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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는 그런 곳이 아니야 - 토박이가 알려주는 진짜 제주
김형훈 지음 / 나무발전소 / 2016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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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모으고 독서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하루에 한 번쯤 신간을 구경하기 위해 도서 쇼핑몰을 구경한다. 여름이라 그런지 여행에 관한 책이 많이 보이는데 그중에서도 제주도에 관한 책이 많았다. 최근 유럽 쪽에는 테러 사건으로 인해 관광객들이 해외 여행을 포기하고 국내로 전환하고 있다. 국내 여행의 대표 관광지로 불리는 제주도이기에 그만큼 제주에 관한 책이 쏟아지고 있다.


제주도에 살면서 현재 내가 속한 지역에 관한 일을 하는 나에게 제주도 여행 책이란 목차부터 너무 뻔했다. 애초에 제주 도민을 공략한 책이 아니었겠지만 대부분의 책 속 내용은 거기서 거기라 읽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알게 된 '제주는 그런 곳이 아니야'는 여행객보다는 제주도에 사는 사람을 위해 쓴 책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제주 여행에 관한 일을 종사하는 나에게 있어서도 무척이나 중요하며 현재 내가 사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이 책을 주문하게 됐다.


최근에 읽었던 제주도에 관한 책은 고희범 저의 '이것이 제주다'였다. '이것이 제주다'는 제주 사람들도 잘 모르는 역사와 문화, 자연환경에 대해 알려준다. 그런 점에서 '제주는 그런 곳이 아니야'와 비슷한 것 같았지만 목차를 비교했을 때 두 책 모두 읽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제주는 그런 곳이 아니야' 저자 김형훈 씨는 제주토박이가 아니지만 오래도록 제주도에 살며 현재는 지역 언론사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크게 다섯 가지 주제로 제주도에 관해 이야기해주는데 무엇보다 신화와 역사에 관한 내용이 많이 담겨 제주도에 살고 있음에도 처음 듣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동안 제주도에 관해 많이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어 보니 제주도는 알면 알수록 새로웠다.


첫 번째 장에서는 제주의 산담, 밭담, 올레, 포구, 동자석, 환해장성, 돌하르방, 방사탑 등 제주도에 살면 최소한 한두 번은 만나게 되는 것에 관해 소개됐다. 그중에서도 포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포구가 하나의 관광지나 명소가 아니라 과거 도민들이 죽음마저 불사하고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앞으로 제주도에 있는 여러 포구에 방문한다면 전과는 다른 기분을 느낄 것 같다.


두 번째 장에서는 신흥리 오탑, 대평리, 질지슴, 신지방코지, 썩은섬, 강정동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제주를 알고 싶다면 꼭 들려야 하는 신흥리 마을과 한라산, 가파도, 마라도, 형제섬을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대평리 마을은 아직 가보지 않았기에 꼭 방문하고 싶은 곳이다.


세 번째 장에는 제주도에서도 가장 유명한 오름 중 하나인 용눈이 오름, 철새들이 많이 다녀가는 조개못, 이외 솜반내, 논짓물, 조간대, 금산공원, 한라산, 곶자왈을 소개하고 있다. 각 명소들에 대한 친절한 소개와 함께 저자가 직접 찍은 듯한 훌륭한 사진이 담겨 있어 책을 읽는 내내 한 번쯤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에 따로 메모까지 해 둘 정도였다.


네 번째 장에서는 온평리, 물맞이, 이중섭 문화의 거리, 추사 유배지, 제주해녀, 갈옷, 자리, 제주초가, 신당, 석굴암, 테시폰, 옹기, 제주어, 추자도에 대해 알려준다. 제주도의 역사와 현재까지도 만날 수 있는 여러 문화와 명소에 관해 상세히 알려주며 제주도가 세계자연유산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줬다.


마지막 장에서는 제주 4.3사건, 제주도에 정착한 이주민, 월정리, 원도심에 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제주는 그런 곳이 아니야'를 통해 제주도의 무분별한 발전에 관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제주도의 천연 자연을 지키려고 하기보다는 그저 관광지로서 지역 경제 발전만을 생각하는 것은 나 역시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후에 나의 2세가 태어나 제주도에 대해 알려줄 때 제주의 자연 환경을 오롯이 보여주고 싶다. 여러 볼거리가 가득해 많은 사람들이 구경 오는 것도 좋지만 이곳에서 사는 원주민과 이주민을 위한 보금자리가 훼손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에게 낙원인 제주도는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제주의 환경과 역사를 올바르게 지키고 싶다.


* 기억하고 싶은 구절


- 제주도 하면 올레를 떠올리는 사람이 대다수가 아닐까 한다. 그만큼 올레는 많이 알려졌다. 하지만 올레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올레를 안다는 사람들은 그냥 걷는 길로 여기고 있다. 그건 사단법인 제주올레의 역할이 컸다. 그런데 사단법인 제주올레에서 말하는 올레와 필자가 쓰고 있는 올레는 개념이 전혀 다르다. 제주올레는 '걷는 길'을 말하는 브랜드이지만, 올레는 그와는 다르다. 올레는 단순한 길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공간이다 - 28


- 사람들은 제주바다의 속성을 모른다. 낭만적인 포구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포구를 말이다. 제주바다는 화산섬이기에 다르다. 삶을 위해 필요한 포구는 화산섬이라는 특성상 쉽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제주도의 해안선은 단조롭고 썰물과 밀물의 차이도 크지 않았다. 그런 특징들은 천연적인 포구를 갖추기 어려웠고, 제주사람들이 얼마나 힘을 들여 포구를 만들었는지를 보여준다. 제주인들은 바다를 경영하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며 포구를 만들어갔다. 몸을 던져 숱하게 널린 검은 돌을 등에 지고 날랐다. 담벼락으로, 밭담으로, 혹은 산담으로 쓰였던 돌은 포구를 만드는 데도 쓰였다. 구멍이 뚫린 그 돌들을 하나둘 옮겨 바다를 채우는 작업부터 제주바다의 경영은 시작됐다. 그러나 산업화는 제주만이 가진 포구의 멋을 앗아가고 있다 - 38


- 대부분의 제주포구는 제주사람들의 땀이 배여 있다. 그런데 자연적으로 생겨난 포구도 있었다. 천연포구인 온평리의 쾌성개다. 쾌성개는 탐라국의 기원과 관련 있는 곳이기도 하다. 탐라국의 세 왕자가 세 공주를 맞은 뜻깊은 곳이기 때문이다. 쾌성개는 인공이 전혀 가미되지 않았다. 자연 그대로의 포구였으며, 1960년대까지도 충천도 선적이 이곳에 배를 대고 뭍으로 해녀들을 실어나르곤 했다 - 40


- '내가 만일 동자석을 세운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제주 돌이 사람을 닮고, 제주사람 역시 돌을 닮을 수밖에 없다면 내가 세우는 동자석은 나를 닮을 테니까. 그러나 제주 사람들은 너무 흔한 것이기에 돌이 인간에게 선물한 것들의 의미를 잊고 산다. 때문에 수많은 동자석은 주인을 떠나 다른 데로 흘러가야만 했다. 석공이 그 사실을 안다면, 무덤의 주인이 그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애통해할까. 동자석은 무덤 곁에 있을 때라야 존재 가치가 있는데 말이다 - 46


