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조선정감 - 구한말 지식인이 본 조선의 정세와 그 뒷이야기 탐구히스토리
박제형 지음, 이익성 옮김 / 탐구당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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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 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을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십니까? 몰락한 왕족으로 세도가 주위를 상갓집 개처럼 기웃거리다가 철종(哲宗, 재위 1849~1863)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이 왕이 되자 비로소 마음속에 숨긴 야심을 드러내는 인물로 알고 있지 않으신지요. 이러한 대원군의 모습은 소설, 영화, 드라마 같은 여러 매체에서 나타났습니다. 특히 김동인(金東仁, 1900~1951)이 1933년과 1934년에 걸쳐 신문에 연재한 역사 소설 『운현궁의 봄』에서 묘사한 대원군은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대원군의 인물상은 『운현궁의 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니, 연재가 끝난 지 백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영향력이 큽니다.


그렇다면 대원군이 대중 매체에 주요 인물로 등장하기 전에는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바라봤을까요? 1886년에 일본의 한 출판사에서 펴낸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은 이하응을 '파락호'로 기술한 역사책입니다. 이 책을 지은 박제경(朴齊絅, 원본에는 이름이 '朴齊炯'으로 표기)은 1884년에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당에서 활동하던 이로, 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면서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근세조선정감』은 박제경을 비롯한 일부 조선인이 1864년부터 1873년까지 10년 동안 이어진 '대원군 집권기'를 어찌 인식하고 평가했는지 보여 주는 자료입니다.

"철종은 여러 번 아들을 두었으나 모두 기르지 못했고 주색(酒色)이 과했다. 여러 김씨는 왕에게 후사 없음을 걱정하여 종실 자손으로 명망이 있는 자는 남모르게 없애고자 하였다.

흥선군 이하응은 재주와 지략이 뛰어났으나 집이 가난하여 죽도 제대로 먹지 못하였다. 성품이 경솔하고 방탕하여 무뢰한과 잘 어울렸다. 기생집에서 놀다가 가끔 부랑군에게 욕을 당하니 사람들이 모두 조관(朝官)으로 여기지 않았다. 매양 여러 김씨에게 아첨하였으나 김씨들은 그 사람됨을 좋지 않게 여겨서 모두 냉정하게 대했다."

지은이가 저자에서 들은 풍문을 적은 듯한 이 기록은 『운현궁의 봄』의 원형이 되었다고 할 만합니다. 다만 고종(高宗, 재위 1852~1919)이 즉위하기 이전에 대원군이 안동 김씨 가문을 속이려고 본심을 숨긴 채 파락호처럼 굴던 적이 있었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당대 사료를 찾아보면, 한량으로 살았을 성싶은 대원군이 종친부(宗親府)에서 유사당상(有司堂上)으로 오래 일했다는 기록이 눈에 띕니다.

종친부는 역대 왕의 계보와 초상화를 보관하고, 왕과 왕비의 의복을 관리하며, 종반(宗班)을 다스리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였는데, 대원군은 유사당상으로 재직하면서 종친부가 가진 권한을 확대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고자 안동 김씨 가문과 정치적으로 거래한 정황도 엿보입니다. 야사나 소설에서 그린 것과 사뭇 다른 행적이지요. 국왕의 생부로 권력의 중심에 서기 전까지 대원군은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사는 아니었습니다. 베일에 싸인 대원군의 과거는 백성들이 호기심을 느끼기에 좋은 소재였습니다. 게다가 신분과 직위가 낮은 이도 만나기를 꺼리지 않을 만큼 대원군이 호방한 성품을 지녔다고 알려지면서 그가 한때 파락호로 행세했다는 이야기를 누군가 꾸미지 않았나 싶습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초상(위키백과)


이처럼 『근세조선정감』은 정사가 아닌 야사임을 고려하더라도 터무니없는 내용이 너무 많습니다. 지은이가 책에서 다룬 시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때에 글을 썼음에도 실상에 어긋나는 기록이 한둘이 아닙니다. 병인박해와 관련한 기사도 그러합니다.

지은이는 대원군에게 서양 국가들과 통상하기를 권한 천주교도 남종삼(南鍾三, 1817~1866)이 자기 집에 천주교 선교사인 '장경일(張敬一)', 즉 시메옹 프랑수아 베르뇌(Siméon François Berneux, 1814~1866) 주교를 숨겨 놓은 것이 드러나면서 병인박해가 일어났다고 이야기합니다. 서양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 만치 국제 정세에 어둡던 대원군이 베르뇌 주교가 조선에서 15년 동안 전교하면서 신자를 수십만 명으로 늘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놀라는 장면도 나옵니다. 그렇지만 조선 조정은 연행사의 보고로 1860년에 영불 연합군이 청(淸)에 쳐들어가 북경 교외에 있는 원명원(圓明園)을 불태웠고, 황제가 열하로 피난했다는 상황을 이미 파악했습니다. 그보다 한참 뒤인 1866년에 대원군이 남종삼에게 "서양이라는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었다고 하는 것은 맥락에 어긋난 엉뚱한 소리일 따름입니다.

또한, 베르뇌 주교가 동료 사제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대원군은 천주교 선교사들의 존재를 모르지 않았습니다. 베르뇌 주교를 모르기는커녕 그와 접촉하려고 애쓴 흔적이 뚜렷합니다.

