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그라운드 니체 - 고병권과 함께 니체의 <서광>을 읽다
고병권 지음, 노순택 사진 / 천년의상상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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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철학에 문외한인 나에게 있어 니체는 단지 철학자로만 알았을 뿐 그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여러 학문에 조금이나마 관심이 많은 나는 철학이라는 학문에도 관심이 많지만 니체에 대해 따로 찾아보거나 그가 쓴 책들을 읽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 책을 만난 것은 어려운 니체의 철학에 대해 조금이나마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입문서 역할을 하기를 책을 펼치기 전부터 기대했다.


이 책을 쓰신 저자 고병권님은 2003년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쓴 후 딱 11년 만에 니체의 또다른 책인 <서광>이라는 5권의 책에 대해 쓰셨다. <서광>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펴내기 2년 전 1881년에 쓴 책으로써 책 속에서는 대지에 의해 삼켜져 대지의 목소리를 전하는 지하의 인간이 침묵 속에서 날이 밝아오자 지나온 밤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이라고 한다. 그 책 속에서는 우리의 삶과 도덕, 종교, 정치 등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렵기 소문난 <서광>을 그나마 쉽게 풀이하여 설명해주고 있다.


책 속에서는, 니체의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니체가 말하는 도덕과 삶에 대해 저자 역시 하나의 독자로서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으며, 그리스인과 독일인에 관한 이야기와 정치, 기독교의 정신에 관해 말하고 있다. 중간중간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도 많았지만 니체에 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어 이 책을 읽는 내내 과거 한 철학자의 삶에 잠시나마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사실 이 책을 읽는 동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라는 의문도 많았고, 철학을 배우지 않은 나 같은 사람에 있어서는 이 책이 정말 어려울 것이로 생각했다. 니체의 <서광>에서 말하는 지하 속의 인간과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니체라는 한 인물에 관해 관심이 갔다.


니체의 철학, 그것은 무엇보다 타자로서의 철학이고, 타자가 되는 철학이며, 그 전에 철학을 타자로 만드는 철학이다. 니체의 철학은 자기 시대와 공동체를 찬양하는 어용성을 탈각할 때 시작된다. 니체는 그것을 '미래의 철학'이라 했고, 자기의 날이 '내일 이후'에 있다고 했다. - p.21


니체를 알지 못한 나에게 있어서는 이 책은 정말 미궁 속의 책이지만, 니체를 알고 그에 대해 배워 다시 이 책을 읽는다면 그 전에 읽었던 것과는 달리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듯하다. 철학을 배워 그의 책 <서광>을 읽을 수 있다면, 그와 함께 과거 유럽인의 삶과 인간 니체에 대해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 기억하고 싶은 구절


'니체와 철학'이라는 말에서 니체와 철학은 서로 '바깥'에 있으면서 동시에 '와'라는 접속사를 통해, 말 그대로 접속해 있다. 이 말에는 '니체의 철학'이라고 했을 때 풍기는 '소유' 내지 '소속'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철학은 니체에 속하는가(더 나아가 철학자는 철학과 소유 관계를 맺는가). 그리고 니체는 철학에 속하는가(우리는 니체를 철학 공동체에 소속된 자로 보아야 하는가). 내 생각에 '니체'와 '철학'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지만, 서로의 소유물도 아니고 서로에게 소속되어 있지도 않다. 우리가 '니체의 철학'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니체'와 '철학'이 맺는 어떤 관계를 통해서이다. - p.14


니체는 도덕에 대해 "그것은 단지 특정 현상들에 대한 해석이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릇된 해석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도, "도덕 판단은 증후학semiotik으로서는 대단히 가치가 있다."고 평한다. 그것은 "자기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해서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여러 문화나 내면세계의 가장 귀중한 실상을 알려준다. - p.19


니체의 철학, 그것은 무엇보다 타자로서의 철학이고, 타자가 되는 철학이며, 그 전에 철학을 타자로 만드는 철학이다. 니체의 철학은 자기 시대와 공동체를 찬양하는 어용성을 탈각할 때 시작된다. 니체는 그것을 '미래의 철학'이라 했고, 자기의 날이 '내일 이후'에 있다고 했다. - p.21


우리는 해석된 사물을 체험하므로 우리 세계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그 무엇보다도 해석자인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낸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은 우리를 폭로하는 것이 아닐까?" 니체는 친구란 "면이 울퉁불퉁하고 온전하지 않은 거울에 비친 네 얼굴"이라고도 했다. 아마도 우리는 이를 우리가 마주하는 사물들 일반까지 확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나타난 사물들은 결국 우리에 대해 말해준다. "모든 사물을 완전히 인식했을 때에야 인간은 자신을 인식한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들은 인간의 한계일 뿐이기 때문이다. - p.49


예컨대 논리학에서 말하는 '동일성'이란 지나치게 엄격한 눈을 통해서는 파악될 수 없다. 세계에는 두 개의 먼지조차 서로 같지 않기 때문이다. '동일성'을 사유할 수 있으려면 대강 '유사한 것'에서 '동일성'으로 나아가는 어떤 감각이 전제되어야 한다. 또한 니체는 어떤 존재가 '대강 유사한 것'에서 '동일성'으로 넘어가는 '환원적' 추론에 익숙해지지 않았다면 아마도 자연에서 도태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 p.55


