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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 금요일엔 역사책 1
장지연 지음, 한국역사연구회 기획 / 푸른역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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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에는 왕건(王建, 877~943)이 태어나기 전에 그와 얽힌 신비로운 이야기 하나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왕건의 아버지 왕륭(王隆, ?~897)은 송악(松嶽, 개성의 옛 이름)에 새집을 지었는데, 마침 도선(道詵, 827~898) 스님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기장[穄]을 심어야 할 땅에다 어찌하여 삼[麻]을 심었는가?"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부인에게서 그 말을 전해 들은 왕륭은 스님을 뒤쫓아가서 그를 붙잡고 대화를 나눕니다. 스님은 왕륭에게 풍수지리에 맞춰 집을 지으라고 일러 주고서 뒷날 삼한을 통일할 인물을 아들로 얻을 테니 그 이름을 왕건으로 지으라고 예언합니다. 왕륭이 새집을 지은 이듬해 스님이 예언한 대로 왕건이 태어나고, 우리가 잘 알다시피 왕건은 고려 왕조를 세운 태조(太祖)로서 후삼국을 통일하는 업적을 이룹니다.


고려 후기에 활동한 문인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왕건의 탄생담이 사실이 아니며, 누군가 나중에 지어냈으리라고 의심하면서도 우리말에서 기장은 왕(王)과 서로 비슷하다는 김관의(金寬毅)의 해설을 인용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도대체 어디를 봐서 기장과 왕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인지 현재 우리의 언어 감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기장과 왕, 전혀 닮아 보이지 않는 두 단어를 이을 실머리는 뜻밖에도 『천자문(千字文)』에서 나타납니다. 『천자문』은 옛날부터 한문 학습 입문서로 널리 쓰인 만큼 여러 가지 판본이 있는데, 그 가운데 1575년(선조 8)에 간행한 판본은 전라도 광주에서 간행했다고 해서 『광주천자문(光州千字文)』이라고 부릅니다. 『광주천자문』은 그보다 조금 뒤에 간행한 『석봉천자문(石峯千字文)』과 계통이 달리합니다. 같은 한자라고 하더라도 독음과 새김이 『석봉천자문』의 그것과 사뭇 다른 까닭입니다. 이를테면 '왕(王)' 자의 새김이 『석봉천자문』에서는 '님금'이지만, 『광주천자문』에서는 '긔ᄌᆞ'입니다. '님금'은 '임금'으로 형태가 바뀌어서 오늘날까지 이어졌기에 우리에게 낯익으나, '긔ᄌᆞ'는 현대 국어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형태이기에 낯섭니다.


『광주천자문』에 나온 '王' 자의 새김(디지털한글박물관)


비록 현대 국어로 이어지지 못하고 사라졌으되 '긔ᄌᆞ'는 '임금'처럼 왕을 뜻하는 고유어 단어였습니다. '긔ᄌᆞ'는 광주 지역에서 오랫동안 내려오던 백제어 단어일 가능성이 큰데, 다행히 그러한 추측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외국에 남았습니다. 중국의 역사서인 『주서(周書)』에는 백제 백성들이 왕을 '건길지(鞬吉支)'라고 부르고,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백제왕을 '코니키시(コニキシ)'라고 일컫는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건길지'와 '코니키시'는 다른 자료까지 참고해 보면, '건+길지'와 '코니+키시'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백제어에는 왕을 뜻하는 단어 '긔ᄌᆞ'가 있었고, 이것을 중국에서는 '길지'로, 일본에서는 '키시'로 표기한 셈입니다.


