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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시대의 신인류 호모 나랜스
한혜원 지음 / 살림 / 2010년 3월
절판
혹시 <소공녀>의 이 장면을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책읽기에 지루해하는 반 친구들에게 세라가 자신만의 상상력을 보태어 이야기를 만들어가자, 졸던 아이들이 눈을 반짝거리며 세라 곁으로 모여들던 장면 말이다. 이야기란 그런 것이다. ‘그렇고 그런’ 뻔한 내용이 아니라, 뭔가 새로운 상상력이 보태진 신선한 이야기, 그것이 바로 story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스토리텔링에 대한 책이다.
사실 이 책은 디지털 스토리텔링을 연구하는 전문 연구자의 책이다. 그렇다보니 ‘나도 스토리텔러나 해볼까?’하는 가벼운 생각으로 집어 들기에는 조금 무게감이 있다. 그러나 전문적인 스토리텔링에 관심을 갖고 그 분야에 동참하려는 생각이 있다면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 책에는 전문용어도 많고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광고 등을 다양한 장르를 언급하고 있어서,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구성이 산만할 수도 있다. 그래서 처음 접하는 이는 어리둥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 스토리텔링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이해해야할 부분이다.
우선, 이 책에서 말하는 ‘호모 나랜스’나 ‘스토리텔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디지털 미디어가 이제까지 인쇄 · 출판을 통해 우리가 접한 작품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저자의 말처럼, 디지털 미디어는 변화(divergence, 분화)와 융합(convergence)을 거듭하는 살아있는 존재이다. 이는 작가 1인에 의존하여 생산되고 완결되어진 기존의 작품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저자가 영국의 구비설화를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낸 J.R.R.톨킨과 조앤롤링에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다. “기존에 알고 있는 이야기를 새롭게 창출해내는 사람”이 바로 스토리텔러이자 ‘호모 나랜스’이다.
호모 나랜스(Homo narrance)라는 용어는 라틴어로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영문학자 존 닐(John D. Niles)의 <호모 나란스(Homo narrance)>(1999)에서 유래한 신조어이다. 존 닐의 책에서는 블로그, 트위터, UCC 등을 예로 들며, ‘이야기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룬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은 연구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책이다보니, 일반인에게는 용어 설명이 없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호모 나랜스나 MMORPG(me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playing game) 등과 같은 용어는 최소한 한 번쯤 설명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마 연구자에게는 일반화된 용어이다 보니 굳이 설명할 필요를 못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호모 나랜스>라는 제목 때문에 저자의 새로운 용어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나도 찾아보기 전까지는 잠깐 착각했으니까. 신조어를 제목으로 쓸 정도였으면 용어를 만든 사람인 존 닐에 대한 언급이 당연히 한 번쯤 있었어야 하는 것이 연구자의 기본이었을텐데, 그 부분은 좀 아쉽다. 더구나 참고문헌에도 없는 것은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저자는 일본, 영국을 예로 들며 섬나라인 그들 나라의 경우, 기담과 괴담이 발달했다고 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지난 100년의 역사 당면 과제 등에 의해 리얼리즘에 고정되어 있어 판타지, 추리, SF 등은 비주류로 밀려났다고 한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저자는 우리나라의 작품에 대해서는 별반 다루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 부분도 논의의 여지는 있다.
이 책은 읽는 사람에 따라 전혀 새로운 이야기일 수도 있고, 이미 많은 분야에서 논의된 이야기들을 정리차원에서 한 번 더 훑고 지나가는 책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나름의 의미는 있겠다. 책을 읽다보면 스타벅스, 드라큘라, 다빈치코드, 샤넬, 던전앤드래곤 등 우리가 일상에서 많이 접하는 다양한 콘텐츠를 예시하고 있어 공감도 되고 재밌기도 하다. 하지만 그 예들이 대부분 외국의 예에만 편중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대장금>, <바람의 나라>, <왕의 남자>(연극 <이(爾)>) 등등 우리나라에도 이미 수많은 문화콘텐츠들이 스토리텔링에 의해 생산되고 작품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다루어 주었다면 훨씬 더 공감되는 바가 컸을 것이다.
앞으로 이러한 우리의 문화콘텐츠들을 소재로 하여, 더욱 체계적이고 풍부한 이야기를 깊이 있게 전달해줄 수 있는 새로운 연구서가 나오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