경건하고 고귀한 것들이 인간적 덕성을 말해주기는커녕 어떤 오류와 기만에 기초한 경우도 많다. 심지어 어떤 것들은 인간에 대한 불합리하고 불가능한 요구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결혼제도에서 니체는 그것을 본다. 정열에 불타올라 사랑한 두사람에게 영원한 사랑, 영원한 열정의 의무를 지우는 결혼제도는 그 자체가 얼마나 정열의 본질을 거스른 것인가. 정열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생각은 정열의 본질에 반한다. - p.58


'힘의 감정'은 우리가 <서광>을 읽으며 여러 번 마주하게 될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이 개념은 '힘에의 의지'의 선구적 개념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힘의 감정'이란 힘에 대한 감각이자 평가이며, 힘을 받을 때만큼이나 행사할 때도 느끼는 감정이다. 니체에게 '강자'와 '약자'란 '힘에의 의지'에 따른 구분이기 이전에 '힘의 감정'에 따른 구분, 즉 서로 다른 감각 내지 감성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 p.70


니체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은 "자신을 지배할 수 있고 지배함으로써 힘의 감정에 정통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기독교는 덕을 드러내는 것에는 소질이 없었고, 반대로 죄를 드러내는 것에서 천재성을 발휘했다. 기독교는 무엇보다 현실의 불행과 고통을 죄와 연결 지었다. 죄의 크기와 불행의 크기를 연계하는 계산법, 즉 '고통과 불행이 클수록 지은 죄가 큰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이다. - p.71


도덕적 행위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종종 중첩된 오류에서 나온다. 우리는 우선 그 행위가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에 주목한다. 우리에게 이로웠는지, 해로웠는지, 그다음 우리는 그 행위가 행위자의 의도에 따른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고는 그런 의도가 그 행위자의 지속적 성질, 다시 말해 행위자의 본질적 측면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니체는 이를 "삼중의 오류"라고 불렀다. - p.85


니체에 따르면 우리는 일생 동안 "자아의 환영을 위한 일만 한다." 이 자아의 환영이란 '타인에 비춰진 나'이고, 사이비 이기주의란 이 환영에 대한 나의 동일시라고 할 수 있다. - p.89


우리는 태양이 솟아오를 때 방에서 나와 "나는 태양이 뜨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 비웃을 것이다. 또 우리는 바퀴를 멈출 수 없으면서도 "나는 바퀴가 구르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비웃는다. 그리고 우리는 격투에서 져 쓰러진 사람이 "나는 여기에 누워 있다. 하지만 내가 원해서 누워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비웃는다. 그러나 니체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이렇게 비웃지만, 우리가 '나는 원한다'라는 말을 사용할 때 저 세 사람과 다른 의미로 그 말을 사용한다고 할 수 있는가?" - p.102


니체는 '지붕에서 떨어지는 벽돌'을 '신의 사랑'과 연관 짓는 것이 무리라는 생각이 들 때가 뭔가를 깨달을 기회라고 말한다. 목적과 이성이 미치지 못한 영역만을 '우연'이라고 말하는 데서 한 발 더 나아가자. 혹시 목적이나 이성 자체에도 '우연'이 개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지와 목적이란 없는 것이며 그것들은 우리가 상상해낸 것"이 아닐까. - p.109


동정은 또한 동정을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동정을 받는 이를 불행하게 만든다. 동정을 구걸하는 이는 무언가를 포기하면서 그것을 얻는다. 바로 타인과 자신이 동등하다는 긍지를 포기한다. "동정을 받는다는 생각은 야만인들에게는 도덕적 전율을 일으켰다. 동정을 받을 경우 사람들은 모든 덕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동정을 베푸는 것은 경멸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경멸할 만한 인간이 괴로워하는 것을 그들은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어떤 적이 자신과 동등하게 긍지를 포기하지 않으며 동정을 받는 것을 가장 치욕적이고 가장 심한 굴욕으로 간주하면서 거부한다면, 그런 적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는 것은 최고의 즐거움이다. - p.114


우리는 왜 이렇게 타인의 감정을 모방하는 데 숙달되었을까. 그것은 앞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 시대가 '타인의 눈치'를 봐야 하는 시대라서, 무리 속에서만, 통계적 평균인 뒤에서만, 혹은 '세인' 뒤에서만 안도감을 느낄 수 있는 시대라서 그런지 모른다. 아니면 종種적 특성으로서 인간이 갖고 있는 '겁 많음' 때문일 수도 있다. - p.118


강자의 말과 약자의 말이 가장 큰 차이는 진실함에 있다. 여기서 진실하다는 것은 '사실에 부합하다는 말'을 한다는 게 아니라 '자신에 부합하다는 말'을 한다는 뜻이다. 진실하지 않다는 것은 자신의 말이 아닌 말, 자신이 책임지지 않을 말을 하는 것이다. 근대의 '냉소주의'를 비판하고 그것을 고대의 '견유주의'와 대비했던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우리는 계몽되었고 우리는 무감각해졌다"고 했다. - p.128