또한, 이 말은 고구려에서도 쓰인 듯합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왕봉현(王逢縣)'과 '왕기현(王岐縣)'이라는 지명이 각각 고구려의 '개백현(皆伯縣)'과 '개차정현(皆次丁縣)'을 바꾼 것이라고 나와서 고구려어에서 왕이라는 말이 '개(皆)' 또는 '개차(皆次)'와 비슷했음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개차'가 '길지'와 '키시'처럼 '긔ᄌᆞ'를 달리 표기한 형태였다고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왕륭과 왕건 부자의 근거지인 송악은 옛 고구려 땅이었습니다. 왕건이 태어났을 무렵까지 송악에 고구려어의 영향력이 미쳤다고 헤아려 볼 만합니다. 그렇기에 도선 스님이 고구려어에서 왕을 뜻하는 단어인 '개차'와 발음이 유사한 단어인 '기장'을 비유법으로 활용했겠지요. 왕건의 탄생담에서 언급된 땅에 기장을 심으라는 말은 왕의 씨를 낳으라는 소리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처럼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에서 우리는 지금은 사라진 옛말 하나가 역사에 남긴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문으로 적힌 『고려사』만 읽었다면, 거의 눈에 띄지 않았을 희미한 흔적입니다.


"이렇듯 토착 언어와 문자에는 토착 지식이 담겨 있다. 토착 언어나 이를 표기하는 수단이 끊기면 그 지식 역시 단절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문을 통해 그런 지식이 전해질 수 있긴 했겠지만, 문자의 장벽, 언어 및 지식의 위계 등을 비롯한 여러 이유로 쉽지 않았다. 이렇게 수많은 과거의 지식이 이제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 수도 없는 채 사라졌을 것이다." - 25쪽


장지연 교수의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는 한자가 주류 문자이고, 한문이 보편 문어로 기능하던 시대에 한자가 아닌 구결, 이두, 향찰, 훈민정음 등으로 기록한 역사에 주목합니다. 우리말로 기록한 역사는 한문으로 기록한 역사와 다른 풍경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토착 언어와 문자에는 토착 지식이 담겼기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한자로 쓴 『한경지략(漢京識略)』과 한글로 쓴 <한양가(漢陽歌)>는 조선의 수도 한양의 19세기 모습을 동시대에 다뤘음에도 글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아주 다릅니다. 또 똑같은 대상을 가리키지만, 한자어인 '경사(京師), 경성(京城), 도성(都城), 왕경(王京)' 등과 고유어인 '서울'은 그 속뜻이 같지 않습니다. 장지연 교수가 지적한 대로 한문 자료에서 과도하게 당대의 상을 뽑아내는 것은 위험한 일임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푸른역사의 '금요일엔 역사책' 시리즈로 나온 첫 번째 책인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은 그 밖에도 흥미로운 내용이 많습니다. 특히 조선 시대에 남성은 한문으로, 여성은 언문으로 문자 생활을 했다는 통념을 깨는 분석이 눈길을 끕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선 시대 남성들은 한글을 제법 잘 썼고, 한문으로 글을 쓰다가도 자기감정을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면, 그 속에 '뒤쥭박쥭('뒤죽박죽'의 옛말)' 같은 고유어를 한글로 섞어 쓰기도 했습니다. 임금이 모후나 옹주에게 정성껏 쓴 한글 편지를 부치기도 했으니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나 정약용(丁若鏞, 1762~1836)처럼 언문을 익히지 않은 것이 드문 경우였습니다.


이렇게 한문으로 기록한 역사 너머의 또 다른 역사를 살펴보고 싶다면,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를 읽으면서 주말을 보내면 어떨까요?


