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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부원록 ㅣ 강화고려역사재단 학술총서 1
김인호 외 옮김 / 혜안 / 2015년 7월
평점 :
"멀리 강화도를 바라보니 아득하게 보이는 땅이 바람 속 먼지로 흐릿한데 단지 한 줄기 강물로 떨어져 있을 뿐이다."
- 『개성부원록(開城赴援錄)』에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어우러진 조강(祖江)은 강화도 동북단에 다다라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남으로 흐르는 물은 강화 해협을 지나 인천 앞바다로, 서로 흐르는 물은 예성강과 합류해 교동도를 거쳐 서해로 들어갑니다. 둘로 나뉜 조강 물줄기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그 생김새가 마치 제비 꼬리를 닮았습니다. 풍류를 즐기던 옛사람들은 이 물길이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언덕에 정자를 세우고, 거기에 연미정(燕尾亭)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문자 그대로 제비 꼬리 정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연미정은 여느 정자와 달리 월곶 돈대 안에 자리 잡아 성벽을 울타리같이 둘렀고, 강화 외성의 여섯 개 성문 가운데 하나인 조해루(朝海樓)와 이어졌습니다. 이것은 조선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대에 바다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막고자 월곶진(月串鎭)이라는 요새를 연미정 일대에 구축한 흔적입니다. 한강으로 들어가는 어귀에서 관문 역할을 하던 강화도가 지닌 특성으로 말미암아 연미정은 군사 시설과 어우러진 독특한 경관을 보여 주지요. 그래서 연미정은 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처럼 성에서 군사를 지휘하는 장수가 올라서던 장대와 비슷해 보입니다. 실제로 연미정에 올라 주위를 돌아보면, 김포 문수산부터 개성 송악산까지 한눈에 들어오므로 전시에 지휘소로 삼을 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닌 게 아니라 연미정은 한때 싸움터가 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프랑스 극동 함대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1866년에 개성에서 보낸 군대가 그 앞을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미정과 월곶 돈대를 찾아온 답사객들도 대개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돌아갑니다. 안내판에도 적히지 않을 만큼 널리 알려진 사건이 아닌 탓입니다.
이렇게 사람들 머릿속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는 개성군을 언급할 수 있는 것은 『개성부원록』이라는 책 덕분입니다. 『개성부원록』은 양요가 끝난 뒤 개성에서 참전한 이들이 명령서, 보고서, 회고록 등 관련 자료를 모아 엮은 책으로, 그들이 양요 전후에 어떻게 활동했는지 드러내는 사료입니다. 이 책도 개성군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지난 2015년에 강화고려역사재단이 역주본을 펴내면서 일반인도 찾아보기 쉬워졌습니다. 『개성부원록』은 10월 4일(양력 11월 10일)에 조강을 건넌 개성군이 강화도에 상륙한 직후에 목격한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곧이어 월곶진 앞에 도달하였는데, 이른바 적선이 모두 숨어버리고 한 놈도 발견할 수 없었다. 10여 곳의 포구 부락에는 도무지 젊은 여성은 없었고 단지 병들고 늙은 4~5명의 남자 노인네들이 있을 뿐이었다. 이들은 고목(枯木)과 같은 모습으로 마치 강가에 서있는 나무 같이 빈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김종원(金鍾源)이 진중에 명령하여 좌우의 반열과 전후의 행군대오를 엄숙하게 정렬하여 총을 쏘고 취타(吹打)를 불게 하면서 조해문(潮海門)으로 들어갔다. 조금 쉬고 난 후에 병사들이 먼저 진사(鎭舍)를 살피게 하니 남은 곳이 10군데 중 2~3곳에 불과하였다. 군기고(軍器庫)와 화약고가 모두 잿더미가 되었고, 중문 다락의 돌난간이 깨지고 떨어져 있었다. 성 아래에 진(鎭) 밑에 있던 34가구는 비어서 거주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탐문할 곳이 없었다."
