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 어느 책방에 머물러 있던 청춘의 글씨들
윤성근 엮음 / 큐리어스(Qrious)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80, 90년대에는 책 선물을 주고받는 일이 흔했다. 그리고 그 책의 표지 안쪽에는 으레 손글씨로 메모가 곁들여있는 경우도 많았다. 메모의 내용은 저마다 제각각이었지만, 따뜻한 정과 넘치는 감성은 공통적이었다. 때로는 삐뚤빼뚤한 글씨에 치기어린 내용이었어도, 그렇게 메모를 전한 이들은 누구라도 다 시인이고, 수필가였다. 생일이거나 기념일이거나 혹은 아무 날도 아닌데, 그냥 그렇게 주고받았다. 그게 좋았다.

 

요즘도 책 선물을 하기는 하지만, 예전만큼 많지는 않다. 더구나 책에 메모를 써서 주고받았던 일은 기억에 가물가물할 만큼 오래된 것 같다. 그래서인지 헌책방에서 어쩌다가 메모가 쓰인 헌책을 발견할 때면 괜스레 정이 더 간다. 헌책방 순례는 오랜 취미이기도 하고, 요즘은 특히 품절이나 절판 책을 사느라 헌책방 걸음이 잦은 편이다.

 

그러면서도 본문에 줄이 많이 쳐져있거나 낙서가 있는 책은 좀 피하게 된다. 하지만 책갈피의 영수증이나 안쪽 표지에 있는 메모를 발견할 때면 한 번 더 눈길이 머물게 마련이다. 익명이기는 해도 그 메모가 마치 추억의 한 자락 혹은 시간의 파편인 듯 느껴져서 그런가 보다.

 

요즘 사는 헌책에도 그런 메모를 종종 만난다. 얼마 전에 샀던 시인 고은의 <절을 찾아서>에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정이 넘치는 메모가 쓰여 있었다. 한번은 친구가 구해준 헌책에 나와는 동명이인인 사람에게 주는 메모가 적혀 있기도 했다.

1997년의 메모를 지금에 읽는 것도 새롭지만, 같은 이름의 사람이, 같은 책을, 똑같이 누군가에게 선물 받는다는 것 또한 마치 평행이론의 일부처럼 느껴져 신기하기도 했다. 아마도 시간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그런 우연한 만남이 헌책의 묘미가 아닐까?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는 그런 추억의 조각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저자는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의 주인으로도 많이 알려진 이로, 헌책방을 하면서 만난 메모들을 엮어 이 책을 내었다. 저자는 헌책에 쓰인 메모들을 사진으로 보여주며 간단한 서지사항과 함께 그 메모에 대한 상황이나 감상 등을 간략하게 써놓았다.

소개된 책들은 메모만큼이나 다양해서, 메모의 주인과 책의 상관관계를 미루어 짐작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또한 읽었던 책이나 아직 읽지 못한 책, 그에 얽힌 일화들이 떠올라 잠시 생각에 빠지게도 된다. 황지우, 곽재구, 루카치, 박노해, 함석헌, 우리 시대의 소설가, 조성기, 정현종, 마광수, 밀란 쿤데라…

 

어찌 보면 책 속의 메모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다. 하지만 책이라는 매개체와 그 시대의 감성이 겹쳐져서 그것은 공감을 얻기도 한다.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메모이지만, 그 메모를 통해 우리는 그 시절의 내 모습, 어느 땐가 청춘이었던 내 모습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유독 천천히 읽게 된 것도, 그 시절의 추억을 더듬느라 그랬는가 보다. 책을 읽고 나니, 헌책처럼 정감 있고, 따뜻했던 추억 속의 얼굴들이 문득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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