※ 이 서평은 푸른역사에서 제공한 책을 토대로 작성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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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明 2023-08-24 0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만 이 책에서 한 가지 옥에 티가 있다면, ‘삼세불배(三世佛拜)‘의 문장 성분을 설명한 부분을 꼽겠습니다. 장지연 교수는 ‘삼세불배‘의 어순이 ‘목적어+동사‘라고 했는데, ‘부사어+서술어‘가 정확합니다. 어순은 문장 성분의 배열에 나타나는 일정한 순서이므로 문장 성분이 아닌 품사인 동사로 어순을 설명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삼세불배‘를 우리말로 풀이하면, ˝삼세의 여러 부처에게 절하다.˝이므로 부사격 조사 ‘에게‘가 붙은 ‘삼세의 여러 부처‘는 목적어가 아닌 부사어로 분석해야 합니다. 이다음에라도 이 부분이 고쳐지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전쟁과 인간 - 군국주의 일본의 정신분석
노다 마사아키 지음, 서혜영 옮김 / 길(도서출판)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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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왜 적잖은 일본인은 일본 제국이 침략 전쟁을 벌였다고 인정하지 않을까요? 전쟁을 일으켜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괴롭힌 일을 어쩌면 그리 쉽게 잊었을까요?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자기들도 전쟁 피해자라고 우기는 일본인들의 저의는 무엇일까요? 일본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되풀이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정신 의학자인 노다 마사아키[野田正彰]는 일본군으로 동원되어 중국 등지에서 복무한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정리해, 침략 전쟁을 부인하는 일본인들의 물구나무선 논리, 그 밑바닥에 깔린 심리를 분석한 책인 『전쟁과 인간 - 군국주의 일본의 정신분석』(원제는 '戰爭と罪責')을 펴냈습니다.


글쓴이가 만난 이들은 대부분, 전쟁을 기획하고 주도한 A급 전범들 아래에서 전쟁을 직접 수행한 B급 전범이나 C급 전범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범'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에 걸맞지 않게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글쓴이는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괴물'이 되었다가 '인간'으로 되돌아왔는지 알아내고자 그들이 걸어온 삶을 성장 과정부터 하나하나 되짚어갔습니다. 전범들이 글쓴이에게 털어놓은 죄들은 하나같이 큰 충격을 줍니다. 이를테면 중국인 부하에게 '염라대왕'이라고 불린 한 병사는 다음과 같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근처 상사아구코우(上下峪口) 마을에서는 농민 8명을 빨간 술이 달린 창으로 엉덩이를 찔러 죽였다. 3명을 그가 찔러 죽이고 나머지는 부하들에게 흉내내도록 했다. 또 원시현 헝쉐이진(橫水鎭)에서는 남자 한 사람을 고문한 뒤, 마차 뒤에 밧줄로 묶어 질질 끌고다녀 죽게 했다. 불에 달군 젓가락으로 음경을 자르거나, 물고문으로 부풀어오른 배를 발로 짓밟는 고문도 즐겼다. 또 비위애현(泌源縣) 정중(正中) 마을에서는 겁에 질려 굴 속에 숨어있는 여자와 아이 열두 명을 찾아내, 마른풀로 태워 죽였다. 그가 죽인 중국 농민은 특별군사법정에서 기소된 사건만 해도 111명이다. 그 자신은 200명이 넘는다고 말하고 있다. 실로 염라대왕이 따로 없을 뿐더러, 본인도 그렇게 불리는 것이 아주 싫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온갖 만행을 저지르던 일본군 장병들은 일제가 패망하자 하루아침에 포로 신세가 됩니다. 그래도 이들은 스스로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몰랐습니다. 죄책감은 없었습니다. 일본군 포로들은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흔하고 자기들은 높으신 분들이 내린 명령을 따랐을 뿐인데, 그런 자기들을 전범으로 취급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기며, 되레 불만을 품었습니다. 만주 사변(1931)과 중일 전쟁(1937) 그리고 태평양 전쟁(1941)으로까지 이어지는 '15년 전쟁'이 침략 전쟁이었음을 부인하는 논리가 전쟁이 끝나자마자 나왔던 것입니다.


난징 대학살 당시 중국인을 참수하려는 일본군의 모습(위키백과)



그러나 중화 인민 공화국의 '이인자'인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 총리는 일본군 포로들에게 관대 정책을 베풀라고 지시하였습니다. 포로들을 고문하거나 폭행하는 따위의 가혹 행위는 전혀 없었고, 포로들이 배가 고프다고 하면 밥을 더 주고, 아프다고 하면 귀한 약을 아낌없이 썼습니다. 당시 웬만한 중국 인민들보다 일본군 포로들이 더 대접을 받은 셈입니다. 그동안 중국인들을 벌레 보듯 하며 멋대로 죽인 자기들을 손님처럼 따뜻하게 보살피는 중국 지도원들의 태도에 일본군 포로들은 크게 당황합니다. 처음에는 전범이 된 게 억울해서 허세를 부리며 반항하던 일본군 포로들은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내림을 느끼며, 하나둘씩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고백합니다. 이른바 탄바이[坦白, 죄행의 고백]였습니다.


