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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척, 조선의 사냥꾼 - 호랑이와 외적으로부터 백성을 구한 잊힌 영웅들
이희근 지음 / 따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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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음력 10월 3일, 양력으로 11월 9일에 정족산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순무천총(巡撫千摠) 양헌수(梁憲洙, 1816~1888)가 이끌던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쳤습니다. 낡은 화승총으로 무장한 조선군을 얕잡아 보던 프랑스군은 뜻밖에도 거센 저항에 부딪혔고, 이날 패배는 프랑스군이 한 달 가까이 점령하던 강화도에서 철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곧이어 한강 수로를 봉쇄하던 프랑스 함대도 강화 해협에서 물러나 사라졌습니다. 프랑스 군함 2척이 음력 8월 18일(양력 9월 26일)에 한강에 난데없이 나타나 무력시위를 벌인 때부터 헤아리면, 거의 두 달 동안 한성을 충격과 공포에 빠트린 병인양요는 그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병인양요의 승패를 가른 정족산성 전투에서 조선군의 주력을 이룬 것은 중앙군인 경군(京軍)이 아니라 '향포(鄕砲)'라고 불린 지방 포수들이었습니다. 지방 포수 대다수는 평소 산에서 조총으로 범을 잡던 사냥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양이(洋夷)'가 쳐들어오자, 조정의 명령으로 순무영(巡撫營) 선봉대가 주둔한 통진에 모였는데, 어떤 이는 강원도 춘천에서, 또 어떤 이는 경기도 여주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는 고을은 제가끔 달랐지만, 포수들은 순무영의 일원으로서 바다를 건너 정족산성에 들어가 전투를 치렀습니다.

병인양요 이후 정족산성의 지형을 병풍에 그린 고지도(우리역사넷)


정족산성 전투에 참가한 사람들의 전공을 기록한 보고서인 「정족산성접전사실(鼎足山城接戰事實)」을 보면, 양헌수가 군사를 나눠 남문에는 향포 161명, 동문에는 향포 150명, 서문과 북문에는 경군 101명과 향포 56명을 배치했다는 내용이 눈에 띕니다. 전등사(傳燈寺)와 사고(史庫)가 자리한 골짜기를 둘러싼 정족산성에서 남문과 동문으로 오르는 길은 서문과 북문으로 오르는 길보다 덜 가파릅니다. 더욱이 그 길은 정족산성과 강화부성(강화산성) 사이에 남북으로 길게 놓인 도로와 이어졌기에 접근성도 좋았지요. 서문과 북문보다 남문과 동문 쪽으로 프랑스군이 진격해 올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다시 말해 양헌수가 남문과 동문에 향포를 집중하여 배치한 것은 향포를 전방 부대로, 경군을 예비 부대로 활용하는 전략을 세웠음을 뜻합니다. 실제로 양헌수가 예측한 대로 남문과 동문 일대에서 접전이 벌어지자, 일선에 선 포수들은 그 기대에 부응했습니다. 그때 통역으로 프랑스군 정찰대를 따라간 리델(Félix Clair Ridel, 1830~1884) 신부는 친형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자신이 목격한 전투 현장을 다음과 같이 생생히 묘사했습니다.

"문에서 100m도 안 되는 곳까지 이르고 전위는 문에 훨씬 더 가까이 이르렀을 때, 긴 성벽 앞쪽에서 갑자기 총성이 울렸습니다. 총성은 뒤섞여 쉴 새 없이 울렸고 총탄이 사방에서 저희 말, 저희 머리 위에서 쌩쌩 날랐습니다. 머리를 돌려봤더니 거의 모두 땅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각자 숨을 수 있는 곳에 몸을 숨기고 사격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했습니다만 사격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 『리델문서Ⅰ』에서

포수들은 마치 사냥감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듯이 프랑스군이 조총의 유효 사거리인 100보 안에 들어올 때까지 참고 견뎠습니다. 그리고 적들이 성문에 접근한 순간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조선군의 기습으로 서른 명이 넘는 프랑스군이 총상을 입었는데, 그 가운데 다섯 명이 장교였습니다. 4개 소대를 차출해 150명 규모로 편성한 정찰대에서 장교 여럿이 총에 맞아 쓰러졌으니, 작전을 지속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또한, 리델 신부는 친형에게 부상병들과 그들을 간호하는 이들을 제외하면, 싸울 수 있는 병사가 80명이 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습격을 당해 사상자가 발생했어도 우세한 병력과 화력을 앞세워 조선군을 격퇴한 문수산성 전투와 정반대로 불리한 전황에 빠진 셈이었습니다. 결국 프랑스군은 정족산성에서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찰대를 지휘한 올리비에(Olivier) 대령은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Pierre-Gustave Roze, 1812~1882) 제독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조선의 포수들을 가리켜 "그들은 의심 없이 서울에서 파견된 가장 훌륭한 정규군"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포수들은 군인도 아니었고, 한성에서 온 것도 아니었으니, 올리비에 대령이 오해한 것이었지만, 그 정도로 포수들은 잘 싸웠습니다. 그렇다면 양헌수가 훈련도감(訓鍊都監) 소속 병졸들 대신에 지방 포수들을 전방에 내세운 까닭을 짐작해 볼 만합니다.