"러시아로부터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는 편지가 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 관리에게 제가 러시아인들의 문제를 처리해 주면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관리를 통해 그 군(君)[흥선대원군]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임금께 유익한 일로 돕고자 간절히 바라지만, 러시아인들과 나라가 다르고 종교가 다른 저로서는 그들에게 어떤 영향력도 미칠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 『베르뇌 주교 서한집』에서

대원군은 1864년에 러시아인들이 조선 국경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베르뇌 주교를 통해 프랑스와 손잡고 러시아를 밀어내려고 했습니다.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대안으로 구상한 셈입니다. 그러다가 일이 틀어지면서 대원군은 베르뇌 주교와 대면하거나 프랑스와 수교하기를 단념하고, 되레 천주교를 박해하고 말았습니다. 병인박해가 일어난 까닭을 조금 다르게 또는 좀 더 깊이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근세조선정감』에 나오는 내용은 사실과 거리가 멉니다.

앞서 살펴봤듯이 『근세조선정감』은 대중의 역사 인식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음에도 왜곡이 많습니다. 하지만 한학자로 활동한 이익성(李翼成) 선생이 1974년에 우리말로 옮겨 탐구당에서 낸 번역서는 현재 서점에서 찾기 쉽지만, 주석이 빈약한 탓에 독자들이 사실 여부를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이를테면 대원군의 개혁과 양요를 서술한 부분은 지은이가 제너럴셔먼호 사건, 병인양요,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 사건, 신미양요를 뒤섞어 버리는 바람에 아주 혼란스러운데, 거기에 "양헌수(梁憲洙)는 신미양요 때 정족산성에서 미군을 격퇴한 인물이다."라고 잘못된 주석이 달려 독자들을 더 혼란스럽게 하지요. 양헌수는 병인양요에 참전했고, 그가 격퇴한 적은 프랑스군이었습니다.

『근세조선정감』에는 지금의 연구 성과와 사료 비판을 반영한 새로운 번역과 주석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것은 사료를 주의 깊게 독해하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환기한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작업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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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울 감옥 생활 1878 - 프랑스 선교사 리델의 19세기 조선 체험기 그들이 본 우리 6
펠릭스 클레르 리델 지음, 유소연 옮김 / 살림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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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델 주교가 조선과 조선인을 사랑하고 아꼈음을 부정하지 않겠지만, 1866년에 프랑스군이 조선을 침략했을 때 길잡이로 나선 일을 생각한다면, 신앙의 자유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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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조선정감 - 구한말 지식인이 본 조선의 정세와 그 뒷이야기 탐구히스토리
박제형 지음, 이익성 옮김 / 탐구당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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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 대원군의 섭정이 끝난 지 10년을 전후한 때에 쓰인 야사이지만, 사실에 맞는 내용이 손에 꼽을 만큼 적은 탓에 가치 있는 사료라고 하기 어렵다. 다만 당대에 살던 일부 조선인이 ‘대원군 집권기‘를 어떻게 바라봤는지에 초점을 둔다면, 흥미롭게 읽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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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평화를 짝사랑하다 - 붓으로 칼과 맞선 500년 조선전쟁사 KODEF 한국 전쟁사 1
장학근 지음 / 플래닛미디어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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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는 매력이 넘치는데, 정족산성 전투 묘사처럼 오류로 얼룩진 일부 내용은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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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明 2025-11-13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줄 평에서는 정족산성 전투 묘사가 왜 잘못됐는지 자세히 설명하기 어려우므로 댓글로 보충 설명합니다. 다음은 책 원문입니다.

˝강화도에 도착한 이용희는 11월 7일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을 침입한 후 산세를 정찰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광성보에 배치되어 있던 양헌수梁憲洙를 불러 정족산성 사수 명령을 내렸다. 예하병력 530여 명을 이끌고 잠복해 프랑스군이 접근해오기를 기다리던 양헌수에게, 사흘 후 160여 명의 특공대를 이끌고 정족산성을 향해 오고 있는 올리비에 대령이 포착되었다. 일부는 말을 타고 일부는 걸어오는 모습에서 경계태세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산성 내에 들어서자마자 전등사 불당에 짐을 풀고 점심식사를 하면서 승리를 자축했다. 기회를 잡은 양헌수는 일제공격을 명령했다.˝

이 글만 읽으면, 순무영(巡撫營) 중군(中軍)인 이용희(李容熙)는 강화도에 머무른 듯한데, 실제 이용희는 통진에 주둔 중이었습니다. 천총(千摠) 양헌수는 광성보가 아닌 그 맞은편에 있는 덕포진에서 대기 중이었지요. 순무영의 선봉 격인 이용희와 양헌수는 한양에서 출발해 통진에 도착했음에도 프랑스군의 한강 수로 봉쇄로 강화 해협을 건널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양헌수가 야음을 틈타 강화 해협을 건넜고, 정족산성에 들어가 프랑스군과의 일전을 준비합니다.

또한, 올리비에 대령이 이끌던 프랑스군 정찰대는 정족산성 전투 당시 조선군의 기습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는 바람에 성벽을 넘지도 못했습니다. 전등사 불당에 짐을 풀고 점심을 먹으면서 승리를 자축했다는 기술도 근거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글쓴이가 한때 일하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전신인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89년에 펴낸 『병인·신미양요사(丙寅·辛未洋擾史)』에서도 그러한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책 전반부는 재미있게 읽었기에 사실 관계에서 크게 어긋난 오류는 아쉬울 따름입니다.
 
철종의 눈물을 씻다 - 강화도령 이원범의 삶과 그의 시대사
이경수 지음 / 디자인센터 산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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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도령‘으로 불리는 철종이 실제 강화도에 살던 시간은 5년 정도이며, 나무꾼이나 농부도 아니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즉위한 왕이라서 한계가 뚜렷했지만, 재위 기간 내내 민생을 살피려고 했다. 철종은 자기에게 갑자기 주어진 의무를 포기하지 않고, 군주로서 자질을 갖추고자 애쓴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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