"리우 반장은 싱긋싱긋 웃으며, 우리들의 맨 앞에서 걷고 있었다. 마음의 빗장이 열렸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 같았다. 눈물이 넘쳐흘렀다. 스스로도 주체할 길 없었다. 눈앞이 희뿌옇게 흐려졌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휘청휘청 리우 반장 앞으로 다가갔다. 나는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양손을 바닥에 대고 무릎을 꿇었다."


전범들은 죄를 죄로 인식하는 능력을 겨우 갖추게 되었습니다만, 아직 그것은 머리로만 생각해서 나온 결론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죄가 아니었지요. 이들이 쓴 반성문을 읽으면, 설명과 분석이 너무 많아서 반성문이라기보다 마치 보고서를 보는 듯합니다. 오랫동안 군국주의 문화에 젖어 감정이 마비된 이들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피해자가 죽으면서 느꼈을 슬픔과 아픔은 추상화되어 희미하게 다가왔을 뿐이고, 원한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중국인들이 보여 준 인내심이 아니었다면, 전범들이 죄를 자각하는 일조차 불가능했을지 모릅니다.


중국 정부는 전범들의 인죄(認罪, 죄를 인정함)를 받아들여서 한 사람도 사형하지 않고, 1956년부터 1964년까지 약 8년에 걸쳐서 일본군 포로들을 모두 일본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일본 사회는 고국으로 돌아온 귀환자들을 세뇌된 빨갱이로 낙인찍었습니다. 귀환자들은 자기들이 꺼내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일본 사회의 공감력 결핍에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악명 높은 731 부대에서 생체 해부를 해서 전범이 된 군의관 유아사 겐[湯浅謙]은 패전 후 11년 만에 본 동료 군의관이 생체 해부를 한 사실을 까맣게 잊은 것에 놀라서 일본이 처한 현실에 눈을 떴습니다. 유아사를 비롯한 귀환자들은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중국인들이 자기들을 바라보며 느꼈을 감정을 비슷하게나마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옛날에 마음속에서 사라진 '슬픔을 느낄 힘'을 되찾은 것이지요. 귀환자들은 '중국귀환자연락회(중귀련)'라는 모임을 만들어 일본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기들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며 평화 운동에 앞장섭니다.


