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림, 우아한 세계

"디즈니랜드는 ‘실제의’ 나라, ‘실제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거기 있다(마치 감옥이 사회 전체가 그 평범한 어디서고 감방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거기 있는 것과 약간은 유사하게). 디즈니랜드는 다른 세상을 사실이라고 믿게 하기 위하여 상상적 세계로 제시된다. 그런데 사실은 그곳을 감싸고 있는 로스앤젤레스 전체와 미국도 더 이상 실재가 아니며 파생 실재와 시뮬라시옹 질서에 속한다.”  - 장 보드리야르.

 <우아한 세계>를 봤다.  네이버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이 영화의 장르는 ‘범죄/느와르/액션/코미디’다. 그런데 나만의 착각일까? 이 영화는 범죄처럼 잔혹하지 않고, 느와르처럼 스산하지 않으며, 액션처럼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코미디처럼 막 웃기지도 않다. 그저 ‘웃어라, 아버지니까’라는 광고 카피가 주는 느낌처럼 ‘씁쓸’할 뿐.

송강호가 나오는 모든 영화와 마찬가지로, 이번 영화 역시 '송강호를 위한, 송강호에 의한, 송강호의' 영화다.

'배우 송강호'의 존재는 우리나라 영화계의 축복이다. 그의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과연 그가 연기를 하고 있는건지, 그의 삶을 다큐로 몰래 찍은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다.

송강호의 '리얼리즘'은 영화의 다른 캐릭터를 압도하는 까닭에, 송강호 외의 이야기에 집중하기가 어렵다.  

송강호 중심주의라 불러로 과언이 아닌데, 이를 꼭 그의 탓으로 돌릴 수 없는 게, 그의 연기는 '자기중심적 과욕'에서 비롯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자연스럽게' 연기를 할 뿐이다. 드러나 보이려 애쓰지도 않고, 튀어보려 과장되게 연기하지도 않는다.

예컨대 조금 다른 관점에서 연기를 잘 하는 '설경구'나 '최민식'과는 확연히 다른 '연기'를 보여주는 게 배우 송강호다.

 연기를 하는 건지, 그저 삶을 보여주는 건지 모를 정도의 연기. 전혀 작위적이지 않은 연기. 송강호가 국내 최고의 배우라 평가받는 이유다.

 

이 영화의 주인공 강인구(송강호 분)는 폭력 전과가 수두룩한 조폭 넘버 3이며, 따라서 범죄도 저지르고, 액션도 펼친다. 송강호야, 어느 배역에 있든 ‘코미디’를 칠 줄 아는 국내 최고의 배우다. 따라서 표면적으로 보자면 이 영화는 ‘범죄/느와르/액션/코미디’가 맞다. 그런데, 이 영화…왜 이렇게 ‘씁쓸’한 것이냔 말이다.

<우아한 세계> 속 현실은 전혀 ‘우아하지 않다.’ 조폭의 느와르가 매번 그렇듯이, 피비린내 나는 드잡이와 비열한 배신, 매정한 현실이 있을 뿐이다. 보드리야르의 말을 조금 비틀자면, 있지도 않은 ‘우아한 세계’가 실재한다고 믿게 하기 위해 <우아한 세계>라는 역설적 제목의 영화가 존재하는 셈이다. 

<우아한 세계>는 조폭 세계를 매개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지만, 매정한 현실은 조폭세계에만 한정돼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진짜 보르리야르의 말을 빌려 보자. "조폭 세계는 '실제의' 나라, '실제의' 한국 전체가 조폭 세계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거기 있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위해 목숨을 건 사투를 벌여야 하는 아버지의 일상은 조폭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생활 전선'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우리네 삶은 하루하루가 전쟁을 하는 것과 같다. 살아남기 위해 2인자를 밟고 올라서야 하고, 경쟁자의 칼을 무서워하지도 않아야 하며, 상대방의 목숨을 담보로 흥정 할줄도 알아야 한다. '경쟁'이 돈을 버는 유일한 방법이 된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하루도 긴장을 풀 날이 없는 것이다. 가정이라는 멍에를 짊어진 우리네 아버지들은 그 임무를 홀로 해결하겠다고 나선 외로운 '투사'다.


송강호 주연의 또다른 영화 <괴물>의 한 장면. 잘 보니 여기서도 송강호는 '아버지'의 역할을 했다. 한강 한 귀퉁이에서 매점을 보조운영하는 무능력한 아버지. 매점에서 빵을 팔든, 조폭의 넘버3(앗! 그러고 보니, 오늘의 송강호를 있게 한 영화도 <넘버 3>다.)이든, 아버지의 모습은 저 사진처럼 무력하다. 시인 안도현의 경구를 빌리면 '외롭고 높고 쓸쓸한' 존재가 바로 '아버지'다.  

안타까운 점은 오늘의 '경쟁' 결코 '우아한 세계'를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아한 세계'라는 결코 올 것 같지 않은 미래를 위해 죽어라 희생만 하는 '오늘'만 계속될 뿐. 잘 보라. 오늘의 희생이 보다 밝은 내일을 가져오는지. 내일이 되면, '조금 더 희생해 보다 밝은 미래를 만들자'는 '희생의 약속'만 하나 늘 뿐이다. 본디 '우아한 세계' 혹은 '밝은 미래'는 객관적 수치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결코 충족되지 않는 추상적 욕망이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는 사이, 우아한 세계를 꿈꾸었던 미래는 지독한 현실이 돼 돌아오는 것이다. 결코 헤어나오지 못하는 욕망의 쳇바퀴.

 더욱 암울한 사실은 이 욕망의 메커니즘이 자본주의를 가능케 하는 핵심 동력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끊임없는 노동을 자극해야 자본주의가 지속될 수 있다. 초기 자본주의 시기에는 '물리적 폭력'으로 노동을 이끌어 냈다면, 현재의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자극한다. '조금 더 노력하면 훨씬 풍요로운 사회에서 편히 살 수 있을거야' 하고 말이다. 50년이라는 극히 짧은 기간에 달성한 우리네 산업화 과정은 그 단적인 예다. 60년대 산업화의 깃발을 높이 든 기수들은 허울 뿐인 근로기준법을 '근거'로 쉴새 없이 일만 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총탄을 맞은 대가로 '중동 특수'를 따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막 한 가운데에서 열심히 토목공사를 했다. 돌아와서는 여전히 계속된 군부독재에 의해 입과 귀가 막혀 버렸다. 또 일만 했다. 살만 하니 IMF를 맞았고, 또 다시 일. 그리고 오늘이다. 이 오늘 역시 그리 밝지 않다. 며칠 전엔 한미FTA가 타결됐다. 살벌한 세계경쟁의 소용돌이에 맨몸으로 뛰어들어야 할 지경에 놓인 것이다. 이러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스스로는 '조폭'이 돼야 하며, 이 비정한 삶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자녀들은 서둘러 외국행 비행기를 태워야 한다. 이 자녀들이 크면 '우아한 세계'가 오려나? 글쎄.


헤드락은 조폭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기술이 아니다. 내 이웃을 꺽어야 내가 사는 사회. 승자만 살아남는 승자독식사회에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헤드락'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아한 세계>는 씁쓸하다. 그리고 이 씁쓸함의 중심에 '아버지'라는 존재가 있다. IMF이후 더욱 비정해진 현실 속에서 아버지라는 인물의 존재감을 그린 이야기들이 선을 뵈기 시작했다. 최근엔 장진 감독이 <아들>이라는 영화로 또 다른 아버지 상을 그릴 예정이고, 현재 상영중인 <날아라 허동구> 역시 아버지에 대한 얘기다.

예전의 아버지가 오이디푸스처럼 '질투'의 대상으로 존재했다면, 현재의 아버지는 '부재'하다.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는 미래를 좆는 사이 아버지라는 존재는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라고 응원하는 여우같은 아내와 토끼같은 자녀가 있지만, 이러한 노래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버지의 부재를 강력하게 지지해 주는 증거물이다. 사실 남성에게 무리한 포즈를 강요하고, 여성에게 그 종속물이 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마초주의의 비극적 산물이다. 표면적으로 아버지에게 불쑥 들어간 '어깨힘'이 빠지는 것은 '민주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화가 한 인간의 무력감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무력하다. 무력해도 아버지니까 웃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들을 더욱 무력하게 만든다. 이제 쓸데없는 부담감 벗어버리고, '웃으라고', '우아한 세계' 대신 '오늘을 즐겨보자'고, 내 아내여, 내 자식들이여, 한번만 우리네 아버지들에게 말해보는 건 어떨까?

