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의존적이다. 기계에 의존하며 무엇보다 대상에의존한다. 매번은 아니더라도 많은 경우 사진사가 하는일은 대상을 프레임 안에 넣고 의도한 시간만큼 셔터를열어두는 일뿐이다. 길에서 웃고 있는 아이를 찍으면 길에서 웃고 있는 아이의 사진이 나온다. 아이가 웃지 않는데 웃는 아이의 사진을 찍을 재간이란 없다. 이런 의존성은 사진사로 하여금 대상을 관찰하고 장면의 의미에 대해 사고할 것을 요구한다.
특정 대상과 장면이 발산하는 시각적 힘을 알아채는일은 어떤 경우 쉽고, 어떤 경우 쉽지 않다. 둘은 뒤섞인다. 어떤 장면은 찍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한다. 어떤 장면은 찍을까 말까 망설이게 한다. 눈으로 느낀 힘이 사진으로도 이어질까? 늘 그렇지는 않다는 데 사진의 어려움과매력이 있다. 봤을 때 근사했으나 사진으로 담고 보면 실망스러운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정반대도 부지기수다.연습은 예견을 가능케 한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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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욕적이다. 누군가 고통받는 장면에 사진기를 들이대는 행위는 아무리 좋게 보아주려고 해도 추악하다. 모욕은, 고통받는 사람만 치르는 것일까. 찰칵대는, 그리하여 그 고통을 ‘볼만한 것, 아니 볼 것을 촉구하는 것으로만들려는 사진사에게도 그 순간은 모욕적이다. 스스로비웃게 된다. 힐난하게 된다. 자책의 늪에 빠진다.
누군가 ‘찍히는 모욕‘을 견딘다. 누군가 ‘찍는 모욕‘을견딘다. 비로소 누군가의 눈에 사진이 배달된다. 누군가는 (찍히기를/찍기를, 알려지기를/알리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이다. 모욕 따위 생각할 겨를마저 없었을지 모른다. 그 땅에 살기 위하여. 한데 그런 절박함이 모욕을 없던 일로 만들어주는가. 모욕은 즉각적인 것만은 아니다.
더한 치욕은 시간차를 두고 찾아온다. 두고두고.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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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란 언제나 처음이다. 하지만 누적된 처음이다. 현재에서 과거를 돌아본다는 건, 원치 않을지라도 미래를 짐작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밀양이라는 현재는 대추리라는 과거가 예언한 미래였다. 이대로 밀양이 과거가 될때, 우리가 마주할 미래는 무엇일까. 저곳의 파괴는, 이곳의 파괴로 돌아온다. - P114

‘보는 것‘이 곧 일인 내게, ‘볼거리‘가 많다는 것은 어쩌면 축복이리라.
나의 ‘보는 일‘은 목격일 수도, 응시일 수도, 관찰일 수도, 방관일 수도 있는데, 펼쳐진 장면의 성격에 따라 나의 ‘보는 태도‘
와 ‘보는 방법‘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시각이란, 그저 보는 것만은 아니다. 시각이 인간의 감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감각으로 자리 잡은 이유는, 사고의 근간이 되는 정보가 시각을 통해운반되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점점 더 시각 정보에 의존하는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그저 바라볼 뿐이라 말할 때도 있지만,
그것마저도 사실은 그저 바라볼 뿐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타자라는 풍경을 바라본다. 타자는 나를 비추는 오묘한 거울을 가진 자다. 그러니 그저 바라볼 뿐인 행위란, 실로 불가능할수밖에나는 본다. 
어떤 풍경은 보고 싶어서 보고, 어떤 풍경은 보기싫지만 본다. 대체로 눈을 감지는 않는다. 눈을 뜨는 것이야말로 너의 일이라 타이르면서. - P88

그 한 문장이 며칠째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쁜 끝은없어도 착한 끝은 있다. 그 말씀을 읽는 방법이 여럿일것만 같았다. 어머니는 ‘착함의 좋은 끝‘을 말하였으나,나는  ‘착함의 한계‘를 생각했다. 사람의 착함엔 한계가있다. 사람의 나쁨엔 한계가 없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건 결국 나쁜 짓이 아닐까.
악마라 불러도 좋을 자들을 볼 때마다, 저것이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사진으로 수집해온 건 그런‘사람의 짓거리‘였다. 정말이지, 나쁜 짓들은 볼거리를제공한다.
때론 착함을 본다. 힘겨워진다. 저 사람은, 사람이 싫어서 저러는구나. 사람됨을 거절하는구나. 곧 넘어지겠지, 결국 무너지겠지. 착함이란 바스러지기 쉬운 거니까.그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아파 까무룩 잠이 든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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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귀환‘은 역사철학의 고민이기도 했다. 죽은 자는 왜귀환하는가. 산 자들이 그들의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않았기때문이다. 전두환의 돈을 숨겨주고 그를 기리는 기념 공원을만드는 사회, 지역 발전을 위해 항쟁의 기억을 지우려는 사회,
여전히 빨갱이 폭도를 들먹이는 사회에서 빛고을 영령은 제대로 배웅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귀환한다. 기억 투쟁의이름으로, 인정 투쟁의 이름으로.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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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격 - 필연의 죽음을 맞이하는 존엄한 방법들에 관하여
케이티 엥겔하트 지음, 소슬기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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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을 때까지 살 수 없는 경우를 줄이기 위해 의학이 발달해왔다고 생각했다.

의사의 역할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고.

이 책을 읽고 난 지금, 잘 모르겠다.

병이 나을 희망이 없고, 심신의 고통이 너무 심하고, 내가 내 몸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을 때 목숨을 더 이어가기를 포기한다는 것에 대해서.

치매 환자를 매일 보면서 내가 치매에 걸렸을 때를 생각하면 결정은 더 쉬웠다.

저런 상황을 맞기 전에 삶을 끝내야겠다. 나를 위해서 또 가족을 위해서.

그런데 오히려 이 책을 읽으면서 그게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삶도 죽음도 선택할 자유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치료나 돌봄을 받을 수 있다면 고통스러운 상황을 일시에 끝내버릴 생각을 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책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미국처럼 보편적인 의료에 접근할 권리를 보장하지 못하는 국가에서는 조력자살(의사조력사, 안락사, 존엄사...)을 허락해서는 안된다고.

재정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필요할 때 필요한 의료적 처치나 돌봄을 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 같지만 결국 타의에 의해 죽음에 내몰리게 된다는 것이다.

살고 싶지 않을 때 죽음을 내가 선택할 수 있고, 죽는 방법을 안내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죽는 것까지도 뭔가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죽는 것에도 품위와 존엄을 위해 돈을 써야 한다는 것이며, 아무나 그 죽음의 방식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 씁쓸하고 어쩌면 그 모든 것이 인간의 오만함이 아닌가 싶다.

읽는 중간 중간 한숨이 나고 답답했으며 생각할 것이 많아지고 복잡해지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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