명령자가 시켜서 억지로 한 전쟁이 아니라 스스로 한 전쟁임을 뒤늦게 깨닫고 실행자로서 자기가 지은 죄를 짊어지고 사는 귀환자들과 달리 대부분의 일본인은 과거의 잘못을 제대로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만든 전후 일본 사회는 경제 발달로 풍요로웠지만, 죄의식을 억압하고 공격성을 강화하는 문화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글쓴이는 "직접 전쟁에 관여한 자를 모두 우순 전범관리소에 넣는 것 이외에는, 표면적이나마 그들 일본인을 바꿀 길이 없었던 게 아닐까 싶다"라며 절망감을 드러내면서도, 지금이라도 전후 세대는 그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전쟁에 나가 무엇을 했는지 묻고 알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는 '강한 인간(책에서 자주 나오는 '강함'이라는 개념은 일상적인 쓰임새와 다르게 부정적인 뜻을 품고 있습니다)'이 되기보다는 울고 웃을 줄 아는 '느끼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버지 세대가 숨겨왔고 때로는 폭력으로 왜곡시켜온 침략전쟁의 사실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은 음침한 일이다. 그 음침함은 사실인 자학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부인하려 했던 아버지 세대의 자세로부터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이 음침함을 청명하게 벗겨내지 않는 한, 감정의 풍요로움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감정의 풍요로움이 없는 한, 상처 입은 사람들의 얘기를 들을 능력은 생기지 않는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강제로 연행하고 학대하고 죽인 데 대해서도, '듣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상하느냐 마느냐, 보상액을 얼마로 하느냐만이 문제가 된다. 피해자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그러면 눈을 돌려서 우리를 살펴보면 어떨까요? 일제 강점기를 겪은 우리는 이 책을 번역한 서혜영 씨의 말대로 우리 스스로를 피해자 자리에 앉히는 데 익숙하지만, 과연 그럴 수만 있을까요? 윤해동 교수는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에서 "제국 일본 속에서 이등국민의 가능성을 엿보던 조선인들은 제국주의자로서의 욕망을 가슴속에 감춘 '새끼' 제국주의자"였다며, 이런 '새끼 제국주의자'들을 낳은 "식민지 분열 현상은 해방 후 민간인 학살을 이해하는 키워드가 될 수 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현대사가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는 역사임을 말한 것이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국민 보도 연맹 사건(1950)이나 거창 사건(1951) 같은 해방 후 한국 전쟁 시기에 일어난 민간인 학살을 잘 알지 못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데, 피해자의 마음을 알기란 더더욱 어렵습니다. 침묵을 깨고 슬픔을 느낄 힘을 키워야 하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군국주의 일본의 심리를 분석하는 일은 우리의 심리를 분석하는 일과 다르지 않음을 새삼 깨닫게 합니다.
- 2014년 9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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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부장들 - 개정 증보판 남산의 부장들
김충식 지음 / 폴리티쿠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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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부터 1994년까지 『동아일보』에 인기리에 연재된 글을 묶은 『남산의 부장들』은 총 세 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됐습니다. 그 가운데 1992년에 나온 1권과 2권은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일한 김충식 교수가 썼는데(나머지 3권은 김 교수와 마찬가지로 『동아일보』 기자였던 이도성 씨가 썼습니다), 김 교수가 맡은 부분은 20년 만인 지난 2012년 개정하고 증보하면서 800쪽이 넘는 두툼한 한 권짜리 책으로 새로 나왔습니다. 과거 '남산'이란 속칭으로 불리며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중앙정보부(이하 중정)'의 뒷이야기를 담은 『남산의 부장들』은 한국 현대사의 사료가 될 만한 값어치가 있는 우리 시대의 명저입니다.



대체로 1권(개정 증보판의 1부)은 제3 공화국 시기를, 2권(개정 증보판의 2부)은 10월 유신 이후 제4 공화국 시기를 다뤘는데, 박정희 정권과 흥망성쇠를 함께한 중정의 부장들이 이야기의 주조연으로 등장합니다. 박정희 소장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키고서 중정을 세웠음에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외유를 떠나야 했던 김종필(金鍾泌 1926~2018), 한 달 남짓 남산에 머물다가 덧없이 떠난 김용순(金容珣, 1926~1975), 육군 사관 학교(이하 육사) 5기를 대표해서 육사 8기 김종필을 견제한 김재춘(金在春, 1927~2014), 권세만 믿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가 자기가 모시던 윗사람에게 끝내 버림받은 채 프랑스 파리에서 영원히 '실종'된 김형욱(金炯旭, 1925~1979?), 샌님같이 대가 약해 노회한 야당 정치인들에게 휘둘린 김계원(金桂元, 1923~2016), 능수능란한 처세술로 장면(張勉) 내각 사람이라는 약점을 극복하고 박정희의 오른팔이 된 이후락(李厚洛, 1924~2009), 법을 칼처럼 휘두른 신직수(申稙秀, 1927~2001),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金載圭, 1926~1980) 등이 만든 사건들을 글쓴이인 김충식 교수는 여러 관계자의 증언과 기록을 엮어서 생생하게 그렸습니다. 음모와 계략 그리고 배신이 뒤섞인 박정희 시대의 드라마는 소설 못지않게 흥미진진합니다.