개성군이 월곶진에 닿았을 때 연미정을 감싸던 요새는 프랑스군이 파괴해 이미 폐허가 된 상태였습니다. 그 주변에 살던 백성들은 모두 어디론가 흩어져 버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물어볼 만한 이마저 없었지요. 당시 프랑스 해군 소위 후보생으로 종군한 앙리 쥐베르(Jean Henri Zuber, 1844~1909)가 쓴 기록을 살펴보면, 강화부성에서도 월곶진과 비슷한 광경이 먼저 펼쳐졌다는 내용이 나와 눈길을 끕니다. 쥐베르는 프랑스군이 강화부성을 함락하자 주민 대부분이 달아나 여자는 한 명도 없었고,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 몇몇만 마을에 남았을 뿐이라고 종군기에 적었습니다. 그만큼 조선인들에게 '양이(洋夷)'는 낯설고 두려운 존재였는데, 프랑스군은 강화도 여기저기에서 학살, 방화, 성폭행, 약탈 따위의 범죄를 저질러 조선인들을 공포에 빠뜨렸습니다. 천주교 선교사들을 처형한 조선의 야만스러운 행위를 징벌하겠다는 '문명국' 프랑스의 민낯은 그토록 끔찍했습니다.

연미정을 감싼 월곶 돈대와 조해루(국가유산포털)
그렇다면 월곶진에 머무르던 프랑스군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개성군이 강화도에 발을 딛기 하루 전인 10월 3일(양력 11월 9일)에 양헌수(梁憲洙, 1816~1888)가 이끄는 부대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 정찰대와 전투를 치렀습니다. 이른바 정족산성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프랑스군보다 화력이 열세했음에도 지휘관의 지략으로 전세를 뒤집는 이변을 일으켰습니다. 반면에 프랑스군은 뜻밖의 패배에 충격을 받고 노획물을 챙겨 강화도에서 서둘러 빠져나갑니다. 이처럼 프랑스군의 시선이 강화도 동남쪽에 자리한 정족산성으로 쏠린 덕에 개성군은 아무런 저항 없이 바다를 건넜던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개성군은 그런 전황을 모른 채로 상륙 작전을 벌였습니다. 만약에 개성군이 프랑스군과 마주쳤다면, 전력 차로 참패했을 가능성이 컸을 테니 그야말로 천운이었지요.
이쯤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더 제기할 만합니다. 9월 8일(양력 10월 16일)에 강화부성을 빼앗긴 지 한 달 가까이 지나서야 개성군이 강화도에 도착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조선 조정은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쳐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해 중앙군 병력을 동원합니다. 이때 순무영 천총(千摠)으로 임명돼 선봉에 나선 이가 바로 정족산성 전투의 영웅 양헌수였습니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개성과 교동도에 지원군을 편성하라고 명령합니다. 한양에서 출발해 통진 방면으로 진군하는 순무영 군사와 협공해 프랑스군에게 빼앗긴 강화도를 되찾겠다는 포석이었겠지요. 개성 유수(開城留守)는 조정의 명령을 받자마자 9월 11일(양력 10월 19일)에 군졸을 징발해 그 이튿날에 출정하게 합니다. 이렇게 보면 크게 나무랄 데 없이 비상사태에 잘 대응한 듯싶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개성은 유수부(留守府)를 둔 큰 고을로, 군적에 적힌 병력이 만 명쯤 됐는데, 막상 전쟁이 터지자 소집된 인원은 겨우 150명 남짓했습니다. 군적에 쓰인 이름은 허깨비인 셈이었지요. 그나마 모인 병사들도 『개성부원록』의 글쓴이가 "급하게 거병을 하니 여유가 거의 없던 백성들은 무기와 군장을 준비한 것도 전혀 없었다."라고 지적할 정도로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더욱이 그들을 이끌어야 할 중군(中軍) 구연홍(具然泓)마저 무능한 지휘관이었습니다. 개성군은 개성과 통진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다가 강화도 땅은 밟지도 못하고, 개성으로 그냥 되돌아가 버렸습니다. 