이 웃음을 위해 우린 너무도 많은 '희생'을 강요받는다. '우아한 세계'는 내일에 있는 게 아니다. 지금 이 순간, 걱정이나 시름 따위 잠시 접어두고 이렇게 활짝 웃는 모습이 바로 '우아한 세계'다. '카르페 디엠'은 현재의 게으름을 찬미하는 단어가 아니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오늘을 희생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라는 말이 '카르페 디엠'이다. 자, 우리 잠시만이라도 굽은 허리 펴고 저렇게 웃어보자. 자, '카르페 디엠'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잉크냄새 2007-04-26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즈니랜드에서 카르페 디엠으로 마무리되는 우아한 세계에 대한 영화평이 가슴 절절히 와 닿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로시난테 2007-04-26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이 영화 보셨어요? 지난 주말에 본 영환데, 주변에서 괜찮다는 얘기를 하도 많이 들어선지 기대를 잔뜩했었어요. 음...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었지만 괜찮은 감흥을 준 영화였어요. 잉크냄새님께 조심스럽게 추천합니당.*^^*

프레이야 2007-04-26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시난테님, 맛깔나는 영화리뷰에요. 전 이 영화를 아직 못 보고 있는데 꼭 봐야
겠어요. 카르페 디엠!

로시난테 2007-04-26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심스러운' 추천이예요*^^* 기대없이 가면 훨씬 더 좋을 영화입니다. 옆지기 남편분과 날씨 좋은 날 나들이 가셨다 돌아오는 길에 보시면 좋겠네요~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김훈 世說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김훈,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생각의 나무*2003)

오랫동안 기자생활을 했던 김훈이 소설을 쓴다고 했을 때 한 비평가는 '그의 문체가 소설에 적합하겠느냐'라는 의문을 제기했다고 한다. 기자로서의 글쓰기와 소설가로서의 글쓰기는 엄연히 다른 영역이라는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  

글쎄. 솔직히 난 김훈의 '기사'를 본 적이 없다. 내가 처음 접한 김훈의 글은 <강산무진>이었다. 김훈의 몇몇 소설을 뒤적이고 또 이 책을 본 후에, 난 위의 비평가와는 전혀 반대의 의문을 가졌다. '이런 식의 사고와 문체로 과연 김훈이 기자적 글쓰기를 할 수 있었겠느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컨대 뒤늦게 읽은 김훈의 글에는 뭐랄까, 기자로서 요구되는 '벼린 이성'보다는 '축축한 감정'이 묻어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는 편집자와의 상의 끝에 원래 제목이었던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를 수정한 제목이라고 한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곱씹을수록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제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걸 두고 제목에 '낚였다'라는 표현을 쓰는가 보다, 했다.   

 

<기자로 산다는 것·호미출판사>에서 스치듯 김훈의 과거사를 전해 듣고, 난 그가 궁금해졌다. 부끄러운 과거 덮기에 급급한 한국 지식인 지형에서 자신의 치부를 손수 밝히고자 했던 사람이 하는 얘기가 듣고 싶어졌다. 게다가 <너는 어느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라는 도발적 표제를 건, 김훈이 말하는 세설(世說)이라니. 알라딘으로부터 택배가 도착하기 전부터 난 조바심이 났다.  

그에게 붙은, 그를 가장 단선적으로 보여주는 수식어는 바로 ‘문장가’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간결한 문체와 그 사이에 드문드문 배치하는 만연체는 글의 전체 맥락 속에 적절히 혼용돼 읽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책머리에>라는 책의 첫 장부터 그의 칼날 같은 문장이 나를 압도한다. “세상은 읽혀지거나 설명되는 곳이 아니고, 다만 살아낼 수밖에 없을 터이다. 나는 미리 설정한 사유의 틀 속으로 세상을 편입시킬 수는 없었다. 나는 내 글의 계통 없음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나는 여러 사람들이 흘린 액즙과 고름이 서로 섞이고 스미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것은 어찌 그리 어려운 일이었던지. 몸이 가장 부대끼는 날에, 가장 곤고한 글을 나는 썼다.” 이 책에 실린 많은 세설 중 가장 압권으로 문화일보가 소개한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의 일부를 보자. “내가 아들인 너의 눈치를 보면서 전전긍긍하던 어느 날, 너는 결국 너의 그 별것도 아닌 평발 증세를 너의 어머니께 강조하면서 재심받을 방법을 찾아달라고 말했다. 나와 너의 어머니는 다만 무력하게 한숨을 쉴 뿐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가 없었다. 너를 낳아서 청년이 되도록 길렀으며, 남자로 태어나 함께 병역의 의무를 진 내가 너에게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며, 이 나라의 어느 아버지가 징집을 앞둔 아들에게 이 사태를 납득시킬 수 있겠는가. 병역은 남자로 태어난 국민의 가장 신성하고 가장 도덕적인 의무라고 말한들 이미 더럽혀지고 허물어진 신성 앞에서 그 말이 무슨 씨가 먹힐 것인가. (중략) 너의 어머니에게 다시는 너의 평발을 내밀지 말아라. 아프고 괴롭겠지만, 나라의 더 큰 운명을 긍정하는 사내가 되거라. 네가 긍정해야 할 나라의 운명은 너와 동년배인 동족 청년과 대치하는 전선으로 가야 하는 일이다. 가서, 대통령보다도 국회의원보다도, 그리고 애국을 말하기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보다도 더 진실한 병장이 되어라.”(pp.18-20) 

그러나 김훈의 미사여구에 갖혀 그의 문체에만 주목하는 것은 오랜 기간 기자로 재직하며 쌓았던 그의 내공을 폄훼하는 일이 될 것이다. 사실 글 쓰는 재주야 하늘이 내려주신 선험적 재능이라 볼 수도 있어 그의 필력에만 평가가 집중하는 건 ‘주례사비평’스러운 경향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에 실린 글은 세상살이에 대한 김훈의 사색을 훔쳐볼 수 있어 그의 내면을 보다 깊이 들여다 볼 기회를 제공한다. 

 

김훈식 글쓰기를 말할 때 빼놓지 않고 나오는 게 바로 '아날로그적 글쓰기'다.

그는 여지껏 컴퓨터 자판에 익숙치 않아, 400자 원고지에 연필로 꾸역꾸역 문장을 만들어 나간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의 집필 공간엔 잔뜩 구겨진 원고지와 지우개 가루가 어지러히 널려 있다고 한다.

사실 글쓰기를 업으로 자임한 자가 만드는 문장 하나하나는 몇번을 고쳐쓰고 지워쓰는, 산고의 고통을 거치는 게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글이란 본디 '볼펜'보다는 '연필'로, 좀 더 투쟁적으로는 '몽당연필'로 써야 맞다.


 

‘너는 어느 쪽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김훈의 대답은 자못 분명하다. ‘난 아무편도 아니다’가 그가 유일하게 밟고 있는 사유의 방향성이다. 앞서 소개한대로 그는 그의 ‘계통없음’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거니와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도 그의 ‘아무편도 아님’은 쉽게 읽힌다. “나는 개별적 삶의 구체성을 배반하거나 천대하거나 또는 그것을 추상화해 버리는 모든 이론과 정책은 모두 사기극이라고 믿는다. 도덕은 인간의 개별성과 개별적 존재의 구체성 위에서 논의될 수 있을 뿐이다.”(p.78) "정의로운 언설이 모자라서 세상이 이 지경인 것은 아니다. 지금 정의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약육강식의 질서를 완성해 가는 이 합리주의의 정글 속에서 정의로운 언어는 쓰레기처럼 넘쳐난다.“(p.76) "나는 보편과 객관을 걷어치우고 집단의 정의를 조롱해 가면서 나 자신의 편애와 편견을 향하여 만신창이로 나아갈 것이다.”(p.76)  