그렇지만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은 역시 특유의 용인술로 중정 부장들을 쥐락펴락한 박정희(朴正熙, 1919~1979) 전 대통령입니다. 중정이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것도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 뒤에서 밀어줬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안보파수꾼·외교주역에서부터 정치공작, 선거조작, 이권배분, 정치자금징수, 미행, 도청(盜聽), 고문 납치, 문학·예술의 사상평가, 심지어 여색(女色)관리, 밀수, 암살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올마이티(almighty)의 권력중추"인 중정을 앞세워 국가를 통치하였습니다. 그는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바꾸는 것 빼고는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던 중정 덕분에 승승장구하며 18년 동안 장기 집권했지만, 우리 사회는 그 때문에 너무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5·16 이후 박정희 정치의 특징은 '친위 정보기구를 통한 정치 인멸(湮滅)'이었다. 정보부를 비롯한 권력기구, 행정 체계 및 돈을 총동원해 선거의 공정성을 무너뜨리고 공작으로 정치 타협의 룰을 훼손했던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여당 정치인은 힘에만 빌붙고 야당 정치인은 돈과 공작에 놀아나는 천박한 존재로 굴러 떨어졌다.


박정희는 스스로 빚어놓은 그 천박한 정치와 정치인상에 또 역겨움을 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박 전 대통령은 스스로 정치인이었음에도 다른 정치인을 혐오했으며, 의회 정치를 불신했습니다. "부질없는 정쟁(政爭)으로 인한 국력손실을 막고 경제 도약을 해보자고 유신을 한 거야"나 "시끄럽게 떠드는 건 학생과 정치인뿐"이라는 말에서 그러한 생각이 언뜻 드러나지요. 박 전 대통령은 자유로운 선거와 투표로 빚어지는 번거로움도 꺼렸습니다. 그래서 선거와 투표의 '폐단'을 줄인 유신체제가 들어서면, '정치적 낭비'가 없는 부국강병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978년 8월 28일, 태릉사격장에서 사격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동아일보)



하지만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목소리는 나날이 커졌습니다. 정적들의 동태에 신경이 예민해진 박 전 대통령은 '정보중독증상'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정보 정치에 더욱 기댔습니다. 측근이자 조카사위인 김종필조차 믿지 못해서 중정을 통해 감시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종말의 날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정보 정치의 고갱이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손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정치 폐허 위에 쌓은 유신의 성은 하루아침에 허물어졌습니다.


『남산의 부장들』의 또 다른 주인공은 박 전 대통령의 '친위대'이던 전두환(全斗煥, 1931~)입니다. 책 들머리에 1961년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난 직후 권력의 향방을 좇아 바쁘게 움직이던 전두환 대위의 모습을 비춘 김충식 교수는 1980년 중정의 사실상 '마지막' 부장이 된 전두환이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서 권좌에 오르는 광경을 보이면서 글을 마무리 짓습니다. 이야기의 기와 결을 전두환 한 사람이 장식한 셈이지요. 김 교수는 이 놀라운 수미일관의 구성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박정희 시대는 다시 말하면 초급장교 전두환이 최고회의 민원비서관과 중정 인사과장으로 부임하면서 열려, 전두환 소장이 보안사령관일 때 닫혔다. 그리고 전 장군이 80년 중앙정보부장(서리)으로 남산에 되돌아옴으로써 박정희 시대는 소멸되었다."