안타깝게도 19세기 무렵에 조선의 병력 동원 체제는 허물어진 지 오래였습니다. 이를테면 개성처럼 큰 고을에서 강화도를 돕겠다고 모은 군사가 겨우 200명 남짓할 뿐이었습니다. 군적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명부에 이름만 적힌 장정이 너무 많은 탓이었지요. 다른 고을들도 개성과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허깨비나 다름없는 군적만 믿고 모이지 않을 군졸들을 하염없이 기다리느니 포수들을 부르는 것이 더 빠른 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조정이 전시에 사냥꾼들을 동원한 일은 병인양요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일찍이 임병양란을 겪었을 때도 사냥꾼들은 전선에 나아가 활약했습니다. 목궁을 잡고 살을 먹이던 '산척(山尺)'에서, 조총을 쥐고 방아쇠를 당기는 '산행포수(山行砲手)'로, 시대에 따라 무기와 호칭은 바뀌었어도 사냥꾼들은 언제나 노련한 전사들이었습니다.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대에 수어사(守禦使)를 지낸 조영국(趙榮國, 1698~1760)이 "급할 때 믿을 만한 것으로 산행포수만 한 자들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비록 병자년의 일로 말하더라도 유임(柳琳)의 김화 싸움은 오로지 청주의 3백 명 산행포수의 힘을 입은 것"이라고 평가한 일은 위정자들이 사냥꾼들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보여 줍니다. 병자호란은 남한산성에 고립된 임금이 끝내 버티지 못하고 청 황제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조선이 전략적으로 패배한 전쟁이었지만, 조영국이 언급한 김화 전투나 광교산 전투에서는 전술적으로 승리함으로써 포수들이 지닌 힘을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조총 생산과 포수 양성에 박차를 가합니다.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17세기 중반에 청과 제정 러시아 사이에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청이 조선에 포수 파병을 요청했을 만큼 조선 포수들은 뛰어난 사격술을 자랑했습니다. 또 19세기 전반에 중앙군이 보유한 조총은 4만 자루가 넘었는데, 마상총과 천보총 등 조총에서 파생한 화기까지 헤아리면, 그 두 배인 8만 자루를 훌쩍 넘겼습니다. 지방군이나 산행포수가 지닌 조총도 그 수가 적잖았을 테니, 조선은 화승총을 먼저 도입한 일본보다 더 많은 조총을 보유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지면서 창고에 가득 쌓인 조총을 다뤄야 할 포수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군인인 관포수(官砲手)들은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병인양요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양헌수의 직속상관인 순무중군(巡撫中軍) 이용희(李容熙, 1811~1878)는 음력 9월 18일(양력 10월 26일)에 도성으로 보내는 첩보에 보병 5초와 마병 3초로 구성된 출정군이 모두 조총을 잘 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부족할 듯싶어서 걱정스러운데, 총수(銃手)는 겨우 5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는 정보를 알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1등 포수 3백 명을 서둘러 보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용희의 첩보를 근거로 추정한다면, 군대 편성 단위의 하나인 '초(哨)'는 약 100명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순무영 선봉대 병력은 약 800명이고, 그 가운데 포수는 약 160명이었던 모양입니다. 포수, 사수, 살수를 통틀어 이르는 삼수병(三手兵)에서 포수가 고갱이가 돼야 하는데, 조총을 다룰 줄 아는 군사가 3분의 1은커녕 그보다 훨씬 더 적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중앙군에서 생긴 구멍을 메운 이들이 바로 지방에서 온 사포수(私砲手)인 산행포수들이었습니다. 이때의 경험으로 조정은 전후에 이른바 포군(砲軍)을 늘리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전국의 산행포수는 대거 정규군에 충원되었는데, 신미양요 직전 전국의 포군은 그 수가 무려 2만여 명이나 되었다. 물론 새로 확충된 포군 전체가 산행포수, 서양인의 표현에 따르면 호랑이 사냥꾼 출신은 아닐 테지만 핵심 전력이라고 단정해도 큰 무리는 없을 테다. 그리하여 조선은 신미양요 때에는 전국의 산행포수를 별도로 차출하지 않은 채 확충된 포수만으로 미군의 침략에 대치하게 된다."

지금은 한반도에서 범이 멸종되었기에 상상하기 어렵지만, 조선 시대에는 범이 궁궐에도 나타났을 만치 수두룩했고, 그만큼 많은 백성이 피해를 봤습니다. 어느 해에는 경기도에서 두세 달 동안 서른 명이 넘는 백성이 범에게 물려 죽는 참사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호환이 천연두, 전쟁과 함께 무서운 재앙으로 꼽힐 만했지요. 사람들이 ;악수(惡獸)'라고 부르며 두려워하던 존재인 범을 잡아야 했으니, 사냥꾼들이 군인들보다 더 뛰어난 전투력을 지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희근 선생이 쓴 『산척, 조선의 사냥꾼』은 조선의 생태 환경이 낳은 최고의 전사인 사냥꾼들에게 주목한 책입니다.

김준근이 그린 포수들의 모습(우리역사넷)


글쓴이는 산척과 산행포수를 범을 잡던 사냥꾼으로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평시에는 범에게서, 전시에는 외적에게서 백성을 지키던 영웅으로 그들을 되살려 냈습니다. 사냥꾼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쳐 독립 전쟁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의 고비마다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비록 신분이 대개 높지 않은 탓에 오래도록 역사의 중심에 서지 못했고, 의병과 독립군으로 활동한 홍범도(洪範圖, 1868~1943)처럼 이름을 남긴 이도 드물었지만, 사냥꾼들이 역사에서 맡은 역할은 작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책에서 아쉬운 부분도 눈에 띕니다. 이를테면 글쓴이는 화승총을 가리켜 "장전하고 나서 불을 붙인 심지가 다 타야 발사되는데 그 시간이 꽤 소요됐다."라고 설명했는데, 불이 붙은 심지가 다 타야 탄환이 발사되는 것은 총통이지 화승총이 아닙니다. 불을 붙인 심지가 다 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면, 화승총에 방아쇠가 굳이 달아 놓을 필요가 없었겠지요. 화승총은 미리 불을 댕긴 화승을 용두에 물린 채 포수가 방아쇠를 당기면, 용두가 내려가 화약 접시에 담긴 화약에 점화해 탄환을 발사하는 구조였습니다. 총통과 조총의 차이를 놓친다면, 산행포수들이 범과 맞서 싸우며 익힌 사격술의 의미가 반감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산행포수들은 방아쇠를 당겨야 할 때를 똑똑히 알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산척, 조선의 사냥꾼』이 지닌 가치는 작지 않습니다. 주변부에 있던 산척과 산행포수를 조선사의 중요한 행위자로 불러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호환에 시달리던 백성들, 활이나 총을 손에 쥐고 높은 산을 오르내리던 사냥꾼들의 삶을 떠올려 본다면, 조선사가 새롭게 보일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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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조선정감 - 구한말 지식인이 본 조선의 정세와 그 뒷이야기 탐구히스토리
박제형 지음, 이익성 옮김 / 탐구당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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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 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을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십니까? 몰락한 왕족으로 세도가 주위를 상갓집 개처럼 기웃거리다가 철종(哲宗, 재위 1849~1863)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이 왕이 되자 비로소 마음속에 숨긴 야심을 드러내는 인물로 알고 있지 않으신지요. 이러한 대원군의 모습은 소설, 영화, 드라마 같은 여러 매체에서 나타났습니다. 특히 김동인(金東仁, 1900~1951)이 1933년과 1934년에 걸쳐 신문에 연재한 역사 소설 『운현궁의 봄』에서 묘사한 대원군은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대원군의 인물상은 『운현궁의 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니, 연재가 끝난 지 백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영향력이 큽니다.


