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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와 단수의 구별이 없다는 점과 관련해서 떠오르는 말은 민권(民權)입니다. ‘자유민권운동‘(自由民權運動)은 일본에서는 보통 쓰이는 말이지만 서양인은 번역하는 데 애를 먹습니다. 지금은 freedom and people‘s rights movement라는 번역어가 정착되어 버렸지만, 처음엔 아주 희한하게 여겼던 모양입니다. 곧 people‘s rights라는 건 없다는 거지요. right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권리여서, 민권이라는 의미로 되지는 않습니다.

그 점을 간파했던 사람이 바로 후쿠자와죠. 민권이라고들 하는데 인권과 참정권을 혼동하고 있다고 후쿠자와는 말합니다. 인권은 개인의 권리이지 인민의 권리는 아니다. 따라서 국가권력이 인권, 곧 개인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국가권력이 인권, 곧 개인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된다. 인민이 참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민권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개인과 일반시민의 구별이 없다고 후쿠자와는 지적했습니다. 그 감각은 탁월하지요. 집합개념으로서의 인민의 권리와 개개인의 개별적인(individual) 권리.

이 말을 번역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은 프랑스 민법의 번역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미쓰쿠리 린쇼(箕作麟祥)였던가요, 프랑스어 droit civil을 민권이라고 번역했지요. 그런데 그것은 재산권 등 민법상의 사권(私權)을 말하는 겁니다. 자유민권론과는 다르죠. 똑같은 droit civil을 한쪽에서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인권이라 번역하고, 다른 쪽에서는 일반적으로 통용된다는 이유로 민권이라 해버리는 것, 그것 역시 일본어에 단수와 복수의 구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중략) 오히려 메이지 10년대의 유명한 유행가 가사 "좋잖아, 시빌이야 아직 부자유스러운들 폴리티컬이라도 자유롭다면" 같은 것은 위압적입니다. civil right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거죠. political(right)이란 참정권을 말합니다. 이리 되면 전체주의로 나아가는 건 시간문제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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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1888년(메이지 21)에는 증보판도 나오는데, 이 판에서는 서문이 약간 바뀌어 있습니다. 원래의 서문은, 지금 가토 씨가 말한 ‘왜 번역주의인가‘에 대해서 답하고 있지요. 사실 이 글은 모리 아리노리(森有禮)에 대한 반박입니다.

모리는 모리대로 『일본의 교육』(Education in Japan)이라는 유명한 책을 출간했습니다. Series of Letters, 곧 그의 서간문 시리즈인데, 뉴욕 애플턴(D. Appleton) 출판사에서 1873년 1월에 나왔습니다. 이 책의 서문에서 모리는 ‘영어를 국어로 삼자‘고 하는 유명한 주장을 폈지요. 야마토 말에는 추상어가 없기 때문에, 야마토 말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서양문명을 일본 것으로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이 기회에 차라리 영어를 국어로 채용하자는 주장이지요. 거기에 대한 반박이 이 바바의 서문인 겁니다. 이 글은 무척 재미있습니다. 만일 일본에서 영어를 채용한다면 어찌될 것인가, 상류계급과 하층계급 사이에 말이 전혀 통하지 않게 되고 말 것이다라는 의견을 바바는 개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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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결혼식에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신랑 신부의 부모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모를 대신하여 덕혜에게는 오빠 부부가 있고, 타케유키에게는 원래 후견인인 쿠죠 부부가 중매인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형식적인 교제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결혼은 고아끼리의 결혼이었다. 본인의 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 그다지 드물지 않은 일이었지만, 본인들의 이해를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부모의 모습이 여기에는 없다.

정략결혼이라고는 하지만 도대체 양가의 어느 쪽이 이익을 얻은 것일까. 일조동화日朝同化라는 국책에 따른 결혼으로, 그야말로 각본대로 젊은 두 사람(만 23세와 18세)의 결혼이 치러진 것이다. 이은 부부를 비롯하여 도대체 누가 그 두 사람의 장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을까. 아니!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 나의 직감이다. 이 느낌은 그 후 두 사람의 결혼생활을 보면 볼수록 더욱 깊어진다.

