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부장들 - 개정 증보판 남산의 부장들
김충식 지음 / 폴리티쿠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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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부터 1994년까지 『동아일보』에 인기리에 연재된 글을 묶은 『남산의 부장들』은 총 세 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됐습니다. 그 가운데 1992년에 나온 1권과 2권은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일한 김충식 교수가 썼는데(나머지 3권은 김 교수와 마찬가지로 『동아일보』 기자였던 이도성 씨가 썼습니다), 김 교수가 맡은 부분은 20년 만인 지난 2012년 개정하고 증보하면서 800쪽이 넘는 두툼한 한 권짜리 책으로 새로 나왔습니다. 과거 '남산'이란 속칭으로 불리며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중앙정보부(이하 중정)'의 뒷이야기를 담은 『남산의 부장들』은 한국 현대사의 사료가 될 만한 값어치가 있는 우리 시대의 명저입니다.



대체로 1권(개정 증보판의 1부)은 제3 공화국 시기를, 2권(개정 증보판의 2부)은 10월 유신 이후 제4 공화국 시기를 다뤘는데, 박정희 정권과 흥망성쇠를 함께한 중정의 부장들이 이야기의 주조연으로 등장합니다. 박정희 소장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키고서 중정을 세웠음에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외유를 떠나야 했던 김종필(金鍾泌 1926~2018), 한 달 남짓 남산에 머물다가 덧없이 떠난 김용순(金容珣, 1926~1975), 육군 사관 학교(이하 육사) 5기를 대표해서 육사 8기 김종필을 견제한 김재춘(金在春, 1927~2014), 권세만 믿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가 자기가 모시던 윗사람에게 끝내 버림받은 채 프랑스 파리에서 영원히 '실종'된 김형욱(金炯旭, 1925~1979?), 샌님같이 대가 약해 노회한 야당 정치인들에게 휘둘린 김계원(金桂元, 1923~2016), 능수능란한 처세술로 장면(張勉) 내각 사람이라는 약점을 극복하고 박정희의 오른팔이 된 이후락(李厚洛, 1924~2009), 법을 칼처럼 휘두른 신직수(申稙秀, 1927~2001),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金載圭, 1926~1980) 등이 만든 사건들을 글쓴이인 김충식 교수는 여러 관계자의 증언과 기록을 엮어서 생생하게 그렸습니다. 음모와 계략 그리고 배신이 뒤섞인 박정희 시대의 드라마는 소설 못지않게 흥미진진합니다.


그렇지만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은 역시 특유의 용인술로 중정 부장들을 쥐락펴락한 박정희(朴正熙, 1919~1979) 전 대통령입니다. 중정이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것도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 뒤에서 밀어줬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안보파수꾼·외교주역에서부터 정치공작, 선거조작, 이권배분, 정치자금징수, 미행, 도청(盜聽), 고문 납치, 문학·예술의 사상평가, 심지어 여색(女色)관리, 밀수, 암살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올마이티(almighty)의 권력중추"인 중정을 앞세워 국가를 통치하였습니다. 그는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바꾸는 것 빼고는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던 중정 덕분에 승승장구하며 18년 동안 장기 집권했지만, 우리 사회는 그 때문에 너무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5·16 이후 박정희 정치의 특징은 '친위 정보기구를 통한 정치 인멸(湮滅)'이었다. 정보부를 비롯한 권력기구, 행정 체계 및 돈을 총동원해 선거의 공정성을 무너뜨리고 공작으로 정치 타협의 룰을 훼손했던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여당 정치인은 힘에만 빌붙고 야당 정치인은 돈과 공작에 놀아나는 천박한 존재로 굴러 떨어졌다.


