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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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 한 일간지에 소개된 그의 책 「갈팡질팡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를 읽은 후, 난 그를 당장에 내 오마주로 삼아버렸다. 이후 첫 소설집 「최순덕 성령 충만기」를 당장에 사 보았고, 한국일보에 하루에 한편씩 꾸준히 연재하고 있는 한토막짜리 글도 부러 챙길 정도로, 그에 대한 내 충성도는 꽤 깊은 편이다.


그는 결코 있을 법 하지 않은 캐릭터와 상황설정으로 이야기를 창조해 나가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를 박민규 등과 더불어 ‘21세기 한국문학의 새로운 작가군’으로 분류하는 까닭 역시 여기에 있는 것으로 안다. ‘2차적’ 현실세계를 워낙 재미있게 그려내 그의 글은 매우 쉽게 읽힌다. ‘죽죽’


그러나 그의 글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미덕은 중간 중간 ‘턱’ 하고 걸리게 만드는 대목에 있다. 이번 소설집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나쁜 소설 - 누군가 누군가에게 소리내어 읽어주는 이야기」부터 살펴보자. 선뜻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바로 ‘형식의 파괴’다. 이 소설에서 그는 직접대화체를 통해 독자들에게 말을 건다. “자, 좋습니다. 이 소설은 저 위 부제처럼 누군가 누군가에게 직접 소리내어 읽어주도록 씌어진 소설입니다.”(p.9) 색다른 화법에 당황한 독자들에게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해 설명해주는 배려 또한 잊지 않는다. “소설을 읽어줄 사람은, 소설은 듣는 사람 머리맡에 바싹 붙어 앉는 것이 좋습니다.”(p.11) 이제 그의 소설은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귀로 듣는 게 된다. 이제 그가 진행하는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 ‘죽죽’ 듣기만 하면 된다. 그러다가 ‘턱’ 하며 걸린다. “주위를 둘러보세요. 자,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이런....역시 그랬던 거군요....당신은 역시 거기, 도서관 자료실에 앉아 있었던 거군요. 당신 주위엔 마음 편히 소설을 읽어줄 만한, 그런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거군요. 불쌍한 사람, 내 한 걸음에 달려가 소설을 읽어주고픈, 당신. 쓸쓸한.”


「갈팡질팡」의 두 번째 꼭지,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역시 그러하다. ‘흙’으로 만드는 가정식 야채볶음이라니… “오늘의 요리는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이 되겠습니다.”(p.47)하며 우리에게 있을 리 만무한 음식을 소개하는 화자. 그리고 화자의 야채볶음흙의 유일한 시식자 명희. 이런 말도 안 되는 캐릭터로 이야기를 ‘죽죽’ 끌고 나가는 작가는 중간 중간 다음과 같은 말을 건넨다. “저와 명희 사이에도 그 조미료 같은 사람들이 끼어들었죠. 저와 명희 사이에 조미료를 뿌리지 못해 안달난 사람들. 저와 명희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춰 세상 모든 것을 요리하려 드는 사람들 말입니다.”(p.81)


