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한 스푼
유헌식 지음 / 이숲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사람과 사람이 대화하거나, 영화와 음악, 미술 같은 예술 작품을 보거나, 여행, 운동 등 모든 것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 사람은 철학이라고 하면 어렵고 고리타분한 학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철학은 우리의 삶 속에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내가 책을 읽고 그에 관한 서평을 쓰는 것, 이것도 하나의 생각이고 철학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현재 단국대학교 철학과 교수이신 유헌식님이 철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K라는 사람에게 보내는 일곱 통의 편지이다. K라고 하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성씨인 김씨가 될 것이고, 그것은 바로 독자에게 보내는 철학 편지라고 할 수 있다.


책 속에서 말하는 것은 세상은 '나'와 '나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철학적인 용어로 바꾸면 '자기'와 타자'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은 '자기'와 '타자'의 초점에 맞추어 우리 일상 속에서 철학이 어떻게 관여하고 있는지, 과거의 유명한 서양 철학자의 생각을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답게 다양한 예를 들며 쉽게 가르쳐주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아르키메데스, 뉴턴, 칸트, 니체,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헤겔, 블로흐, 루카치 등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각이 담겨 있고 어린왕자, 피노키오, 로빈스 크루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자신과 세계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재미있게 풀이한다. 이를 통해 쉽게 접하지 못하는 철학자들의 생각을 쉽게 알 수 있어 철학에 입문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그 외에도 형이상학, 이데아계, 로고스, 사유, 모나드, 물자체(物自體), 유물론과 같이 철학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려웠을 법한 전문 지식을 쉽게 설명하고 있고, 더불어 그러한 생각을 통해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철학적인 관점에서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책 제목이 '철학 한 스푼'인 것처럼 저자인 유헌식 교수님이 독자들에게 떠먹여 주는 한 스푼을 통해 철학이란 무엇인지 배워보는 것은 어떨까? 


* 기억하고 싶은 구절


철학자들이 어떻게 세계를 경제적으로 이해했느냐고? 간단하게 말하면 그들은 세계를 '나'와 '나 아닌 것'으로 갈라놓고 이해했던 거야. 너를 중심으로 보면 세계는 'K'와 'K 아닌 것'으로 나뉠 수 있지? 수학의 벤다이어그램에서 전체는 어떤 한 집합과 그 여집합을 합친 것이잖아. 이런 식으로 철학자들에게는 "세계 = '나' + '나 아닌 것'"이야. 인간은 누구에게나 자기 자신에게는 '나'이기 때문에 각자를 중심으로 보면 이 공식은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셈이지. 이 공식에서 '나'와 '나 아닌 것'을 좀 더 철학적인 용어로 바꾸면 '자기'와 '타자'라고 해. 그래서 '세계 - 자기 + 타자'라는 아주 단순한 공식을 얻게 되지. '자기'와 '타자'라는 말을 잘 기억해두렴! 이 용어들은 철학을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거든. - p.11


타자의 정체를 몰라 어찌할 바를 모르틑 상태는 일종의 '혼돈' 상태라고 할 수 있어. 보통 우리는 무언가 마구 뒤섞여 있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태를 '혼돈'이라고 하잖아. 그러니까 타자의 정체를 밝히는 일은 곧 혼돈을 극복하는 일인 셈이지. 그 일은 아주 단순하게 'X is p'라는 문장으로 표현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어. 왜 하필 p냐고? p는 '술어'를 뜻하는 영어 'predicate'의 머리글자야. '그것은 이것이다'라는 주술 관계의 기본형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문장으로 내가 타자인 X를 무엇이냐고 술어화한다는 것이지. 여기서 '술어화'란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다시 말해 규정되지 않은 '무규정적인 것'을 '규정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활동이야. 'X is p'는 그러니까 정체불명의 타자에 대해 내가 무엇이라고 규정하는 활동인 셈이지. 김춘수의 시 '꽃'에서 '내'가 다만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나에게로 와 '꽃'이 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거야. - p.14


'인신론적'이 대상에 대한 인간의 지식과 관련된 내용을 다룬다면 '존재론적'은 인간을 벗어나 그 밖의 것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인간을 포함한 존재 일반을 설명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지. 그러니까 '저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인신론적인 성격을 띠지만, '저것은 어디에서 생겨났어?'하는 물음은 존재론적인 성격을 띠게 되지. 어린아이가 지나가는 기차를 보고 엄마에게 "엄마, 저게 뭐야?" 하고 묻는다면 인신록적인 질문이 되지만, "엄마, 기차는 누가 만들었어?" 하면 존재론적인 물음이 되는 것이지. - p.16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니? 나는 볼펜을 쓸 수 있는데 왜 볼펜은 나를 쓰지 못할까? 말도 안 되는 우스꽝스러운 질문이라고? 그럼 이건 어때? VIP의 경호원들이나 조직 폭력 집단의 행동 대원들이 하나같이 선글라스를 끼는 이유는 뭘까? 이들 현상은 모든 지식 관계의 불평등에 근거하고 있어. 무슨 말이냐고?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나는 볼펜이 무엇인지 알지만, 볼펜은 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의 경우, 우리가 상대방의 움직임을 알아채는 건 눈을 통해서잖아. 그러니 누군가가 몰래 다가서면 경호원은 그의 움직임을 보지만, 그는 선글라스를 낀 경호원이 무얼 보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없다는 말이지. 그럼, 누가 유리한지는 말 안 해도 뻔하지? - p.24