그가 잣대로 삼는 유일한 사유의 기초는 바로 ‘삶의 구체성’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먹고 사는 일’을 고려하는 것부터 그의 사유가 전개된다. 예컨대 <돈과 밥으로 삶은 정당해야 한다>에서 아들에게 하는 다음과 같은 충고들, “아들아, 사내의 삶은 쉽지 않다. 돈과 밥의 두려움을 마땅히 알라. 돈과 밥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지 말고 주접을 떨지 말라. 사내의 삶이란, 어처구니없게도 간단한 것이다. 어려운 말 하지 않겠다. 쉬운 말을 비틀어서 어렵게 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그걸로 밥을 다 먹는 자들도 있는데, 그 또한 밥에 관한 일인지라 하는 수 없다. 다만 연민스러울 뿐이다.”(p.13)를 보고 있노라면 그가 ‘밥을 먹고 돈을 버는’ 인간의 기초 행위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내가 일자리를 잃고 내 처자식의 밥 세 끼를 포기해야 하는 것, 이것이 도대체 ‘개혁’이란 말인가."(p.31) 그리고 그의 이러한 기본적 삶에 대한 집착은 곤궁하게 살아온 지난 세월의 대한민국의 기억으로부터 비롯된 듯 보인다. “(한국전쟁 당시) 열차 지붕 위에 실려서 부산까지 내려갔던 세 살 먹은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이 글을 쓴다. 피난지에서 자라난 유년은 하루 종일 배가 고팠고 1년 내내 배가 고팠다.”(p.21) 혹은 오랜기간 기자 생활을 하며 부딪힌 사건들, 사람들의 양면성과 이면성을 몸으로 체득하며 얻은 심성일 수도 있겠다. “미리 설정된 사유의 틀이나 논리의 질서 속에 이 복잡하고 중층적인 세계를 강제로 편입시켜서 일사불란한 논리를 전개하는 언론행위는 별 가치가 없어 보인다.”(p.92) 

난 김훈의 계통없음이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대단히 용기 있는 커밍아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말처럼 이 세상은 너무도 ‘복잡하고 중층적’이어서, 한 가지 틀로 명쾌히 설명하는 언설은 이제 흰소리로 느껴진다. 다만 이 책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잣대의 무의미함’이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삶의 모든 부분을 인정하는 ‘절대적 상대주의’의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언급해 둔다. 또한 지나친 허무주의로 인해 극단적 부정의 냉소주의를 보여주기도 한다. “젊은 날의 말을 되돌아보는 두려움이 98년의 저물녘에 되살아난다. 말들은 허상 만들기로 싸우고 허상 위에서만 타협이 가능하다. 결국 당대의 현실은 당대에서 말하여지지 않는다. 들끓고 날뛰고 날아오르는 말들이 당대의 결핍이며 빈곤이다. 신기루는 점점 두꺼워진다.”(p.66) "어느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고위관리가 ‘그것(IMF)은 나의 책임이고, 내가 책임지겠다’라고 책임을 자인하고 나섰다 한들 그 말이 그 말이다. ‘책임이 없다’는 말이나 ‘책임을 지겠다’는 말이나 그 말이 그 말인 것이고 하나마나한 소리이고 들으나마나한 소리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무의미하고 무내용하다. 왜냐하면 그가 책임이 있다 하더라도 책임을 질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p.35)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가득 차 있다’ 나 ‘천국으로 가는 길은 악의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의 ‘계통없음’을 삶의 구체성에 천착하는 방식으로 이해해야지, 삶의 갖가지 핑계거리를 용인하는 방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스스로를 초로(初老)라 부르지만, 이제 이순(耳順)에 가까워져 오는 그가 보여주는 ‘글’에 대한 집념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글이란 ‘왜 쓰는가’에 대답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 글을 쓰는 일은 이 생기발랄한 몸의 살아 있음을 입증하는 과정이다. 이 몸이 언어를 통해서 이미지에 가닿을 때 그의 글을 가장 빛나는 문장을 이룬다. 문체는 몸의 일이다. 몸이 이미지에 맞는 가장 정확한 문체를 포착해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몸이 술과 담배에 절어 있어서는 끝장이다. 이 몸에 포즈가 배어 있어서는 다 끝난 것이다.”(p.203) 매일 이 핑계, 저 핑계에 절주, 금연 선언을 번복만 하기에 바쁜 나로썬 얼굴 홧홧 거리게 만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난 몸을 부릴 대로 부려야 사유가 번뜩이는, 젓 비린내 여지껏 가시지 않은 20대가 아니던가. 이런 내가 ‘술과 담배에 절어 있어서는 끝장이다.’ 지금부터 다시 금연이다.   

문체는 몸의 일이다.

몸이 이미지에 맞는 가장 정확한 문체를 포착해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몸이 술과 담배에 절어 있어서는 끝장이다.

이 몸에 포즈가 배어 있어서는 다 끝난 것이다.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07-04-24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시난테님, 두번 추천하고픈 리뷰입니다.
며칠 전 김훈의 '남한산성'을 손에 들었는데 아무편도 아니다라는 말이 생각났어요.
이 글 담아가겠습니다.

로시난테 2007-04-25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안녕하세요.*^^* 미천한 글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훈의 새 소설이 나왔다고 해서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고 여지껏 못 봤는데...기회 되시면 어떤 책인지 소개 좀 해주세요.*^^*

잉크냄새 2007-04-25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배혜경님의 서재에서 이 글을 읽고 추천도 드리고 담아갈겸 방문했습니다.

로시난테 2007-04-25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인연이 돼 잉크냄새님 서재에 들어갔는데 좋은 글들이 너무 많아 서둘러 즐겨찾기에 등록했습니다.*^^* 자주 놀러갈게요~

프레이야 2007-05-11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합니다.!!

파란여우 2007-05-11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사과혜경님이다!!
로시난테님, 이젠 저 안부럽죠? ㅋ 축하합니다.
근데 님의 몇 편 안되는 리뷰들은 모두 주옥같아서 하나의 섹션으로도 근사한걸요^^

로시난테 2007-05-11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왓! 저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배혜경님 저 뛸듯이 기뻐요*^^*

파란여우님. 안녕하세요*^^* 여우님의 '여우'(?)같은 칭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다니까욧!!*^^*

안 그래도 책을 느리게 읽는 편인데 요즘은 더욱 책을 못 읽게 되네요.

사실, 저 조그마한 신문사에 취직을 했습니다.*^^* 요즘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책볼 시간이 없네요. 제 서재를 찾아주시는 몇 안되는 소중한 '지기'들에게 축하받고 싶어 이렇게 수선을 떨어 봅니다.*^^*

samahun 2007-05-14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읽어봐야겠군요..좋은 소개 감사합니다.....

나비80 2007-05-14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시난테! 이주의 마이 리뷰 축하한다. 역시~! 최고. 잘 읽었어. 존대 하려다가 영 쑥스러워서.^^

kleinsusun 2007-05-15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므로 이 몸이 술과 담배에 절어 있어서는 끝장이다.
이 몸에 포즈가 배어 있어서는 다 끝난 것이다."
아........이 결연함!
로시난테님의 리뷰를 오늘 아침에 읽은 건 행운이었어요. 멋진 하루를 보낼 것 같은 예감! 쵝~오의 리뷰예요.^^

로시난테 2007-05-15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부답님! 얼굴 보기 힘들다*^^*

kleinsusun님. 과분한 칭찬이세요*^^* 형편없는 곳이지만 가끔씩 들러주세용~


심술 2007-05-16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첨 뵙습니다. 클라인수선님 서재에서 보고 왔는데요 님 글은 부러울 만큼 좋은데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글 남깁니다. 글자에 색 넣을 때 좀 진한 색을 넣어 주세요. '삶의 구체성', '인간의 먹고 사는 일', '절대적 상대주의', '글에 대한 집념' 마지막 문단 203쪽 인용구절 모두 색깔이 옅어서 읽으려니까 눈이 좀 아프네요. 즐찾에 넣고 갑니다.

로시난테 2007-05-16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술님! 안녕하세요. 지적 감사드립니다.*^^*

향기로운 2007-05-17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당선 축하드립니다. 파란여우님의 페이퍼에서도 본 책이네요. 즐찾하고가요^^
 
오 하느님
조정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오 하느님>의 작가 조정래. 태백산맥에서부터 시작된 '민족의 회한'의 문학이 여전히 계속됐다. <오 하느님>이라는 탄념은 그 뒤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이어지게 만든다. <이것이  인간이란 말입니까>.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였던 프리모 레비가 쓴 <이것이 인간인가>가 뒤이어 떠오른 이유다. 안타깝게도 <오 하느님>의 비극은 '배타적 쇼비니즘'으로, <이것이 인간인가>의 비극은 '시오니즘의 폐쇄성'으로 돌변했다.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그러나 노란 얼굴의 독일군 포로는 그의 인적사항을 기재하던 미군 병사의 사무적이고도 신경질적인 질문에 단 한마디도 답할 수 없었다. 그는 히틀러의 독일어는 물론, 그가 속해 있던 동방대대 795부대의 웬만한 다른 병사들처럼 러시아어도 할 줄 몰랐다. 영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일본군이었지만 일본어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그 누구도 모르는 언어, 일찌감치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되어 모국어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동북아시아 변방의 조그만 반도 출신의 소작농 아들이었다.”(p.219*<오 하느님>에 실린 문학평론가 복도훈의 평론<노르망디의 실종자> 중에서)

 To. 신길만 선생께.