이처럼 책에서는 우연인 듯 우연 아닌 필연이 된 장면이 몇 가지 나옵니다. 예컨대 전두환을 비롯한 육사 11기 출신 정치군인들이 1963년에 이미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었고, 그들을 조사한 이가 당시 방첩대장인 정승화(鄭昇和, 1929~2002)였다는 대목은 뒷날 벌어질 12·12 군사 반란을 불길하게 예고합니다. 또한, 육사 11기들이 꾀한 쿠데타 계획은 1990년대 초까지 이어진 군사 정권의 씨앗이 박정희 정권 초기에 뿌려졌음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현시점에서 『남산의 부장들』을 다시 읽으면, 책 속에서 조연으로 잠깐 나오는 박근혜(朴槿惠, 1952~), 김기춘(金淇春, 1939~), 최태민(崔太敏, 1912~1994) 같은 몇몇 이름이 자연스레 눈에 띕니다. 그때 그 사람들이 몇 년 전에 온 나라를 뒤흔든 사건과 얽힌 것을 보면, 우리는 아직도 박정희 시대의 그늘 속에서 사는 듯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안타까우면서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중정도 '국가 안전 기획부(안기부)'와 '국가 정보원(국정원)'으로 두 차례나 이름을 바꾸고, 기관이 자리 잡은 곳을 서울 중구 예장동에서 서초구 내곡동으로 옮겼으나, '정치공작사령부'라는 본질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박정희 시대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정보기관이 대선에 개입하고, 민간인을 사찰하고, 간첩을 조작하는 행태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민주화 이후에도 정보 정치의 폐단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확연히 드러냅니다. 아마도 정권 안보가 국가 안보라고 여기는 헛똑똑이들이 조직을 이끈 탓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잇달아 일어난 것이겠지요. 하지만 중정의 역사가 말하듯 그런 믿음은 우스꽝스러운 착각일 뿐입니다. 정보기관이 정권의 시녀 노릇이나 하는 흑역사는 앞으로 끝내야 마땅합니다. 『남산의 부장들』은 예나 이제나 그것을 잘 보여 줍니다.

- 2016년 1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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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 2020-06-08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놀고있네 아주

解明 2020-06-09 09:18   좋아요 0 | URL
네, 아주 잘 놉니다.
 
시민군 계엄군
김양우 / 종로서적 / 1996년 12월
평점 :
절판


지난 2017년에 전두환의 회고록이 논란 속에 발간되고, 영화 <택시운전사>가 천만 관객을 모아 흥행하면서 여느 때보다 5·18 민주화 운동에 주목하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거기에 맞물려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을 무렵 광주를 둘러싼 상황을 엿볼 만한 자료도 여럿 드러났는데, 그 가운데 "한국군이 점령군의 태도를 견지하면서 광주 시민을 외국인처럼 다뤘다"는 증언이 들어간 미국 국방정보부의 비밀문서(관련 기사)와 광주 시민들을 '적'으로 규정한 육군 본부의 비밀문서(관련 기사)가 눈길을 끕니다.



당시 새로 공개된 비밀문서들은 계엄군이 광주에서 학살을 저지른 까닭을 우리에게 넌지시 말하는 듯합니다.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군이 시민들을 '외국인'이나 '적'으로 바라봤다는 건 경악스럽습니다. 동족마저 '비국민'으로 취급하는 짓을 서슴지 않을 만큼 권력욕이 무서움을 새삼 느낍니다. 그런데 현실은 문서에 담긴 내용보다 더 끔찍했습니다. 부산에 기반을 둔 『국제신문』의 기자로 취재팀을 이끌고 광주에 들어간 김양우 씨의 책 『시민군 계엄군』에는 계엄군이 시민군을 '진압'한 직후인 1980년 5월 27일 오전 전남도청 앞에서 어떤 광경이 펼쳐졌는지 나옵니다.


"갑자기 단말마같은 고함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야! 이놈들아, 우릴 빨리 죽여라! 이 비겁한 군인놈들아! 포로를 묶어놓고 때려 죽이는 더러운 놈들아! 전쟁터에서도 포로는 못 죽이는 것 아니냐! 이놈들아!" 포승에 묶인 젊은이들 중 한 명이었다.


도청 정문 안 시멘트 바닥에 방치돼 있어 시체거니 하고 눈여겨 보지도 않았던 사람 6명이었다. 사람을 엎어 전깃줄로 두 팔을 뒤로 돌려 묶고 발못을 이 줄로 함께 묶은 뒤 다시 목까지 칭칭 동여매 두었다. 얼마나 세게 잡아당겨 조였던지 얼굴과 두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몸이 마치 활처럼 뒤쪽으로 둥글게 휘어져 있었다. 네 사람을 전깃줄 하나로 동여매었다. 흡사 굴비를 엮어 놓은 형상이었다. 한 줄에 묶인 넷 중 양쪽 끝 둘은 이미 숨이 끊어져 머리가 푹 꺾여져 시멘트 바닥으로 처박혀 있었다. 바로 그 옆에는 따로 두 사람이 묶인 채 이미 시체가 되어 있었다.