‘거의 연락이 없었던 사이였’(p.106)던 중학교 동창이 운영하는 룸살롱 ‘토지’에서 친구의 꾐에 빠져 술을 먹은 후, 박경리 선생을 찾아가는 주인공의 이야기, 「원주통신」. 부잣집 딸이 운전하는 차를 향해 맹렬히 돌진하기로 작정한 진만과 시봉의 이야기, 「당신이 잠든 밤에」. 밤마다 국기게양대에 몰래 올라 국기를 떼어 자신의 생계수단으로 삼는 시봉과 국기게양대를 사랑해(국기가 아니다. 국가는 더더욱 아니다) 매일 게양대의 스테인리스 봉에 오르는 사내의 이야기, 「국기게양대 로망스 - 당신이 잠든 밤에2」. 세상과 두절한 채 소설을 쓰다가 지구가 방사능 사고에 노출됐다는 사실 조차 모르는 소설가의 이야기, 「수인」. 할머니가 들려주는 한국전쟁의 비극, 그 속에 감춰진 할머니의 상처입은 과거, 상처를 씻어주기로 작정한 손자의 이야기, 「할머니, 이젠 걱정 마세요」. “근대소설은 우연으로 시작해 필연으로 끝나는 장르라고, 그게 바로 논리라고.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쓰기 전 철저하게 설계도 먼저 그려야 한다는 말도 들었다. 공학적으로, 나사못, 하나 허투루 박지 말고, 꼼꼼하게, 제목도 마찬가지로”(p.268)하며, 소설의 ‘과학성’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는 ‘근대’ 에게 ‘하이킥’을 날리는 이야기, 「갈팡질팡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들 틈틈이 박혀 있는 이기호의 ‘턱’ 때리는 한 문장을 주목하자. 그의 글재주가 선사하는 ‘재미’를 왜 곧이곧대로 넘길 수 없는가를 쉬이 알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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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 신영복 서화 에세이
신영복 글.그림, 이승혁.장지숙 엮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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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글과 서예, 그림을 모아 신영복 ‘선생님’이 ‘서화 에세이’라는 형식의 책을 내셨다. 호칭이 주는 권력의 비대칭성 때문에 저자의 이름 뒤에 ‘선생님’을 붙이는 것을 극히 삼가는 편이나 신영복 선생님은 예외로 둔다. 그의 글에는 말 그대로 ‘先生’이 가져야 할 통찰과 반성, 혜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에세이’가 본디 그러하듯, 「처음처럼」 역시 저자가 “가르치고 배우는 삶의 연쇄 속에서”(p.30) 깨달은 바를 소박하게 밝히고 있다. 여기서 소박함은 글의 분량도 그렇거니와, 경어체를 굳이 고집하시는 선생님의 태도, 소소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글의 내용 모두를 아우르는 말로 적당하다. 사실 글의 크기로만 보자면 얼핏 힘이 빠지도록 진부한 잠언처럼 보일 수도 있었으나 후덕한 인상의 書畵가 그 틈을 잘 메워 주었다. 저자 스스로의 말에 따르면 “언어의 관념성과 경직성이 그림으로 하여 조금은 구체화되고 정감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서화를 그렸다고, 배치하였다고 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알아두면 좋은 명언’이나 잠언, 교훈집 류의 글을 즐겨 읽지 않는 편이다. 그런 글들은 대부분의 경우 ‘훌륭한 말씀들’만 가득할 뿐, 세상의 불가피한 어둠엔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혹은 금욕주의가 삶을 깨우치는 유일한 방법이라 여기는 ‘종교’적 색채마저 덧칠해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글들이 우리에게 주는 깨달음이란 ‘면벽 수행 3년으로 벽을 절대로 통과할 수 없다’ 정도다. 


  설핏 해석하면 ‘뻔하디 뻔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는 신영복 선생님의 글이 위의 잠언류와 다를 수 있는 건 그가 견뎌낸 삶이 가지고 있는 진정성 때문이다. 이번 책에도 실려 있거니와, 이미 세간에 널리 알려진 ‘여름 징역살이’편을 들여다 보자.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도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 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p.135)


인간 존재의 근원적 외로움을 이보다 절절히 그린 글이 어디 있는가? 그의 글은 이처럼 자신의 ‘경험’을 진득이 녹여내 그 어떤 글보다 정직하다. 진솔하다. 저자 스스로 “경험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신념이 부러우며,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을” 여전히 배우고 싶어할 정도로 ‘경험’을 깨달음의 주춧돌로 삼고 있다.


약 200여 페이지를 통해 저자가 그려내고 있는 世間의 내용은 다양하나, 이 모두를 엮는 한 가지 방법은 ‘하방연대’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하방’에 두고, 내 주위의 것들과 ‘연대’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람 잘 날 없는 우리네 삶을 ‘처음처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한다.


‘하방연대’로 가는 길목에 곳곳에 ‘비움’, ‘노동’, ‘성찰’, ‘더불어’, 함께’, ‘관계’, ‘실천’이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지루할 정도로 익숙한 단어다. 그러나 명심할 건 우리 모두 ‘알고 있으나 행하지 못하는’ 삶의 방식들이 너무도 많다는 점이다.  결코 「처음처럼」을 익숙한 내용으로 볼 수 없는 이유다.


나만 힘든 것 같은 ‘나’에게. 너의 아픔은 내 고통 다음이라고 믿는 ‘나’에게. 언제든 삶의 선로를 바꿔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함에 잔뜩 움츠린 ‘나’에게. 신영복 선생님은 이런 ‘나’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줄탁동시啐啄同時)’한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습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습니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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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2-28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3쪽에서 인용한 시가 마음에 참 와닿습니다. ^^

로시난테 2007-03-01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신념이 명징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불안해 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지남철이야기'가 큰 울림을 주더라구요.
 