타자의 정체를 규정하는 문제에서 제시했던 'X is p' 기억하지? 이제 'is'에 주목해야 할 때가 온 거야. 'is'는 물론 여기에서 아무 뜻 없이 문법적으로 주어와 술어를 연결하는 be 동사에 지나지 않지만, 그 상징적인 의미는 달라. 위 문장에서 'is'는 연결사 또는 매사로서 기능하고 있어. 인간은 자기와 세계 사이에 항상 연결 끈을 개입시킨다는 거야. 인간은 중간항 또는 매개자 없이 세계와 관계하지 않아. 이 중간항, 매가자를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아니? 바로 '문명'이라는 거야. '문화'도 마찬가지고 - p.44


불의 사용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식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야. 익혀 먹는다는 것은 자연물과 인간 사이에 거리를 두는 행위이고, 이 거리는 '불'이라는 중간자를 통해 확보된다고 볼 수 있어. 그뿐이 아니야. 기후의 변화에 무관하게 늘 안온한 거주 공간, 즉 집을 만들어 인간과 자연 사이에 칸막이를 만드는 행위도 중간자의 개입이라고 할 수 있어. 이와 마찬가지로 옷도 맨살이 바로 외부에 노출되지 않게 인간의 피부와 자연 사이에 있는 인공의 막이지. 이렇게 인간은 자연과 직접적으로 관계하지 않고 항상 간접적으로, 즉 매개적으로 관계한다는 거야. - p.46


아쟈수 열매에 맞은 멧돼지가 쉽게 기절하겠니? 멧돼지는 왜 야자수 열매에 맞고도 끄덕하지 않을까? 야자수 열매는 멧돼지를 쓰러뜨릴 만큼 강력하지 못했다는 건데, 이 '강력함'이란 무얼 의미할까? 그건 매개자인 야자수 열매의 속성이 타자인 멧돼지의 속성과 만나는 데 실패했다는 거야. 더 정확히 말하면 야자수 열매의 속성은 멧돼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속성과 연결되지 못했다는 뜻이지. 요즘 말로 하면 서로 코드가 맞지 않았던 거야. 라디오 주파수가 맞지 않으면 자기가 듣고 싶은 방송을 들을 수 없듯이 코드가 맞지 않으면 자기와 타자는 서로 만날 수 없어. - p.50


인간은 동물과 달리 매개자를 필요로 하고 고안해내는 존재야.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 '으로서' 산다는 것은 매개항과 관계하면서 산다는 것을 뜻해. '매개항과 관계하는 삶'이란 문화적인 것과 관계하는 삶을 뜻해. 이 사실은 인간이 세계의 알맹이와 직접 만나지 않고 항상 그것과 만날 수 있는 통로, 즉 문화적 장치를 갈고 다듬는 데 노력과 시간을 들인다는 뜻이야. - p.69


철학은 세계와 우주의 끝까지 생각하는 학문이야. 세계와 우주에 대해 더는 생각할 수 없는 마지막 단계까지 사고를 밀고 가는, 그래서 세계와 우주가 궁극적으로 어디에서 닫혀 있는가를 탐구하는 학문이지. 물론 물리학, 특히 이론 물리학이 이런 문제로 고민하지만, 철학은 물리학처럼 물리 현상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아. 물리 현상을 넘어서 작동되는 우주의 근복적인 요소나 원리를 찾고자 하는 데에서 철학은 출발했다고 할 수 있어. 동양의 '오행설'에서 金, 木, 水, 火, 土를 삼라만상의 운행의 기본 요소로 삼는다거나 서양의 '사원소(四元素)설'에서 물, 불, 흙, 공기를 우주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로 보는 것, 그리고 동양의 음양의 원리와 서양의 수의 원리 등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 p.75


형이상학을 뜻하는 meta-physics의 meta는 '~다음에'라는 본래의 뜻을 넘어 그 이후에는 '~을 넘어서' 그리고 '~에 대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고, 철학의 이러한 메타적 특성은 철학의 본령을 이루게 되었어. 따라서 형이상학은 경험적인 현상과 지식에 '대해' 이해하고 설명함으로써 이들이 진실로 무엇에 근거하고 또 무엇을 전제하고 있는지, 그래서 경험적인 세계의 설명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어떠한 세계관에 입각해 있는지, 이러한 기초적이고 근원적인 사실을 검토하지. 이를 통해서 형이상학은 경험적인 현상과 지식의 위상과 정체를 밝혀 이들이 총체적인 세계 안에서 지니는 의미를 탐구하는 거야. - p.77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용어'가 이데아의 성격을 띠지는 않아. 로고스와 관련되지 않은 것은 이데아의 성격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야. 무슨 뜻이냐고? 그러니까 세계에 특정한 질서를 부여하는 우주적인 영혼과 관련되어 있지 않은 것에는 이데아가 상응하지 않는다는 거야. 세계의 합리적인 질서에 부합하는 현상에 대해서만 '이데아'라는 말을 붙일 수 있어. 이를테면 '크다' '작다'는 지각적인 사태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이데아가 상응하지 않지만, 어떤 것을 '크다' '작다'고 평가할 수 있는 근거인 '비교'나 '성질'에는 이데아가 상응한다는 거야. - p.82