"그리스인들이 삶에서는 커다란 위험과 전복을 가까이에 두고, 숙고와 인식에서 일종의 안도감과 초종의 피난처를 찾는 것"과는 달리 근대인들은 "그리스인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안전한 상태에서, 위험을 숙고와 인식으로 옮겨버렸다." 그래서 생각으로는 온갖 위험한 것을 공상할 수 있지만 행동이나 실제 삶에서는 그것이 나타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 p.132


우리는 여러 곳에서 니체가 어떤 것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때 니체가 말하는 기다림이란 승강장에서 기차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 같은 게 아니다. 니체는 우리가 '시도'와 '실험' 속에서만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음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다음 아포리즘들을 보자. "삶과 사회에 대해 무수한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져야 한다." "많은 실험이 여전히 행해져야만 한다." - p.148


'민중 정치'에 대한 니체의 비판 역시 마찬가지 성격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나는 니체가 목격한 19세기 민중 정치의 문제점이 역으로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란 약자 민중이 지배자가 된다는 사실에 있지 않고, 민중이 강자가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민중은 복종하는 법이 아니라 명령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자신의 삶과 정치에 대한 고귀한 취향을 가져야 한다.(민중-귀족) 그렇지 않으면 민중은 '술고래들'이 들이붓는 술에 도취되어 놀아나는 어릿광대가 되고 말 것이다. - p.156


니체는 가난한 이들에게 어느 길을 갈 것이냐고 묻는다. "가난하면서도 즐겁고 독립적이라는 것! 그것은 동시에 가능하다. 가난하면서도 즐겁고 노예라는 것! 이것도 가능하다." 어느 쪽인가? 당신은 어느 쪽인가? 아마도 당신이 "지금의 상태처럼 기계의 나사로, 또 말하자면 인간의 발명품에 대한 보완물로 소모되는 것을 치욕이라고 느끼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그리고 "높은 급여를 통해.. 비참한 삶의 본질적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후자의 삶을 택한 것이다. "돈 많은 노예 상태'를 치욕으로 경험하느냐 행복으로 경험하느냐. 그 힘의 감정에 따라 우리는 아주 다른 체제, 아니 '다른 시대'라고 불러도 좋을 그런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니체는 다시 묻는다. "인격이 아니라 나사가 되는 대가로 하나의 갑을 가질" 것인가? - p.157


여성은 남성의 성급함과 허영심을 이용한다. 이를테면 남성들은 여성을 부양하는 것으로 자신의 허영심과 명예욕을 채우려 한다. 하지만 그것을 이용할 줄 아는 여성이 더 현명하다. 남성의 허영심과 명예욕을 활용해 그를 이용하고 부려먹을 줄 아는 여성 말이다. "여성들은 종속됨으로써 압도적 장점은 물론이고 지배권도 확보하게 될 것을 안다." 이들은 종속을 감내하는 것은 겸손해서가 아니다. 이는 "최고 지배자"의 "영리하고도 냉혹한 요구"이다. 참고로 데리다는 여기서 '소유'와 '지배'의 어떤 결정 불가능성을 발견했다. "여성은 줌으로써, 몸을 내맡김으로써, 소유의 지배력을 위장하고 소유의 지배력을 확실시한다." 주는 것과 획득하는 것, 소유한 자와 소유당한 자의 어떤 결정 불가능성이 생겨나는 것이다. - p.178


예술은 배후에 진정한 '존재'를 둔 일종의 '가상'으로 존재하는 한 '도덕'의 추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예술이 우리에게 선사할 수 있는 귀중한 선물 하나는 우리의 삶이 '무구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음악가들은 위대한 발견을 했다. 즉 그들은 흥미로운 추함을 표현하는 것이 예술에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설령 음악가 자신들은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이것은 "내면적 인간의 나쁜 행위와 이 행위의 무구함을 포착할" 소중한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했다. - p.182


니체는 고독 속에서 나는 임신한 자의 몸가짐을 본다. 신체가 아주 민감해지면서,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았을 일에 큰 역겨움과 구토를 느끼는 것. 그것은 자기 안에 새로운 뭔가가 자라고 있다는 임신의 징후일 수 있다. 고독한 자는 몸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하고 음식을 가려 먹어야 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생활 습관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 이는 뭔가 피하고 떠나는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돌보고 가꾸는 일이다. 자기 안에서 새로운 진리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 p.202


우리의 능력이나 위대함 역시 단번에 무너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잘게 부서져 내린다. 모든 것 속으로 들어가 자라고 어디에나 달라붙을 줄 아는 식물, 이것이 우리에게 있는 위대한 것을 파멸시킨다. 그것은 매일, 매시간 간과되고 있는 우리 주변의 비참함이며, 이런저런 작고 소심한 감각의 수천 개의 작은 뿌리가 되어 우리의 이웃, 직장, 교제, 일상의 일에서 자라난다. 우리가 이 잡초를 조심하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것 때문에 몰락하게 된다.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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