풍요한 사회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지음, 노택선 옮김, 신상민 감수 / 한국경제신문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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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풍요한 사회에 살고 있는가? ‘풍요’는 가치의 지향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누구도 이 질문에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하리라. 경제학자 존 갤브레이스 의 책 ‘풍요한 사회’(The Affluent Society)(한국경제신문)에서의 풍요(Affluence)는 경제적 의미의 풍요를 말한다. 이 책의 초판이 벌써 50여년이 됐다고 하니, 갤브레이스는 반 세기 전의 미국을 ‘풍요한 사회’로 본 셈이다. 자본과 재화의 규모에 주목해 본다면 50여년 전 미국은 이미 풍요한 사회였으며, 똑같은 잣대로 평가한 우리나라 역시 ‘풍요한 사회’임에 틀림 없다.


존 겔브레이스가 ‘풍요한 사회’에서 주목한 부분은 ‘빈곤’한 사회에서 태동한 경제학이 사회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 ‘풍요한 사회’의 분석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전 경제학의 이론이 가진 통념 그대로 현재를 해석하다보니, 그 분석이 심각한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고 지적한다. “통념의 적은 사상이 아니라 세상이 계속 변해간다는 사실이다.(p.27)”


그의 지적은 ‘불평등’에 대한 진단으로부터 시작한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불평등’이 심화되는 까닭으로 주류 경제학이 흔히 꼽는 것은 자본주의의 ’생태학‘적 특성이다. 즉 자본주의는 내재적 원리상 ’불평등‘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멜더스의 경우“국가의 자본과 생산량이 늘면 이윤도 늘어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생산이 늘면 인구도 증가한다. 따라서 필요한 식량도 늘어나기 때문에 토지에 대한 수요는 더 늘어나고, 결국 지대가 올라서 지주가 이득을 본다. 다시 말해 경제가 성장하면 자본가가 번영을 누리고, 그 열매는 지주에게 돌아가게 마련이다. 이처럼 자본주의가 발생하는 필연적인 불행은 결국 대부분 일반 대중의 몫이다."(p.43)    


불평등의 ‘합리화’는 1930년대 후반 미국 전역을 뒤엎었던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 에 의해 ‘정당성’마저 확보한다. 자본주의의 경쟁에 그에 따른 도태는 약자를 제거함으로써 훗날 사회에 득이 된다는 논리가 사회진화론의 고갱이다. 이에 따르면 ‘불평등’은 정당한 경쟁의 ‘당연한’ 결과물로 외려 칭찬받아 마땅한 것이 된다. 

 

‘불평등 문제’하면 떠오르는 학자가 바로 마르크스다. 마르크스는 이 불평등이 사회적 혁명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마르크스의 장기적인 전망은 바로 자본 집중의 심화이다. 그는 자본의 집중 현상이 진행될수록 사회자본이 점점 더 소수에 의해 지배되는 경향이 있다고 예견했다.”(p.85) 사회자본에서 소외된 자들은 자신의 발목에 묶여 있는 쇠사슬을 풀 ‘행동’을 결의한다. 그것이 바로 혁명이다. 결국 마르크스 역시 ‘불평등’은 자본주의가 배태한 어쩔 수 없는 사생아로 본 셈이다.  


현대에 와서 불평등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부쩍 줄기 시작했다.(상대적 의미에서 ‘줄었다’라는 표현을 쓴 듯 하다.) “현대에 불평등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으나, 이 원인들은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생산이 증대했다는 사실과 관련돼 있다.(p.109)” 생산의 증대는 우리에게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나게끔 했으며, 부 자체가 특권으로 인식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지나친 부의 과시는 여러 사람의 뭇매를 맞기 십상이다. 대신 이미 습득한 재산을 ‘지키고자’ 하는 욕망이 생겨난다. 자신의 몫을 뺏길 여지가 있는 것들에 대한 ‘보장’에 대해 신경을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불안요소를 제거하는 데 앞장선 것은 당장 경영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기업들이었다. 이들의 불안의 최대원인은 경쟁과 예측할 수 없는 자유경쟁시장의 가격변동이었다. 기업가들은 이런 불안요소들을 제거하거나 완화하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이들이 생각한 궁극적인 보장은 즉 한 회사가 공급과 가격 지배권을 장악하는 독점이었다. 카르텔과 법에 의한 가격 협정, 신규기업의 진입 제한, 관세와 쿼터제에 의한 보호”(p.113) 등은 이들의 몫에 대한 든든한 보험으로 작용한다.


