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선풍기 좀 고쳐 볼래. 선풍기가 안되니 어째 덥다."
내 앞에 낡은 선풍기를 갖다 놓으시며 할머니가 한 말이다. 할머니가 일본서 쓰시던 거니 일제이긴 하지만, 요즘엔 드문 110V 짜리고, 할머니가 일본서 나오신 게 82년이니 최소한 26년 이상을 써오신 터였다. 집에 있는 110V짜리 플러그에 끼워봤지만 선풍기는 작동되지 않았다. 갑자기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5월 말부터 날이 더웠는데, 선풍기도 없이 어떻게 지내셨을까. 나랑 엄마는 각각 각자의 선풍기가 있고, 특히 더위를 타는 나는 늘 선풍기를 얼굴에 바짝 쏘이며 잠을 자는데 말이다.
"걱정 마세요. 제가 내일 고쳐드릴께요."
다음날 난 출근을 왕창 늦게 했다. 집 근처에 있는 삼성 대리점이 문을 여는 시간-알고보니 10시였다-까지 기다려 선풍기를 샀기 때문이다. 힘 좋고 튼튼한 놈을 골랐고, 가격은 5만원이었다. 착한 일을 한 애들이 다 그렇듯, 나 역시 할머니가 시원하게 밤을 보낼 생각을 하며 혼자 좋아했다. 집에 오자마자 할머니 방문을 열어 선풍기가 잘 도는지를 확인하고자 한 것도 다 그런 까닭, 하지만 선풍기는 할머니 방에 없었다.
"할머니, 선풍기 어디 갔어요?"
할머니는 황당한 대답을 하신다. "난 안만졌다."
그것이 어디 갔나 찾다가 내 방 구석에 예쁘게 놓인 선풍기를 발견했다.
"이걸 왜 여기다 두셨어요?"
"손도 안댔다. 내 것도 아닌데... 너 써라."
짜증이 났다.
"제가 할머니 쓰시라고 사드린 거잖아요. 전 선풍기 있으니까 오늘부터 이거 쓰세요, 네?"
다음날 밤, 선풍기는 여전히 할머니 방에 없었다. 어디 갔나 찾았더니 이번엔 마루 구석이다. 전날과 같은 대화가 또다시 오갔고, 난 선풍기를 할머니 방에 넣고 코드를 꽂아 드렸다.
그저께, 밤 11시가 넘어 집에 온 나는 또다시 선풍기의 행방을 찾았다. 흔적도 안보인다. 여기저기를 찾아다녔지만 집이 넓어서 그런지 도저히 못찾겠다. 십분을 그러고 헤매다 결국 찾아낸 장소는 할머니 방이었는데, 할머니는 그 선풍기를 가을에 들여놓는 것처럼 정성스럽게 싸서 방구석에 놔둔 거였다. 선풍기를 덮은 비닐을 벗기고, 칭칭 동여맨 끈을 가위로 자르며 할머니한테 짜증을 냈다.
“아니 왜 선풍기를 안쓰세요? 더워 죽겠구만.”
옆에 더 높은 집이 있어서 그런지 우리집은 겨울엔 춥고 여름에 더운데, 할머니 방은 상태가 더 안좋다. 근데 왜, 부채는 부치면서 선풍기는 안틀까. 할머니가 선풍기를 다시금 보자기로 덮어놓은 어제, 대체 왜 선풍기를 안쓰냐고 여쭤봤다.
“전기도 아까운데 어떻게 쓴다냐. 너희집 전기라고 막 써서는 안되지.”
이런 비유가 적당할지 모르지만, 말을 물가에 끌고갈 수는 있어도 물을 못먹인다는 말이 있다. 할머니에게 선풍기를 사드리는 건 쉽다. 하지만 할머니가 선풍기 바람을 쐬게 해드리는 건 너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