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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와 늙음에 따라오는 간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요즘 보험사 TV광고에 자주 등장하는 간병보험에 대한 이야기.

광고 내용을 보면 아버지 간병에 지친 딸, 시어머니 간병으로 힘들어하는 며느리가 나온다.

늙은 남자는 아내, 딸의 일상을 지켜주기 위해 간병보험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간병이 대부분 배우자(아내), 딸, 며느리 차지임을 감안하더라도 맘이 불편한 광고다.

광고의 목적은 상품판매이고 미래의 불안을 조장하는 것은 판매에 도움이 된다.

광고에 가치나 윤리를 더해야 한다는 주장이 부당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늙은 남자의 간병인이 (당연하게도) 아내, 딸, 며느리라는 건 부당하다. 

그리고 그게 개인이 (사보험으로) 부담해야만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노화, 질병, 장애에 따른 자기 통제력의 상실이 불안을 넘어 공포스럽게 느껴지는 건 보험광고의 호들갑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혐오, 배제, 차별과 연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은교'에서 노老작가의 말처럼 젊음이 상이 아니듯 늙음은 벌이 아니다.

누구나 늙는다. 그리고 늙음은 벌이 아니다. 

돌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므로 돌봄을 받는 것이, 또 돌보는 것이 형벌처럼 느껴지지 않게 제도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나에겐 오면 안 되는 일이라는 위치를 벗어나 협력과 연대로서의 돌봄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들 등을 톡톡 두드리며 여기 좀 돌아보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돌봄에 관한 모순된 심리 기제를 깨고 공론화로 나아갈 수 있다. -돌봄과 인권, 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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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키가 작아서 종합병원 성장클리닉에 애를 데리고 다니는 이가 있다. 성장호르몬이 적게 분비되는 ‘병‘이라서 호르몬을 주사해야 한단다.
잘 안먹고, 편식하고, 예민해서 잘 자지 못하니 크지 못한 것 아니냐고 하니 본인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한다.
키가 크지 않는 것이 병이 되어 치료해야 할만큼 절박한 이유를 물었더니 아이가 작으면 학교에서 괴롭힘을 받을 위험이 커진단다. 큰애도 얌전한 편인데 덩치가 커서 애들이 괴롭히지 않는다고.
참 뭐라 할 말이 없다.

긴 것이라고 해서 ‘남아돈다‘고 생각하지 않고, 짧은 것이라고 해서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해서 이어주면 오리는 근심에 빠지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해서 잘라내면 학은 슬픔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태어나기를 긴 것은 잘라내야 할 것이 아니고 태어나기를 짧은 것은 이어주어야 할 것이 아니니, 근심을없앨 이유도 없는 법이다.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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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딸이 놀러왔다.

아이들과 모두 같은 도시에 사는데 재주(?)가 좋아 분가를 시켰다.

'근황토크'를 하는 중에 딸이 '해야하는데'라는 말을 계속하기에 뭘 그리 열심히 사냐고 했다.

딸 말이 요즘 젊은 사람들은 '갓생'살기에 열심이라고 한다.

직장에서 온 몸을 불사르고는 집에 오면 에너지가 소진돼 늘어져 먹고 자고 출근하는 삶이 아니라, 새벽에 일어나 '미라클모닝'을 하고, 운동도 하고, 외국어 공부도 하는 등등 자신을 위한 삶을 산다는 거다.

뭔가 와~ 대단한데? 가 아니고 그렇게까지? 라는 생각이 든다.

그처럼 '나를 위한 삶'에 온 힘을 쏟으며 사니까 연애를 해도, 결혼을 해도, 애를 낳아도 나와 애인, 나와 배우자(및 그 주변사람), 나와 아이의 이익이 계속 충돌하는 걸까?

주변에 손주 키우는 중년여성이 몇 있는데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결혼한 자식들이 육아를 너무 힘들어 한다는 거다.

할머니가 되면 당연히 손주를 봐줘야하는 상황이 된단다. 그 할머니가 일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말이다.