 생전 한 순간도 편안한 적 없었던 당신, 저승에선 안녕하신지요. 당신은 참으로 기구한 삶을 살았고, ‘개 같은’ 죽음을 당하셨더군요. 당신의 실제 모델이던 양경종 씨는 92년까지 미국에서 살다가 생을 마쳤다는 설이 있다는데, 조정래 씨가 그린 당신의 마지막은 그야말로 ‘개 같았어요.’ 저속하기 그지없는 표현이라 화내지 마세요. <오 하느님>의 마지막 장, 그러니까 당신의 죽음을 그린 지면을 덮고, 전 한숨을 쉬며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 ‘개 같은 죽음이구나…’ ‘비참한’, ‘얄궂은’, ‘비루한’ 등등의 형용사는 당신의 죽음 앞에서 너무 미약한 단어라고 전 생각했던 거예요. 
 
 당신은 피식민 국가 조선에서 살았던 미천한 존재였어요. 당신이 일본군에 “강압적인 ‘지명’”(p.27)당했을 때가 스무 살이었다지요. 장가를 갈 수 있는 나이였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일찍 장가가 입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 또 아버지와 똑같이 평생 가난 속에서 허덕일 것”이 분명해 “논 한마지기라도 장만할 때까지 장가를 미루고, 뼈 휘도록 일하기로 했”었다지요. 그런데 “덜컥 지원병 지명을 당하고 말”(p.13)았던 거고요.

 당신은 몽골에서 있었던 노몬한 전투에서 소련군에게 잡히고 말았어요. 소련군의 포로로 있던 도중 당신은 소련군으로 복무할 것을 제안 받았지요. 말이 제안이지, 사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고요. “길은 외길이었다. 소련군이 되지 않으면, 다시 일본군으로 돌아가야 했다.”(p.83) 이후 당신은 소련인 신 미하일이 돼, 독일군을 상대했어요. “독일군이 일제히 소련을 공격하기 시작”(p.94)함에 따라 혹독한 시베리아를 횡단하였고요. 그리고 모스크바를 사십 킬러미터 뒤에 둔 소련의 한 지역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당신은 독일군에게 잡혔어요.

 독일군 포로가 된 이후의 생활은 예전 소련군 포로였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지요. 조금 더 고역스러운 잡일에 시달렸고 쓰레기보다 못한 음식을 집어삼켜야 했지만, 그 신세의 얄궂음이란 똑같은 것이었다고요. 게다가 소련군과 마찬가지로 독일군도 당신에게 명령을 했다지요. “좋아. 그럼 우리 독일군으로 근무하도록 하라!”(p.165) 당신은 별다른 주저 없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p.166)라고 대답했어요. “여기서 살아나가야” 했으니까.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야” 했으니까 말이죠. “대답을 하는 순간” 당신은 “이 생각만을 꽉 붙들고 있었”(p.166)다지요.

 당신은 노르망디에 갔어요. “덴마크라는 나라에서부터 스페인이라는 나라의 해안까지 몇천리에 걸쳐 ‘대서양 방벽’이라는 것을 설치하고 있”(p.179)던 독일군에 합류한 것이예요. 쇠기둥을 박고, 벙커를 만들던 도중 노르망디전투에 투입된 미군에 의해 또 다시 포로가 됐어요. 미군 포로 때의 생활은 예전과는 달랐다지요. “아무런 통제나 간섭없이 자유로웠다”(p.187)고 해요. 그래서 당신은 “언젠부턴가, 다른 나라에 비해 포로를 월등하게 사람 대접 해주는 미국에 강한 기대를 품”(p.187)게 됐고요. “이런 나라라면, 언젠가 전쟁이 끝나면 바로 우리나라로 보내줄 것 같았”(p.188)다고 여겼다지요. 당신과 동료들은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썼습니다. “우리는 쏘련인이 아니다!”, “우리는 조선인이다!”, “우리의 국적을 고쳐달라!” 그렇지만 당신의 요구는 쇠고랑은 묵살됐어요. “유감스럽지만 국적을 고칠 수 없다. 그건 쏘련의 권한이지 우리 미국의 권한이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간결한 말 한마디에 의해 말이죠.

 "독일의 패색이 짙은 가운데 얄타 회담이 열렸”고 “스탈린은 미국에 수용되어 있는 독일군 포로들 중에서 국적이 소련인 자들을 전부 소련으로 송환해줄 것을 요구했”다고 해요. “미국 대통령은 그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고요. “독일군에게 잡힌 미군 포로들이 동유럽의 여러 수용소에 칠만오천 명쯤 갇혀 있었는데, 이제 그 지역이 소련의 점령하에 있었던” 까닭이지요. “미국은 자국민 포로들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급선무였”(p.207)던 거예요. 당신은 배를 다시 소련으로 갔어요.

 “(중략)“여기서 삼십 분 쉬어 간다. 모두 내려 트럭선(線) 안에서 소변도 보고 자유롭게 쉬어라”
   장교들이 트럭에서 내리는 포로들에게 일렀다. 사병들은 트럭 사이사이에 서서 포로들을 분지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나무들 많은 야산으로 에워싸인 그 분지는 수많은 포로들이 용변을 보면서 휴식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마지막 트럭에서 포로들이 다 내리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타당탕탕탕탕……
  타당타타타타……
  드득드드드드……
  야산 숲 속 여기저기서 기관총 난사가 시작되었다. 한가롭게 쉬고 있던 수많은 포로들은 아우성과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지고 엎어지고 뒤집어지고 나뒹굴고 뒤엉키고 있었다."(p.213)

 작가 조정래는 당신의 마지막을 이렇게 묘사하며 끝냈어요. 당신의 운명처럼 기구하게, 허망하게 말이죠. 


 "이 남자는 일본군으로 징집되었다. 1939년 만주 국경 분쟁 당시 소련군에 붙잡혀 붉은 군대에 편입되었다. 그는 다시 독일군 포로가 되어 대서양 방어선을 건설하는 데 강제 투입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다시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 포로로 붙잡혔을 당시 당시 아무도 그가 사용하는 언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한국인으로 밝혀졌으며, 미 정보부대에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했다."

 

신길만 선생님. 작가 조정래를 통해 당신의 이야기를 접한 후 전 '민족주의'에 대해 생각했어요. 당신의 행로 중간 중간 강력히 자리매김하고 있던 '민족의 끈'을 봤어요.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것들 말이죠. "그런데 그들이 놀랄 일이 벌어졌다. 조선말을 듣고 온 것은 강명수만이 아니었다. 셋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신길만과 천일호가 따로 찾으러 나서고 어쩌고 할 것이 없었다. 그렇게 모인 사람이 모두 열한명이었다. 그들은 서로서로 손을 마주 잡는 순간에 십년지기가 되고, 한 덩어리가 되었다."(p.70) "신길만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꾸벅해 인사를 했다. 그 사람이, 이름도 모르는 그 사람이 그렇게 반갑고도 고마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같은 조선 사람이라는 것이 이렇게 밝은 햇살이 쏟아지는 것처럼 마음 환해지고, 가슴이 뜨겁게 울렁거리도록 반가운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리고 무엇이 고마운지 모르면서도 그저 고맙고, 고마웠다. 그 사람이 틀림없이 이 곤궁에서 구해줄 것만 같은, 그가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주리라는 믿음이 고마운 마음을 일으키고 있었다."(p.56)

 그렇습니다. 당신은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들에게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조선'이라는 '민족의 끈' 때문에 말이죠. 실제로 비슷한 습관을 공유하고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은 그야말로 강력한 '상상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주의에 대한 자신의 책 <상상의 공동체 :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8세기 말경에 이 민족주의라는 문화적 조형물들이 서로 관련이 없는 역사적 동력들이 복잡하게 '교차해서' 나온 우발적인 증류물로 창조되었지만 일단 창조되자 그것은 아주 다른 사회적 환경에 다양하게 의식적으로 이식될 수 있는 '조립물'이 되었으며, 여러 종류의 정치적*이념적 유형들을 통합하고 이 유형들에 흡수될 수 있었다."(p.23)