결국 “현대에 와서 보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현대 경제생활에 존재하는 특별한 위험요소 때문이라는 통념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부의 증대로 생겨난 결과다. 즉, 가진 것이 거의 없던 세상에서 지켜야 할 것들이 훨씬 늘어난 세상으로 옮겨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불경기가 경제적 보장에 대한 관심을 자극하는 것은, 대형화재가 화재보험에 대한 관심을, 또는 홍수가 홍수예방에 대한 관심을 자극하는 것과 같다.”(p.121) 그러나 안타깝게도 “경제학자는 가격조작의 목적이 불안요소를 최소화하는 것보다는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데 있다고 보았다. 경제학자들은 이 문제만 생각했지, 불안요소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자기방어에만 몰두하는 소극적인 기업가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p.114) 바로 이 지점에 경제학자들의 잘못된 통념이 숨어 있다. ‘빈곤의 시대’에 주목받았던 ‘이윤의 극대화’라는 생산에만 이목을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존 갤브레이스는 과거 절대적 의미를 지녔던 ‘생산’이 풍요한 사회에 이른 지금까지도 ‘그 난공불락의 위상’을 여전히 과시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와 더불어 미국 특유의 ‘다위니즘적 진화론’이 더해져 이른바 상대적 빈곤층의 경제적 보장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고 비판한다. 이른바 충분한 부를 습득한 자들은 이미 예전부터 부의 손실에 대한 보험을 들어놓은 것에 반해 그렇지 못한 자들에 대해서는 경제적 보장 자체를 생산의 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경제적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금전적인 보상이라는 ‘당근’과 함께 개인의 경제적 재난이라는 ‘채찍’이 있어야 하며, 이 두 가지 모두가 꼭 필요한 요소라는 생각이었다. 경제적 보장이 늘어나면 채찍이 제거되므로 대중을 고무시키는 자극 역시 절반이 제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불안요소들이 효율을 높이고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라는 생각은 전적으로 큰 오산이었다. 경제사상의 역사에서 최대의 오산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p.124)”

   

‘생산의 기득권’이 또 다시 합리화 되는 근거는 이른바 ‘소비자 수요’가 끊임없이 창출된다는 점이다. “옛날에는 생산증대가 굶주린 사람에게 식량을, 추운 사람에게 의복을, 집 없는 사람에게 집을 제공하는 것을 뜻했다. 그런데 오늘날 생산증대란 더 우아한 고급 자동차와 색다른 음식, 멋진 옷, 세련된 오락 등 한마디로 감각적이고 부도덕하고 파괴적인 현대의 모든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을 뜻한다. 이런 욕망과 그 욕망을 충족시키는 생산을 옹호하는 경제이론은 통념에서 난공불락의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데(그리고 놀라울 만큼 아무런 도전도 받고 있지 않는데), 이는 대단히 비논리적이며 저속한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위험천만한 것이다.”(p.149)


왜냐하면, 이 소비자 욕구라는 것이 결코 소비자 개인의 소비심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외부환경에 의해서 ‘부추겨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유롭게’ 소비한다고 여겨지는 행위를 잘 보라. 과연 이것이 진정 ‘자유로운가?’ 자의적인가? 아니면, 나도 모르게 타의에 의해 부추겨진 행위인가? 백화점을 쇼핑할 때 항상 생각했던 것보다 매번 ‘불필요’하게 많은 소비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말 원해서 하는 선택인가? 아니면, 진열대의 디스플레이 된 ‘생산품’이 당신의 지갑을 열게 하였는가? 또는 가는 길목마다 위치한, TV를 켜면 으레 보게 되는 ‘광고’에 주목해 보라. 우리의 시선 어느 곳에도 항상 자리매김돼 있는 광고는 우리의 소비욕구를 부추긴다. 또, 보다 멋진 옷을 사는 이유가, 진정 자신이 멋지게 보이기 위해선가, 아니면 멋지게 보인다고 여겨지는 옷을 구매함으로써 얻게 되는 ‘지위’ 때문인가?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소비는 결코 자유롭지 않으며, 생산자의 의도에, 광고자의 기획에, 사회의 시선에 포섭돼 있다. 그렇다면, “개인을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욕구는 시급하다고 볼 수 없다. 생산이 욕구를 창조한다면, 생산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라고 변화할 여지가 없어진다.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재화를 생산하는 것이 도리어 욕구를 만들어낸다면, 또는 욕구가 생산과 병행하여 나타나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욕구의 시급성이 생산의 시급성을 옹호하는 데 사용될 수 없다.(p.161-162)”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욕망을 만드는 것. 생산을 통해서든, 광고를 통해서든, 상품의 진열에 의해서든....“욕망을 만드는 것. 욕구가 그것을 충족시키는 과정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의존효과(Dependence Effect)라고 부르겠다.”