물론 프랑스군이 갑곶진(甲串鎭)과 월곶진 앞에 군함을 여러 척 배치해 조선군이 섬으로 못 들어오게 막았으므로 강화 해협을 넘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엇비슷한 조건에 처한 양헌수가 적정을 살피며 바다를 건너갈 기회를 끊임없이 노렸다면, 구연홍은 그러한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 차이는 나중에 사뭇 다른 결과로 돌아왔습니다. 결국 조정에서는 개성 유수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채 철수한 구연홍을 파면하고 맙니다. 그렇게 아까운 시간이 덧없이 흘러가 버렸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개성부원록』은 개성 사람들이 자신들의 공적을 세상에 알리려고 쓴 책입니다. 이 책은 얼핏 보기에 미완성작이 아닌가 싶을 만치 편집이 깔끔하지 않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적잖지만, 글과 글 사이마다 임금을 향한 충정과 무도한 '양이'를 무찌르겠다는 의지가 짙게 배었습니다. 또한,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경계, 병참, 정찰 등 중요한 임무를 말없이 해냈을 이들의 노고도 엿보이지요. 하지만 『개성부원록』은 글쓴이가 의도한 바와 어긋나게 조선 왕조의 국가 체계가 시나브로 무너지는 모습도 드러납니다.
부족한 병력, 미비한 무장, 무능한 장수 같은 세기말 현상은 개성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나타났습니다. 조선은 19세기에 들어와 파도처럼 거듭 밀려오는 서구 열강에 맞설 만한 역량이 부족해진 지 오래였습니다. 나라를 떠받쳐야 할 사대부들의 인식도 시대에 뒤처졌습니다. 『개성부원록』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은 영웅 소설 속 호걸인 양 그려집니다만, 시대착오에 빠진 그들의 언행을 보면 쓴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이를테면 서생 민치오(閔致五)는 프랑스군을 물리칠 계책으로 화공과 수륙병진을 제안하는데, 작전을 실행하는 데에 필요한 사람도 배도 모자란 상황에서 그것은 쓸 만한 계략이 아니었습니다. 또 제너럴셔먼호 같은 상선이라면 몰라도 프랑스군이 타고 온 군함을 화공으로 불태우기란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습니다.
몇몇 역사학자는 작자 미상인 『개성부원록』이 민치오가 쓴 작품이라고 여길 만큼, 민치오는 책에서 비중이 큽니다. 민치오는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종군하기를 자원해 개성군의 일원으로 활약했으며, 전란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양요라는 사태를 수습하고자 애썼습니다. 적어도 민치오는 사대부로서 책임감을 느끼던 인물이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시대가 변화하는 흐름을 읽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민치오는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침입하기 직전에 과거를 보러 마침 한양에 다녀왔는데, 누군가 그에게 서울 소식을 묻자 태평스러운 기상이라고 답변했습니다. 그때는 프랑스 극동 함대 소속 군함 2척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한양이 코앞인 양화진(楊花津)까지 이르렀다가 중국으로 돌아간 때였습니다. 이양선 출몰로 한양이 소란스러움을 모를 리 없는 그가 서울은 태평스럽다고 했으니 황당할 따름이지요.
아마 민치오는 스스로 보고 듣고 겪은 일을 회고록으로 남긴 듯하고, 그 글은 『개성부원록』의 고갱이를 이뤄 병인양요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 주는 귀중한 사료가 됐습니다. 다만 그는 자신이 기록한 시대가 어디로 나아가는지 몰랐습니다. 민치오는 일개 서생에 지나지 않았으니, 세계정세에 어두워도 크게 탓할 수 없겠지만, 안타깝게도 위정자라고 하더라도 그보다 눈이 밝은 이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서세동점(西勢東漸) 시기에 조선이 맞은 비극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