 앤더슨의 말처럼 민족, 민족성, 혹은 민족주의는 "'정치적으로는 위력이 있는 반면 철학적으로는 그 내용이 빈곤하고 일관성마저 결여하고 있"(p.24)는 게 사실입니다. 즉 민족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어떠한 '정치적, 이념적 유형'들과 통합됐을 때 매우 강력한 행위 동인으로 작용합니다. 당신의 행동은 피식민지배 상황의 특수한 정치적 유형이 '민족의 끈'을 공고히 한 셈이지요. 실제로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와 결합하여 '쇼비니즘'의 광기로, 피식민국가의 해방의식과 결합해서는 민족자결주의로 탈바꿈합니다. 반론의 여지가 없진 않으나 우리나라의 해방에 '민족주의'가 준 함의는 대단히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 이제 '민족주의는 반역'이 됐다는 사실을 말씀드려야 할 듯 합니다. 혹자는 '좋은' 민족주의와 '나쁜' 민족주의를 지혜롭게 구분하자는 식의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만, 공허한 외침으로 들립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민족주의'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배타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군 아래 일치단결을 강요하는 한민족 이데올로기는 국가에 의해 '밑으로부터의 희생'을 강요하는 기제로, 다른 한편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를 폄훼하는 기제로 쓰이고 있습니다. 또 다른 혹자는 북한의 존재 때문에, 통일의 당위성 때문에 '민족의 가치'를 옹호하기도 합니다. 일견 통일의 당위성을 주장하기엔 민족이라는 관념만한 게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민족', 혹은 '민족주의'는 통일담론에 있어 왕따가 됐습니다.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특수한 조직인 '민족좌파'는 북한의 핵실험을 묵인하고, 민족주의의 긍정성을 보수해 나가야 할 우파는 북한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둘 모두에게서 공히 '민족주의'가 걸림돌이 된 셈이지요.

박지성의 손을 꼭 부여잡은 이영표의 손. 이 때의 상황은 이렇다. 박지성이 '토트넘'의 진영에서 이영표가 가지고 있던 공을 가로챈다. 박지성이 소속팀의 동료인 웨인 루니에게 그 공을 연결하고, 웨인 루니가 득점에 성공한다. 웨인 루니에게 포커스가 맞춰진 사이 박지성이 이영표에게 다가가 미안한 듯 엉덩이를 두들긴다. 이영표는 괜찮다며 박지성의 손을 맞잡는다.

 가슴 찡한 장면이다, 라고 한다. 글쎄. 난 그리 이들의 행동이 그리 가슴 '찡하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박지성이 미안한 감정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은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 서로에게 '미안하거나 괜찮다며 두드리거나' 할 행동을 하지 않았다. 박지성이 미안했다면 '개인적인 친분관계'에 의한 감정이어야 맞다. 그렇다면 이 감정을 풀 장소는 그라운드가 아니라 각자의 방에 있는 '전화기'여야 맞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 장면을 보고 '울컥' 하는 국민들에 있다. 한민족의 이름으로 세계 최고의 리그인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한 두 사람의 '우정'에 감격하는 우리 국민들. 이들과 우리들을 연결하는 유일한 끈은 '한민족'이라는 사실 하나다. 자랑스런 한국인의 자랑스런 우정에 '한민족의 긍지'를 자위하는 것이다. 아무런 '우정'에나 감격하는 건 아니다. 이들의 '프리미어'함이 가미돼야 한다.  이게 무슨 대수랴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저 '우리끼리 만족하며 살면 되지'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다음을 보자.

 



 "태극전사를 응원하는 마음, 배타적 민족주의를 선동한 것인가?? 아니다. 우리 한민족은 9천년 역사동안 한 핏줄 속에 흐르는 홍익인간, 선민사상으로 나라가 어려우면 하나로 똘똘뭉쳐 외환을 극복해낸 민족이다. 뿐만 아니라 지난 역사를 통해 보면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 민족도 보살필 줄 아는 이미 세계화 마인드를 가진 민족이다." - 'SUNDANCE D.SIGN, 웰빙코스님 블로그 중에서.

'선민사상'이 대처 뭔가? '배타적 민족주의'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다른 민족보다 깨어있다는 '선민의식'이 배타성을 불러오는 것 아니냔 말이다. 게다가 '나라가 어려우면 하나로 똘똘뭉쳐'야 한다는 민족의식이 어디로부터 비롯됐느냐도 생각해 볼 문제다. 어디서 많이 봐온 홍보문구 아닌가? '힘들수록 뭉쳐야 한다'는 밑의 희생을 강요하는 국가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니다. 붉은 악마의 옷을 입고 대한민국을 응원하는 건 신나는 일이다. 그러나 이 '신남'은 '놀이'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의 '민족주의'는 '국가'와 결합해 '국가주의적 도구'로 변모하기 십상이다. 그리고 이 국가주의는 종종 우리에게 국가 아래 단결할 것을 강요한다. 국가를 정점으로 한 '종적 단결'은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흐리게 만들어 이건희와 전태일을 같은 층위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종적 단결' 아니라 '횡적 연대'다. 

민족주의에 관한 가장 큰 문제점은 앤더슨이 지적한 다음으로부터 비롯됩니다. "민족은 공동체로 상상된다. 각 민족에 보편화되어 있을지 모르는 실질적인 불평등과 수탈에도 불구하고 민족은 언제나 심오한 수평적 동료의식으로 상상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지난 2세기 동안 수백만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제한된 상상체들을 위해 남을 죽이기보다 스스로 기꺼이 죽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 형제애이다." 앤더슨이 이 지적은 민족의 이름으로 전쟁에 동원된 경우를 상정한 듯 보이지만 현재는 전쟁의 자리를 '국가경제'가 대신하고 있습니다. IMF를 불러오게 한 원인의 분석 없이 국민의 희생을 강요한 것을 보세요. 민족의 힘을 믿겠다는 상투적인 선전구를 동원해서 말이지요.

최근엔 한-미 FTA가 타결됐습니다. 또 '민족의 힘을 믿겠다'는 얘기를 합니다. 국민을 무한경쟁의 사지로 몰아넣고, '민족의 힘'을 믿겠다니요. 경쟁에서 낙오된 이들은 스스로의 힘이 부족한 것이며, 이는 자기 책임으로 귀결된다지요. 임지현의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는 아포리즘은 그래서, 맞는 말이 됐습니다.

물론, 선생님. 당신이 살았던 시대의 민족주의를 간과해선 안될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이제 그 시기 민족주의는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아야지, 현재의 발목을 잡아선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피식민지를 견뎌내게 해 주었던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제 자리'에 돌려놓을 때가 됐다는 말입니다. '위안부 문제' 등 여전히 '과거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굳이 여기에 민족주의가 투입될 필요가 없습니다. 예컨대 미국의 '위안부 조사 위원회'는 민족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도 그 시기의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대해 근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민족주의는 이제 기록으로 남아야 할 때라는 말입니다.  

 이 점에 당신의 비루함을 기록한 조정래의 <오 하느님>은 가치가 있습니다. 역사는 강자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경향이 짙어, 삶의 밑바닥에 있었던 당신의 삶은 '한 줄' 따위로 정리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조정래의 다음과 같은 말이 큰 울림을 주는 이유입니다. "언제 어느 때나 문학은 인간에 대한 탐구다. 역사는 그 안에 포함된다. 인간을 응시할 수록 거듭하여 인간에 대한 질문과 마주 서게 된다." 조정래의 민족문학이 여전히 유효한 건 '역사 속에서 희생당했던 인간에 대한' 탐구 정신을 놓치고 있지 때문인 듯 보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슨 뜻인지를 묘사하던 대목에서 코끝이 매워질 정도로 찡했습니다. "니 이름을 왜 길만이라고 지었는지 아냐? 길할 길(吉)자, 일만 만(萬)자, 니 평생 좋은 일만 있으라고 그런 것이다. 사람이 살면서 이름 덕도 보는 것잉게, 이름 믿고 무슨 일이고 열성으로 해야 혀." 억울하게도 당신의 이름은 이승에서 단 한번도 당신의 삶이 돼주지 못했다지요. 지금 계신 그 곳에선 이름 덕 보며 사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럼 이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진중권, <호모 코레아니쿠스*웅진지식하우스>

내 편견일 수 있겠으나, 진중권의 책은 별다른 고려없이 사는 편이다. 나에게 그는 그야말로 이름 하나로 책의 내용을 보증하는 확실한 보증수표인 셈이다.

내가 좋아하는 논객인 '고종석'과 비교해 본다면 진중권은 사실 '되바라진' 경향이 있다. '싸움닭'이라는 별칭에서 알 수 있듯, 그의 비판엔 에누리 혹은 에티켓이 없다. 예전엔 상당히 거슬리는 부분이었는데, 지금 생각컨대는 그럴수도 있겠다, 싶다. 그도 그럴것이 예전 그의 되바라짐은 대부분 지독한 보수꼴통에 대한 '거침없는 하이킥'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거침없는 표음'을 상당히 눅인 것처럼 보인다.

