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에떼 - 문화와 정치의 주변 풍경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비겁하게도 난 이들을 마음 속으로만 지지하고 응원한다. '세계화', '개방' 이라는 단어는 거역할 수 없는 성역으로 자리매김한지 오래다. 왜 하필 '영미식 개방'이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겠지만 IMF체제에 의해 재정비된 이후 우리나라가 선택할 수 있는 개방의 내용은 극히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미래는 열려있는 시간이며 채워갈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난 이들의 결집 정도가 FTA가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양극화의 간극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것이라 믿는다. FTA찬성론자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언죽번죽 해댄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저력을 믿는다." 경쟁에서 뒤지지 않으려 자기 몸을 생고생시키는 데 이력이 난 국민들의 이력을 믿는단다. 이 어찌 대책없는 책임 떠넘기기냐만은 나 또한 전혀 반대의 이유로 '우리나라 국민의 저력을 믿는다.' 군부독재의 총칼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기어이 '민주주의의 봄'을 만든 우리네 투쟁의 저력을 믿는다는 것이다.

며칠 전 反FTA집회를 마치고 술자리에 합류한 후배녀석에게 난 이런 말을 했다. "난 불가피하다는 이유로 FTA를 찬성하며, 불가측하다는 이유로 反FTA 역시 찬성한다." 그 녀석은 물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물타기식 자세도 어이 없음이거니와, 다른 무엇보다도 난 그의 '사수'였다. 그렇다. 난 그가 대학에 첫 발을 내딛었던 날 그의 손목을 거칠게 부여잡은 채 소위 '투쟁현장'에 끌고간, 녀석의 '사수'였다. 그 녀석과 난 언젠가부터 대화가 뜸해졌다. 그리고 오랜만에 마주한 자리. 녀석은 당연스레 나를 자기와 같은 '편'일 것이라고 여겼을테다. 난 이 지면을 빌려 '커밍아웃'한다. 난 이제 어떤 '편'이나, '주의자' 가 아니라고. 김훈의 언어를 잠시 빌리면 난 '내 사유의 계통없음을 이제 더이상 숨기지 않겠노라고.'

 고종석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글들을 모아 또 한 권의 책을 냈다. <바리에떼>(개마고원*2007). '문화와 정치의 주변풍경'이라는 부제에서 보듯,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주제의 영역을 한정하지도 않았거니와, 신변잡기풍의 이야기도 군데군데 실려있다. 그는 이러한 신변잡기에 대해 우려한 듯 서문('군소리'라는 제목을 달린 서문)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껏 내 이름으로 내보낸 책들이 으레 그랬듯, 이 책 역시 그 짜임에 어떤 체계라 할 만한 것이 없다. 그 비-체계성이 이전 책들에서보다도 사뭇 두드러져, 나는 궁리 끝에 이 책의 표제로 '바리에떼'를 취하기로 했다. '바리에떼'는 프랑스어로 다채로움(곧이곧대로 얘기하자면 잡다함!)이라는 뜻이다. 영어의 '버라이어티'에 해당한다. 왜 하필 프랑스어냐고 따지는 독자분들께는, '잡다함'이나 '버라이어티'라는 말이 한국어 화자들에게 행사할 정서적 환기력을 조금이라도 눅이고 싶었다는 변명을 드리고 싶었다. 이 책은 일종의 버라이어티쇼다.(이하 생략)"    

 고종석, <바리에떼*문화와 정치의 주변풍경>, 개마고원, 2007

  '바리에떼'라는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웬 '겉멋 부리기?'식의 반응을 보였다. 고종석의 얼굴에서 풍기는 '옆집 아저씨'  이미지에 의한 선입견 때문인지, 난 그가 멋부리기엔 전혀 소질이 없거나, 혹은 그런 건 애당초 신경조차 쓰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가 여지껏 낸 책들의 제목을 쭉 훑어보니 또 그런 게 아니었다. 그가 붙인 제목은 그럴싸한 게 꽤 있었다.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2006, 개마고원), <모국어의 속살>(2006, 마음산책), <엘리아의 제야>(2003, 마음산책), <히스토리아>(2003, 마음산책), <언문세설>(1999, 열람원) 등.  인간의 편견이란 이리도 저급한 것이니 싶었다. 그의 넉살좋게 생긴 얼굴에 '촌스러움'을 떠올리는 지독한 편견.

 'Variete', 바리에떼. 프랑스어로 '다채로움'이라는 뜻이란다. 영어로는 버라이어티. 이곳 저곳 흩어져 있던 글을 한 책으로 엮은 터라 글의 소재건, 내용이건, 주제건 참 '버라이어티'하다. 그저 자기 입맛에 맞는 풍경을 골라 읽으면 되지 싶다. 원래 책은 '발췌독'에 쏠쏠한 재미가 있다. 나 또한 이 책의 뒤편에 있는 시평은 내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건너뛰었다. 시는 해석이 곤란한 영역이 아닌가. 라고 나는 또 하나의 편견을 가지고 있다. 

 

 

 필자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난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사유를 들춰내고 싶었다. '바리에떼', 즉 다채로움을 하나로 엮어낼 만한 하나의 꼬챙이를 찾아 이 책 전체의 내용을 엮어보고 싶었다. 원래 단순한 놈이 무식한 행동을 쉽게 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의 다음과 같은 문장을 내 무식함의 꼬챙이로 삼아버렸다.