그렇다면 대원군이 대중 매체에 주요 인물로 등장하기 전에는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바라봤을까요? 1886년에 일본의 한 출판사에서 펴낸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은 이하응을 '파락호'로 기술한 역사책입니다. 이 책을 지은 박제경(朴齊絅, 원본에는 이름이 '朴齊炯'으로 표기)은 1884년에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당에서 활동하던 이로, 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면서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근세조선정감』은 박제경을 비롯한 일부 조선인이 1864년부터 1873년까지 10년 동안 이어진 '대원군 집권기'를 어찌 인식하고 평가했는지 보여 주는 자료입니다.

"철종은 여러 번 아들을 두었으나 모두 기르지 못했고 주색(酒色)이 과했다. 여러 김씨는 왕에게 후사 없음을 걱정하여 종실 자손으로 명망이 있는 자는 남모르게 없애고자 하였다.

흥선군 이하응은 재주와 지략이 뛰어났으나 집이 가난하여 죽도 제대로 먹지 못하였다. 성품이 경솔하고 방탕하여 무뢰한과 잘 어울렸다. 기생집에서 놀다가 가끔 부랑군에게 욕을 당하니 사람들이 모두 조관(朝官)으로 여기지 않았다. 매양 여러 김씨에게 아첨하였으나 김씨들은 그 사람됨을 좋지 않게 여겨서 모두 냉정하게 대했다."

지은이가 저자에서 들은 풍문을 적은 듯한 이 기록은 『운현궁의 봄』의 원형이 되었다고 할 만합니다. 다만 고종(高宗, 재위 1852~1919)이 즉위하기 이전에 대원군이 안동 김씨 가문을 속이려고 본심을 숨긴 채 파락호처럼 굴던 적이 있었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당대 사료를 찾아보면, 한량으로 살았을 성싶은 대원군이 종친부(宗親府)에서 유사당상(有司堂上)으로 오래 일했다는 기록이 눈에 띕니다.

종친부는 역대 왕의 계보와 초상화를 보관하고, 왕과 왕비의 의복을 관리하며, 종반(宗班)을 다스리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였는데, 대원군은 유사당상으로 재직하면서 종친부가 가진 권한을 확대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고자 안동 김씨 가문과 정치적으로 거래한 정황도 엿보입니다. 야사나 소설에서 그린 것과 사뭇 다른 행적이지요. 국왕의 생부로 권력의 중심에 서기 전까지 대원군은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사는 아니었습니다. 베일에 싸인 대원군의 과거는 백성들이 호기심을 느끼기에 좋은 소재였습니다. 게다가 신분과 직위가 낮은 이도 만나기를 꺼리지 않을 만큼 대원군이 호방한 성품을 지녔다고 알려지면서 그가 한때 파락호로 행세했다는 이야기를 누군가 꾸미지 않았나 싶습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초상(위키백과)


이처럼 『근세조선정감』은 정사가 아닌 야사임을 고려하더라도 터무니없는 내용이 너무 많습니다. 지은이가 책에서 다룬 시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때에 글을 썼음에도 실상에 어긋나는 기록이 한둘이 아닙니다. 병인박해와 관련한 기사도 그러합니다.

지은이는 대원군에게 서양 국가들과 통상하기를 권한 천주교도 남종삼(南鍾三, 1817~1866)이 자기 집에 천주교 선교사인 '장경일(張敬一)', 즉 시메옹 프랑수아 베르뇌(Siméon François Berneux, 1814~1866) 주교를 숨겨 놓은 것이 드러나면서 병인박해가 일어났다고 이야기합니다. 서양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 만치 국제 정세에 어둡던 대원군이 베르뇌 주교가 조선에서 15년 동안 전교하면서 신자를 수십만 명으로 늘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놀라는 장면도 나옵니다. 그렇지만 조선 조정은 연행사의 보고로 1860년에 영불 연합군이 청(淸)에 쳐들어가 북경 교외에 있는 원명원(圓明園)을 불태우고, 황제가 열하로 피난했다는 상황을 이미 파악했습니다. 그보다 한참 뒤인 1866년에 대원군이 남종삼에게 "서양이라는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었다고 하는 것은 맥락에 어긋난 엉뚱한 소리일 따름입니다.

또한, 베르뇌 주교가 동료 사제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대원군은 천주교 선교사들의 존재를 모르지 않았습니다. 베르뇌 주교를 모르기는커녕 그와 접촉하려고 애쓴 흔적이 뚜렷합니다.

"러시아로부터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는 편지가 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 관리에게 제가 러시아인들의 문제를 처리해 주면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관리를 통해 그 군(君)[흥선대원군]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임금께 유익한 일로 돕고자 간절히 바라지만, 러시아인들과 나라가 다르고 종교가 다른 저로서는 그들에게 어떤 영향력도 미칠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 『베르뇌 주교 서한집』에서

대원군은 1864년에 러시아인들이 조선 국경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베르뇌 주교를 통해 프랑스와 손잡고 러시아를 밀어내려고 했습니다.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대안으로 구상한 셈입니다. 그러다가 일이 틀어지면서 대원군은 베르뇌 주교와 대면하거나 프랑스와 수교하기를 단념하고, 되레 천주교를 박해하고 말았습니다. 병인박해가 일어난 까닭을 조금 다르게 또는 좀 더 깊이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근세조선정감』에 나오는 내용은 사실과 거리가 멉니다.

