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보를 들은 후 이릉이 한 말은 실로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왜 자신이 대역부도죄를 뒤집어썼는지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혹시 이릉은 지금까지 전쟁의 역사와 제도로 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비극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이것이 지나친 억측일지는 모르겠으나 그래서 이릉은 한 내지는 무제 개인에 대해 분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저주하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이릉의 비탄과 절망은 무제에 대한 분노라는 차원보다 더 크고 더 깊은 것이 아니었을까?

이제 이쯤에서 고개를 드는 의문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릉이 보낸 편지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 ‘한 통의 편지‘에는 무제의 가혹한 처사에 대한 이릉 자신의 원망과 분노가 토로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설명해 왔던 대역부도 혹은 족형 등의 언급은 전혀 없고 오히려 편지의 세계는 소설 이릉의 그것과 더 닮아 있는 듯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릉의 편지, 흉노 땅에 있는 이릉이 장안의 소무에게 보낸 편지는, 후세의 누군가가 이릉의 이름을 빌려 만든 가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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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혈마를 획득하고 이것으로 흉노군을 때려 눕히겠다고 만전을 기해 시작한 천한 2년의 총공격은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무제와 한 제국에게 이것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한은 10년 전의 전쟁에서 흉노를 궤멸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그 연장선에서 시작한 것이 이번의 전쟁이었다. 더욱이 이전에는 없었던 신무기까지 사용한 총공격이었으니 한은 반드시 승리해야 옳았다.

그러나 기대했던 전과를 올리지 못한 책임을 이광리와 공손오 두 사람에게 물을 수는 없었다. 왜냐 하면 그들 두 사람이 꼭 이것이라고 할 만한 죄를 범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제가 분통이 터져 어찌할 바를 몰라하던 그 순간에 이릉의 투항 소식이 전해진 것이었다.

투항한 이릉은, 이러한 조정이 울분을 터뜨릴 수 있는 속죄양이었다. 물론 사서에는 이에 대해 아무런 기록도 없다. 하지만 실상은 이러했으리라 추측된다.

그들이 이릉에게 화를 내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격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느낀 사람이 조정에도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이릉에게 비난이 집중되자 감히 이릉을 변호하고자 나섰다.

"이 장군은 부모에게는 효성스럽고 동료에게는 신의가 두터우며 언제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평소에 지니고 있는 품격으로 보건대 그는 정말이지 국사(國士)라고 할 만큼 훌륭한 무장입니다. 그러나 지금 무운이 여의치 않자 일신의 보전을 바라는 무리가 그의 작은 결점을 거론하며 온갖 비난을 퍼붓고 있습니다. 통탄할 일입니다. 이 장군은 고작 5천의 보병을 이끌고 고비 사막 깊숙한 곳까지 가서 수만의 적을 상대로 사투를 다하지 않았습니까. 과거의 명장들도 그에 미치지 못할 바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은 것은 틀림없이 공을 세워 설욕하려는 생각일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한 사람은 바로 『사기』의 저자 사마천이었다. 그리고 이 발언이 화근이 되어 그는 감옥에 갇혔고 사형을 언도받았다. 하지만 자신이 저작하고 있던 『사기』의 완성을 위해 사마천은 죽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남자로서는 가장 치욕스런 형벌이라는 궁형(宮刑, 남녀의 생식기를 거세하는 극형)을 사형 대신 선택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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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 진한사 중국의 역사
니시지마 사다오 지음, 최덕경 외 옮김 / 혜안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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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 군현제, 관료제 등 중국 왕조의 국가구조 기틀을 다진 진 제국과 한 제국의 역사를 톺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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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야를 넓혀서 생각하면 한제국이 성립된 후의 중국은 일정한 방식 아래 주변 여러 국가와 정치적 관계를 맺고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세계‘를 형성했다. 이 세계를 동아시아 세계라고 부르는데, 지구상이 일체화되는, 즉 근대세계가 성립하기까지 지구상의 각지에 존재했던 여러 세계, 예를 들면 지중해 세계라든가 이슬람 세계라든가 유럽 세계 혹은 남아시아 세계와 나란히 하나의 세계였다.

이 동아시아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며 그 특징은 한자문화권이라고도 부르듯이 중국문화를 중심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 세계가 중국문화권으로서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 세계에 들어갈 주변 국가와 중국과의 사이에 일정한 형식을 가진 정치적 관계가 필요했다.

예를 들어 한자의 전파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본래 한자란 중국말을 표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글자로, 글자 하나 하나는 중국어로서의 음과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중국과 언어가 다른 한반도나 일본에는 전파되기 어려운 문자였다. 그럼에도 한반도나 일본에 한자가 전파된 것은 당초에는 한국어나 일본어를 표기하기 위한 문자로서 채용된 것이 아니라 중국어 그 자체를 문자로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정이란 당시의 상태에서 생각해 볼 때, 교역이라든가 중국문화의 이입 때문이 아니라 중국과의 사이에 발생한 정치적 관계를 처리하기 위한 도구로서 한자를 습득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즉 한자로 된 외교문서를 해독하고 작성하는 일이 급했던 것이다. 한국 고대의 이두라든가 일본의 만요가나(萬葉仮名)와 같이 한자를 이용하여 그 민족의 언어를 표기한 것은 그 다음 단계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므로 동아시아 세계라는 역사적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문제는 우선 중국과 주변국가 사이에 발생한 정치적 관계의 성립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러한 정치적 관계의 성립은 바로 전한 초기의 대외관계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대외관계는 일정한 형식을 동반하는 것으로, 여기서도 역시 그 형식의 실제와 성격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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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진제국이라는 통일제국은 시황제의 천하통일에 의해 홀연히 출현한 것은 아니다. 춘추시대 후기 이후에 중국 사회의 변동을 배경으로 하여 군현제가 출현하여 전개되고 군주권의 강화와 관료제의 발전이 있었으며, 더욱이 그 밑바탕에는 지배층 및 피지배층 모두에 씨족제의 해체라고 하는 사회구조의 변용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동 속에서 새로운 정세에 재빨리 적응하여 진나라는 부국강병(富國强兵) 정책을 진행하였고 시황제의 천하통일은 마지막 마무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천하통일이 결코 쉽게 달성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성장 과정은 극히 불행했고, 왕위계승도 혼자 힘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게다가 그가 천하통일을 할 때 시행한, 위에서 말한 새로운 정책 입안에는 훌륭한 기획자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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