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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찾다가 띠지를 모아놓은 봉투를 발견했다.

책의 아래쪽을 감싸는 띠지는 책을 읽을 때는 불편해서 따로 빼놓는데 다시 끼워두지 않았나보다. 띠지만으로는 어떤 책인지 가늠하기 어려워서 바코드를 읽어야했다.몇 권은 팔아버렸는지 보이지 않아 띠지도 버려야했지만 대부분은 남아있어서 다시  끼워두었다. 그러면서 보니 읽지 않고 꽂아둔 책이 참 많다.


샀던 시기에 읽어야했던 책들이 많다는 것은 내가 그 나이때 필요한 책을 잘 산다는 것이고, 이제는 읽어 무엇하리 생각하게 된 책이 많아졌다는 건 그만큼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뜻이겠지. 사정이 생겨서 모아놓은 책들을 더 이상 읽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가 요즘 걱정거리 중 하나다. 그러면서도 계속 책을 사고, 쌓아두기만 한다.


그러나 어머니와 여러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나이와 신체적 취약성이 형틀, 사슬, '감옥'을 구성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미약하다해도 그것들은 운명으로부터 탈주할 힘, 거기서 벗어날 힘이었던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린다. 의지는 있지만, 권력은 없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할 수 없기에, 더 이상 원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 29쪽


원치 않지만 타의로(자식들의 의지로) 요양시설에 가게 된 어머니와 나눈 대화에서 디디에 에리봉은 어머니의 절망을 깨닫게 된다. 그 깨달음은 어머니의 절망과 같지 않다. 같을 수가 없지. 요양원에서의 삶이 얼마나 절망스러운지 읽는 것이 고통스럽다. 자율성의 상실은 노인의 욕망을 '더 이상 원하지 않게' 만든다.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요양원 안에서도 개인의 삶이나 욕구가 완전히 말살되지는 않는다. 각자의 성격, 살아온 과정에 따라 개성이 살아있다.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제한된 자원안에서 최대한 자기 것을 챙기려는 노인들의 욕심이야말로 끝까지 삶을 놓치지 않고 사랑하려는 그들의 몸부림이기에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다만 요양원에 들어올 때의 그 마음만은 헤아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쩔 수 없이 요양원 생활을 받아들여야 하는 노인들의 처지를.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그전에 어머니는 '내 집'에 있을 때 그녀의 것이었던 세계와 단절되었고, 그것을 채 애도하지도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과 사귀는 법을 배워야했고, 심지어 식사 시간 동안만이라도 전연 관계 맺고 싶지 않는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는 법을 익혀야 했다. -71쪽

 

우리는 집으로 되돌아가길, 혹은 진짜 자기 집을 되찾길 기다리며 다소 긴 기간 동안 임시 체류하러 요양원에 들어가지 않는다. 아니! 영구히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죽을 것이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어디서 인지는 안다. - P60

우리는 여기서 지적 접근이 개인의 생애사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명시적으로 가정하는 셈이다. 엘리아스와 보부아르의 책은 그들의 삶에서 무언가 흔들린 순간, 혹은 흔들리려한 순간 태동했다. 그들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그들의 시선 전체가 변화한 것이다. 그들은 사람과 사물을 다르게 경험하기 때문에 다르게 본다. - P264

보부아르는 자신이 ‘늙은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왜 ‘우리‘라고 말하지 않는지 자문하지 않는다. 그녀는 쇠약해지고 의존적인 고령자들이 어떻게 자기들만의 말, 자기들만의 시선, 자기들만의 삶의 주체가 될 수 있을지 자문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고령자들이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 보부아르 책의 모든 쟁점이 있다...... 그래서 보부아르는 결연히 선언한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리게 하고 싶다."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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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와 늙음에 따라오는 간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요즘 보험사 TV광고에 자주 등장하는 간병보험에 대한 이야기.

광고 내용을 보면 아버지 간병에 지친 딸, 시어머니 간병으로 힘들어하는 며느리가 나온다.