앞서 살펴봤듯이 『근세조선정감』은 대중의 역사 인식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음에도 왜곡이 많습니다. 하지만 한학자로 활동한 이익성(李翼成) 선생이 1974년에 우리말로 옮겨 탐구당에서 낸 번역서는 현재 서점에서 찾기 쉽지만, 주석이 빈약한 탓에 독자들이 사실 여부를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이를테면 대원군의 개혁과 양요를 서술한 부분은 지은이가 제너럴셔먼호 사건, 병인양요,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 사건, 신미양요를 뒤섞어 버리는 바람에 아주 혼란스러운데, 거기에 "양헌수(梁憲洙)는 신미양요 때 정족산성에서 미군을 격퇴한 인물이다."라고 잘못된 주석이 달려 독자들을 더 혼란스럽게 하지요. 양헌수는 신미양요가 아닌 병인양요에 참전했고, 그가 격퇴한 적은 미군이 아니라 프랑스군이었습니다.

『근세조선정감』에는 지금의 연구 성과와 사료 비판을 반영한 새로운 번역과 주석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것은 사료를 주의 깊게 독해하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환기한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작업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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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부원록 강화고려역사재단 학술총서 1
김인호 외 옮김 / 혜안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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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강화도를 바라보니 아득하게 보이는 땅이 바람 속 먼지로 흐릿한데 단지 한 줄기 강물로 떨어져 있을 뿐이다."

- 『개성부원록(開城赴援錄)』에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어우러진 조강(祖江)은 강화도 동북단에 다다라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남으로 흐르는 물은 강화 해협을 지나 인천 앞바다로, 서로 흐르는 물은 예성강과 합류해 교동도를 거쳐 서해로 들어갑니다. 둘로 나뉜 조강 물줄기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그 생김새가 마치 제비 꼬리를 닮았습니다. 풍류를 즐기던 옛사람들은 이 물길이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언덕에 정자를 세우고, 거기에 연미정(燕尾亭)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문자 그대로 제비 꼬리 정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연미정은 여느 정자와 달리 월곶 돈대 안에 자리 잡아 성벽을 울타리같이 둘렀고, 강화 외성의 여섯 개 성문 가운데 하나인 조해루(朝海樓)와 이어졌습니다. 이것은 조선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대에 바다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막고자 월곶진(月串鎭)이라는 요새를 연미정 일대에 구축한 흔적입니다. 한강으로 들어가는 어귀에서 관문 역할을 하던 강화도가 지닌 특성으로 말미암아 연미정은 군사 시설과 어우러진 독특한 경관을 보여 주지요. 그래서 연미정은 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처럼 성에서 군사를 지휘하는 장수가 올라서던 장대와 비슷해 보입니다. 실제로 연미정에 올라 주위를 돌아보면, 김포 문수산부터 개성 송악산까지 한눈에 들어오므로 전시에 지휘소로 삼을 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닌 게 아니라 연미정은 한때 싸움터가 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프랑스 극동 함대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1866년에 개성에서 보낸 군대가 그 앞을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미정과 월곶 돈대를 찾아온 답사객들도 대개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돌아갑니다. 안내판에도 적히지 않을 만큼 널리 알려진 사건이 아닌 탓입니다.

이렇게 사람들 머릿속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는 개성군을 언급할 수 있는 것은 『개성부원록』이라는 책 덕분입니다. 『개성부원록』은 양요가 끝난 뒤 개성에서 참전한 이들이 명령서, 보고서, 회고록 등 관련 자료를 모아 엮은 책으로, 그들이 양요 전후에 어떻게 활동했는지 드러내는 사료입니다. 이 책도 개성군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지난 2015년에 강화고려역사재단이 역주본을 펴내면서 일반인도 찾아보기 쉬워졌습니다. 『개성부원록』은 10월 4일(양력 11월 10일)에 조강을 건넌 개성군이 강화도에 상륙한 직후에 목격한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곧이어 월곶진 앞에 도달하였는데, 이른바 적선이 모두 숨어버리고 한 놈도 발견할 수 없었다. 10여 곳의 포구 부락에는 도무지 젊은 여성은 없었고 단지 병들고 늙은 4~5명의 남자 노인네들이 있을 뿐이었다. 이들은 고목(枯木)과 같은 모습으로 마치 강가에 서있는 나무 같이 빈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김종원(金鍾源)이 진중에 명령하여 좌우의 반열과 전후의 행군대오를 엄숙하게 정렬하여 총을 쏘고 취타(吹打)를 불게 하면서 조해문(潮海門)으로 들어갔다. 조금 쉬고 난 후에 병사들이 먼저 진사(鎭舍)를 살피게 하니 남은 곳이 10군데 중 2~3곳에 불과하였다. 군기고(軍器庫)와 화약고가 모두 잿더미가 되었고, 중문 다락의 돌난간이 깨지고 떨어져 있었다. 성 아래에 진(鎭) 밑에 있던 34가구는 비어서 거주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탐문할 곳이 없었다."

개성군이 월곶진에 닿았을 때 연미정을 감싸던 요새는 프랑스군이 파괴해 이미 폐허가 된 상태였습니다. 그 주변에 살던 백성들은 모두 어디론가 흩어져 버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물어볼 만한 이마저 없었지요. 당시 프랑스 해군 소위 후보생으로 종군한 앙리 쥐베르(Jean Henri Zuber, 1844~1909)가 쓴 기록을 살펴보면, 강화부성에서도 월곶진과 비슷한 광경이 먼저 펼쳐졌다는 내용이 나와 눈길을 끕니다. 쥐베르는 프랑스군이 강화부성을 함락하자 주민 대부분이 달아나 여자는 한 명도 없었고,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 몇몇만 마을에 남았을 뿐이라고 종군기에 적었습니다. 그만큼 조선인들에게 '양이(洋夷)'는 낯설고 두려운 존재였는데, 프랑스군은 강화도 여기저기에서 학살, 방화, 성폭행, 약탈 따위의 범죄를 저질러 조선인들을 공포에 빠뜨렸습니다. 천주교 선교사들을 처형한 조선의 야만스러운 행위를 징벌하겠다는 '문명국' 프랑스의 민낯은 그토록 끔찍했습니다.