항상 내가 흥분하는 부분은 그 '당연하다'라는 거다.

아무리 부모 자식간이라도 당연한게 어디 있담. 


이야기가 이리 저리 튀다 보니 딸이 좋네, 아들이 좋네, 까지 흘러갔는데 사람들마다 그 의미는 다르겠지만 내 경험을 미루어 짐작하자면 '딸이 좋다'라는 의미는 왠지 가스라이팅인 것 같다.

내 엄마는 딸들을 키울 때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은 분이었는데 말년에 딸들이 가까이에서 부양을 열심히 했더니 딸들 덕에 산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물론 그런 입에 발린 말에 감격할 나이는 지났기땜에 그런 소리를 듣는다해서 온몸을 바치지는 않는다.

그냥 도리를 다할 뿐.

갓생도 좋다만 내 인생이 소증한 만큼 가족이나 다른 사람의 인생도 소중하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부모가 나를 잘 돌보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한다면, 내가 내 자식을 잘 돌보는 것도 당연하다. 

내 부모가 내 자식을 돌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돌봄은, 특히 혈연을 돌보는 것은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든 일이다.

어머니를 돌보느라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는 딸이 있다.

딸 앞에서는 걷지 못한다며 자기 옆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어머니가, 혼자서는 걸을 수 있다.

엄마의 모든 요구를 받아주던 딸은 휠체어를 탄 엄마를 도로 한가운데 두고 가버린다.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지 못하고 타인, 특히 혈연을 끌어들이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기 힘들다.

돌봄을 받는 일은 자신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상대에 대한 지배가 되어서는 안된다.

어른이 된다는 것, 성숙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어렵다.


혈연을 넘어서 신에게까지 가스라이팅을 당하다니.

돈도 없고, 이쁘지도 않은데다 나이까지 많은 여성은 잘 살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것일까.

사는 것에 그런 자격이 필요한가.

네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는 네가 간절히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설교를 들으며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열심히만 하면 복을 받고 잘 살 수 있다면 신이 왜 필요한가.

아픈 이모를 내팽개치지 못하고 끝까지 돌본 결과가 돈 없는 알콜중독자 노처녀라면 어디다 책임을 물을 수 있나. 

잘 못 사는 것이 내 탓이 되지 않으려면 결국 나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요즘 '갓생'을 추구하는 젊은 사람들이 현명한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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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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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입한 시립도서관에서 11월부터 회원에게 교보문고 전자도서관에서 전자책을 무제한 다운 받을 수 있게 해준다. 예산 소진시까지라는 단서가 있긴 하지만 이게 왠 떡이냐.
소설을 잘 읽지 않으므로 아는 작가가 많지 않은데 전자도서관 상단에 떠 있길레 다운받았다.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데 나무의 일생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나무의 수령은 대체로 길기 때문에 나무는 몇 백년에 걸쳐 주변의 변화를 묵묵히 보아 넘긴다. 마을이 생겼다 없어지거나 사람들이 늙어서 죽는 것을 보고, 전쟁도 겪고.
내가 사는 동네도 원 마을이 없어지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곳인데 군데군데 공원에 당산나무들이 있다. 그 나무들을 볼 때마다 그 책 생각이 났고 저 나무들도 마을이 생기고 사라지고 애들이 태어나고 노인들이 죽는 것을 다 봤겠구나 생각했었다. 작가의 말을 보니 작가도 그런 생각을 했었나 보다. 나 같은 사람은 생각만 하는데 소설가는 그걸 소설로 풀어내는구나.
4대에 걸쳐 내가 선택한 적이 없는 운명을 대하는 여자들의 이야기. 그냥 감수하거나, 증오하거나, 이유를 찾는다. 같은 운명에 처해 있는 것 같지만 각자의 상황은 다르다.
인간의 삶이 그렇다. 각자 감당할 몫이 있고, 사는 방식도 다르다. 작가는 환멸과 절망이 가득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각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고 말하는 것 같다. 수퍼맨처럼 세상을 구할 수는 없어도 네 옆의, 네가 구할 수 있는 한 사람, 단 한 사람은 있다고. 그게 중요한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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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생각과 달리 편두통은 무작위로 찾아오지 않는 모양이다. 어떤 패턴이 있는 것 같다. 아주 시끌벅적한 사건들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평범한 좌절과 연결된 패턴......"집이 홀랑 타버리고 남편이 나를 떠났다고 해서, 거리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은행에 강도가 들었다고 해서 두통이 생기지는 않는다. 대신, 나의 삶과 남몰래 게릴라전을 벌일 때 두통이 찾아온다. 집안의 작은 혼란들, 세탁물 분실, 마뜩잖은 도움, 약속 취소가 잇따르는 몇 주 동안, 전화벨이 너무 많이 울리고 되는 일을 하나도 없고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날에. 초대하지도 않은 친구가 불쑥 찾아오는 날에."