박정희는 스스로 빚어놓은 그 천박한 정치와 정치인상에 또 역겨움을 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박 전 대통령은 스스로 정치인이었음에도 다른 정치인을 혐오했으며, 의회 정치를 불신했습니다. "부질없는 정쟁(政爭)으로 인한 국력손실을 막고 경제 도약을 해보자고 유신을 한 거야"나 "시끄럽게 떠드는 건 학생과 정치인뿐"이라는 말에서 그러한 생각이 언뜻 드러나지요. 박 전 대통령은 자유로운 선거와 투표로 빚어지는 번거로움도 꺼렸습니다. 그래서 선거와 투표의 '폐단'을 줄인 유신체제가 들어서면, '정치적 낭비'가 없는 부국강병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978년 8월 28일, 태릉사격장에서 사격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동아일보)



하지만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목소리는 나날이 커졌습니다. 정적들의 동태에 신경이 예민해진 박 전 대통령은 '정보중독증상'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정보 정치에 더욱 기댔습니다. 측근이자 조카사위인 김종필조차 믿지 못해서 중정을 통해 감시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종말의 날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정보 정치의 고갱이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손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정치 폐허 위에 쌓은 유신의 성은 하루아침에 허물어졌습니다.


『남산의 부장들』의 또 다른 주인공은 박 전 대통령의 '친위대'이던 전두환(全斗煥, 1931~)입니다. 책 들머리에 1961년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난 직후 권력의 향방을 좇아 바쁘게 움직이던 전두환 대위의 모습을 비춘 김충식 교수는 1980년 중정의 사실상 '마지막' 부장이 된 전두환이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서 권좌에 오르는 광경을 보이면서 글을 마무리 짓습니다. 이야기의 기와 결을 전두환 한 사람이 장식한 셈이지요. 김 교수는 이 놀라운 수미일관의 구성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박정희 시대는 다시 말하면 초급장교 전두환이 최고회의 민원비서관과 중정 인사과장으로 부임하면서 열려, 전두환 소장이 보안사령관일 때 닫혔다. 그리고 전 장군이 80년 중앙정보부장(서리)으로 남산에 되돌아옴으로써 박정희 시대는 소멸되었다."


이처럼 책에서는 우연인 듯 우연 아닌 필연이 된 장면이 몇 가지 나옵니다. 예컨대 전두환을 비롯한 육사 11기 출신 정치군인들이 1963년에 이미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었고, 그들을 조사한 이가 당시 방첩대장인 정승화(鄭昇和, 1929~2002)였다는 대목은 뒷날 벌어질 12·12 군사 반란을 불길하게 예고합니다. 또한, 육사 11기들이 꾀한 쿠데타 계획은 1990년대 초까지 이어진 군사 정권의 씨앗이 박정희 정권 초기에 뿌려졌음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현시점에서 『남산의 부장들』을 다시 읽으면, 책 속에서 조연으로 잠깐 나오는 박근혜(朴槿惠, 1952~), 김기춘(金淇春, 1939~), 최태민(崔太敏, 1912~1994) 같은 몇몇 이름이 자연스레 눈에 띕니다. 그때 그 사람들이 몇 년 전에 온 나라를 뒤흔든 사건과 얽힌 것을 보면, 우리는 아직도 박정희 시대의 그늘 속에서 사는 듯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안타까우면서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중정도 '국가 안전 기획부(안기부)'와 '국가 정보원(국정원)'으로 두 차례나 이름을 바꾸고, 기관이 자리 잡은 곳을 서울 중구 예장동에서 서초구 내곡동으로 옮겼으나, '정치공작사령부'라는 본질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박정희 시대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정보기관이 대선에 개입하고, 민간인을 사찰하고, 간첩을 조작하는 행태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민주화 이후에도 정보 정치의 폐단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확연히 드러냅니다. 아마도 정권 안보가 국가 안보라고 여기는 헛똑똑이들이 조직을 이끈 탓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잇달아 일어난 것이겠지요. 하지만 중정의 역사가 말하듯 그런 믿음은 우스꽝스러운 착각일 뿐입니다. 정보기관이 정권의 시녀 노릇이나 하는 흑역사는 앞으로 끝내야 마땅합니다. 『남산의 부장들』은 예나 이제나 그것을 잘 보여 줍니다.

- 2016년 1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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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 2020-06-08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놀고있네 아주

解明 2020-06-09 09:18   좋아요 0 | URL
네, 아주 잘 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