'생각하는 나'가 있다. 사유가 자아의 존재를 결정짓는다 이 사실은 '생각하는 나' 밖에서 아무것도 끌어들이지 않고도 '나의 존재'를 정립한다는 점에서 소위 '주체 철학'의 여명을 알리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던 것이지. 데카르트 이전에는 인간의 이성이 신에게 물려받은 것으로서 그 자체로 객관적인 존재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미 그렇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그냥 믿을 수 없었던 데카르트는 이제 신의 힘을 빌리지 않고 순전히 인간 자신의 힘만으로 자기가 사유함으로써 사유의 존재를 확보하게 되었어. 그는 인류에게 '사유의 사유', 즉 사유가 자기 자신을 사유한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 거야. - p.107


고양이가 고양이이기 위해서는 개와 구별되는 특성을 지녀야 하고, 이를 개에게 양보하거나 개와 공유해서는 안 되잖아. 그렇지 않을 경우, 고양이의 정체성이 사라지면서 세계는 혼란에 빠지겠지. 그런데 K! 세계를 가만히 들여다봐. 각자는 자기 자신만의 모습으로 자기의 자태를 뽐내면 진행되고 있잖아. 그 이유는 다른 것들과 구별되는 자기만의 선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야. 이렇게 넘어설 수 없는 마지막 선에 의해 닫혀 있는 각자의 자기동일성이 곧 모나드야. - p.114


이성은 인간이 세계와 관계하는 데에서 필수불가결한 매개자다. 그런데 그 매개자는 인간의 주관적인 능력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성격을 띤다. 그 이유는 사유의 원리-질서가 사물의 원리-질서와 일치한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신은 세계를 지을 때 자신의 로고스를 사용하는데, 그 로고스를 인간의 이성에 부여하였을 뿐 아니라 세계 자체를 만드는 데에도 사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성의 보편성'은 모든 인간이 똑같이 이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넘어,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이성적인 질서를 지니고 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이성만을 잘 들여다봐도 그 안에서 세계의 기본 원리를 찾을 수 있다. - p.124


헤겔은 이성을 그 자체로 완결된 원리가 아니라 완결을 기다리는 가능태로 보았으며 완결은 가능태가 현실태로 전환될 때에만 성립한다고 생각했어. 가능태와 현실태에 대한 발상을,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빌려 왔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이행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기본 운동으로 파악했지. 꽃씨가 나중에 꽃이 되는 것은 꽃씨 안에 꽃이 될 가능성을 이미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식이야. 꽃씨가 가능태라면 꽃은 현실태라는 말이지. - p.129


인정을 통해 타인의 삶에 내가 관여하게 되는 일 자체가 실은 앞에서 말한 '자기 되기'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어. 나를 '나'뿐 아니라 다른 '나들'도 인정할 때 참된 '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야. 자기는 결국 자기 자신만으로는 자기가 될 수는 없어. 그런 점에서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거쳤던 '자기 되기' 전략은 일면적이라고 할 수 있지. - p.148


무한정 열려 있다는 것은 실은 자기 주위의 모든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다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지. 이러한 상황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가 과연 참된 의미의 자유라고 할 수 있겠니? - p.158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간의 불행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조장되는 거야. 앞에서도 말했지만, 인간존재의 불행은 개인적인 성향이나 능력이라는 자연적인 조건, 그리고 운명과 같은 초월적인 힘의 작용에서 기인하지 않고, 특정한 집단의 부조리한 지배에서 생겨나지. 뒤집어 말하면, 인간의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어서 특정 집단의 부당한 처사에 집단적으로 항거함으로써 불행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하지. 역사란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지.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야. 그래서 인간의 실천적인 의지와 행동이 곧 역사의 내용을 구성하도록 해야 해. - p.188


인간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유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의지"를 지니고 있어. 사유하는 활동 자체는 정신이지만, 그 정신의 배후에는 항상 의지가 작동하고 있다는 거지. 보통 정신 활동을 그 자체로 독자적인 것으로 여기기 쉬우나 그 정신 활동의 뒤에는 항상 감성적인 의지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거야. 이 감성적인 의지는 생명체의 자연적인 속성으로서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고 삶의 다양한 활동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어. 그것은 삶을 추동하는 원동력이고 추진력이야. 이러한 '힘에의 의지'는 선과 악 같은 도덕적 판단 이전에 삶을 지배하는 원초적인 욕구야. 선악의 도덕 판단은 힘에의 의지가 겉으로 드러나는 양태에 지나지 않아. 생명체의 본성에는 본래 선이니 악이니 하는 게 없어. 있는 것은 오직 힘에의 의지뿐이지. 의지는 이성 이전에 모든 생명체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진 감성이야.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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