- 조천읍 신흥리엔 가슴 아픈 전설이 흐른다. 이곳 노인들은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신흥리의 이야기를 가슴속 깊은 곳에서 꺼내줬다. 현용준이 펴낸 '제주도 전설'에도 신흥리 마을지에도 없는 옛이야기다. 신흥마을이 생긴 뒤다. 왜구들이 들락날락했다. 오죽하면 신흥리의 옛 이름이 왜포일까. 주민들은 풍족하지 못한 삶 때문에 바다에 나가 파래, 톳 등을 캐며 생계를 이어갔다. 어느날 한 왜인이 '멤을 거리러' 바다로 나온 박씨를 겁탈하려 든다. 그러자 박씨는 도망치다 볼래낭(보리수나무) 밑에서 죽고 만다. 주민들은 박씨를 위해 그 자리에 당을 만들어 모시고 있다. 그곳이 볼래낭할망당이다. 박씨는 아기를 낳지 못하고 저세상 사람이 됐고, 주민들은 양자를 들여 신흥동 산밭에 하르방당도 세웠다 - 73


- 제주도를 한 바퀴 빙 돌며 만들어놓은 해안도로. 도로가 나지 않은 해안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됐다. 이처럼 제주도를 둘러싼 해안도로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그 반대로 많은 것들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한다. 신흥리의 큰 포구는 해안도로 때문에 사라졌다. 볼래낭할망당에서 동쪽으로 가면 이곳 주민들이 '엉알'이라고 부르는 포구가 나온다. 30~40톤에 달하는 배도 이곳에 댔으며, 전남 강진에서 옹기를 실은 배가 오가기도 했다. 그러나 해안도로가 개통되면서 계곡을 방불케 하던 옛 포구는 영원히 사라졌다. '비배기사막'이라 부르는 모래동산도 양어장이 들면서 사라졌고, 거대한 환해장성도 볼품없는 밭담으로 변하고 말았다 - 79


- 대평리는 중국과의 만남이 서려 있는 곳만큼이나 낯선 이방인 그대로다. 제주에 있으면서도 제주답지 않은 고을이라면 너무 과장됨일까. 한국의 산야는 곳곳에 골짜기를 만들고, 그 골짜기를 따라 마을을 이룬다. 굽이굽이 산을 휘감아 내려가는 도로를 골짜기가 벗삼는 그 맛이 뭍 지방을 여행할 때 나그네들에게 주는 하나의 매력이다. 그런 기분을 대평리에서 느끼게 된다. 아니, 제주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새로움이다 - 82


- 여행이 업이 아닌 이상 그 자체가 일상이 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을 하려면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이 뒤따른다. 어차피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잃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 하는데, 바닷가 여행을 하다가 감기라는 불청객을 맞기도 한다. 감기를 달고 살아가는 사람에겐 전혀 낯선 일이 아니겠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그야말로 팔팔하고 생기 넘치던 익숙함고의 결별이 아닐까 - 87


- '제주도의 푸른 밤'을 찾아 많은 이들이 제주에 온다. 50만 명을 좀 웃돌던 제주도의 인구는 최근 몇 년 사이에 10만 명 가까이 늘어 이젠 60만 명을 넘어서서, 조만간 70만 명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한다. 긍정 부정을 떠나서 많은 이들이 살다 보면 땅이 그 땅 본연의 역할을 하는 게 어려워진다. 땅에 무언가 계속 들어선다는 말이다. 썩은섬도 조만간 그런 운명을 겪지 않을까 해서 우려된다. 섬이 아름다운 이유는 물과 떨어진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 104


- 용당리 바닷가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곳 주민들의 삶은 바다가 지배하고 있다. 원래 용수리였으나 1952년 용수리에서 떨어져 나오며 용당리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용당 사람들이 솔해라고 부르는 바다는 1960년대 들어서야 용당리 것이 됐다. 마을 사람들이 솔해로 나오려면 바다로 난 길을 족히 2km는 걸어야 했다. 마을과 떨어져 있지만 바다를 찾는 이유가 있다. 솔해에서 나는 톳, 천초, 소라 등은 용당마을 사람들을 먹여살리는 소득원이기 때문이다. 솔해가 용당 사람들의 삶을 지탱하는 재원이라면, 솔해에서 뭍으로 나 있는 조개못은 그곳 사람들의 쉼터였다. 가족을 데리고 바다도 구경하고, 갯벌탐사도 벌일 수 있는 그런 곳이다 - 126


- 썰물 때 바다는 공존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사람이 혼자 살지 않듯 사람과 자연도 하나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 우린 그 바다를 메워오기를 수십 차례 해왔다. 바로 내수면이나 공유수면 매립이었다. 바다를 배우면 새로운 땅이 만들어진다. 순전히 사람만을 위한 공간이다. 육지에선 간척사업이라고 하면서 '국토가 늘었다'고 강조해 왔다. 새만금도 그렇게 됐다. 아니, 제주바다도 그렇게 돼왔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각종 개발에 따라, 해안도로의 등장에 따라 바다는 메워지고 있다. "바다가 메워지면 뭐가 좋을까"라고 물어보자. 바다에 시멘트를 실고, 수많은 사람을 갖다놓으면 뭐가 좋은지, 자연은 글자 그대로일 때가 이름값을 한다. 바다를 메우는 것과 바다를 메우지 않고 생태체험을 하는 것 가운데 어떤 게 더 이득일까 - 143


- 겨울바람은 한라산의 남북으로도 서로 다른 광경을 보여준다. 1100도로를 기준으로 한다면 다소 따뜻한 남쪽보다는 북쪽의 눈꽃이 더 아름답다. 북서계절풍은 북쪽의 눈을 날리고, 그 눈은 가지에 하나둘 붙어 눈꽃이 된다. 정신없이 불어대는 바람에 눈밭이 나무에 꽂히듯, 아니 박히면서 만들어지는 게 눈꽃이다. 한라산의 눈꽃은 뭍지방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제주만의 것이기도 하다. 뭍에서 그런 눈꽃을 만나려면 지리산의 새석평전쯤은 가야 한다. 어느 코스로 갈까. 한라산은 코스마다 특색이 있다. 한라산 정산까지 갈 것인지, 그렇지 않을지를 선택해야 한다. 정상까지 간다면 성판악과 관음사 코스를 택한다. 성판악 코스는 한라산 동쪽 주능선으로 다소 밋밋하지만 힘들지 않고 편안하게 오를 수 있다. 관음사 코스는 한라산의 능선과 계곡 등 깊은 맛을 느끼며 등산할 수 있다 - 162


- 정상을 굳이 가지 않는다면 어리목으로 올라 영실로 내려오는 코스를 권하고 싶다. 어리목은 한라산의 서북 방면이어서 겨울철 계절풍을 곧바로 받는다. 따라서 오를 때는 바람을 등지며 갈 수 있지만 내려올 때는 바람을 맞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리목 코스를 이용해 오른 뒤 서남 방면의 영실 코스로 내려오면 바람도 피하고 겨울 산행의 여러 느낌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한라산은 겨울이 좋다. 요즘은 한라산을 오르는 이들이 너무 많아 탈이긴 하지만 한라산이 덜 아프게, 오르는 이들을 통제하는 방법은 없을까 - 163


- 온평리 바닷가는 쾌성개라 부른다. 세 신인이 이곳에 떠내려온 석함을 보고 쾌성을 질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석함이 닿은 포구는 오퉁이다. 그러나 오퉁은 한참 헤맨 뒤 나타난다. 팻말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여기에 사는 이들도 단박에 찾아내지 못하기도 한다 - 174


- 이중섭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서귀포에서 피난생활에 들어간다. 그해 1월부터 12월까지 솔동상 작은 초가의 2평도 채 안 되는 방에서 네 식구가 살았다. 서귀포시는 이중섭이 살았던 초가를 복원했다.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복원된 이 초가는 그의 채취가 묻어 있는 국내 유일의 유적이다. 여기에 놀라운 사실을 하나 더 쓰겠다. 이중섭을 아는 이가 여기 초가에 머물고 있다. 어느새 100세를 바라보는 김순복 할머니다. 우리 나이로 96세인 김순복 할머니는 지금도 정정하다. 서귀포시에서 초가를 매입했으나 할머니는 떠나지 않고 있다. 이중섭의 흔적을 끝까지 간직하고 싶어서일까 - 190


