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판 기행 - 고개를 들면 역사가 보인다
김봉규 글.사진 / 담앤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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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사람이 태어나면 이름을 지을 때 신중을 기하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선조들은 건물의 이름을 짓는 데에도 깊은 의미를 두고, 글씨에도 온갖 정성을 모았다. 이렇게 정성들여 올린 현판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그 건물의 얼굴과 같은 역할을 한다. 여행을 다니며 사찰, 누각, 고택 등에서 만나게 되는 “현판(懸板)”은 해당 건물의 성격과 특색 등을 함축하고 있어 글자의 의미와 서체를 한참 눈여겨보게 된다.

 

예전에 지리산 천은사(泉隱寺)에 처음 갔을 때, 물이 흐르는 듯 부드러운 필체의 현판이 눈에 띄었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샘이 숨어있다’는 이름이 상징하듯 천은사는 수기(水氣)가 약해 유달리 화재가 많았는데, 현판의 글씨를 수체(水體)로 써넣은 뒤로는 더 이상 화마의 피해가 없더라는 이야기다. 이것이 바로 조선 후기 명필로 유명한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로, 그의 글씨는 전국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다. 특히 해남 대흥사의 ‘대웅보전’은 추사 김정희와의 일화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렇듯 여행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현판에는 종종 재미있는 일화들이 얽혀있다. 해서체(楷書體)로 반듯하게 쓰여진 글자들은 그럭저럭 읽지만 흘림이 심한 초서(草書)를 만나게 되면 긴가민가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현판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추사 김정희, 원교 이광사, 일중 김충현 등의 글씨는 눈에 익어 가지만, 수많은 현판에 얽힌 뒷얘기는 놓치기 십상이다. 그래서인지 현판을 볼 때마다 아쉽고 궁금할 때가 많다.

 

<현판 기행>은 독자들의 그런 궁금증과 아쉬움을 풀어주는 책이다. <한국의 혼, 누정(樓亭)>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던 저자는 이번 책에서 고건축의 현판을 집중해서 다루었다. 그는 주로 영호남 지역의 고건축들을 위주로 ‘정자와 누각’, ‘서원과 강당’, ‘사찰’ 등으로 분류하여 현판의 글씨와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책에 소개된 현판들은 안동 봉정사 덕휘루(만세루), 진주 촉석루, 안동 도산서원,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완주 화암사 극락전, 구례 천은사 일주문 등 우리가 여행길에 쉽게 만날 수 있는 현판들이다.

 

무심코 지나쳤던 현판들을 관련된 이야기와 함께 천천히 되새겨보게 되는 것은 이 책의 큰 장점이다. 현판에 대해서는 대개 고건축을 얘기하며 짧게 지나갔던 것을 저자는 “현판”만 따로 떼어내어 집중 조명하였다. 책을 읽다 보면 수려한 글씨로만 보았던 현판 속에 담긴 선조들의 사상과 의식을 엿보게 된다. 여행에 앞서 그 곳에 있는 현판에 대해 미리 알고 간다면 여행의 의미와 내용은 더욱 충실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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