미국에 어학연수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단순히 어학만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미국을 고집하진 않았을 터. 그 때 내가 가진 돈은 전세방에 묻어둔 700만원의 보증금이 다였다.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으나 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 세기가 다 지나도록 압도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세계 최강국 미국을 알고 싶다는 욕구가 컸던 게 제일 큰 이유였다. 귀국한 지 2년이 훌쩍 지난 지금 그 때의 생각을 복원하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애당초 그 짧은 시간동안 미국을 관찰해보겠다는 내 대책 없음이 문제다.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이 이물감으로 얼핏 기억에 남듯, 이색적인 생활방식에 대한 당시 내 사고의 편린이 설핏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내가 보았던 이색적인 풍경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1. 내가 약 4개월 동안 체류했던 애틀란타는 미국의 전체 도시를 통틀어서도 교통상태가 불량한 곳으로 유명하다. 출퇴근 시간 도로 곳곳엔 상습정체구간이 끝없이 늘어져 있고, 또 웬 도로공사는 이곳저곳에서 계속되는지. 도로상태만 보자면 서울의 여느 곳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하지만 병목을 풀어가는 방식이 이 둘을 가른다.

 

한국에서는 다들 알겠지만 ‘파란불 진입, 빨간불 정지’가 제1원칙이다. 교차로에 이미 차가 꽉 들어차 더 이상 진입할 구석이 없음에도 파란불에는 우선 차머리를 들이민다. 심지어는 빨간불인 상황에서도 교차로의 혼잡함을 틈타 차를 진입시키는 운전자도 있다. 순식간에 도로는 얽히고설킨 실타래처럼 엉망진창이 돼 버린다.

이에 비해 애틀란타에서 병목을 푸는 제 1원칙은 ‘정지선 대기’다. 파란불이 들어와 있더라도 교차로가 혼잡하면 무조건 정지선에서 기다린다. 금세 바뀐 빨간불 탓에 몇 분을 더 기다려야 하지만 보다 분명한 점은 다음 턴엔 그 교차로를 통과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도로엔 항상 차들로 북적대지만 이들의 제 1원칙은 허물어지는 경우가 없다. 파란불 진입이라는 순간적인 이해에 집착하는 사회와 약간의 기다림으로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전체적으로 공유된 사회는 이처럼 다르다.

 

#2. 역시 애틀란타에서 있었던 일. 내가 가지고 갔던 700만원은 예상처럼 게눈 감추듯 사라졌다. 순전히 잠자리가 공짜로 보장된다는 이유 하나로 난 한국인 carpenter(목수)의 보조수가 됐다. 속된말로 노가다판에 들어간 것이다. 물론 불법이었다. 그러나 부시도 알고, 체니도 알고, 우리 모두 알듯이 미국은 불법체류자들이 먹여 살리는 국가다. 풍요한 사회에 진입한 국가가 폼 안 나오는 직업을 대신해 줄 불법인생을 필요로 한다는 건 익히 아는 상식이다. 작업현장에 가면 근엄하게 오더를 내리는 소수의 Jack들이 있고 이 명령에 못질, 톱질에 열심인 Mr.Kim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 김씨들과 같은 신세의 산쵸들, 즉 히스패닉이 있다. 

 

이들이 작업장에 오자마자 하는 일은 손에 쥐고 있던 카세트를 켜는 것이다. 이들의 라틴은 흥겨운 구석이 있으나 몸을 부리는 일에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이에 반해 우리 김씨들은 쉴새없이 손을 놀린다. 몸을 재게 부릴수록 하루에 처리할 수 있는 집의 수가 늘어나며 이에 비례해 주머니가 두둑해짐은 물론이다. 무리하게 받은 오더를 채우기 위해 야근을 자청하고, 토․일요일도 가리지 않는다. 이쯤되면 산초들의 정시퇴근과 자진 5일근무가 부러울 따름이다. 내 사수는 마치 ‘습관’처럼 일을 하곤 했다. 그의 악다구니 근성은 그만큼 몸에 자연스레 배어 있었다. 그리고 아주 가끔씩 일에 지칠 때면 쪽빛 대서양 바다와 야자수나무가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는 미시시피의 한 해안에서…‘카지노’를 즐겼다. 2박 3일 내내. 바다 내음 한번 들이쉬지 않고.


 돈을 벌 요량으로 애틀란타로 옮기기 직전,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봤던 '남북전쟁 재연'광경을 찍은 사진이다. 싸이월드에 올린 사진이었는데, 이 사진 밑에는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아놓았었다.
"우연히 미국의 civil war를 재연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는데...요즘 들어 부쩍 더워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꽤나 많은 사람들이 나왔고, 그들 중 대부분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수고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들이 내세우는 노예해방이나 자유, 평등, 등등의 가치 이면에 숨겨져 있는 civil war의 본성을 아는 이가 이들 중 얼마나 될 것인가."

당시 난 미국에 대한 반감이 극도에 달했을 때였다. 지금도 뭐 딱히 미국에 대한 내 감정이 그리 호의적이진 않다. 다만 배울 건 배워야겠다는 '용미'를 어설프게 습득했을 뿐. 이 사진을 보니, 이들의 '국가주의적 면모'도 어렸을 때부터 '전쟁 재연'이라는 '군대화'를 거쳐 형성된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본다. 

 

“‘국민성’, ‘정체성’보다 이 책의 의도에 더 적합한 것이 있다면, 아마 ‘하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일 것이다. 우리말로 흔히 ‘습속’이라 번역되는데, 거칠게 말하면 특정 사회 성원들의 사고방식, 감정구조, 행동양식의 총합이라 할 수 있다.(중략) 모든 인간은 같은 ‘류’로서 이른바 공통된 ‘유적’ 특성을 가지나, 특정 사안에 대한 생각, 특정 사건에 대한 느낌, 특정 자극에 대한 반응은 민족에 따라, 시대에 따라 상당히 다르게 나타난다. 인간의 몸에는 타고난 자연의 바탕 위에 사회적,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층위가 얹혀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목적은 한국인의 몸에서 그 ‘구성된’ 층위를, 다시 말하면 한국인의 하비투스를 드러내는 데에 있다.”(pp.11-12)

 

진중권이 책을 냈다. 습관처럼 책을 샀다. 진중권. 이름 하나로 책의 내용이 보장되는 몇안되는 필력가 중 하나다. <호모 코레아니쿠스>는 한국인의 몸에 아로새겨진 습속을 드러낸 글이다. 이를 위해 저급 단어인 ‘국민성’ 대신, 전체주의적 발상이 묻어나는 ‘정체성’ 대신 ‘하비투스(habitus) 개념을 끌어들였다.

 

이 책에서의 한국인의 습속, 즉 호모 코레아니쿠스는 ‘근대화’, ‘전근대성’, ‘미래주의’가 한 몸에 뭉뚱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서양에 비해 너무 급속하게 진행된 근대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처럼 근대화가 압축적으로 진행된 사회에는 종종 전근대와 근대의 시간 축이 공시적으로 존재하게 마련이다.”(p.110) 그리고 이 근대화 과정은 호모 코레아니쿠스들을 ‘산업전사’로, ‘반공투사’로 만들었다. 군대화가 곧 근대화였던 셈이다. “산업화가 이루어지던 1970년대에 노동자는 일터에서는 ‘산업전사’였고, 일터 밖에서는 ‘반공투사’였다. 이 군대의 은유에는 좌우의 차이가 없어, 1980년대 좌익들이 즐겨 부르던 ‘인터내셔널가’의 한국어 버전은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라는 군사적 은유로 시작한다.”(p.32) 전근대적 타성에 젖어 있던 한국사회를 ‘근대적 군대’로 바꾸기 위해서는 전면적 인간개조가 필요한 법. 그리하여 박정희 ‘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제는 제도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개인에게 있는 것이다. 또한 민족 운명의 공동체라 하더라도 역시 민족의 구성 요소는 개인이다. 우리가 차제에 인간 개조를 부르짖고 민족적 자각을 요청하는 소이도 바로 여기에 있다.”(p.25)

 

이 책에 소개된 조형예술 사진. 압축적 근대화를 온몸으로 감내한 한국인의 자화상은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항상 '더 나은 미래'를 좆아 끊임없이 손을 내밀지만, 사실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헐레벌떡하는. 원래 '더 나은 미래'는 허구다. 오늘 생각한 '더 나은 미래'가 내일 이루어진다 해도, 우리의 성장 일변도 의식은 '더 나음'을 요구하기 때문에 말이다.