- '조선왕조실록'에 '해녀'라는 단어는 단 한 차레 등장한다. 이때 해녀는 제주의 여성을 말하는 단어가 아니다. 동래부(부산)에 설치된 왜관을 상대로 생선과 채소를 파는 이들을 가리켜 해녀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어쨌든 제주에서 해녀라는 단어는 애당초 없었다. 물질의 의미를 들여다본다면 해녀 스스로가 말하는 '좀녀'가 직업으로서의 물질 행위에 보다 가깝다. '좀녀'로 쓰는 한자는 물질을 하는 기본 요소인 잠수 행위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는 '좀녀'이지만 뭇사람들에겐 '해녀'가 익숙해져 버렸다. 사회적 언어가 돼버린 '해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됐다. 고유 제주어가 사라지다니 너무 아쉽다 - 204


- 해녀들의 도구 가운데 그들의 사고방식을 읽을 수 있는 걸 하나 소개한다. 작은 전복 껍질인 본조갱이가 있다. 해녀들은 잠수로는 으뜸이지만 하염없이 바닷속에 몸을 담가둘 순 없다. 물질을 하다 보면 지치게 마련이고, 숨을 쉬어야 한다. 바다에서 좋은 물건을 봤는데 캐기 힘들면 어찌해야 할까. 그때 쓰는 게 본조갱이다. 해녀들은 미처 캐내지 못한 해산물 곁에 본조갱이를 놔둔다. 그러면 그것을 본 다른 해녀들은 임자가 있는 것으로 알고 건드리지 않는다. 그들만의 불문율이다 - 208


- 조선 초만 하더라도 제주사람들의 배 건조술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그러나 제주사람들의 발은 묶였다. 조선정부가 제주를 뜨지 말라는 '출륙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먼 바다로 나서지 못하는 제주사람들은 테우(떼배)를 만들며 삶을 살았다. 테우를 쓰면서 그물로 뜨는 방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 보니 자리 사냥은 핍박받는 제주사람들의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 선택이 이젠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 자리는 날 것으로, 구이로, 젓갈로 우리 제주사람의 품에 남아 있다. 누가 뭐래도 6월엔 자리만한 게 없다. 제주에서는 '자리'라고 부르지만 그들의 본 이름은 자리돔이다. 맛은 6월 장마철이 최고다. 산란기여서 뼈가 나긋나긋해 뼈째 썰어먹기에 그만이다 - 220


- 지금도 우리 할머니들은 신당을 찾는다. 솔직히 말하면 글쓴이의 어머니도 최소한 1년에 한 번은 신당에 들른다. 이유는 딱 한 가지다. 자식과 손자들이 아무 탈없이 잘살라고 그곳에서 무언가 읊어댄다. 그래야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건 어느 종교에서나 마찬가지다. 구원은 기독교에만 있지 않다. 불교에도, 우리 할머니들이 믿는 민간신앙에도 있다. 경전이 있어야만 종교는 아니지 않는가. 어느 것이나 종교는 하나다. 그것이 제주사람들의 마음 깊숙이 자리한 것이라면 더 그렇지 않을까 - 234


- 족보는 얼마나 믿을 만한가. 이 글을 읽는 사람 가운데 족보를 믿는 사람들은 있을까. 우문을 꺼낸 이유는 계복학이라는 게 '불가지', 즉 알 수 없는 영역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한 세대를 대략 30년으로 잡곤 한다. 본격적인 족보가 만들어진 시기가 17세기, 즉 1600년대이니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이다. 이때 만들어진 족보는 조상을 거슬로 올라가서 만드는데 최고로 올라가더라도 기원년이 시작이다. 세대를 기준으로 하면 고작 60세대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 사피엔스가 세상에 등장한 시기를 지금으로부터 15만 년 전으로 잡는다. 그걸 기준으로 한다면 제대로 된 우리 조상의 세대는 5,000세대여야 맞다. 그러나 계보학적으로는 길어야 60세대이니, 모든 조상의 99%는 알 수 없다는 답이 나오는 셈이다 - 286


- 언젠가는 이주민도 원주민이 된다. 그러기에 제주에 오고자 하는 이들은 제주를 먼저 알고 와야 한다. 제주에 먼저 온 이들도 마찬가지다. 어설프게 제주를 알고, '제주도가 이렇다'고 말을 해서는 곤란하다. 이주민들은 제주에 대한 공부에 열중하고, 나름대로 역작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다 간혹 왜곡도 저지른다. 그런 왜곡을 볼 때 원주민들은 화가 난다. 그러니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제주에 이주를 꿈꾸시는 분, 이미 이주를 해오신 분들이 제주사랑이 넘치는 것은 좋지만, 원주민의 속마음을 우선 이해하려 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자연스럽게 이주민에서 원주민으로 성공적인 탈바꿈을 하게 된다 - 297


- 개발행위는 기억의 파괴를 부르는 일이다. 원도심에서 기억은 무척 중요하다. 기억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가슴에, 머리에 차 있는 생각들이다. 원도심이 화두로 떠오른 건 그런 기억의 저장고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게 뭔가를 했던 일이나 장소에 대한 애착을 갖는다. 그건 추억이다. 자신이 가진 추억을 되새기려고 원도심을 찾는다면 그게 바로 기억의 공간으로서 역할을 한다. 기억은 사라지지만 기억을 보존하는 방법으로는 기억이 지닌 것들을 '있게 놔두는' 것일 수도 있다 -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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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한 스푼
유헌식 지음 / 이숲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사람과 사람이 대화하거나, 영화와 음악, 미술 같은 예술 작품을 보거나, 여행, 운동 등 모든 것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 사람은 철학이라고 하면 어렵고 고리타분한 학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철학은 우리의 삶 속에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내가 책을 읽고 그에 관한 서평을 쓰는 것, 이것도 하나의 생각이고 철학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현재 단국대학교 철학과 교수이신 유헌식님이 철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K라는 사람에게 보내는 일곱 통의 편지이다. K라고 하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성씨인 김씨가 될 것이고, 그것은 바로 독자에게 보내는 철학 편지라고 할 수 있다.


책 속에서 말하는 것은 세상은 '나'와 '나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철학적인 용어로 바꾸면 '자기'와 타자'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은 '자기'와 '타자'의 초점에 맞추어 우리 일상 속에서 철학이 어떻게 관여하고 있는지, 과거의 유명한 서양 철학자의 생각을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답게 다양한 예를 들며 쉽게 가르쳐주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아르키메데스, 뉴턴, 칸트, 니체,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헤겔, 블로흐, 루카치 등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각이 담겨 있고 어린왕자, 피노키오, 로빈스 크루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자신과 세계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재미있게 풀이한다. 이를 통해 쉽게 접하지 못하는 철학자들의 생각을 쉽게 알 수 있어 철학에 입문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그 외에도 형이상학, 이데아계, 로고스, 사유, 모나드, 물자체(物自體), 유물론과 같이 철학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려웠을 법한 전문 지식을 쉽게 설명하고 있고, 더불어 그러한 생각을 통해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철학적인 관점에서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책 제목이 '철학 한 스푼'인 것처럼 저자인 유헌식 교수님이 독자들에게 떠먹여 주는 한 스푼을 통해 철학이란 무엇인지 배워보는 것은 어떨까? 