역설적이게도, 그에게 편두통은 곧 진통제가 된다. 그렇다, 편두통 자체는 지독히 무서운 진통제다. 하지만 서술자는 위안이 필요할 때면 기꺼이 한 고통을 유도하여 또 다른 고통, 즉 평범한 일상의 고통을 제거한다. -49쪽








만약 어떤 느낌이 너무 고통스럽고 괴롭다면, 감정표현이 금지되거나 성욕이 억제된다면, 유일한 대안은 긴장을 끌어올려 가두어버리는 것뿐이다. 이 과정은 다치기 쉬운 자아 주위에 신체적 방패를 만들어내어, 즐거움에 둔감해지는 대신 고통에 대한 방어력을 준다. -51쪽







흥미롭게도, 중국의 신경쇠약 환자와 미국의 만성통증 환자는 서로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 이들은 병이 잘 낫지도 않거니와 의료진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주는 문제적 환자로 취급당한다. 침술과 전통 약초는 물론 현대 의약품 모두 신경쇠약에 거의 효과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는 어쩌면 모든 의료 시스템이 치료하기 힘든 만성질환의 한 부분을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126쪽


우연히 연달아 읽게 된 책들이 같거나 비슷한 내용을 이야기할 때가 있다.

'감정이 신체적 결과를 낳는가?'

비비언 고닉이 인용한 조앤 디디온의 에세이나 올리비아 랭의 글, 원인모를 통증에 시달리는 환자를 추적관찰한 아서 클라인먼의 글에서는 그렇다고 한다.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심인성, 신경쇠약, 스트레스 같은 증상이나 질환이다.

가까이에서는 엄마가, 일터에서는 생활노인이 그런 특징을 보인다.

엄마는 예민하고 완벽한 성격때문에 늘 위장병을 달고 살았는데, 스트레스의 원인이 해결되고 나자 별다른 치료를 받지 않았는데도 증상이 사라졌다.

내가 모시고 있는 어르신 한 분은 뭔가 못마땅하면 혈압이 오르는데 언짢은 기분만으로 최대혈압을 190까지 올릴 수 있다. 그것도 단번에.

그 어르신을 보면서 며느리가 못마땅하면 머리에 흰 띠 두르고 드러눕는 드라마의 시어머니 같다는 생각을 했다.

상대의 죄책감을 유발하여 자기 뜻을 관찰시키려는 의도.


이 책들을 읽으면서 불편하고 외면하고 싶은 감정이 팽만할 때 차라리 신체의 고통을 선택함으로서 마음의 불안, 분노, 좌절을 잊어버리고자 하는것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신체의 고통이 찾아오면 그 고통에 집중하느라 감정의 괴로움을 잊을 수 있다.

그래서 갑작스런 편두통이나 치솟는 혈압, 원인을 알 수 없는 몸의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은 꾀병이 아닌가 의심받고, 질병을 치료하려는 의료진을 좌절시킨다.


해결방법이 있을까?

뻔한 이야기지만 나 자신에게서 찾아야할 것 같다.

그런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 해소되지 않는 불안이나 분노를 가진 나를 이해하고 책망하지 않는 것.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게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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