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이름이 생뚱맞도록 길다. 원래 감독 이름 같은 걸 의도적으로 외우는 취향은 아니지만, 저건 작정하고 외워도 금세 까먹을 듯 싶다.   <타인의 삶>이 그의 영화 경력 첫번째 장편이라고 한다. 그는 지금껏 단편영화 세편을 찍었을 뿐이다. 속된 말로 '신삥'감독이 내놓은 이 작품에 내려진 수상 타이틀을 보면 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독일 아카데미(롤라상) 주요부문 최다 7개 부문 수상, 2006 로카르노영화제 관객상, L.A 비평가 협회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수상. 골든 글로브 외국어 영화상 노미네이트." 

이 감독, 심상치 않다. 작정하고 외워두고 볼 일이다.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그의 재판과정을 지켜본 그녀에 따르면 그는 "자상한 아빠요, 좋은 남편"이었다. 전유럽을 피로 물들이고 수백만의 유태인들을 집단학살한 원흉인 그를 그녀는 '그저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봤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밝힌 나치즘 체제의 제1전범 아이히만의 '평범성'은 유태인의 격렬한 반발심을 불러 일으켰다.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극악무도하게 살해한 아이히만을 악귀로 여겼을 유태인에게 한나 아렌트의 분석은 경악 그 자체였다. 아이히만은 전후 있었던 재판에서 자신은 그저 국가가 부여한 소명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강변했다. 그는 유태인 학살을 '효율적'으로, '성실히' 수행한 것뿐이라고 했다.

이를 두고 한나 아렌트는 그가 그저 '관료주의적 체계' 안에서 그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던 것 뿐이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녀는 이러한 분석을 통해 인간의 '악의 평범성'을 발견했다. 그녀에 따르면 흔히 '악'하다고 여겨지는 인간의 행동은 한 개인의 심리적인 장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 하에 놓여 있음으로써 '평범'하게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조건'은 바로 '무사유(thoughtless)'다. 행동의 근원적인 사유없이 그저 주어진 행동양식에 매몰돼 있을 때 '악'으로 여겨지는 행동이 나온다는 것이 그녀의 '악의 평범성' 이론이다.   


독일 영화 <타인의 삶>의 '위즐러' 역시 자기 역할에 충실한 '평범한' 인간이다. 그 역할이 구동독 시절의 비밀경찰이었다는 게 문제가 될 뿐. 그는 "국가의 안보와 안녕"을 위해 불순분자라 여겨지는 이들을 감시하고 고문한다. 공산주의 혹은 국가주의적 관료체제를 '무사유'한 채, 이 체제가 요구하는 행동양식에 매몰된 이가 위즐러다. 요컨대 그는 '악의 평범성' 인간의 한 전형이다.

그런 그에게 국가의 안녕을 해칠 우려가 있어 보이는 한 예술가의 삶을 감시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서둘러 집에 도청장치를 깔고, 24시간 내내 극작가 '드라이만'과 그의 연인 '크리스타'의 일상을 몰래 엿듣는다. 그들의 사랑, 갈등, 예술가로서의 고뇌와 사회에 대한 절망들을 여과없이 훔쳐 들은 그는 그들의 삶에 동화되고 만다. 이제 그는 그들처럼 브레히트의 시에 감명받고, 드라이만이 치는 피아노곡 '선한이들의 소나타'를 훔쳐 듣곤 눈물을 흘린다. 이 영화의 메인 카피의 말처럼 위즐러는 "그들의 삶을 훔쳤고, 그들은 그의 인생을 바꿨다."


'타인의 삶'을 훔쳐보는 그의 유일한 이유는 바로 '국가의 안녕'이다.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의 흔들림 없는 체제결속을 위해 그는 도청하고, 감시하고, 고문한다. 그러나 이번에 맡은 임무가 그를 바꿔 놓았다. 그는 "그들의 삶을 훔쳤고, 그들은 그의 인생을 바꿨다."

 

이 영화 <타인의 삶>은 개인과 국가, 특히 '자유'를 열망하는 개인과 국가 아래 총단결할 것을 바라는 국가간의 대립을 소재로 한 영화다. 어찌보면 해묵은 소재를 끌어다 쓴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그 속을 켜켜이 들여다 보면 그게 그렇지 않다. 이 영화의 진짜 초점은 '위즐러의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있다. 즉 '무사유'에 파묻힌 악한 비밀경찰 위즐러가 '어떻게'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그것에 동화되는지를 그리고 있는 영화다. 그리고 이 '어떻게'는 '훔쳐보기'다.