* 기억하고 싶은 구절


철학자들이 어떻게 세계를 경제적으로 이해했느냐고? 간단하게 말하면 그들은 세계를 '나'와 '나 아닌 것'으로 갈라놓고 이해했던 거야. 너를 중심으로 보면 세계는 'K'와 'K 아닌 것'으로 나뉠 수 있지? 수학의 벤다이어그램에서 전체는 어떤 한 집합과 그 여집합을 합친 것이잖아. 이런 식으로 철학자들에게는 "세계 = '나' + '나 아닌 것'"이야. 인간은 누구에게나 자기 자신에게는 '나'이기 때문에 각자를 중심으로 보면 이 공식은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셈이지. 이 공식에서 '나'와 '나 아닌 것'을 좀 더 철학적인 용어로 바꾸면 '자기'와 '타자'라고 해. 그래서 '세계 - 자기 + 타자'라는 아주 단순한 공식을 얻게 되지. '자기'와 '타자'라는 말을 잘 기억해두렴! 이 용어들은 철학을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거든. - p.11


타자의 정체를 몰라 어찌할 바를 모르틑 상태는 일종의 '혼돈' 상태라고 할 수 있어. 보통 우리는 무언가 마구 뒤섞여 있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태를 '혼돈'이라고 하잖아. 그러니까 타자의 정체를 밝히는 일은 곧 혼돈을 극복하는 일인 셈이지. 그 일은 아주 단순하게 'X is p'라는 문장으로 표현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어. 왜 하필 p냐고? p는 '술어'를 뜻하는 영어 'predicate'의 머리글자야. '그것은 이것이다'라는 주술 관계의 기본형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문장으로 내가 타자인 X를 무엇이냐고 술어화한다는 것이지. 여기서 '술어화'란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다시 말해 규정되지 않은 '무규정적인 것'을 '규정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활동이야. 'X is p'는 그러니까 정체불명의 타자에 대해 내가 무엇이라고 규정하는 활동인 셈이지. 김춘수의 시 '꽃'에서 '내'가 다만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나에게로 와 '꽃'이 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거야. - p.14


'인신론적'이 대상에 대한 인간의 지식과 관련된 내용을 다룬다면 '존재론적'은 인간을 벗어나 그 밖의 것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인간을 포함한 존재 일반을 설명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지. 그러니까 '저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인신론적인 성격을 띠지만, '저것은 어디에서 생겨났어?'하는 물음은 존재론적인 성격을 띠게 되지. 어린아이가 지나가는 기차를 보고 엄마에게 "엄마, 저게 뭐야?" 하고 묻는다면 인신록적인 질문이 되지만, "엄마, 기차는 누가 만들었어?" 하면 존재론적인 물음이 되는 것이지. - p.16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니? 나는 볼펜을 쓸 수 있는데 왜 볼펜은 나를 쓰지 못할까? 말도 안 되는 우스꽝스러운 질문이라고? 그럼 이건 어때? VIP의 경호원들이나 조직 폭력 집단의 행동 대원들이 하나같이 선글라스를 끼는 이유는 뭘까? 이들 현상은 모든 지식 관계의 불평등에 근거하고 있어. 무슨 말이냐고?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나는 볼펜이 무엇인지 알지만, 볼펜은 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의 경우, 우리가 상대방의 움직임을 알아채는 건 눈을 통해서잖아. 그러니 누군가가 몰래 다가서면 경호원은 그의 움직임을 보지만, 그는 선글라스를 낀 경호원이 무얼 보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없다는 말이지. 그럼, 누가 유리한지는 말 안 해도 뻔하지? - p.24


타자의 정체를 규정하는 문제에서 제시했던 'X is p' 기억하지? 이제 'is'에 주목해야 할 때가 온 거야. 'is'는 물론 여기에서 아무 뜻 없이 문법적으로 주어와 술어를 연결하는 be 동사에 지나지 않지만, 그 상징적인 의미는 달라. 위 문장에서 'is'는 연결사 또는 매사로서 기능하고 있어. 인간은 자기와 세계 사이에 항상 연결 끈을 개입시킨다는 거야. 인간은 중간항 또는 매개자 없이 세계와 관계하지 않아. 이 중간항, 매가자를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아니? 바로 '문명'이라는 거야. '문화'도 마찬가지고 - p.44


불의 사용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식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야. 익혀 먹는다는 것은 자연물과 인간 사이에 거리를 두는 행위이고, 이 거리는 '불'이라는 중간자를 통해 확보된다고 볼 수 있어. 그뿐이 아니야. 기후의 변화에 무관하게 늘 안온한 거주 공간, 즉 집을 만들어 인간과 자연 사이에 칸막이를 만드는 행위도 중간자의 개입이라고 할 수 있어. 이와 마찬가지로 옷도 맨살이 바로 외부에 노출되지 않게 인간의 피부와 자연 사이에 있는 인공의 막이지. 이렇게 인간은 자연과 직접적으로 관계하지 않고 항상 간접적으로, 즉 매개적으로 관계한다는 거야. - p.46


아쟈수 열매에 맞은 멧돼지가 쉽게 기절하겠니? 멧돼지는 왜 야자수 열매에 맞고도 끄덕하지 않을까? 야자수 열매는 멧돼지를 쓰러뜨릴 만큼 강력하지 못했다는 건데, 이 '강력함'이란 무얼 의미할까? 그건 매개자인 야자수 열매의 속성이 타자인 멧돼지의 속성과 만나는 데 실패했다는 거야. 더 정확히 말하면 야자수 열매의 속성은 멧돼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속성과 연결되지 못했다는 뜻이지. 요즘 말로 하면 서로 코드가 맞지 않았던 거야. 라디오 주파수가 맞지 않으면 자기가 듣고 싶은 방송을 들을 수 없듯이 코드가 맞지 않으면 자기와 타자는 서로 만날 수 없어. - p.50


인간은 동물과 달리 매개자를 필요로 하고 고안해내는 존재야.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 '으로서' 산다는 것은 매개항과 관계하면서 산다는 것을 뜻해. '매개항과 관계하는 삶'이란 문화적인 것과 관계하는 삶을 뜻해. 이 사실은 인간이 세계의 알맹이와 직접 만나지 않고 항상 그것과 만날 수 있는 통로, 즉 문화적 장치를 갈고 다듬는 데 노력과 시간을 들인다는 뜻이야. - p.69


철학은 세계와 우주의 끝까지 생각하는 학문이야. 세계와 우주에 대해 더는 생각할 수 없는 마지막 단계까지 사고를 밀고 가는, 그래서 세계와 우주가 궁극적으로 어디에서 닫혀 있는가를 탐구하는 학문이지. 물론 물리학, 특히 이론 물리학이 이런 문제로 고민하지만, 철학은 물리학처럼 물리 현상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아. 물리 현상을 넘어서 작동되는 우주의 근복적인 요소나 원리를 찾고자 하는 데에서 철학은 출발했다고 할 수 있어. 동양의 '오행설'에서 金, 木, 水, 火, 土를 삼라만상의 운행의 기본 요소로 삼는다거나 서양의 '사원소(四元素)설'에서 물, 불, 흙, 공기를 우주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로 보는 것, 그리고 동양의 음양의 원리와 서양의 수의 원리 등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 p.75


형이상학을 뜻하는 meta-physics의 meta는 '~다음에'라는 본래의 뜻을 넘어 그 이후에는 '~을 넘어서' 그리고 '~에 대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고, 철학의 이러한 메타적 특성은 철학의 본령을 이루게 되었어. 따라서 형이상학은 경험적인 현상과 지식에 '대해' 이해하고 설명함으로써 이들이 진실로 무엇에 근거하고 또 무엇을 전제하고 있는지, 그래서 경험적인 세계의 설명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어떠한 세계관에 입각해 있는지, 이러한 기초적이고 근원적인 사실을 검토하지. 이를 통해서 형이상학은 경험적인 현상과 지식의 위상과 정체를 밝혀 이들이 총체적인 세계 안에서 지니는 의미를 탐구하는 거야. - p.77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용어'가 이데아의 성격을 띠지는 않아. 로고스와 관련되지 않은 것은 이데아의 성격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야. 무슨 뜻이냐고? 그러니까 세계에 특정한 질서를 부여하는 우주적인 영혼과 관련되어 있지 않은 것에는 이데아가 상응하지 않는다는 거야. 세계의 합리적인 질서에 부합하는 현상에 대해서만 '이데아'라는 말을 붙일 수 있어. 이를테면 '크다' '작다'는 지각적인 사태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이데아가 상응하지 않지만, 어떤 것을 '크다' '작다'고 평가할 수 있는 근거인 '비교'나 '성질'에는 이데아가 상응한다는 거야. - p.82


