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한 사회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지음, 노택선 옮김, 신상민 감수 / 한국경제신문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우리는 풍요한 사회에 살고 있는가? ‘풍요’는 가치의 지향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누구도 이 질문에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하리라. 경제학자 존 갤브레이스 의 책 ‘풍요한 사회’(The Affluent Society)(한국경제신문)에서의 풍요(Affluence)는 경제적 의미의 풍요를 말한다. 이 책의 초판이 벌써 50여년이 됐다고 하니, 갤브레이스는 반 세기 전의 미국을 ‘풍요한 사회’로 본 셈이다. 자본과 재화의 규모에 주목해 본다면 50여년 전 미국은 이미 풍요한 사회였으며, 똑같은 잣대로 평가한 우리나라 역시 ‘풍요한 사회’임에 틀림 없다.


존 겔브레이스가 ‘풍요한 사회’에서 주목한 부분은 ‘빈곤’한 사회에서 태동한 경제학이 사회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 ‘풍요한 사회’의 분석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전 경제학의 이론이 가진 통념 그대로 현재를 해석하다보니, 그 분석이 심각한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고 지적한다. “통념의 적은 사상이 아니라 세상이 계속 변해간다는 사실이다.(p.27)”


그의 지적은 ‘불평등’에 대한 진단으로부터 시작한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불평등’이 심화되는 까닭으로 주류 경제학이 흔히 꼽는 것은 자본주의의 ’생태학‘적 특성이다. 즉 자본주의는 내재적 원리상 ’불평등‘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멜더스의 경우“국가의 자본과 생산량이 늘면 이윤도 늘어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생산이 늘면 인구도 증가한다. 따라서 필요한 식량도 늘어나기 때문에 토지에 대한 수요는 더 늘어나고, 결국 지대가 올라서 지주가 이득을 본다. 다시 말해 경제가 성장하면 자본가가 번영을 누리고, 그 열매는 지주에게 돌아가게 마련이다. 이처럼 자본주의가 발생하는 필연적인 불행은 결국 대부분 일반 대중의 몫이다."(p.43)    


불평등의 ‘합리화’는 1930년대 후반 미국 전역을 뒤엎었던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 에 의해 ‘정당성’마저 확보한다. 자본주의의 경쟁에 그에 따른 도태는 약자를 제거함으로써 훗날 사회에 득이 된다는 논리가 사회진화론의 고갱이다. 이에 따르면 ‘불평등’은 정당한 경쟁의 ‘당연한’ 결과물로 외려 칭찬받아 마땅한 것이 된다. 

 

‘불평등 문제’하면 떠오르는 학자가 바로 마르크스다. 마르크스는 이 불평등이 사회적 혁명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마르크스의 장기적인 전망은 바로 자본 집중의 심화이다. 그는 자본의 집중 현상이 진행될수록 사회자본이 점점 더 소수에 의해 지배되는 경향이 있다고 예견했다.”(p.85) 사회자본에서 소외된 자들은 자신의 발목에 묶여 있는 쇠사슬을 풀 ‘행동’을 결의한다. 그것이 바로 혁명이다. 결국 마르크스 역시 ‘불평등’은 자본주의가 배태한 어쩔 수 없는 사생아로 본 셈이다.  


현대에 와서 불평등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부쩍 줄기 시작했다.(상대적 의미에서 ‘줄었다’라는 표현을 쓴 듯 하다.) “현대에 불평등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으나, 이 원인들은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생산이 증대했다는 사실과 관련돼 있다.(p.109)” 생산의 증대는 우리에게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나게끔 했으며, 부 자체가 특권으로 인식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지나친 부의 과시는 여러 사람의 뭇매를 맞기 십상이다. 대신 이미 습득한 재산을 ‘지키고자’ 하는 욕망이 생겨난다. 자신의 몫을 뺏길 여지가 있는 것들에 대한 ‘보장’에 대해 신경을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불안요소를 제거하는 데 앞장선 것은 당장 경영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기업들이었다. 이들의 불안의 최대원인은 경쟁과 예측할 수 없는 자유경쟁시장의 가격변동이었다. 기업가들은 이런 불안요소들을 제거하거나 완화하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이들이 생각한 궁극적인 보장은 즉 한 회사가 공급과 가격 지배권을 장악하는 독점이었다. 카르텔과 법에 의한 가격 협정, 신규기업의 진입 제한, 관세와 쿼터제에 의한 보호”(p.113) 등은 이들의 몫에 대한 든든한 보험으로 작용한다.


결국 “현대에 와서 보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현대 경제생활에 존재하는 특별한 위험요소 때문이라는 통념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부의 증대로 생겨난 결과다. 즉, 가진 것이 거의 없던 세상에서 지켜야 할 것들이 훨씬 늘어난 세상으로 옮겨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불경기가 경제적 보장에 대한 관심을 자극하는 것은, 대형화재가 화재보험에 대한 관심을, 또는 홍수가 홍수예방에 대한 관심을 자극하는 것과 같다.”(p.121) 그러나 안타깝게도 “경제학자는 가격조작의 목적이 불안요소를 최소화하는 것보다는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데 있다고 보았다. 경제학자들은 이 문제만 생각했지, 불안요소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자기방어에만 몰두하는 소극적인 기업가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p.114) 바로 이 지점에 경제학자들의 잘못된 통념이 숨어 있다. ‘빈곤의 시대’에 주목받았던 ‘이윤의 극대화’라는 생산에만 이목을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존 갤브레이스는 과거 절대적 의미를 지녔던 ‘생산’이 풍요한 사회에 이른 지금까지도 ‘그 난공불락의 위상’을 여전히 과시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와 더불어 미국 특유의 ‘다위니즘적 진화론’이 더해져 이른바 상대적 빈곤층의 경제적 보장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고 비판한다. 이른바 충분한 부를 습득한 자들은 이미 예전부터 부의 손실에 대한 보험을 들어놓은 것에 반해 그렇지 못한 자들에 대해서는 경제적 보장 자체를 생산의 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경제적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금전적인 보상이라는 ‘당근’과 함께 개인의 경제적 재난이라는 ‘채찍’이 있어야 하며, 이 두 가지 모두가 꼭 필요한 요소라는 생각이었다. 경제적 보장이 늘어나면 채찍이 제거되므로 대중을 고무시키는 자극 역시 절반이 제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불안요소들이 효율을 높이고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라는 생각은 전적으로 큰 오산이었다. 경제사상의 역사에서 최대의 오산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p.124)”