호모 코레아니쿠스들은 이 사진처럼 '헐겁다.' 남루한 회사 옷차림에 호모 코레아니쿠스들.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이들을 가냘프게 만든다.  

 마르크스는 '종국에 노동은 유희의 형태'로 온다고 말했다. 진중권 역시 미래의 노동은 '유희적' 성격을 지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대한민국의 노동은 '유희를 위해 온 몸을 바치는 노동'이다. 아니, 극단적으로 유희 없는 노동만 가득한 노동. 노동을 위한 노동 일꾼들이 바로 우리들, 한국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개조 프로그램도 뼛속 깊이 박혀 있는 ‘하비투스’를 쉽게 바꿀 순 없는 노릇이다. 우리의 근대화는 전근대적 습속과 공존하는 특이함을 보인다. 요컨대 일반적 의미의 근대화는 ‘합리적 계산능력’이 행동양식의 주된 근거로 활용되는 것을 말한다. 냉철한 이성에 근거한 경제인이 합리적 인간의 표본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양식은 이성적이라기보다는 정념적이다. 한국인을 묘사하는 단어로 자주 쓰이는 것은 “냄비 근성을 포함, 강인함, 활력, 승부 근성, 도전 정신, 자신감, 대담함, 빨리빨리 문화, 신바람, 악바리 근성, 잡초 근성, 거침, 격정, 난폭함, 떼거리 근성 등”(p.84)이다. 정념의 홍수에 빠져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앞서 서두에 소개한 예를 주목해 보자. 우리의 ‘파란불 진입’은 합리적 이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가, 아니면 나 하나 빨리빨리 가보겠다는 정념의 소산인가. 밤잠 못자고, 휴일까지 반납하며 죽어라 일만한 Mr.Kim이 카지노에서 애써 모은 돈을 탕진하는 건 경제적 인간의 모습인가, 디오니소스의 감정인가. 

 

 아이러니한 것은 압축성장으로 기인하는 근대와 전근대의 공존이 우리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 어느 곳보다 앞선 인터넷 문화가 그 증거다. 인터넷에서 범람하는 창조적 상상력의 ‘콘텐츠’들을 보라. 수초 안에 배꼽을 잡게 만드는 동영상이 넘쳐나고, 기지가 번득이는 패러디도 가득이다. 컴퓨터가 야기하는 디지털 문화는 근대적 텍스트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전근대적 그림, 즉 영상의 영역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호모 코레아니쿠스의 한계가 있다. 즉 우리 한국인은 IT 강국이되, 그 사이에 ‘소비’라는 말을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 IT 소비 강국. "프로그래밍을 하는 이들은 문자-수자 코드로 그림을 그리고, 이로써 가상의 ‘창조자’가 된다. 반면에 프로그래밍을 당하는 사람들은 그림을 세계로 받아들임으로써 가상의 ‘소비자’에 머문다.(중략) 한국의 영상문화는 서구처럼 문자문화의 강력한 저항을 받지 않았다. 문자문화의 전통이 약한 게 외려 신속하게 디지털 영상문화로 이행하는 데에 유리한 조건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게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서구는 속도는 느려도 문자문화의 바탕 위에서 서서히 영상문화로 이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자 없는 그림을 선사 시대의 주술적 상상력이고, 문자로 그린 그림은 디지털 시대의 기술적 상상력이다. 우리의 것은 이중 어느 쪽에 가까울까?“(p.209)

 


 이 어찌 유쾌한 상상력이라 하지 않을 수 있는가. 지금 인터넷의 바다에서는 이런 '유쾌함'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우리의 IT가 새지평을 열 수 있는 희망적 조짐이다. 다만 진중권이 우려하는 것은 근대적 이성에 기반한 '텍스트'가 부재하다는 것. '이미지'로만 이루어진 콘텐츠는 '의미없음'으로 이루어진 게 대부분이다. 또한 IT는 '프로그래밍의 생산'보다는 '소비'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다. 물론 텍스트의 부재로 기인한 것이다.  

 

결국 진중권이 말하고 싶은 바는 우리의 몸엔 ‘전근대’와 ‘근대’, ‘미래’의 습속이 교묘히 섞여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신체가 아무리 그로테스크해 보여도 오늘의 한국을 만든 것은 바로 그 몸이다. 다만 그 신체는 급조된 근대화에 따르는 부작용으로 고통받고 있고, 미래로 나아가야 할 시점에서 아직도 과거의 타성에 사로잡혀 있다.”(p.289)는 필자의 우려가 제법 묵직하게 들린다. 필자는 이 우려를 극복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한국은 세계에서도 이런 변화가 가장 신속하고 극단적으로 일어나는 곳. 이곳에서 신체가 받는 중력의 하중은 다른 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하지만 신체는 권력의 생체공학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나, 동시에 어느 정도는 존재미학을 통해 제 스스로 디자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잠재성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자신을 늘 새롭게 디자인하는 신체는 최소한 강요된 유목에 따르는 고통을 적게 받을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유례가 없던 가능성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즉 앞으로의 세기는 ‘새로움’을 디자인하는 시대인 것이다. 근대적 텍스트와 미래주의적 영상이 결합한 창조적 상상력이 그 해답이다.

 

 미래의 동력으로써의 ‘상상력’은 이미 진중권의 이전 저서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이하 놀이)에서 강조했던 바다. <놀이>가 개괄적 이론서라면, <호모 코레아니쿠스>는 그 이론을 한국인에 구체적으로 적용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원체 많은 자료를 가지고 많은 이야기를 하려 했다. 앞에서 소개한 예 이외에도 한국인의 습속이라고 할 만한 수많은 행동양식이 소개된다. 과연 진중권스러운 관찰력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발견이다. 다만 그의 경험칙이 호모 코레아니쿠스의 일반화로 넘어가는 급격한 전환을 지적할 수는 있겠다. 한 사람의 시선은 ‘편견’으로 가득차 있을 수 있으니. 그러나 ‘정교한 이론화’를 결여했다고 해서, 관찰의 표본수가 적다고 해서 그의 주장이 싸그리 부정될 순 없을 듯 보인다. 통계엔 허수가 가득하다는 일반적인 사실을 고려해 본다면, 그리고 진중권이라는 이름이 보증하는 ‘칼날 같은 이성’을 믿는다면 말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리에떼 - 문화와 정치의 주변 풍경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비겁하게도 난 이들을 마음 속으로만 지지하고 응원한다. '세계화', '개방' 이라는 단어는 거역할 수 없는 성역으로 자리매김한지 오래다. 왜 하필 '영미식 개방'이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겠지만 IMF체제에 의해 재정비된 이후 우리나라가 선택할 수 있는 개방의 내용은 극히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미래는 열려있는 시간이며 채워갈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난 이들의 결집 정도가 FTA가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양극화의 간극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것이라 믿는다. FTA찬성론자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언죽번죽 해댄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저력을 믿는다." 경쟁에서 뒤지지 않으려 자기 몸을 생고생시키는 데 이력이 난 국민들의 이력을 믿는단다. 이 어찌 대책없는 책임 떠넘기기냐만은 나 또한 전혀 반대의 이유로 '우리나라 국민의 저력을 믿는다.' 군부독재의 총칼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기어이 '민주주의의 봄'을 만든 우리네 투쟁의 저력을 믿는다는 것이다.

며칠 전 反FTA집회를 마치고 술자리에 합류한 후배녀석에게 난 이런 말을 했다. "난 불가피하다는 이유로 FTA를 찬성하며, 불가측하다는 이유로 反FTA 역시 찬성한다." 그 녀석은 물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물타기식 자세도 어이 없음이거니와, 다른 무엇보다도 난 그의 '사수'였다. 그렇다. 난 그가 대학에 첫 발을 내딛었던 날 그의 손목을 거칠게 부여잡은 채 소위 '투쟁현장'에 끌고간, 녀석의 '사수'였다. 그 녀석과 난 언젠가부터 대화가 뜸해졌다. 그리고 오랜만에 마주한 자리. 녀석은 당연스레 나를 자기와 같은 '편'일 것이라고 여겼을테다. 난 이 지면을 빌려 '커밍아웃'한다. 난 이제 어떤 '편'이나, '주의자' 가 아니라고. 김훈의 언어를 잠시 빌리면 난 '내 사유의 계통없음을 이제 더이상 숨기지 않겠노라고.'