'훔쳐보기'라는 은밀한 속성을 거세하고 보면 결국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은 '보기(see)'다.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무사유'에서 보았고, 따라서 사유할 것(아렌트의 또 다른 저서 <인간의 조건>에서는 인간의 조건엔 3가지 행동양식이 있다고 보았다. 그 중 먹고 살기 위해 하는 행동 외의 행동, 즉 정치적인 자기 주장을 하는 등의 행동(action)이 인간의 조건의 핵심이다. 즉 한나 아렌트가 말한 '사유'는 '인간은 정치적,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것에 대한 사유다.)을 주문했다면, 이 영화 감독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는 타인의 삶을 '볼 것'을 주문한다. 이 것이 '훔쳐보는' 방식이면 더욱 좋다. 왜냐하면 이 '훔쳐보기'는 가식이 없는, 인간 본연을 그대로 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훔치다'라는 욕망을 거세하자. 다른 이을 이해하기 위해 그 사람의 삶을 '여과없이' 지켜보는 것이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한 방법이라고 감독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극작가 '드라이만'과 그의 연인 '크리스타.' '크리스타'는 출중한 실력을 지닌 열정적인 희극배우로 나온다. 이 배우와 관련한 조금은 씁쓸한 글을 하나 봤었다. 며칠 전 경향신문에 한 외국인 강사가 기고한 글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는 이 영화에 대해 한국인 여성들과 얘기를 하던 중 그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고 한다.  "만약에 이 영화가 한국영화였다면 그 배우는 캐스팅 되지 못했을 것이다" 한 영화의 여주인공을 하기엔 지나치게 살이 쪘다는 게 이유란다. 참으로 씁쓸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의 영화 보는 수준이라는 게, 여성을 바라보는 틀이라는 게, 딱 그 수준이다.

 

위즐러는 결국 국가로부터 의심을 받게 되고, 비밀경찰직으로부터 내쫓김을 당한다. 그는 손수레를 끌며 편지배달을 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그러나 타인의 삶을 훔쳐본 후 변한 그의 삶은 그리 비참하지 않다. 그는 이제 다른 이를 이해할 줄 알며 이제 "나를 위해"(No, this is for me) 살 줄 알게 됐다. '먹고 사는 것 외의 행위(action)가 인간의 핵심 조건이라고 말했던 아렌트의 지적을 되새겨 본다면, 위즐러는 이제야 '인간의 삶'을 살기 시작한 셈이다.


그는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국가안전부 비밀경찰에서 별볼일 없는 편지배달부로 전락한다. 그러나 그의 삶은 비로소 인간의 그것과 닮아가기 시작한다. 그의 표정 변화에 주목할 것. 그의 초반 냉혈한적 모습과 비교해 편지배달을 하는 동안 그의 모습은 비로소 인간의 표정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어린 시절 난 나와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문제 삼은 적이 많았다. 피 끓은 감정만 가득한 시절, 난 나와는 다른 생각이 문제였다고 생각했다. 은연 중에 난 모든 이의 사고가 나와 같아야 한다고 믿었다. '우리 안의 파시즘'은 내게도 예외가 아니었던 셈이다. '다름'은 문제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외려 존중받아야 할 미덕임을 난 이제야 조금 이해할 듯 하다. 문제는 '다름'이 아니라 이 '다름'을 이해하지 않고, '틀림'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난 '이제야 말할 수 있다'.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 그들의 삶을 '훔쳐보자.' "난 그들의 삶을 훔쳤고, 그들은 나의 인생을 바꿨다"


난 이제 말할 수 있다. 문제는 '다름' 그 자체가 아니라 이 '다름'을 이해하지 않고, '틀림'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 타인과 얘기하고, 웃고, 떠들어 보자. 그들의 삶을 훔쳐보자. "난 그들의 삶을 훔쳤고, 그들은 나의 인생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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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5-02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시난테님의 리뷰에 반해버립니다. 이 영화는 개봉관에서 못 보고 지나간 좋은
영화라서 디비디 나올 때를 기다리고 있는데요... 나왔나 보군요.
감독이름 참 길어요.^^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저 잘 외우죠?
가만 보면 이름이 익히 들어본 편한 단어들로 연결되네요.ㅎㅎ도너스..

로시난테 2007-05-03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회 되시면 꼭 보시면 좋을 듯. 전 단순해서 그런지 스펙타클하고 난해한 영화보다 이렇게 쉽게 읽히는영화가 좋더라구요. 글구...그 감독 이름 넘 어려워요. 전 아직도 못 외웠답니다. 플로리다 헨델 폰 도너츠 마르크스...아..이 억지 개그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