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7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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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걸리버 여행기라고 하면 여전히 온몸은 물론 머리카락까지 올올이 밧줄에 묶여 누워있는 걸리버의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거인걸리버의 몸에 사다리를 걸쳐놓고 올라와 있는 소인국 사람들의 모습도. 어릴 적 동화책에서 보았던 이런 모습들은 당시로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소인들의 나라, 거인들의 나라라니! 걸리버 여행기에 그려진 소인국과 거인국의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걸리버가 여행한 나라는 그 뒤에도 더 있었지만, 소인국과 거인국의 인상이 너무나 강렬해서 야후나 다른 나라들의 여행기는 사실 기억에 크게 남지 않았었다.

 

그런 걸리버 여행기를 최근에 다시 읽었다. 어른이 되어 다시 읽은 <걸리버 여행기>걸리버 여행기가 이런 내용이었나?’ 싶을 정도로 전혀 새로운 책이었다. 어린아이의 눈에는 그저 소인국과 거인국이라는 상상 속의 나라가 신기했을 뿐이지만, 다시 읽은 걸리버 여행기는 인간 세상에 대한 풍자와 아이러니, 페이소스(phatos)가 가득했다. 어렸을 때 읽은 걸리버 여행기의 후반부가 앞부분에 비해 상대적으로 재미없고 조금 지루하게 느껴졌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 세상의 허세와 아집 등 온갖 단점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라퓨타나, 더 나아가 인간의 탐욕스럽고 더러운 본능까지 다 드러낸 야후의 세계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으니까.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나니 어찌 보면 소인국 릴리펏(Lilliput)과 거인국 브롭딩낵(Brobdingnag)3, 4부에 나오는 라퓨타(Laputa)와 여러 나라들, 결정적으로는 말의 나라인 후이늠(Houyhnhnm)국을 이야기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소인국에서 거인국을 거쳐 다른 나라들을 여행하는 순서 또한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작가의 치밀하고도 당연한 여행 순서라는 것을 알았다. 거인이 된 자신의 힘과 능력에 으쓱했던 걸리버는 거인국에서는 반대로 소인이 되어 자신의 무력함과 보잘 것 없는 자기 존재를 깨닫게 된다.

 

뒤이어 방문한 떠다니는 섬 라퓨타에서 걸리버는 오이에서 햇빛을 추출하려는 연구자, 얼음을 태워 재로 만든 뒤 화약을 생산하려는 계획자, 대화에 필요한 사물을 모조리 지참하고 다니는 현인들을 만난다. 그중 압권은 제자들에게 미리 조작된 나무 조각 틀을 돌리게 한 뒤, 거기에서 나온 단어들을 조합하여 책을 내는 교수였다. 그런 방법으로 어떤 책이라도 쓸 수 있다고 하는 교수는 대중 기금을 모아 더 많은 나무틀을 만드는 데 관심을 둔다. 엉뚱하다 못해 기괴한 이들의 모습은 당시에 저자가 느꼈던 학자, 교수, 정치인의 일면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걸리버가 여행 중에 겪는 사건들이나 정치인이나 변호사에 대한 풍자 등은 작가인 조나단 스위프트의 개인적인 경험도 일부 연관이 있다. 스위프트는 당시에는 병명이 알려지지 않았던 메니에르병을 앓았는데, 때문에 정신병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받았다고 한다.

스위프트는 책에서 걸리버의 여행기에만 집중할 뿐, 영국에 남아있는 걸리버의 아내에 대한 묘사는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이와 함께 후이늠국에서 자신을 보고 본능적으로 달려드는 여자 야후에 대해 공포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걸리버의 모습에서 어쩌면 작가인 조나단 스위프트가 무성애자이거나 성적 장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데, 조지 오웰 역시 그 점을 지적했다 하니 역시 괜한 짐작은 아니었던가 보다.

 

작가 조나단 스위프트는 소인국과 거인국을 거치면서 걸리버라는 한 인간의 나약함을 차츰 깨닫게 한 뒤, 허세와 거짓, 궤변으로 가득한 라퓨타에서 인간 세상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문한 말의 나라 후이늠국에서 인간은 결국 야후라는 더럽고 탐욕스러운 짐승으로 전락하고 만다. 걸리버는 자신은 야후가 아니라고 끝까지 부정해보지만, 결국에는 자기 역시 어쩔 수 없는 야후였음을 깨닫고 만다. 그는 거짓과 위선 같은 부정적인 단어는 아예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나라 후이늠국에서 평생 머물고 싶어하지만, 야후인 그는 결국 추방 아닌 추방을 당하고 만다. 인간에 대한 실망과 혐오로 가득해져 집으로 돌아온 그가 가족마저도 외면한 채, 말인 후이늠을 끌어안고 우는 모습은 인간 자신에 대한 페이소스를 그대로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사족 하나. 한 가지 눈에 띈 것은 라퓨타의 지도에 ‘Sea of Corea’라는 선명한 이름이었다. 천공의 섬 라퓨타를 만든 일본도 분명 이 지도를 보았을 텐데 왜 독도에 대해 그런 억지를 부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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