 고종석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글들을 모아 또 한 권의 책을 냈다. <바리에떼>(개마고원*2007). '문화와 정치의 주변풍경'이라는 부제에서 보듯,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주제의 영역을 한정하지도 않았거니와, 신변잡기풍의 이야기도 군데군데 실려있다. 그는 이러한 신변잡기에 대해 우려한 듯 서문('군소리'라는 제목을 달린 서문)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껏 내 이름으로 내보낸 책들이 으레 그랬듯, 이 책 역시 그 짜임에 어떤 체계라 할 만한 것이 없다. 그 비-체계성이 이전 책들에서보다도 사뭇 두드러져, 나는 궁리 끝에 이 책의 표제로 '바리에떼'를 취하기로 했다. '바리에떼'는 프랑스어로 다채로움(곧이곧대로 얘기하자면 잡다함!)이라는 뜻이다. 영어의 '버라이어티'에 해당한다. 왜 하필 프랑스어냐고 따지는 독자분들께는, '잡다함'이나 '버라이어티'라는 말이 한국어 화자들에게 행사할 정서적 환기력을 조금이라도 눅이고 싶었다는 변명을 드리고 싶었다. 이 책은 일종의 버라이어티쇼다.(이하 생략)"    

 고종석, <바리에떼*문화와 정치의 주변풍경>, 개마고원, 2007

  '바리에떼'라는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웬 '겉멋 부리기?'식의 반응을 보였다. 고종석의 얼굴에서 풍기는 '옆집 아저씨'  이미지에 의한 선입견 때문인지, 난 그가 멋부리기엔 전혀 소질이 없거나, 혹은 그런 건 애당초 신경조차 쓰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가 여지껏 낸 책들의 제목을 쭉 훑어보니 또 그런 게 아니었다. 그가 붙인 제목은 그럴싸한 게 꽤 있었다.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2006, 개마고원), <모국어의 속살>(2006, 마음산책), <엘리아의 제야>(2003, 마음산책), <히스토리아>(2003, 마음산책), <언문세설>(1999, 열람원) 등.  인간의 편견이란 이리도 저급한 것이니 싶었다. 그의 넉살좋게 생긴 얼굴에 '촌스러움'을 떠올리는 지독한 편견.

 'Variete', 바리에떼. 프랑스어로 '다채로움'이라는 뜻이란다. 영어로는 버라이어티. 이곳 저곳 흩어져 있던 글을 한 책으로 엮은 터라 글의 소재건, 내용이건, 주제건 참 '버라이어티'하다. 그저 자기 입맛에 맞는 풍경을 골라 읽으면 되지 싶다. 원래 책은 '발췌독'에 쏠쏠한 재미가 있다. 나 또한 이 책의 뒤편에 있는 시평은 내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건너뛰었다. 시는 해석이 곤란한 영역이 아닌가. 라고 나는 또 하나의 편견을 가지고 있다. 

 

 

 필자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난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사유를 들춰내고 싶었다. '바리에떼', 즉 다채로움을 하나로 엮어낼 만한 하나의 꼬챙이를 찾아 이 책 전체의 내용을 엮어보고 싶었다. 원래 단순한 놈이 무식한 행동을 쉽게 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의 다음과 같은 문장을 내 무식함의 꼬챙이로 삼아버렸다.

 "결국 내가 20세기의 역사에서 얻은 교훈은 모든 순수한 것에 대한 열정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순수한 열정이라는 것은 말을 바꾸면 근본주의, 원리주의다. 그것이 종교의 탈을 쓰든, 학문이나 도덕의 탈을 쓰든, 인종이나 계급의 탈을 쓰든 마찬가지다. 순수에 대한 열정은 좋게 말하면 진리에 대한 열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광신이라는 게 별게 아니라 진리에 대한 무시무시한 사랑이다. 그리고 진리에 대한 무시무시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소수파나 이물질을 배제하는 전체주의의 문을 연다."

 고종석. 그는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라 부른다. 그러나 그를 아는 이들, 그의 글을 즐겨 보는 독자들은 그를 '진보주의자'로 여긴다. 그는 또한 스스로를 지독한 '개인주의자'로 소개하지만 그의 사유 곳곳에는 '연대의 껴안음'이 보인다. 그래서 그에게 붙은 '주의자'는 대단히 어색해 보인다. 그는 누구의 '편'도 함부로 들지 않으며, 반대로 누구의 '탓'도 함부로 하지 않는다. 그의 사유는 오롯이 '상식'에 기초한 인간의 나아갈 길을 겸손하게 말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봐도 '배타적 개인주의자'로밖에 보이지 않는 복거일을 대할 때를 보자. 복거일은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라는 글을 통해 소위 '친일 부역자'에 대한 변호를 시도했다. 고종석은 이 책의 <식민주의적 상상력*복거일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에 부쳐>라는 글에서 복거일의 친일 불가피론(그 시대의 친일은 시대의 정황상 어쩔 수 없었던 측면이 있었다는 식의)과 이른바 근대화론(일제 시대를 통해 우리나라는 비로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도입할 수 있었다는 식의)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그런데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면 겸손함이 지나쳐 그의 비판을 오히려 무디게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들 정도다. "나는 이제 연부역강하다고는 할 수 없을 혜안의 문필가가 왜 굳이 이 책에 소중한 열정을 지불했는지 쉬이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저자의 글과 책을 여느 독자에 견주어 큰 저항감 없이 거의 다 따라 읽어왔다고 자부하는 나로서도 <변호>의 '급진적 파격'에 흔쾌히 공감하기 어려웠다는 뜻이다. 부분 부분의 세목들에서는 동의할 수 있는 점이 적지 않았으나, 전체로서의 이 책의 논지에 나는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요컨대 나는 이 책이 불편했다. 그것은 그토록 버리고 싶어했던 민족주의를 내가 아직도 말끔히 씻어내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p.88)

 민주당 분당에 이은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당의 가벼움"(p.184)이라 일갈하면서도, 그는 끝내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을 "우리가 지켜내야 할 참여정부"(p.196)라며 보듬는다. 이쯤되면 그 역시 사유의 '계통없음'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의 '계통없음'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적어도 내가 볼 때 그의 계통없음은 '주의', 'ism', '편먹기'에 대한 거부에서 비롯된 것일 뿐, 그의 사유는 일정한 '흐름'을 지니고 있다. '상식'. 우리가 뻔히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이유(이 중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주의'에 대한 집착일테다)로 거부되는 상식에 기반한 글을 그는 쓰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강준만은 '책임의식'에 의한 글쓰기라고 봤으며, 이에 바탕한 고종석식 '진보주의'를 주장했다.

 난 언젠가부터 '이념'이라는 것에 짙은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과연 모든 사회현상을 명쾌히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생각이라는 게 존재하느냔 말이다. 왜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은 꼭 대체복무를 인정해야 하며, 주한미군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사람은 왜 북한에 대해 전향적인 자세를 취할 수 없느냐는 말이다. 왜 FTA를 찬성하는 사람은 反FTA 깃발을 들 수 없느냐는 거다. 20세기를 진득이 살아낸 우리들의 사유가 언젠가부터 '줄서기'를 강요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사건이 있고, 사건을 해석하는 상식이 있고, 이것에 기반한 이념이 있는 게 아니라 이념이 있고, 그 이념으로 해석하는 사건이 있고, 해석된 사건에 의해 상식이 결정되는. 이념에 의한 줄서기. 고종석의 글이 좋은 이유는, 그가 겸손한 자세를 매사 일관되게 유지하는 까닭은 그가 모든 사회현상의 이면성을 숙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념에 의한 줄서기에서 단호히 벗어나 각자의 '바리에떼'(다채로움)을 충분히 이해하려는 자세는 그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겸양이다. 그래서 난 '고빠'다.

 

한국일보 논설위원이자 소설가 고종석. 그의 글은 하도 '전방위적'이라 하나의 타이틀로 소개하기 버거운 구석이 있다. 최근엔 한국일보에 '언어학'에 관련된 깊은 사유를 보여주고 있으니 이를 어찌 '소설가', '사회비평가' 라는 걸로 한정할 수 있겠는가.  헐거운 단어이지만 '작가' 정도가 그나마 무난할 듯.

 이 사진을 보니 고종석의 이미지에 대한 내 편견이 무리는 아닌 듯 보인다. 갈수록 민둥해지는 머리와 이에 비해 갈수록 평수를 넓혀가는 이마가 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 내는 저 후덕함이여. 딱 옆집 아저씨 풍이다. 저자에겐 미안한 편견일 수도 있지만 난 이래봬도 '고빠'다. 고종석 오빠. 홧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