'생각하는 나'가 있다. 사유가 자아의 존재를 결정짓는다 이 사실은 '생각하는 나' 밖에서 아무것도 끌어들이지 않고도 '나의 존재'를 정립한다는 점에서 소위 '주체 철학'의 여명을 알리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던 것이지. 데카르트 이전에는 인간의 이성이 신에게 물려받은 것으로서 그 자체로 객관적인 존재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미 그렇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그냥 믿을 수 없었던 데카르트는 이제 신의 힘을 빌리지 않고 순전히 인간 자신의 힘만으로 자기가 사유함으로써 사유의 존재를 확보하게 되었어. 그는 인류에게 '사유의 사유', 즉 사유가 자기 자신을 사유한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 거야. - p.107


고양이가 고양이이기 위해서는 개와 구별되는 특성을 지녀야 하고, 이를 개에게 양보하거나 개와 공유해서는 안 되잖아. 그렇지 않을 경우, 고양이의 정체성이 사라지면서 세계는 혼란에 빠지겠지. 그런데 K! 세계를 가만히 들여다봐. 각자는 자기 자신만의 모습으로 자기의 자태를 뽐내면 진행되고 있잖아. 그 이유는 다른 것들과 구별되는 자기만의 선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야. 이렇게 넘어설 수 없는 마지막 선에 의해 닫혀 있는 각자의 자기동일성이 곧 모나드야. - p.114


이성은 인간이 세계와 관계하는 데에서 필수불가결한 매개자다. 그런데 그 매개자는 인간의 주관적인 능력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성격을 띤다. 그 이유는 사유의 원리-질서가 사물의 원리-질서와 일치한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신은 세계를 지을 때 자신의 로고스를 사용하는데, 그 로고스를 인간의 이성에 부여하였을 뿐 아니라 세계 자체를 만드는 데에도 사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성의 보편성'은 모든 인간이 똑같이 이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넘어,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이성적인 질서를 지니고 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이성만을 잘 들여다봐도 그 안에서 세계의 기본 원리를 찾을 수 있다. - p.124


헤겔은 이성을 그 자체로 완결된 원리가 아니라 완결을 기다리는 가능태로 보았으며 완결은 가능태가 현실태로 전환될 때에만 성립한다고 생각했어. 가능태와 현실태에 대한 발상을,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빌려 왔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이행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기본 운동으로 파악했지. 꽃씨가 나중에 꽃이 되는 것은 꽃씨 안에 꽃이 될 가능성을 이미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식이야. 꽃씨가 가능태라면 꽃은 현실태라는 말이지. - p.129


인정을 통해 타인의 삶에 내가 관여하게 되는 일 자체가 실은 앞에서 말한 '자기 되기'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어. 나를 '나'뿐 아니라 다른 '나들'도 인정할 때 참된 '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야. 자기는 결국 자기 자신만으로는 자기가 될 수는 없어. 그런 점에서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거쳤던 '자기 되기' 전략은 일면적이라고 할 수 있지. - p.148


무한정 열려 있다는 것은 실은 자기 주위의 모든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다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지. 이러한 상황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가 과연 참된 의미의 자유라고 할 수 있겠니? - p.158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간의 불행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조장되는 거야. 앞에서도 말했지만, 인간존재의 불행은 개인적인 성향이나 능력이라는 자연적인 조건, 그리고 운명과 같은 초월적인 힘의 작용에서 기인하지 않고, 특정한 집단의 부조리한 지배에서 생겨나지. 뒤집어 말하면, 인간의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어서 특정 집단의 부당한 처사에 집단적으로 항거함으로써 불행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하지. 역사란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지.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야. 그래서 인간의 실천적인 의지와 행동이 곧 역사의 내용을 구성하도록 해야 해. - p.188


인간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유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의지"를 지니고 있어. 사유하는 활동 자체는 정신이지만, 그 정신의 배후에는 항상 의지가 작동하고 있다는 거지. 보통 정신 활동을 그 자체로 독자적인 것으로 여기기 쉬우나 그 정신 활동의 뒤에는 항상 감성적인 의지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거야. 이 감성적인 의지는 생명체의 자연적인 속성으로서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고 삶의 다양한 활동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어. 그것은 삶을 추동하는 원동력이고 추진력이야. 이러한 '힘에의 의지'는 선과 악 같은 도덕적 판단 이전에 삶을 지배하는 원초적인 욕구야. 선악의 도덕 판단은 힘에의 의지가 겉으로 드러나는 양태에 지나지 않아. 생명체의 본성에는 본래 선이니 악이니 하는 게 없어. 있는 것은 오직 힘에의 의지뿐이지. 의지는 이성 이전에 모든 생명체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진 감성이야.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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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그라운드 니체 - 고병권과 함께 니체의 <서광>을 읽다
고병권 지음, 노순택 사진 / 천년의상상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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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철학에 문외한인 나에게 있어 니체는 단지 철학자로만 알았을 뿐 그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여러 학문에 조금이나마 관심이 많은 나는 철학이라는 학문에도 관심이 많지만 니체에 대해 따로 찾아보거나 그가 쓴 책들을 읽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 책을 만난 것은 어려운 니체의 철학에 대해 조금이나마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입문서 역할을 하기를 책을 펼치기 전부터 기대했다.


이 책을 쓰신 저자 고병권님은 2003년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쓴 후 딱 11년 만에 니체의 또다른 책인 <서광>이라는 5권의 책에 대해 쓰셨다. <서광>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펴내기 2년 전 1881년에 쓴 책으로써 책 속에서는 대지에 의해 삼켜져 대지의 목소리를 전하는 지하의 인간이 침묵 속에서 날이 밝아오자 지나온 밤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이라고 한다. 그 책 속에서는 우리의 삶과 도덕, 종교, 정치 등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렵기 소문난 <서광>을 그나마 쉽게 풀이하여 설명해주고 있다.


책 속에서는, 니체의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니체가 말하는 도덕과 삶에 대해 저자 역시 하나의 독자로서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으며, 그리스인과 독일인에 관한 이야기와 정치, 기독교의 정신에 관해 말하고 있다. 중간중간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도 많았지만 니체에 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어 이 책을 읽는 내내 과거 한 철학자의 삶에 잠시나마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사실 이 책을 읽는 동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라는 의문도 많았고, 철학을 배우지 않은 나 같은 사람에 있어서는 이 책이 정말 어려울 것이로 생각했다. 니체의 <서광>에서 말하는 지하 속의 인간과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니체라는 한 인물에 관해 관심이 갔다.