늙은 남자는 아내, 딸의 일상을 지켜주기 위해 간병보험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간병이 대부분 배우자(아내), 딸, 며느리 차지임을 감안하더라도 맘이 불편한 광고다.

광고의 목적은 상품판매이고 미래의 불안을 조장하는 것은 판매에 도움이 된다.

광고에 가치나 윤리를 더해야 한다는 주장이 부당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늙은 남자의 간병인이 (당연하게도) 아내, 딸, 며느리라는 건 부당하다. 

그리고 그게 개인이 (사보험으로) 부담해야만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노화, 질병, 장애에 따른 자기 통제력의 상실이 불안을 넘어 공포스럽게 느껴지는 건 보험광고의 호들갑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혐오, 배제, 차별과 연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은교'에서 노老작가의 말처럼 젊음이 상이 아니듯 늙음은 벌이 아니다.

누구나 늙는다. 그리고 늙음은 벌이 아니다. 

돌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므로 돌봄을 받는 것이, 또 돌보는 것이 형벌처럼 느껴지지 않게 제도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나에겐 오면 안 되는 일이라는 위치를 벗어나 협력과 연대로서의 돌봄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들 등을 톡톡 두드리며 여기 좀 돌아보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돌봄에 관한 모순된 심리 기제를 깨고 공론화로 나아갈 수 있다. -돌봄과 인권, 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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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키가 작아서 종합병원 성장클리닉에 애를 데리고 다니는 이가 있다. 성장호르몬이 적게 분비되는 ‘병‘이라서 호르몬을 주사해야 한단다.
잘 안먹고, 편식하고, 예민해서 잘 자지 못하니 크지 못한 것 아니냐고 하니 본인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한다.
키가 크지 않는 것이 병이 되어 치료해야 할만큼 절박한 이유를 물었더니 아이가 작으면 학교에서 괴롭힘을 받을 위험이 커진단다. 큰애도 얌전한 편인데 덩치가 커서 애들이 괴롭히지 않는다고.
참 뭐라 할 말이 없다.

긴 것이라고 해서 ‘남아돈다‘고 생각하지 않고, 짧은 것이라고 해서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해서 이어주면 오리는 근심에 빠지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해서 잘라내면 학은 슬픔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태어나기를 긴 것은 잘라내야 할 것이 아니고 태어나기를 짧은 것은 이어주어야 할 것이 아니니, 근심을없앨 이유도 없는 법이다.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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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딸이 놀러왔다.

아이들과 모두 같은 도시에 사는데 재주(?)가 좋아 분가를 시켰다.

'근황토크'를 하는 중에 딸이 '해야하는데'라는 말을 계속하기에 뭘 그리 열심히 사냐고 했다.

딸 말이 요즘 젊은 사람들은 '갓생'살기에 열심이라고 한다.

직장에서 온 몸을 불사르고는 집에 오면 에너지가 소진돼 늘어져 먹고 자고 출근하는 삶이 아니라, 새벽에 일어나 '미라클모닝'을 하고, 운동도 하고, 외국어 공부도 하는 등등 자신을 위한 삶을 산다는 거다.

뭔가 와~ 대단한데? 가 아니고 그렇게까지? 라는 생각이 든다.

그처럼 '나를 위한 삶'에 온 힘을 쏟으며 사니까 연애를 해도, 결혼을 해도, 애를 낳아도 나와 애인, 나와 배우자(및 그 주변사람), 나와 아이의 이익이 계속 충돌하는 걸까?

주변에 손주 키우는 중년여성이 몇 있는데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결혼한 자식들이 육아를 너무 힘들어 한다는 거다.

할머니가 되면 당연히 손주를 봐줘야하는 상황이 된단다. 그 할머니가 일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말이다.

항상 내가 흥분하는 부분은 그 '당연하다'라는 거다.

아무리 부모 자식간이라도 당연한게 어디 있담. 