연미정을 감싼 월곶 돈대와 조해루(국가유산포털)


그렇다면 월곶진에 머무르던 프랑스군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개성군이 강화도에 발을 딛기 하루 전인 10월 3일(양력 11월 9일)에 양헌수(梁憲洙, 1816~1888)가 이끄는 부대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 정찰대와 전투를 치렀습니다. 이른바 정족산성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프랑스군보다 화력이 열세했음에도 지휘관의 지략으로 전세를 뒤집는 이변을 일으켰습니다. 반면에 프랑스군은 뜻밖의 패배에 충격을 받고 노획물을 챙겨 강화도에서 서둘러 빠져나갑니다. 이처럼 프랑스군의 시선이 강화도 동남쪽에 자리한 정족산성으로 쏠린 덕에 개성군은 아무런 저항 없이 바다를 건넜던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개성군은 그런 전황을 모른 채로 상륙 작전을 벌였습니다. 만약에 개성군이 프랑스군과 마주쳤다면, 전력 차로 참패했을 가능성이 컸을 테니 그야말로 천운이었지요.

이쯤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더 제기할 만합니다. 9월 8일(양력 10월 16일)에 강화부성을 빼앗긴 지 한 달 가까이 지나서야 개성군이 강화도에 도착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조선 조정은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쳐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해 중앙군 병력을 동원합니다. 이때 순무영 천총(千摠)으로 임명돼 선봉에 나선 이가 바로 정족산성 전투의 영웅 양헌수였습니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개성과 교동도에 지원군을 편성하라고 명령합니다. 한양에서 출발해 통진 방면으로 진군하는 순무영 군사와 협공해 프랑스군에게 빼앗긴 강화도를 되찾겠다는 포석이었겠지요. 개성 유수(開城留守)는 조정의 명령을 받자마자 9월 11일(양력 10월 19일)에 군졸을 징발해 그 이튿날에 출정하게 합니다. 이렇게 보면 크게 나무랄 데 없이 비상사태에 잘 대응한 듯싶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개성은 유수부(留守府)를 둔 큰 고을로, 군적에 적힌 병력이 만 명쯤 됐는데, 막상 전쟁이 터지자 소집된 인원은 겨우 150명 남짓했습니다. 군적에 쓰인 이름은 허깨비인 셈이었지요. 그나마 모인 병사들도 『개성부원록』의 글쓴이가 "급하게 거병을 하니 여유가 거의 없던 백성들은 무기와 군장을 준비한 것도 전혀 없었다."라고 지적할 정도로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더욱이 그들을 이끌어야 할 중군(中軍) 구연홍(具然泓)마저 무능한 지휘관이었습니다. 개성군은 개성과 통진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다가 강화도 땅은 밟지도 못하고, 개성으로 그냥 되돌아가 버렸습니다. 물론 프랑스군이 갑곶진(甲串鎭)과 월곶진 앞에 군함을 여러 척 배치해 조선군이 섬으로 못 들어오게 막았으므로 강화 해협을 넘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엇비슷한 조건에 처한 양헌수가 적정을 살피며 바다를 건너갈 기회를 끊임없이 노렸다면, 구연홍은 그러한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 차이는 나중에 사뭇 다른 결과로 돌아왔습니다. 결국 조정에서는 개성 유수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채 철수한 구연홍을 파면하고 맙니다. 그렇게 아까운 시간이 덧없이 흘러가 버렸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개성부원록』은 개성 사람들이 자신들의 공적을 세상에 알리려고 쓴 책입니다. 이 책은 얼핏 보기에 미완성작이 아닌가 싶을 만치 편집이 깔끔하지 않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적잖지만, 글과 글 사이마다 임금을 향한 충정과 무도한 '양이'를 무찌르겠다는 의지가 짙게 배었습니다. 또한,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경계, 병참, 정찰 등 중요한 임무를 말없이 해냈을 이들의 노고도 엿보이지요. 하지만 『개성부원록』은 글쓴이가 의도한 바와 어긋나게 조선 왕조의 국가 체계가 시나브로 무너지는 모습도 드러납니다.

부족한 병력, 미비한 무장, 무능한 장수 같은 세기말 현상은 개성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나타났습니다. 조선은 19세기에 들어와 파도처럼 거듭 밀려오는 서구 열강에 맞설 만한 역량이 부족해진 지 오래였습니다. 나라를 떠받쳐야 할 사대부들의 인식도 시대에 뒤처졌습니다. 『개성부원록』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은 영웅 소설 속 호걸인 양 그려집니다만, 시대착오에 빠진 그들의 언행을 보면 쓴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이를테면 서생 민치오(閔致五)는 프랑스군을 물리칠 계책으로 화공과 수륙병진을 제안하는데, 작전을 실행하는 데에 필요한 사람도 배도 모자란 상황에서 그것은 쓸 만한 계략이 아니었습니다. 또 제너럴셔먼호 같은 상선이라면 몰라도 프랑스군이 타고 온 군함을 화공으로 불태우기란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습니다.

몇몇 역사학자는 작자 미상인 『개성부원록』이 민치오가 쓴 작품이라고 여길 만큼, 민치오는 책에서 비중이 큽니다. 민치오는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종군하기를 자원해 개성군의 일원으로 활약했으며, 전란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양요라는 사태를 수습하고자 애썼습니다. 적어도 민치오는 사대부로서 책임감을 느끼던 인물이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시대가 변화하는 흐름을 읽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민치오는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침입하기 직전에 과거를 보러 마침 한양에 다녀왔는데, 누군가 그에게 서울 소식을 묻자 태평스러운 기상이라고 답변했습니다. 그때는 프랑스 극동 함대 소속 군함 2척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한양이 코앞인 양화진(楊花津)까지 이르렀다가 중국으로 돌아간 때였습니다. 이양선 출몰로 한양이 소란스러움을 모를 리 없는 그가 서울은 태평스럽다고 했으니 황당할 따름이지요.