니체의 철학, 그것은 무엇보다 타자로서의 철학이고, 타자가 되는 철학이며, 그 전에 철학을 타자로 만드는 철학이다. 니체의 철학은 자기 시대와 공동체를 찬양하는 어용성을 탈각할 때 시작된다. 니체는 그것을 '미래의 철학'이라 했고, 자기의 날이 '내일 이후'에 있다고 했다. - p.21


니체를 알지 못한 나에게 있어서는 이 책은 정말 미궁 속의 책이지만, 니체를 알고 그에 대해 배워 다시 이 책을 읽는다면 그 전에 읽었던 것과는 달리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듯하다. 철학을 배워 그의 책 <서광>을 읽을 수 있다면, 그와 함께 과거 유럽인의 삶과 인간 니체에 대해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 기억하고 싶은 구절


'니체와 철학'이라는 말에서 니체와 철학은 서로 '바깥'에 있으면서 동시에 '와'라는 접속사를 통해, 말 그대로 접속해 있다. 이 말에는 '니체의 철학'이라고 했을 때 풍기는 '소유' 내지 '소속'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철학은 니체에 속하는가(더 나아가 철학자는 철학과 소유 관계를 맺는가). 그리고 니체는 철학에 속하는가(우리는 니체를 철학 공동체에 소속된 자로 보아야 하는가). 내 생각에 '니체'와 '철학'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지만, 서로의 소유물도 아니고 서로에게 소속되어 있지도 않다. 우리가 '니체의 철학'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니체'와 '철학'이 맺는 어떤 관계를 통해서이다. - p.14


니체는 도덕에 대해 "그것은 단지 특정 현상들에 대한 해석이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릇된 해석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도, "도덕 판단은 증후학semiotik으로서는 대단히 가치가 있다."고 평한다. 그것은 "자기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해서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여러 문화나 내면세계의 가장 귀중한 실상을 알려준다. - p.19


니체의 철학, 그것은 무엇보다 타자로서의 철학이고, 타자가 되는 철학이며, 그 전에 철학을 타자로 만드는 철학이다. 니체의 철학은 자기 시대와 공동체를 찬양하는 어용성을 탈각할 때 시작된다. 니체는 그것을 '미래의 철학'이라 했고, 자기의 날이 '내일 이후'에 있다고 했다. - p.21


우리는 해석된 사물을 체험하므로 우리 세계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그 무엇보다도 해석자인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낸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은 우리를 폭로하는 것이 아닐까?" 니체는 친구란 "면이 울퉁불퉁하고 온전하지 않은 거울에 비친 네 얼굴"이라고도 했다. 아마도 우리는 이를 우리가 마주하는 사물들 일반까지 확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나타난 사물들은 결국 우리에 대해 말해준다. "모든 사물을 완전히 인식했을 때에야 인간은 자신을 인식한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들은 인간의 한계일 뿐이기 때문이다. - p.49


예컨대 논리학에서 말하는 '동일성'이란 지나치게 엄격한 눈을 통해서는 파악될 수 없다. 세계에는 두 개의 먼지조차 서로 같지 않기 때문이다. '동일성'을 사유할 수 있으려면 대강 '유사한 것'에서 '동일성'으로 나아가는 어떤 감각이 전제되어야 한다. 또한 니체는 어떤 존재가 '대강 유사한 것'에서 '동일성'으로 넘어가는 '환원적' 추론에 익숙해지지 않았다면 아마도 자연에서 도태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 p.55


경건하고 고귀한 것들이 인간적 덕성을 말해주기는커녕 어떤 오류와 기만에 기초한 경우도 많다. 심지어 어떤 것들은 인간에 대한 불합리하고 불가능한 요구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결혼제도에서 니체는 그것을 본다. 정열에 불타올라 사랑한 두사람에게 영원한 사랑, 영원한 열정의 의무를 지우는 결혼제도는 그 자체가 얼마나 정열의 본질을 거스른 것인가. 정열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생각은 정열의 본질에 반한다. - p.58


'힘의 감정'은 우리가 <서광>을 읽으며 여러 번 마주하게 될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이 개념은 '힘에의 의지'의 선구적 개념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힘의 감정'이란 힘에 대한 감각이자 평가이며, 힘을 받을 때만큼이나 행사할 때도 느끼는 감정이다. 니체에게 '강자'와 '약자'란 '힘에의 의지'에 따른 구분이기 이전에 '힘의 감정'에 따른 구분, 즉 서로 다른 감각 내지 감성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 p.70


니체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은 "자신을 지배할 수 있고 지배함으로써 힘의 감정에 정통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기독교는 덕을 드러내는 것에는 소질이 없었고, 반대로 죄를 드러내는 것에서 천재성을 발휘했다. 기독교는 무엇보다 현실의 불행과 고통을 죄와 연결 지었다. 죄의 크기와 불행의 크기를 연계하는 계산법, 즉 '고통과 불행이 클수록 지은 죄가 큰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이다. - p.71


도덕적 행위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종종 중첩된 오류에서 나온다. 우리는 우선 그 행위가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에 주목한다. 우리에게 이로웠는지, 해로웠는지, 그다음 우리는 그 행위가 행위자의 의도에 따른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고는 그런 의도가 그 행위자의 지속적 성질, 다시 말해 행위자의 본질적 측면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니체는 이를 "삼중의 오류"라고 불렀다. - p.85


니체에 따르면 우리는 일생 동안 "자아의 환영을 위한 일만 한다." 이 자아의 환영이란 '타인에 비춰진 나'이고, 사이비 이기주의란 이 환영에 대한 나의 동일시라고 할 수 있다. - p.89


우리는 태양이 솟아오를 때 방에서 나와 "나는 태양이 뜨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 비웃을 것이다. 또 우리는 바퀴를 멈출 수 없으면서도 "나는 바퀴가 구르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비웃는다. 그리고 우리는 격투에서 져 쓰러진 사람이 "나는 여기에 누워 있다. 하지만 내가 원해서 누워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비웃는다. 그러나 니체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이렇게 비웃지만, 우리가 '나는 원한다'라는 말을 사용할 때 저 세 사람과 다른 의미로 그 말을 사용한다고 할 수 있는가?" - p.102


니체는 '지붕에서 떨어지는 벽돌'을 '신의 사랑'과 연관 짓는 것이 무리라는 생각이 들 때가 뭔가를 깨달을 기회라고 말한다. 목적과 이성이 미치지 못한 영역만을 '우연'이라고 말하는 데서 한 발 더 나아가자. 혹시 목적이나 이성 자체에도 '우연'이 개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지와 목적이란 없는 것이며 그것들은 우리가 상상해낸 것"이 아닐까. - p.109


동정은 또한 동정을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동정을 받는 이를 불행하게 만든다. 동정을 구걸하는 이는 무언가를 포기하면서 그것을 얻는다. 바로 타인과 자신이 동등하다는 긍지를 포기한다. "동정을 받는다는 생각은 야만인들에게는 도덕적 전율을 일으켰다. 동정을 받을 경우 사람들은 모든 덕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동정을 베푸는 것은 경멸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경멸할 만한 인간이 괴로워하는 것을 그들은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어떤 적이 자신과 동등하게 긍지를 포기하지 않으며 동정을 받는 것을 가장 치욕적이고 가장 심한 굴욕으로 간주하면서 거부한다면, 그런 적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는 것은 최고의 즐거움이다. - p.114


우리는 왜 이렇게 타인의 감정을 모방하는 데 숙달되었을까. 그것은 앞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 시대가 '타인의 눈치'를 봐야 하는 시대라서, 무리 속에서만, 통계적 평균인 뒤에서만, 혹은 '세인' 뒤에서만 안도감을 느낄 수 있는 시대라서 그런지 모른다. 아니면 종種적 특성으로서 인간이 갖고 있는 '겁 많음' 때문일 수도 있다. - p.118


강자의 말과 약자의 말이 가장 큰 차이는 진실함에 있다. 여기서 진실하다는 것은 '사실에 부합하다는 말'을 한다는 게 아니라 '자신에 부합하다는 말'을 한다는 뜻이다. 진실하지 않다는 것은 자신의 말이 아닌 말, 자신이 책임지지 않을 말을 하는 것이다. 근대의 '냉소주의'를 비판하고 그것을 고대의 '견유주의'와 대비했던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우리는 계몽되었고 우리는 무감각해졌다"고 했다. - p.128