그리하여 요컨대 ‘생산’에 여전히 방점을 두고 있는 현재의 사회는 ‘풍요한 사회’일 뿐, 이 풍요가 사회 구성원 전체의 몫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생산에만 매진해 만들어진 풍요한 사회는 “부(富)가 만들어내는 차별을 인식하는 데는 인색했다.”(p.319) 그 결과 풍요가 만들어 낸 잘못된 효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풍요 속에 살게 된 우리는 그 혜택과 문화로부터 배제된 이들을 쉽게 잊어버리게 될 위험이 있다. 그리고 과거에 종종 그랬듯, 우리가 그들을 방치하는 것을 합리화할 이론을 개발해 낼 가능성도 있다. 풍요의 두 번째 효과는 계속 그 위험이 늘어나고 파괴능력이 커지는 무기생산을 위한 자원이 크나큰 번영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p.321)


갤브레이스는 이 책의 말미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부탁을 남긴다. “하나는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사회적 요구를 제한하거나 기각할 사회적 이념을 찾으려는 최근의 경향에 저항해 달라는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빈곤의 제거를 이 풍요한 사회의 사회적․정치적 의제의 중심에 놓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호소컨대, 이 지구를 잿더미로 만들려는 이들로부터 우리의 풍요를 지키자. 풍요한 사회에도 결함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풍요한 사회 속에 있는 적대적․파괴적 경향으로부터 이 사회를 지킬 가치는 충분히 있다.”


그렇다. 이제 빈곤‘만’을 이야기 하는 시대는 지났다. 사회적 행동의 동기를 ‘빈곤’ 자체에서 찾으려는 노력은 잘못하면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사회의 모습을 ‘풍요’로 보되, 그 진단의 동기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상대적 빈곤‘이라야 하겠다. 어찌보면 갤브레이스의 말은 ’이제 분배다‘라는 말로 압축될 수 있을 정도로 평범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여전히 유효한 까닭은 우리가 ’생산중심주의‘에서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으며, 생산의 추동력은 ’경쟁‘에 의한 ’죽고 살기‘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풍요를 말할 때다. 분배를 말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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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말로 좋은 날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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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그는 유장한 다변가였고, 무심하게 쓰는 한편 연민으로 넘치는 사람이었다. 흥건한 말과 수다, 연민과 거리 의식이야말로 미천한 삶에 위대함을, 거대한 삶에 희극성을, 살벌한 '지역'의 풍경에 노스탤지어를 새겨넣을 수 있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우스꽝스럽지만 아름다웠고, 사소하면서도 위대했으며, 수다스러우면서도 숭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윤리적인 한편, 즐거운 것이었다.

  그런 그의 문체가 눈에 띄게 짧아졌고, 메말라졌다. 연민도 사라졌다. 작가는 더이상 웃(기)지 않는다. 우리도 웃지 못한다...."

    - 황호덕(문학평론가), 절단(을 절단)하는 이사람('참말로 좋은 날' 비평) 중에서

 내가 알던(그의 책을 꽤 많이 읽었으니 '안다'라는 말을 써도 되겠지? 소설가와의 만남은 작품 하나로 충분한 법) 성석제는 '웃긴' 작가다. 웃길 줄 아는 작가다. 그의 만든 캐릭터는 익살스럽고, 그의 문체는 맛깔스러우며, 그의 단어는 '언어 유희'로 가득차 있었다. 그의 푸짐한 인상처럼 그의 소설은 푸짐했다. 맛있었다.  

  그런 그가 간만에 내놓은 소설이니, 당장에 안 사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웬걸? 이제까지와의 그와 다르다. 이제까지 그가 써왔던 소설과 달리 '참말로 좋은 날'은 사납다. 무섭다. 씁쓸하다. 살풍경이 그가 그린 사회 도처에 널렸고, 소설 속 주인공들은 매번 좌절모드다. '참말로 좋은 날'은 지극히 반어적이었다.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 전과는 달리, 이젠 지난하고 비루한 삶 앞에서 솔직해 지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속수무책 당하기만 하는 밑둥들의 삶이야  매번 그러했던 것이다만, '풍요로운 사회' 아닌가. 풍요한 사회에서 나만 풍요하지 않아 느끼는 소외감은 원래 웃음과 친하지 않은 사이다. 게다가 이 풍요가 그 자식들에게 대물림되고, 나의 소외감은 내 자식에게 대물림되는 사회에서라면 더욱. 그래서인지, '참말로 좋은 날' 안의 여러 소설에서 부를 세습한 태평한 자들이 곳곳에 보인다.  