아마 민치오는 스스로 보고 듣고 겪은 일을 회고록으로 남긴 듯하고, 그 글은 『개성부원록』의 고갱이를 이뤄 병인양요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 주는 귀중한 사료가 됐습니다. 다만 그는 자신이 기록한 시대가 어디로 나아가는지 몰랐습니다. 민치오는 일개 서생에 지나지 않았으니, 세계정세에 어두워도 크게 탓할 수 없겠지만, 안타깝게도 위정자라고 하더라도 그보다 눈이 밝은 이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서세동점(西勢東漸) 시기에 조선이 맞은 비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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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군인 쥐베르가 기록한 병인양요 그들이 본 우리 15
앙리 쥐베르 외 지음, 유소연 옮김 / 살림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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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가을, 산둥반도 앞바다에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중국 지부항(芝罘港)에서 프랑스 극동 함대 소속 전함 일곱 척이 일제히 닻을 올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향한 곳은 동방에 있는 조선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개항하지 않아 서구 세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그 '미지의 왕국'에서 프랑스인 선교사 아홉 명이 조선인 천주교도들과 함께 처형됐다는 소식이 지난여름 중국에 닿았습니다. 식민지 개척으로 이역만리에 머물던 프랑스인들은 병인박해(丙寅迫害)에 분노했고, 그것은 군사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극동 함대 지휘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 1812~1882) 제독은 천주교를 탄압하는 조선에 보복하고자 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심합니다. 이른바 병인양요(丙寅洋擾)의 서막이었습니다. 로즈 제독은 중국과 일본에 주둔 중인 병력 천여 명을 모았는데, 그 가운데 스물두 살의 젊은이도 한 명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앙리 쥐베르(Jean Henri Zuber, 1844~1909), 뒷날 풍경화를 잘 그리는 화가로 프랑스에서 명성을 떨치지만, 이때만 해도 그는 겨우 해군 소위 후보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햇병아리 군인 쥐베르에게 이번 '원정'은 두 번째 조선행이었습니다. 로즈 제독은 조선으로 쳐들어가기에 앞서 서울로 들어가는 한강 수로를 찾기 위한 정찰 작전을 펼쳤습니다. 이 작전에 선발대로 참여한 쥐베르는 첫 번째 조선행에서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수로를 측량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초계함 프리모게호(Le Primauguet)가 강화 해협에서 좌초하는 돌발 상황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프랑스군은 한강 하구에 진입해 조선군의 저항을 뚫고서 서울이 지척인 양화진(楊花津)까지 이릅니다. 정찰 작전은 성공했고, 이제 조선에 본때를 보일 일만 남았습니다. 다만 로즈 제독은 서울이 아닌, 강화도를 공략해 한강을 봉쇄함으로써 조선 조정을 압박하는 전략을 선택합니다.

프랑스의 두 번째 조선 침략으로 드디어 강화도에 발을 디딘 쥐베르는 자기 재능을 살려 눈앞에 펼쳐진 조선의 이모저모를 기록했습니다. 강화도의 군사 시설인 강화외성, 돈대, 강화부성(강화산성)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의 생활상도 세심히 관찰해 글과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이를테면 오늘날 폐허에 가까운 고려궁지(高麗宮址)와는 사뭇 다른, 여러 건물이 들어선 화려한 관아 풍경이 쥐베르가 쓰고 그린 글과 그림 속에 담겼습니다. 또 조선인들이 흔히 쓰던 놋그릇을 "색깔도 매혹적이고 소리 또한 비할 데 없이 맑은 울림"을 낸다며, 자세히 설명하기도 했지요. 그 속에는 화가 지망생 특유의 예리한 관찰력이 깃들었습니다.

쥐베르가 그린 강화유수부(위키문헌)


이러한 기록이 모여 한 편의 종군기로 완성됐고, 마침내 1873년에 여행 잡지 『르 투르 뒤 몽드(Le Tour du monde)』에 「조선 원정기(Une expédition en Corée)」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쥐베르는 독자들에게 낯선 조선을 알려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것을 의도했겠지만, 「조선 원정기」는 병인양요와 19세기 조선 사회를 이해하려면 살펴봐야 할 사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조선 원정기」에는 전투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종군기라기보다는 여행기에 가깝다는 인상마저 들지요. 쥐베르는 조선군이 구식인 화승총으로 무장한 열악한 상황에서도 군사 기술이 좋고 민첩하면서도 용맹했다고 평가했지만, 정작 문수산성 전투나 정족산성 전투 같은 전황을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선 원정기」만 본다면, 병인양요가 어떻게 전개됐는지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프랑스군이 패퇴한 정족산성 전투를 언급하지 않았으니 앞뒤 상황을 모르는 독자들은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점령한 지 한 달이 채 안 돼 갑작스레 철수한 까닭이 무엇인지 의문을 가졌을 것입니다.

물론 "군사적 사건들은 가볍게 훑으면서 특별히 지리와 경치를 상세히 기술"하겠다고 밝힌 대로 쥐베르가 『르 투르 뒤 몽드』의 특성을 고려해 전투 묘사를 일부러 줄였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 점이 없지 않습니다. 『르 투르 뒤 몽드』에 실리지 않았지만, 프랑스군이 갑곶진(甲串津)에 상륙하거나 강화부성을 공격하는 모습을 옮긴 그림이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면, 쥐베르는 전투 현장을 목격했음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가 시간에 꿩, 거위, 오리 따위를 사냥했다는 일화를 소개하거나 풍경화처럼 아름다운 강화도의 자연 경관을 예찬할 따름입니다. 심지어 자기가 강화도에서 경험한 일을 가리켜 아주 오래오래 추억할 만한 '즐거운 소풍'이었다는 감상도 적었습니다. 전쟁이라는 소용돌이 한복판에 있었음에도, 쥐베르의 기록 속 강화도 풍경은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평화롭게 그려집니다. 정말 그랬을까요?

