이 좋네, 까지 흘러갔는데 사람들마다 그 의미는 다르겠지만 내 경험을 미루어 짐작하자면 '딸이 좋다'라는 의미는 왠지 가스라이팅인 것 같다.

내 엄마는 딸들을 키울 때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은 분이었는데 말년에 딸들이 가까이에서 부양을 열심히 했더니 딸들 덕에 산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물론 그런 입에 발린 말에 감격할 나이는 지났기땜에 그런 소리를 듣는다해서 온몸을 바치지는 않는다.

그냥 도리를 다할 뿐.

갓생도 좋다만 내 인생이 소증한 만큼 가족이나 다른 사람의 인생도 소중하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부모가 나를 잘 돌보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한다면, 내가 내 자식을 잘 돌보는 것도 당연하다. 

내 부모가 내 자식을 돌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돌봄은, 특히 혈연을 돌보는 것은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든 일이다.

어머니를 돌보느라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는 딸이 있다.

딸 앞에서는 걷지 못한다며 자기 옆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어머니가, 혼자서는 걸을 수 있다.

엄마의 모든 요구를 받아주던 딸은 휠체어를 탄 엄마를 도로 한가운데 두고 가버린다.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지 못하고 타인, 특히 혈연을 끌어들이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기 힘들다.

돌봄을 받는 일은 자신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상대에 대한 지배가 되어서는 안된다.

어른이 된다는 것, 성숙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어렵다.


혈연을 넘어서 신에게까지 가스라이팅을 당하다니.

돈도 없고, 이쁘지도 않은데다 나이까지 많은 여성은 잘 살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것일까.

사는 것에 그런 자격이 필요한가.

네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는 네가 간절히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설교를 들으며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열심히만 하면 복을 받고 잘 살 수 있다면 신이 왜 필요한가.

아픈 이모를 내팽개치지 못하고 끝까지 돌본 결과가 돈 없는 알콜중독자 노처녀라면 어디다 책임을 물을 수 있나. 

잘 못 사는 것이 내 탓이 되지 않으려면 결국 나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요즘 '갓생'을 추구하는 젊은 사람들이 현명한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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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만 보고 달리는 세상에서 아무도 지지 않는, 누구나 승리하는 세상을 만들려는 마음이 고맙다.

준삼은 무너질 리 없는 하늘과 무너지지 않은 야구장과 환하게 웃고있는 혁오의 얼굴을 차례로 보다가 자기 안에서 어떤 조각이 살짝 움직이는 걸 느꼈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알아차렸다. 혁오가 필사적으로 지킨 아름다움이 자신의 조각을 자극했음을.  누구나 아름다움의 조각을가지고 있으며, 우리에겐 서로의 조각을 자극할 힘이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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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하나의 사실이다. 하지만 조스펍에 앉아비브를 보거나니나 시몬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내 주위 공간이 확대되는 것을 느꼈다. 하나의 몸이 다른 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이것이다.
공유되는 내면까지 침투하는 자유를 표현하는 것. 자유는 과거의부담을 짊어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로 계속 나아가고 항상 꿈꾸고 있는 것을 뜻한다. 자유로운 몸이 온전하거나 손상되지 않거나 현 상태를 유지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항상 변하고변하고 변한다. 결국은 유동적인 형태다. 잠시 두려움 없이, 공포를느낄 필요 없이 하나의 신체 안에 살아가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보라.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상상해보라. 우리가 구축할수 있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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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뿐만 아니라 노화나 신체의 장애도 마찬가지다.

먹고 배설하고 숨 쉬기. 감옥에서 계속되는 고통의 원인인모든 신체 기능들이 그의 소설에서 체계적으로 비천해지고 부인된다. 적어도 이것이 사드의 미궁을 지나가는 한 가지 길이다. 그것을침범할 수 없고 건드릴 수 없음에 대한 판타지로 유아 지배의 판타지로 읽는 것. 그 판타지 자체가 무력함과 결핍의 산물이다. 단지 감옥이 가학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감옥이 곧 사디즘이라는 역사적 개념이 태어난 곳, 몸 그 자체가 어떤 식으로 일종의 감옥이 되는지를 드러나게 하는 결핍의 장소였다는 것이다. -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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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에 대한 이정표 격인 저서, 《고통받는 신체 The Body in Pain)에서 일레인 스캐리 Elaine Scarry 는 고문이 반드시 폭력을 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며 그저 몸을 몸 자체와 대립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실행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가장 일상적이고 소박한 습관이나 매일 해야 하는 일들을 수치와 불편함과 고통의 경험으로 만드는 것이다.
갇혀 있는 상황에서는 아기 때처럼 신체의 필요가 충족되지 못하면금방 견디기 힘들어진다. 화장실이나 씻는 시설을 없애버리고, 잠을 자지 못하게 하고 음식과 물을 주지 않거나, 수감자에게 어떤 자세로 꼼짝도 않고 있으라고 요구하는 것 등은 모두 폭력을 쓰지 않고도 강한 감정적 불편함과 신체적 불편함을 순식간에 유도하는 기술이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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