  그래서 성석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이 바뀌어도 사람은 그대로다. 그대로 있다는 기분이 든다. 생활과 방편이 바뀌어도 내가 아는 사람들 얼굴은 그대로다. 나아지는지 나빠지는지 알 수 없다. 빠른 건 언제나 같다. 내가 바뀐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바뀌는 게 당연한가. 그럴지도 모른다. 고마운 건 언제나 같다. 소설을 쓰게 해주는 존재들, 실재하는 또 실재하지 않는."(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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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경제 산책 - 정운영의 마지막 강의 Economic Discovery 시리즈 7
정운영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고 정운영 경제학 교수의 생전 글을 묶은 '자본주의 경제 산책'은 엄밀히 말해 21세기 대한민국형 자본주의의 앞날을 '조심스레' 예측하고 있는 글이다.

  이 책에서 그는 21세기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세계화'와 '투기자본'을 꼽았다. 세계화는 자본의 전방위적 진출을 가장 전략적인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구촌 공동체'로 대표되는 지구화, 국제화와는 대비된다. 또한 정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투기자본은 초국적 거대 자본의 양도 차익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근대적, 반봉건적 투기 형태와 구분된다.

   세계화는 1970년대 전세계적 - 사실 미국과 유럽 등의 선진국에서 먼저 나타난- 불황의 타개책으로 나온 신자유주의의 또 다른 언어 레토릭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 혹은 세계화는 자본의 무한정한 확장을 위해 국가의 역할을 축소, 나아가 폐지시키려 하는 데 운용의 핵심이 숨어 있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세계화가 "조지 소로스 마저 지적하듯이...(중략) 대다수 주민이 견디지 못할 정도의 불안정과 불안전을 초래하고, 마침내 체제의 재생산 능력을 파괴한다"(p.75)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세계화 시대의 시장 분할과 통합은 그 대상이 기존의 상품과 자본은 물론, 용역, 기술, 노동, 환경, 거래 규칙으로 대거 확대될 뿐만 아니라 외세 개입을 규제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존재하지 않"(p.73)기 때문이다.

   투기자본 역시 실물 거래를 매개로 하는 생산적 활동이 아닌, 도박 플레이에 가깝다는 점에서 21세기 자본주의의 미래를 어둡게 할 것이라고 본다. "통화, 주식, 채권, 파생 상품까지 양도 차익을 노리는 금융 투기가 외환 수요의 98퍼센트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카지노 자본주의'의 야유를 그대로 수긍하게 만든다."(p.83) 실제 우리나라에서는 97년 외환위기 이후 대거 유입된 국제적 투기 자본이 국내의 금융 자본은 물론, 국내의 저평가된 기업들을 잠식하고 있다. 국내 은행의 대부분이 80% 이상의 자본을 국제 자본에 기대고 있다는 점, 또한 칼 아이칸의 KT&G 인수 시도 등에서 보듯, 국가 경제가 국제 투기자본에 휘둘리기 십상인 게 현재 우리나라 경제의 현실이다.

   정 교수는 "과거의 제국주의와 자유주의가 각각 오늘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로 대체"(p.149)되고 있다고 경고한다. 이러한 대체는 기존의 것과는 달리, 가시적인 폭력을 배제하고 더욱 교묘한 '착취' 메커니즘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우려할만 하다.

   정 교수는 이러한 자본의 무차별적 난동에 저항하기 위해 '문화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본다. 경제는 이미 신자유주의적 구호 아래 정리돼 있으며, 정치 또한 아무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창조를 향한 저항, 저항을 통한 창조는 세계화 시대의 문화가 담당할 가장 중요한 책무 중 하나"라고 본다. 보다 구체적으로 문화를 위시한 지역적 통합에 주목한다. 특히 우리나라에 관련해서는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동아시아적 가치를 새롭게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책에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경고 말고도, 지난 20세기에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한 회고, 우리나라의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성장했던 여러 대항 논리들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볼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 책 안에 있는 모든 글들이 정 교수가 생전에 두서없이 집필해 놓은 '초고'인 까닭에 정리가 덜 된 문장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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