돌이켜 보면, 이상한 부분이 한둘이 아닙니다. 쥐베르가 조선의 가옥 구조를 상세히 서술할 수 있던 것은 그가 집주인의 뜻과 상관없이 집안에 마음대로 들어갔기 때문이지 않았을까요? 또한, 쥐베르가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있다고 언급한 "주목할 만한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는 몇 권의 장서들을 포함하여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책들"은 프랑스군이 약탈한 외규장각(外奎章閣)의 의궤가 아니었을까요? 프랑스군은 강화도에서 약탈, 방화, 성폭행 등의 범죄 행위를 저질렀으나, 쥐베르는 그것을 애써 감췄습니다. 굳이 드러낼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감춘다고 모든 것을 감출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사대부가 여성으로 전쟁을 몸소 겪은 나주 임씨(羅州林氏)의 증언에서 쥐베르가 숨긴 진실을 일부나마 엿봅니다.

"남동 이참판의 손자 이철주도 거기에서 살았는데, 비록 가난하였지만 좋은 집에서 살림살이 치장이 찬란하였더니, 급한 지경에 이르자 다 버리고 부인네들을 총각 모습으로 꾸미고는 손목을 맞잡고 도망하였다. 결국 그 집도 불에 소실되고 살림살이가 다 부서졌다. 양인들은 이 마을 저 마을로 떼 지어 다니며 여인들을 욕보이고 살림살이들을 탈취하였는데, 남자들 옷과 쇠붙이와 돈이며 양식을 빼앗아 갔다. 또 소를 잡아먹었으며 닭은 더 좋아하였다. 집을 잠그고 도망친 집은 다 부수고 혹 불도 질렀다. (중략) 양인들은 여인을 보는 족족 욕을 보였으니 상계집이 얼마나 되는지 수를 모르겠으나 사대부가 황이천 집 부인과 우리 동네 양반 심선달 부인 둘이 욕을 보았다고 한다."

나주 임씨는 전쟁 직후에 쓴 『병인양란록(丙寅洋亂錄)』에서 프랑스군이 저지른 전쟁 범죄를 밝힙니다. 『병인양란록』에는 양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하지 않으려고 남장한 여인들과 프랑스군의 약탈로 폐허가 된 마을 모습이 생생히 나옵니다. 「조선 원정기」에는 나오지 않는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사실 「조선 원정기」를 살펴보면, 쥐베르는 선량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는 초라한 초가집에서 사는 조선 서민들의 처지를 동정하고, 논에서 농사일하다가도 프랑스군이 지나가면 넙죽 엎드리던 농부들을 바라보면서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방관하거나 침묵했을지언정 전쟁 범죄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세계 곳곳 온갖 분야에 침투하고 있는 유럽의 영향을 보면서 어느 정도 아쉬움"을 느낀다면서 다양성을 말살하는 제국주의 시대를 비판하는 생각도 지녔습니다. 그렇지만 쥐베르가 종군기를 마무리하면서 남긴 마지막 문단은, 이런 사람마저 제국주의 시대의 광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획일성이 세계 도처로 퍼지기까지는 내달려야 할 길이 아직 멀고, 또 여행가들의 온갖 욕망에 부응할 아직 탐험되지 않은 나라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그러니 우리는 공사가들의 공연한 미련 따윌랑은 한쪽으로 제쳐 놓고 오직 프랑스에 바라는 게 있으니, 지나치게 욕심 없는 역할은 이제 그만 버리고 나날이 전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는 유럽 국가들의 통상 움직임에서 보다 더 큰 몫을 차지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프랑스가 지나치게 욕심이 없다니……. 대영 제국보다 덜하다는 뜻일까요? 지독한 농담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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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明 2025-07-06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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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 올린 서평 후기입니다.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 금요일엔 역사책 1
장지연 지음, 한국역사연구회 기획 / 푸른역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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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에는 왕건(王建, 877~943)이 태어나기 전에 그와 얽힌 신비로운 이야기 하나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왕건의 아버지 왕륭(王隆, ?~897)은 송악(松嶽, 개성의 옛 이름)에 새집을 지었는데, 마침 도선(道詵, 827~898) 스님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기장[穄]을 심어야 할 땅에다 어찌하여 삼[麻]을 심었는가?"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부인에게서 그 말을 전해 들은 왕륭은 스님을 뒤쫓아가서 그를 붙잡고 대화를 나눕니다. 스님은 왕륭에게 풍수지리에 맞춰 집을 지으라고 일러 주고서 뒷날 삼한을 통일할 인물을 아들로 얻을 테니 그 이름을 왕건으로 지으라고 예언합니다. 왕륭이 새집을 지은 이듬해 스님이 예언한 대로 왕건이 태어나고, 우리가 잘 알다시피 왕건은 고려 왕조를 세운 태조(太祖)로서 후삼국을 통일하는 업적을 이룹니다.


고려 후기에 활동한 문인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왕건의 탄생담이 사실이 아니며, 누군가 나중에 지어냈으리라고 의심하면서도 우리말에서 기장은 왕(王)과 서로 비슷하다는 김관의(金寬毅)의 해설을 인용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도대체 어디를 봐서 기장과 왕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인지 현재 우리의 언어 감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기장과 왕, 전혀 닮아 보이지 않는 두 단어를 이을 실머리는 뜻밖에도 『천자문(千字文)』에서 나타납니다. 『천자문』은 옛날부터 한문 학습 입문서로 널리 쓰인 만큼 여러 가지 판본이 있는데, 그 가운데 1575년(선조 8)에 간행한 판본은 전라도 광주에서 간행했다고 해서 『광주천자문(光州千字文)』이라고 부릅니다. 『광주천자문』은 그보다 조금 뒤에 간행한 『석봉천자문(石峯千字文)』과 계통이 달리합니다. 같은 한자라고 하더라도 독음과 새김이 『석봉천자문』의 그것과 사뭇 다른 까닭입니다. 이를테면 '왕(王)' 자의 새김이 『석봉천자문』에서는 '님금'이지만, 『광주천자문』에서는 '긔ᄌᆞ'입니다. '님금'은 '임금'으로 형태가 바뀌어서 오늘날까지 이어졌기에 우리에게 낯익으나, '긔ᄌᆞ'는 현대 국어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형태이기에 낯섭니다.