"그리스인들이 삶에서는 커다란 위험과 전복을 가까이에 두고, 숙고와 인식에서 일종의 안도감과 초종의 피난처를 찾는 것"과는 달리 근대인들은 "그리스인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안전한 상태에서, 위험을 숙고와 인식으로 옮겨버렸다." 그래서 생각으로는 온갖 위험한 것을 공상할 수 있지만 행동이나 실제 삶에서는 그것이 나타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 p.132


우리는 여러 곳에서 니체가 어떤 것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때 니체가 말하는 기다림이란 승강장에서 기차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 같은 게 아니다. 니체는 우리가 '시도'와 '실험' 속에서만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음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다음 아포리즘들을 보자. "삶과 사회에 대해 무수한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져야 한다." "많은 실험이 여전히 행해져야만 한다." - p.148


'민중 정치'에 대한 니체의 비판 역시 마찬가지 성격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나는 니체가 목격한 19세기 민중 정치의 문제점이 역으로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란 약자 민중이 지배자가 된다는 사실에 있지 않고, 민중이 강자가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민중은 복종하는 법이 아니라 명령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자신의 삶과 정치에 대한 고귀한 취향을 가져야 한다.(민중-귀족) 그렇지 않으면 민중은 '술고래들'이 들이붓는 술에 도취되어 놀아나는 어릿광대가 되고 말 것이다. - p.156


니체는 가난한 이들에게 어느 길을 갈 것이냐고 묻는다. "가난하면서도 즐겁고 독립적이라는 것! 그것은 동시에 가능하다. 가난하면서도 즐겁고 노예라는 것! 이것도 가능하다." 어느 쪽인가? 당신은 어느 쪽인가? 아마도 당신이 "지금의 상태처럼 기계의 나사로, 또 말하자면 인간의 발명품에 대한 보완물로 소모되는 것을 치욕이라고 느끼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그리고 "높은 급여를 통해.. 비참한 삶의 본질적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후자의 삶을 택한 것이다. "돈 많은 노예 상태'를 치욕으로 경험하느냐 행복으로 경험하느냐. 그 힘의 감정에 따라 우리는 아주 다른 체제, 아니 '다른 시대'라고 불러도 좋을 그런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니체는 다시 묻는다. "인격이 아니라 나사가 되는 대가로 하나의 갑을 가질" 것인가? - p.157


여성은 남성의 성급함과 허영심을 이용한다. 이를테면 남성들은 여성을 부양하는 것으로 자신의 허영심과 명예욕을 채우려 한다. 하지만 그것을 이용할 줄 아는 여성이 더 현명하다. 남성의 허영심과 명예욕을 활용해 그를 이용하고 부려먹을 줄 아는 여성 말이다. "여성들은 종속됨으로써 압도적 장점은 물론이고 지배권도 확보하게 될 것을 안다." 이들은 종속을 감내하는 것은 겸손해서가 아니다. 이는 "최고 지배자"의 "영리하고도 냉혹한 요구"이다. 참고로 데리다는 여기서 '소유'와 '지배'의 어떤 결정 불가능성을 발견했다. "여성은 줌으로써, 몸을 내맡김으로써, 소유의 지배력을 위장하고 소유의 지배력을 확실시한다." 주는 것과 획득하는 것, 소유한 자와 소유당한 자의 어떤 결정 불가능성이 생겨나는 것이다. - p.178


예술은 배후에 진정한 '존재'를 둔 일종의 '가상'으로 존재하는 한 '도덕'의 추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예술이 우리에게 선사할 수 있는 귀중한 선물 하나는 우리의 삶이 '무구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음악가들은 위대한 발견을 했다. 즉 그들은 흥미로운 추함을 표현하는 것이 예술에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설령 음악가 자신들은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이것은 "내면적 인간의 나쁜 행위와 이 행위의 무구함을 포착할" 소중한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했다. - p.182


니체는 고독 속에서 나는 임신한 자의 몸가짐을 본다. 신체가 아주 민감해지면서,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았을 일에 큰 역겨움과 구토를 느끼는 것. 그것은 자기 안에 새로운 뭔가가 자라고 있다는 임신의 징후일 수 있다. 고독한 자는 몸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하고 음식을 가려 먹어야 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생활 습관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 이는 뭔가 피하고 떠나는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돌보고 가꾸는 일이다. 자기 안에서 새로운 진리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 p.202


우리의 능력이나 위대함 역시 단번에 무너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잘게 부서져 내린다. 모든 것 속으로 들어가 자라고 어디에나 달라붙을 줄 아는 식물, 이것이 우리에게 있는 위대한 것을 파멸시킨다. 그것은 매일, 매시간 간과되고 있는 우리 주변의 비참함이며, 이런저런 작고 소심한 감각의 수천 개의 작은 뿌리가 되어 우리의 이웃, 직장, 교제, 일상의 일에서 자라난다. 우리가 이 잡초를 조심하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것 때문에 몰락하게 된다.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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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자들은 뒷모습에 주목한다 - 드러나지 않는 부분까지 가꾸는 삶의 기술
일레인 사이올리노 지음, 현혜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5월
절판


프랑스는 러브 스토리 위에 세워진 나라입니다. 역사가들은 섹스가 모든 것을 결정했다는 사실을 못 견뎌하죠. 하지만 실제로 프랑스는 여자와 유혹 때문에 변화했습니다-45쪽

제가 상상력이 좀 부족한가 봐요. 베르사유 정원에서 섹스를 한다는 도저히 상상이 안 돼요.

당연하죠! 지금처럼 베르사유에 있는 어느 카페에서 토론을 하는 경우랑 어스름이 내릴 무렵 조각품과 분수들이 아름답게 늘어서 있는 공원이 대리석 벤치에 앉아 있는 경우가 어디 같겠어요? 방해되는 것도 없고, 거리의 소음이나 빛도 없다고요. 당신을 이해하고 궁극적으로 단 한가지만을 원하는, 그러니까 당신과 함께 저녁을 보내면서 당신을 즐겁게 해주고 싶어하는 누군가와 함께 편안함을 느끼는 상황이란 말이죠.

어쩌면 당신은 바로 '예스'라고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황홀한 그곳에 있으면 마음이 흔들릴 겁니다. 당신이 넘어 갈 거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받아들일 거라는 얘기도 아니고요. 단지 그 순간에 당신은 역동적인 상황에 휩쓸려서 과감하게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내가 벽을 쌓기 시작하면 이 마법 같은 순간을 내 발로 걷어차는 거야'라고.-57쪽

왕과 함께 있는 자신이 보이죠? (가축 모양의 조형물과 악기, 사랑의 화살을 가리키며) 이런 것들은 전쟁을 상징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부터 상상해보세요. 당신은 루이 15세와 함께 있는 겁니다. 보이시죠? 그는 준비해둔 초콜렛과 차를 대접하려 해요. 난롯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어요. 당신은 이곳에 유혹이 있음을 인정해야 해요! 내가 틀릴 수도 있지만 지금 왕은 기분이 좋아요. 분위기도 좋고요. 자, 보세요. 여기는 유혹하기 위해 만든 장소입니다. 힘을 보여주기 위한 곳이 아닙니다. 친구들을 위한 장소도 아니고요.-59쪽

미국인들은 '섹스하자'고 말하고, 프랑스인들은 '사랑을 나누자'라고 말한다. 이것은 표현의 차이가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두 가지 관점이다.-67쪽

나에게는 키스와 애무 그리고 몸 위를 움직이는 입술처럼 감성적인 육체관계가 중요해. 하지만 성행위가 벌어졌지. 난 그걸 해냈어. 물론 자주 하긴 했지만 별 감정이 없었어.-71쪽