   

‘생산의 기득권’이 또 다시 합리화 되는 근거는 이른바 ‘소비자 수요’가 끊임없이 창출된다는 점이다. “옛날에는 생산증대가 굶주린 사람에게 식량을, 추운 사람에게 의복을, 집 없는 사람에게 집을 제공하는 것을 뜻했다. 그런데 오늘날 생산증대란 더 우아한 고급 자동차와 색다른 음식, 멋진 옷, 세련된 오락 등 한마디로 감각적이고 부도덕하고 파괴적인 현대의 모든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을 뜻한다. 이런 욕망과 그 욕망을 충족시키는 생산을 옹호하는 경제이론은 통념에서 난공불락의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데(그리고 놀라울 만큼 아무런 도전도 받고 있지 않는데), 이는 대단히 비논리적이며 저속한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위험천만한 것이다.”(p.149)


왜냐하면, 이 소비자 욕구라는 것이 결코 소비자 개인의 소비심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외부환경에 의해서 ‘부추겨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유롭게’ 소비한다고 여겨지는 행위를 잘 보라. 과연 이것이 진정 ‘자유로운가?’ 자의적인가? 아니면, 나도 모르게 타의에 의해 부추겨진 행위인가? 백화점을 쇼핑할 때 항상 생각했던 것보다 매번 ‘불필요’하게 많은 소비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말 원해서 하는 선택인가? 아니면, 진열대의 디스플레이 된 ‘생산품’이 당신의 지갑을 열게 하였는가? 또는 가는 길목마다 위치한, TV를 켜면 으레 보게 되는 ‘광고’에 주목해 보라. 우리의 시선 어느 곳에도 항상 자리매김돼 있는 광고는 우리의 소비욕구를 부추긴다. 또, 보다 멋진 옷을 사는 이유가, 진정 자신이 멋지게 보이기 위해선가, 아니면 멋지게 보인다고 여겨지는 옷을 구매함으로써 얻게 되는 ‘지위’ 때문인가?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소비는 결코 자유롭지 않으며, 생산자의 의도에, 광고자의 기획에, 사회의 시선에 포섭돼 있다. 그렇다면, “개인을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욕구는 시급하다고 볼 수 없다. 생산이 욕구를 창조한다면, 생산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라고 변화할 여지가 없어진다.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재화를 생산하는 것이 도리어 욕구를 만들어낸다면, 또는 욕구가 생산과 병행하여 나타나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욕구의 시급성이 생산의 시급성을 옹호하는 데 사용될 수 없다.(p.161-162)”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욕망을 만드는 것. 생산을 통해서든, 광고를 통해서든, 상품의 진열에 의해서든....“욕망을 만드는 것. 욕구가 그것을 충족시키는 과정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의존효과(Dependence Effect)라고 부르겠다.”


그리하여 요컨대 ‘생산’에 여전히 방점을 두고 있는 현재의 사회는 ‘풍요한 사회’일 뿐, 이 풍요가 사회 구성원 전체의 몫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생산에만 매진해 만들어진 풍요한 사회는 “부(富)가 만들어내는 차별을 인식하는 데는 인색했다.”(p.319) 그 결과 풍요가 만들어 낸 잘못된 효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풍요 속에 살게 된 우리는 그 혜택과 문화로부터 배제된 이들을 쉽게 잊어버리게 될 위험이 있다. 그리고 과거에 종종 그랬듯, 우리가 그들을 방치하는 것을 합리화할 이론을 개발해 낼 가능성도 있다. 풍요의 두 번째 효과는 계속 그 위험이 늘어나고 파괴능력이 커지는 무기생산을 위한 자원이 크나큰 번영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p.321)


갤브레이스는 이 책의 말미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부탁을 남긴다. “하나는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사회적 요구를 제한하거나 기각할 사회적 이념을 찾으려는 최근의 경향에 저항해 달라는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빈곤의 제거를 이 풍요한 사회의 사회적․정치적 의제의 중심에 놓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호소컨대, 이 지구를 잿더미로 만들려는 이들로부터 우리의 풍요를 지키자. 풍요한 사회에도 결함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풍요한 사회 속에 있는 적대적․파괴적 경향으로부터 이 사회를 지킬 가치는 충분히 있다.”


그렇다. 이제 빈곤‘만’을 이야기 하는 시대는 지났다. 사회적 행동의 동기를 ‘빈곤’ 자체에서 찾으려는 노력은 잘못하면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사회의 모습을 ‘풍요’로 보되, 그 진단의 동기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상대적 빈곤‘이라야 하겠다. 어찌보면 갤브레이스의 말은 ’이제 분배다‘라는 말로 압축될 수 있을 정도로 평범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여전히 유효한 까닭은 우리가 ’생산중심주의‘에서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으며, 생산의 추동력은 ’경쟁‘에 의한 ’죽고 살기‘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풍요를 말할 때다. 분배를 말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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