일본 당국의 의도는 덕혜를 일본인과 결혼시킨 후 그녀를 정말 일본인으로서 황실의 번병격인 화족에 편입시켜 조선 왕족으로서의(고종의 유복자로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제거해버리는 것이었다. 고종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덕혜를 조선민족으로부터 빼앗아 그들의 구심력을 상실케 한다. 실제로 덕혜옹주에 대한 조선의 신문 보도는 이후 자취를 감춘다. 조선민족은 깊은 실망과 함께 덕혜옹주를 잃어버린 것이다.

《조선일보》에는 덕혜옹주의 결혼식 옷차림 사진이 게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진은 덕혜만 있을 뿐 타케유키는 삭제되어 있다. 소 타케유키는 처음부터 한국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있었다. 덕혜옹주를 잃은 슬픔이 그만큼 깊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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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일본 역사를 중국문화권 속에 규정하고 거기에 세계의 존재를 상정하려 할 경우에, 이 중국문화권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은 중국과 일본만이 아니다. 즉, 일본과 더불어 한반도와 베트남이 중국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나, 나아가 중국·조선·일본·베트남이라는 동아시아 일대의 지역이 중국문화권으로서 공통문화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공통문화란 한자·유교·불교·율령 네 가지이다. 이들 문화현상은 모두 중국에서 기원하는데, 어떤 것은 계속적으로 어느 것은 한정된 시대에만 유지되었다는 차이가 있긴 해도, 모두가 이들 지역에 보급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 때문에 이 동아시아 일대에 확장된 중국문화권을 하나의 세계로 본다면, 그곳에서 공유되는 여러 가지 문화적 성향이 이 세계의 성격을 규정한다. 여기서의 성격이란, 이들 여러 문화가 단순히 모두가 중국에서 기원한 것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어떻게 동아시아 지역에 향수享受되었느냐 하는 수용과정과, 또 그것이 각 지역에서 어떠한 활동을 했느냐 하는 기능적 측면을 고려해서 판단해야 한다. 이것은 다음 절에서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문제이다.

이상과 같은 동아시아 일대에 널리 퍼진 중국문화권을 나는 동아시아세계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앞에서 언급한 의미를 기준으로 해서 하나의 세계로 인정받으려면, 거기에 공통문화가 자리했다는 사실 외에도 자기완결적인 정치구조가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나타내야 할까. 그리고 또 그것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 가능하더라도 문화권과 정치권이 일치한다는 것은 우연의 결과일까. 아니면 양자 간에, 혹은 더 큰 관점에서 문화와 정치 자체에 서로 유기적인 관련이 있어서일까. 앞서 말한 이 세계에서 특정한 문화 요소의 공유 측면과 더불어 이것의 고찰 또한 중요한 문제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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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타다오씨는 《정신분열증의 세계》에서 정신분열증이라는 것이 문학·회화라는 예술적 창조에까지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넓은 시야에서 쓴 것으로,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이상‘한 부분이 있으며 ‘정상‘과 ‘이상‘의 미묘한 균형이 잡혔을 때라야만 참다운 ‘건강‘이 성립된다."라는 기본적인 견해에 공감한다. 나아가 "분열증의 경우, 보통은 ‘자폐‘로 불리며 주위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잃은 것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그러나 (중략) 사실은 전혀 그 반대가 많다. 즉 그들의 마음은 애처로울 정도로 주위, 특히 인간세계를 향해 있으며, 또 인간 세계로부터의 여러 가지 통신과 자극에 매달려 있다."라는 지적이 가슴에 와닿는다. 분열증으로 시달리는 덕혜의 내면을 짐작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 지적을 기억하면서 고찰해가려 한다.

한 사례를 증거로 들자면, 《햄릿》에 나오는 오필리어의 광기는 정신의 갈등 끝에 초래된 분열증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덕혜옹주의 경우는 이보다 더 가혹한 갈등, 즉 민족적 고난과 정치적 압력의 틈바구니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말살당한 고독한 영혼의 고뇌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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