 "결국 내가 20세기의 역사에서 얻은 교훈은 모든 순수한 것에 대한 열정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순수한 열정이라는 것은 말을 바꾸면 근본주의, 원리주의다. 그것이 종교의 탈을 쓰든, 학문이나 도덕의 탈을 쓰든, 인종이나 계급의 탈을 쓰든 마찬가지다. 순수에 대한 열정은 좋게 말하면 진리에 대한 열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광신이라는 게 별게 아니라 진리에 대한 무시무시한 사랑이다. 그리고 진리에 대한 무시무시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소수파나 이물질을 배제하는 전체주의의 문을 연다."

 고종석. 그는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라 부른다. 그러나 그를 아는 이들, 그의 글을 즐겨 보는 독자들은 그를 '진보주의자'로 여긴다. 그는 또한 스스로를 지독한 '개인주의자'로 소개하지만 그의 사유 곳곳에는 '연대의 껴안음'이 보인다. 그래서 그에게 붙은 '주의자'는 대단히 어색해 보인다. 그는 누구의 '편'도 함부로 들지 않으며, 반대로 누구의 '탓'도 함부로 하지 않는다. 그의 사유는 오롯이 '상식'에 기초한 인간의 나아갈 길을 겸손하게 말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봐도 '배타적 개인주의자'로밖에 보이지 않는 복거일을 대할 때를 보자. 복거일은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라는 글을 통해 소위 '친일 부역자'에 대한 변호를 시도했다. 고종석은 이 책의 <식민주의적 상상력*복거일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에 부쳐>라는 글에서 복거일의 친일 불가피론(그 시대의 친일은 시대의 정황상 어쩔 수 없었던 측면이 있었다는 식의)과 이른바 근대화론(일제 시대를 통해 우리나라는 비로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도입할 수 있었다는 식의)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그런데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면 겸손함이 지나쳐 그의 비판을 오히려 무디게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들 정도다. "나는 이제 연부역강하다고는 할 수 없을 혜안의 문필가가 왜 굳이 이 책에 소중한 열정을 지불했는지 쉬이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저자의 글과 책을 여느 독자에 견주어 큰 저항감 없이 거의 다 따라 읽어왔다고 자부하는 나로서도 <변호>의 '급진적 파격'에 흔쾌히 공감하기 어려웠다는 뜻이다. 부분 부분의 세목들에서는 동의할 수 있는 점이 적지 않았으나, 전체로서의 이 책의 논지에 나는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요컨대 나는 이 책이 불편했다. 그것은 그토록 버리고 싶어했던 민족주의를 내가 아직도 말끔히 씻어내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p.88)

 민주당 분당에 이은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당의 가벼움"(p.184)이라 일갈하면서도, 그는 끝내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을 "우리가 지켜내야 할 참여정부"(p.196)라며 보듬는다. 이쯤되면 그 역시 사유의 '계통없음'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의 '계통없음'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적어도 내가 볼 때 그의 계통없음은 '주의', 'ism', '편먹기'에 대한 거부에서 비롯된 것일 뿐, 그의 사유는 일정한 '흐름'을 지니고 있다. '상식'. 우리가 뻔히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이유(이 중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주의'에 대한 집착일테다)로 거부되는 상식에 기반한 글을 그는 쓰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강준만은 '책임의식'에 의한 글쓰기라고 봤으며, 이에 바탕한 고종석식 '진보주의'를 주장했다.

 난 언젠가부터 '이념'이라는 것에 짙은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과연 모든 사회현상을 명쾌히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생각이라는 게 존재하느냔 말이다. 왜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은 꼭 대체복무를 인정해야 하며, 주한미군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사람은 왜 북한에 대해 전향적인 자세를 취할 수 없느냐는 말이다. 왜 FTA를 찬성하는 사람은 反FTA 깃발을 들 수 없느냐는 거다. 20세기를 진득이 살아낸 우리들의 사유가 언젠가부터 '줄서기'를 강요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사건이 있고, 사건을 해석하는 상식이 있고, 이것에 기반한 이념이 있는 게 아니라 이념이 있고, 그 이념으로 해석하는 사건이 있고, 해석된 사건에 의해 상식이 결정되는. 이념에 의한 줄서기. 고종석의 글이 좋은 이유는, 그가 겸손한 자세를 매사 일관되게 유지하는 까닭은 그가 모든 사회현상의 이면성을 숙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념에 의한 줄서기에서 단호히 벗어나 각자의 '바리에떼'(다채로움)을 충분히 이해하려는 자세는 그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겸양이다. 그래서 난 '고빠'다.

 

한국일보 논설위원이자 소설가 고종석. 그의 글은 하도 '전방위적'이라 하나의 타이틀로 소개하기 버거운 구석이 있다. 최근엔 한국일보에 '언어학'에 관련된 깊은 사유를 보여주고 있으니 이를 어찌 '소설가', '사회비평가' 라는 걸로 한정할 수 있겠는가.  헐거운 단어이지만 '작가' 정도가 그나마 무난할 듯.

 이 사진을 보니 고종석의 이미지에 대한 내 편견이 무리는 아닌 듯 보인다. 갈수록 민둥해지는 머리와 이에 비해 갈수록 평수를 넓혀가는 이마가 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 내는 저 후덕함이여. 딱 옆집 아저씨 풍이다. 저자에겐 미안한 편견일 수도 있지만 난 이래봬도 '고빠'다. 고종석 오빠.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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