이야기가 이리 저리 튀다 보니 딸이 좋네, 아들이 좋네, 까지 흘러갔는데 사람들마다 그 의미는 다르겠지만 내 경험을 미루어 짐작하자면 '딸이 좋다'라는 의미는 왠지 가스라이팅인 것 같다.

내 엄마는 딸들을 키울 때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은 분이었는데 말년에 딸들이 가까이에서 부양을 열심히 했더니 딸들 덕에 산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물론 그런 입에 발린 말에 감격할 나이는 지났기땜에 그런 소리를 듣는다해서 온몸을 바치지는 않는다.

그냥 도리를 다할 뿐.

갓생도 좋다만 내 인생이 소증한 만큼 가족이나 다른 사람의 인생도 소중하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부모가 나를 잘 돌보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한다면, 내가 내 자식을 잘 돌보는 것도 당연하다. 

내 부모가 내 자식을 돌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돌봄은, 특히 혈연을 돌보는 것은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든 일이다.

어머니를 돌보느라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는 딸이 있다.

딸 앞에서는 걷지 못한다며 자기 옆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어머니가, 혼자서는 걸을 수 있다.

엄마의 모든 요구를 받아주던 딸은 휠체어를 탄 엄마를 도로 한가운데 두고 가버린다.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지 못하고 타인, 특히 혈연을 끌어들이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기 힘들다.

돌봄을 받는 일은 자신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상대에 대한 지배가 되어서는 안된다.

어른이 된다는 것, 성숙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어렵다.


혈연을 넘어서 신에게까지 가스라이팅을 당하다니.

돈도 없고, 이쁘지도 않은데다 나이까지 많은 여성은 잘 살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것일까.

사는 것에 그런 자격이 필요한가.

네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는 네가 간절히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설교를 들으며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열심히만 하면 복을 받고 잘 살 수 있다면 신이 왜 필요한가.

아픈 이모를 내팽개치지 못하고 끝까지 돌본 결과가 돈 없는 알콜중독자 노처녀라면 어디다 책임을 물을 수 있나. 

잘 못 사는 것이 내 탓이 되지 않으려면 결국 나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요즘 '갓생'을 추구하는 젊은 사람들이 현명한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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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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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입한 시립도서관에서 11월부터 회원에게 교보문고 전자도서관에서 전자책을 무제한 다운 받을 수 있게 해준다. 예산 소진시까지라는 단서가 있긴 하지만 이게 왠 떡이냐.
소설을 잘 읽지 않으므로 아는 작가가 많지 않은데 전자도서관 상단에 떠 있길레 다운받았다.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데 나무의 일생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나무의 수령은 대체로 길기 때문에 나무는 몇 백년에 걸쳐 주변의 변화를 묵묵히 보아 넘긴다. 마을이 생겼다 없어지거나 사람들이 늙어서 죽는 것을 보고, 전쟁도 겪고.
내가 사는 동네도 원 마을이 없어지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곳인데 군데군데 공원에 당산나무들이 있다. 그 나무들을 볼 때마다 그 책 생각이 났고 저 나무들도 마을이 생기고 사라지고 애들이 태어나고 노인들이 죽는 것을 다 봤겠구나 생각했었다. 작가의 말을 보니 작가도 그런 생각을 했었나 보다. 나 같은 사람은 생각만 하는데 소설가는 그걸 소설로 풀어내는구나.
4대에 걸쳐 내가 선택한 적이 없는 운명을 대하는 여자들의 이야기. 그냥 감수하거나, 증오하거나, 이유를 찾는다. 같은 운명에 처해 있는 것 같지만 각자의 상황은 다르다.
인간의 삶이 그렇다. 각자 감당할 몫이 있고, 사는 방식도 다르다. 작가는 환멸과 절망이 가득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각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고 말하는 것 같다. 수퍼맨처럼 세상을 구할 수는 없어도 네 옆의, 네가 구할 수 있는 한 사람, 단 한 사람은 있다고. 그게 중요한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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