『광주천자문』에 나온 '王' 자의 새김(디지털한글박물관)


비록 현대 국어로 이어지지 못하고 사라졌으되 '긔ᄌᆞ'는 '임금'처럼 왕을 뜻하는 고유어 단어였습니다. '긔ᄌᆞ'는 광주 지역에서 오랫동안 내려오던 백제어 단어일 가능성이 큰데, 다행히 그러한 추측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외국에 남았습니다. 중국의 역사서인 『주서(周書)』에는 백제 백성들이 왕을 '건길지(鞬吉支)'라고 부르고,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백제왕을 '코니키시(コニキシ)'라고 일컫는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건길지'와 '코니키시'는 다른 자료까지 참고해 보면, '건+길지'와 '코니+키시'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백제어에는 왕을 뜻하는 단어 '긔ᄌᆞ'가 있었고, 이것을 중국에서는 '길지'로, 일본에서는 '키시'로 표기한 셈입니다.

또한, 이 말은 고구려에서도 쓰인 듯합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왕봉현(王逢縣)'과 '왕기현(王岐縣)'이라는 지명이 각각 고구려의 '개백현(皆伯縣)'과 '개차정현(皆次丁縣)'을 바꾼 것이라고 나와서 고구려어에서 왕이라는 말이 '개(皆)' 또는 '개차(皆次)'와 비슷했음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개차'가 '길지'와 '키시'처럼 '긔ᄌᆞ'를 달리 표기한 형태였다고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왕륭과 왕건 부자의 근거지인 송악은 옛 고구려 땅이었습니다. 왕건이 태어났을 무렵까지 송악에 고구려어의 영향력이 미쳤다고 헤아려 볼 만합니다. 그렇기에 도선 스님이 고구려어에서 왕을 뜻하는 단어인 '개차'와 발음이 유사한 단어인 '기장'을 비유법으로 활용했겠지요. 왕건의 탄생담에서 언급된 땅에 기장을 심으라는 말은 왕의 씨를 낳으라는 소리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처럼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에서 우리는 지금은 사라진 옛말 하나가 역사에 남긴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문으로 적힌 『고려사』만 읽었다면, 거의 눈에 띄지 않았을 희미한 흔적입니다.

"이렇듯 토착 언어와 문자에는 토착 지식이 담겨 있다. 토착 언어나 이를 표기하는 수단이 끊기면 그 지식 역시 단절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문을 통해 그런 지식이 전해질 수 있긴 했겠지만, 문자의 장벽, 언어 및 지식의 위계 등을 비롯한 여러 이유로 쉽지 않았다. 이렇게 수많은 과거의 지식이 이제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 수도 없는 채 사라졌을 것이다."

장지연 교수의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는 한자가 주류 문자이고, 한문이 보편 문어로 기능하던 시대에 한자가 아닌 구결, 이두, 향찰, 훈민정음 등으로 기록한 역사에 주목합니다. 우리말로 기록한 역사는 한문으로 기록한 역사와 다른 풍경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토착 언어와 문자에는 토착 지식이 담겼기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한자로 쓴 『한경지략(漢京識略)』과 한글로 쓴 <한양가(漢陽歌)>는 조선의 수도 한양의 19세기 모습을 동시대에 다뤘음에도 글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아주 다릅니다. 또 똑같은 대상을 가리키지만, 한자어인 '경사(京師), 경성(京城), 도성(都城), 왕경(王京)' 등과 고유어인 '서울'은 그 속뜻이 같지 않습니다. 장지연 교수가 지적한 대로 한문 자료에서 과도하게 당대의 상을 뽑아내는 것은 위험한 일임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푸른역사의 '금요일엔 역사책' 시리즈로 나온 첫 번째 책인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은 그 밖에도 흥미로운 내용이 많습니다. 특히 조선 시대에 남성은 한문으로, 여성은 언문으로 문자 생활을 했다는 통념을 깨는 분석이 눈길을 끕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선 시대 남성들은 한글을 제법 잘 썼고, 한문으로 글을 쓰다가도 자기감정을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면, 그 속에 '뒤쥭박쥭('뒤죽박죽'의 옛말)' 같은 고유어를 한글로 섞어 쓰기도 했습니다. 임금이 모후나 옹주에게 정성껏 쓴 한글 편지를 부치기도 했으니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나 정약용(丁若鏞, 1762~1836)처럼 언문을 익히지 않은 것이 드문 경우였습니다.

이렇게 한문으로 기록한 역사 너머의 또 다른 역사를 살펴보고 싶다면,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를 읽으면서 주말을 보내면 어떨까요?

※ 이 서평은 푸른역사에서 제공한 책을 토대로 작성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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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明 2023-08-24 0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만 이 책에서 한 가지 옥에 티가 있다면, ‘삼세불배(三世佛拜)‘의 문장 성분을 설명한 부분을 꼽겠습니다. 장지연 교수는 ‘삼세불배‘의 어순이 ‘목적어+동사‘라고 했는데, ‘부사어+서술어‘가 정확합니다. 어순은 문장 성분의 배열에 나타나는 일정한 순서이므로 문장 성분이 아닌 품사인 동사로 어순을 설명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삼세불배‘를 우리말로 풀이하면, ˝삼세의 여러 부처에게 절하다.˝이므로 부사격 조사 ‘에게‘가 붙은 ‘삼세의 여러 부처‘는 목적어가 아닌 부사어로 분석해야 합니다. 이다음에라도 이 부분이 고쳐지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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