미국인들은 섹스에 대해 참 노골적이에요. '섹스하고 싶어?'라고 묻질 않나 '지금 만나자'라는 문자를 새벽 2시에 보내질 않나, 프랑스 남자들이 훨씬 더 로맨틱해요. 우선 레스토랑에서는 으레 여자를 바라보는 것으로 전화를 시작하죠. 내가 만났던 미국 남자들은 나와 눈도 못 마주쳤어요. 하지만 저는 눈길을 통해 성적으로 흥분하거든요. 그리고 프랑스 남자들은 부드럽게 느리게 입술에 키스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낸 다음 몸 전체에 키스를 해요. 대다수 프랑스 남자들은 성감대에 빠삭하고 그 부분을 만지면서 여자를 미치게 하는 방법도 잘 알고 있죠. 그런데 미국인들은 여자를 미치게 하는 경험을 즐기지도 않을뿐더러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요! 여자는 충분히 달아오르지 않았는데 말이죠.-86쪽

미국 문화에서는 외도를 죄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당신은 타락했다. 그러니 지옥 불에 떨어질지도 모른다. 참회하면 용서받을 수도 있다. 과연 용서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프랑스에서 유혹은 기술이고 외도는 고의적인 행동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물을 수도 있어요. '어째서 그가 외도를 했을까?라고 말이죠. 그럼 이런 대답이 나올걸요. 우울했던 모양이라고, 그가 더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그게 그의 방식일 테니 당신도 그런 방식으로 그를 사랑하라고 말이죠.-92쪽

프랑스에서는 모든 관계를 최대한 에로틱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사람이든, 정치든, 일이든 상관없어요. 미묘한 야릇함이 중요하죠.-122쪽

프랑스인들은 목표에 도달하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이란 목표를 추구하고 다른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여유로운 기술과 관련이 있다. 은밀한 눈길도 주고받지 않는 섹스를 무슨 재미로 하고, 와인 향 없는 저녁 식사는 또 무슨 재미로 하겠는가! 말장난 없는 대화에 무슨 즐거움이 있고, 어려움이나 반박도 없는 아이디어에 무슨 만족감이 있겠는가! 평범한 일과도 있어서도 서둘러 계획만 짜고 즐거움을 주는 이론화 단계는 어째서 건너뛰는 것일까? 다시 말해 기분을 바꿔 줄 달콤한 것들이 많은데 어째서 목표에만 집중하냐는 얘기다. 뭔가가 너무 간단하거나 분명하거나 쉬우면 왠지 완전하지 않은 것 같다.-123쪽

미국하면 절대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그런 강박관념 같은 게 떠올라요. 아무리 능숙한 유혹도 미국에서는 통하지 않죠. 누구나 그걸 두려워하니까요. 사실 프랑스에서는 관계를 최대한 에로틱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사람이든 정치든 일이든 상관없이 모든 관계가 에로틱해집니다. 미묘하게 야릇해지죠. 그렇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139쪽

프랑스에서는 남자들이 당신을 쳐다봅니다. 즐거운 일이에요. 심지어 여자들도 쳐다봐요. 물론 항상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당신을 인정해주는 거잖아요. 누군가가 당신을 보고 있으면 걸음걸이부터 달라질걸요. 내가 미국에서 그리워한 게 바로 그거예요. '눈길'이오. 미국 여자들이 살찐 건 그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158쪽

그 어떤 상황에서도 유혹하는 모습을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면 사실상 무례한 사람으로 간주될 겁니다. 하지만 유혹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선 안 돼요. 프랑스식 유혹은 특정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향해 하는 경우가 많아요. 계획도 필요 없죠.-164쪽

장미 한 송이를 덤으로 주는 꽃집 주인, 손님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해 유혹적인 행동을 자주 하는 단골가게 주인, 버스 승객이 정거장이 아닌 원하는 곳에서 바로 내릴 수 있게 해서 약간의 지지라도 얻으려고 하는 관료들, 이 모든 것이 바로 유혹입니다.-164쪽

유혹 게임이란 사람들에게 안에 예쁜 것이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는 거예요. 아무튼 모든 걸 보여줘서는 안 됩니다. 미니스커트를 입든 어깨나 가슴을 드러내는 하나만 해야 합니다. 둘 다 하면 절대 안 돼요. 미니스커트에 가슴까지 노출한다면 좀 놀라지 않겠어요!-180쪽

사람들은 내게 파리 여자의 다른 점이 뭔지 물어봐요. 그러면 나는 그들의 균형 감각이 뛰어나다고 말해주죠. 어쩌면 아주 속물적인 행동일지도 모르지만 난 절대 샤넬의 신제품 가방을 메지 않아요. 낡은 가방이 좋아요. 화려해 보이지 않거든요. 아마 훨씬 더 세련됐을걸요. 가끔 신제품을 맬 수도 있죠. 그럴 땐 절대 화장을 하지 않아요.-182쪽

아름다워질 거라는, 바라는 대로 될 거라는 염감 말이죠. 여자들은 관능성, 섹시함, 여성미로 세상을 지배하고 싶어해요. 그러니까 싫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입장이 아니라 지배하는 입장이 되고 싶어한다는 거죠. 명령하는 입장 말입니다.-194쪽

미국 여자들이 화장을 너무 진하게 해서 깜짝 놀랐어요. 화장이 진하면 자신이 아주 도발적이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거예요. 그에 반해 프랑스 여자들의 화장은 화려하지 않아요. 한 듯 안 한 듯하죠. 그러니 아름답게 보이려고 얼굴에 몇 시간씩 투자한다는 메시지는 보내지 않겠죠.-202쪽

나는 미국 여자들처럼 옷을 입지 않아요. 그들처럼 걷지도 않고요. 프랑스에는 특유의 우아함이 있고, 그보다 한 수 앞서는 파리풍의 우아함도 존재해요. 차분하고 그다지 화려하지 않죠. 아마 프랑스 여자도 블라우스를 조금 풀어놓겠지만 가슴은 드러내지 않아요. 풍만한 가슴이든 납작한 가슴이든 말이죠. 그리고 훨씬 더 수수하죠.-202쪽

프랑스에서는 유혹하지 않으면 보잘것 없는 사람이 돼요. 나도 숫기가 아주 없는 편이에요. 그런데 평범하거나 소심해서 다른 사람 앞에 나서지 않는 사람은 그 틀에 맞지 않는 거죠. 구석에 처박혀 있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요. 하지만 미소를 지으며 뭔가 원한다는 걸 진정으로 보여주면 원하는 것을 얻게 됩니다. 일종의 게임이죠.-224쪽

음식이란 만들고 변신하며 즐거움을 주는 기교와 관련이 있어요. 여자들이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대접하는 것은 다름 아닌 유혹의 행위입니다.-228쪽

불완전한 비밀 보따리의 인간의 비밀들을 모두 밝히기를 원하는가? 완전히 투명한 사회, 심문의 사회를 원하는가? 분명 프랑스 국민들은 '아니오'라고 답할 것이다. -266쪽

프랑스 정치에서 섹스와 관련된 죄와 용서의 개념을 중요하지 않다. 정치인들의 문란한 행동을 비밀로 유지된다.-277쪽

유혹한다는 말은 당신 쪽으로 끌어당긴다는 뜻입니다. 힘을 내세우거나 강요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설명하고 설득하고 웃김으로써 당신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히 자유롭게 발산하는 이탈리아식 매력의 반대 개념이라고 할 수 있죠.-312쪽

유혹은 비이성적이고 기만적입니다. 유혹자는 순간적으로 비열해질 수 있죠. 유혹자의 형편없는 부분이 나타나면 그의 마법 같은 힘도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유혹은 정복을 위한 무기일 뿐, 지속의 무기는 될 수 없기 때문이죠. 지속의 무가기 되려면 다른 특징들이 필요합니다-315쪽

그것은 바로 게임입니다. 힘을 내세우거나 강요하는 것이 아니죠. 설명하고 설득하고 웃김으로써 작전에 성공하여 당신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히 자유롭게 발산되는 이탈리아식 매력의 반대 개념이라고 할 수 있죠.-3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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