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처럼 - 신영복 서화 에세이
신영복 글.그림, 이승혁.장지숙 엮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글과 서예, 그림을 모아 신영복 ‘선생님’이 ‘서화 에세이’라는 형식의 책을 내셨다. 호칭이 주는 권력의 비대칭성 때문에 저자의 이름 뒤에 ‘선생님’을 붙이는 것을 극히 삼가는 편이나 신영복 선생님은 예외로 둔다. 그의 글에는 말 그대로 ‘先生’이 가져야 할 통찰과 반성, 혜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에세이’가 본디 그러하듯, 「처음처럼」 역시 저자가 “가르치고 배우는 삶의 연쇄 속에서”(p.30) 깨달은 바를 소박하게 밝히고 있다. 여기서 소박함은 글의 분량도 그렇거니와, 경어체를 굳이 고집하시는 선생님의 태도, 소소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글의 내용 모두를 아우르는 말로 적당하다. 사실 글의 크기로만 보자면 얼핏 힘이 빠지도록 진부한 잠언처럼 보일 수도 있었으나 후덕한 인상의 書畵가 그 틈을 잘 메워 주었다. 저자 스스로의 말에 따르면 “언어의 관념성과 경직성이 그림으로 하여 조금은 구체화되고 정감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서화를 그렸다고, 배치하였다고 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알아두면 좋은 명언’이나 잠언, 교훈집 류의 글을 즐겨 읽지 않는 편이다. 그런 글들은 대부분의 경우 ‘훌륭한 말씀들’만 가득할 뿐, 세상의 불가피한 어둠엔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혹은 금욕주의가 삶을 깨우치는 유일한 방법이라 여기는 ‘종교’적 색채마저 덧칠해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글들이 우리에게 주는 깨달음이란 ‘면벽 수행 3년으로 벽을 절대로 통과할 수 없다’ 정도다. 


  설핏 해석하면 ‘뻔하디 뻔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는 신영복 선생님의 글이 위의 잠언류와 다를 수 있는 건 그가 견뎌낸 삶이 가지고 있는 진정성 때문이다. 이번 책에도 실려 있거니와, 이미 세간에 널리 알려진 ‘여름 징역살이’편을 들여다 보자.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도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 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p.135)


인간 존재의 근원적 외로움을 이보다 절절히 그린 글이 어디 있는가? 그의 글은 이처럼 자신의 ‘경험’을 진득이 녹여내 그 어떤 글보다 정직하다. 진솔하다. 저자 스스로 “경험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신념이 부러우며,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을” 여전히 배우고 싶어할 정도로 ‘경험’을 깨달음의 주춧돌로 삼고 있다.


약 200여 페이지를 통해 저자가 그려내고 있는 世間의 내용은 다양하나, 이 모두를 엮는 한 가지 방법은 ‘하방연대’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하방’에 두고, 내 주위의 것들과 ‘연대’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람 잘 날 없는 우리네 삶을 ‘처음처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한다.


‘하방연대’로 가는 길목에 곳곳에 ‘비움’, ‘노동’, ‘성찰’, ‘더불어’, 함께’, ‘관계’, ‘실천’이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지루할 정도로 익숙한 단어다. 그러나 명심할 건 우리 모두 ‘알고 있으나 행하지 못하는’ 삶의 방식들이 너무도 많다는 점이다.  결코 「처음처럼」을 익숙한 내용으로 볼 수 없는 이유다.


나만 힘든 것 같은 ‘나’에게. 너의 아픔은 내 고통 다음이라고 믿는 ‘나’에게. 언제든 삶의 선로를 바꿔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함에 잔뜩 움츠린 ‘나’에게. 신영복 선생님은 이런 ‘나’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줄탁동시啐啄同時)’한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습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습니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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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2-28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3쪽에서 인용한 시가 마음에 참 와닿습니다. ^^

로시난테 2007-03-01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신념이 명징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불안해 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지남철이야기'가 큰 울림을 주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