(중략) 지금도 어쩌다 꿈속에서 나타나곤 하는 그 젊은이의 눈빛이 눈에 선하다. 그의 말대로라면 포로로 잡은 시민군을 계엄군들이 묶은 채로 죽였다는 얘기가 된다. 하사관 한 명과 병사 두 명이 어디선가 나타나더니 버럭 고함을 쳤다. "야! 이새끼, 아직 숨이 붙어 있었구나. 까불지말고 가만있어. 죽여줄테니까." 구둣발로 짓이기고 개머리판으로 얼굴을 두들기는데, 금방 피투성이가 돼 얼굴이 푹 고꾸라졌다."


김양우 전 기자의 기록대로라면, 당시 계엄군에 사로잡힌 시민군은 포로만도 못한 처지에 놓인 셈입니다. 더욱이 시민군의 주검을 병사들이 함부로 다뤄 훼손하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 시기 대한민국을 과연 민주 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불과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이 나라는 헌법에서 규정한 것과 달리 제대로 된 민주정 국가가 아니었음을 광주 학살은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계엄군에게 강제 연행되는 광주 시민들을 찍는 기자의 모습(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렇게 시민군의 항쟁이 비극으로 끝맺은 날에서 이야기를 시작한 『시민군 계엄군』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국제신문』 취재팀이 꾸려지고 광주에서 취재한 과정을 그렸습니다. 199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문민정부가 일으킨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의 영향으로 전두환과 노태우가 법의 심판을 받고, 5·18 민주화 운동을 재조명하던 분위기에 힘입어 나온 이 책은 요즈음 봐도 놀라운 일화를 적잖이 실었습니다. 몇 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택시운전사>에서도 묘사했듯이 그때 광주는 계엄군의 통제로 외부와 단절된 상태라서 취재팀이 시내로 들어가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31사단에 속한 김 대위와 정 소령의 도움으로 군 작전 도로를 이용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광주 시내와 시외를 드나들면서 취재하는 행운을 누립니다. 김 대위와 정 소령은 광주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정확히 파악하지도 신군부의 만행을 막지도 못했지만, 『국제신문』 취재팀에 이런저런 편의를 제공해 주면서 광주의 비극이 세상에 알려지는 데 조금이나마 이바지했습니다. 특히 정 소령은 취재팀의 중재로 시민군에서 활동한 몇몇 젊은이와 지역 신문사 기자가 계엄군이 시내에 진입하기 직전에 광주 바깥으로 탈출할 수 있게끔 도와줬다는 점에서 양심적인 군인이라고 할 만합니다.


"정소령은 일부 군인들, 예컨대 첫날 광주 시위대를 사살했던 공수부대원들을 빼고는 군인들이라고 해서 모두 광주시민들, 특히 시민군들을 미워하거나 적대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양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일부 병사들은 "우리가 왜 광주시민들을 학살하는 데 동원되어야 하느냐."면서 노골적으로 반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교들 가운데도 상당수는 광주사태를 다루는 군수뇌부나 정부방침에 겉으로 드러내놓고 반발을 못한 것이지, 내심으로 불만이 많다고 했다. 비단 31사단쪽이 아니라도 다른 지역을 지키는 군인들의 도움을 받아 광주 밖으로 빠져나간 대학생들이 제법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오히려 31사단 쪽은 전남대와 인접해 있어 경비가 엄할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는 피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또 글쓴이는 중앙정보부와 보안 사령부 소속 요원뿐만 아니라 일반 공무원까지 광주에서 정보원으로 활동한 이가 줄잡아 수천 명이었으며, 5월 26일에 전남도청 앞 광장에 모인 약 3천 명의 시민 중 2천 명가량은 기관원이었다고 주장합니다. 황당한 숫자처럼 보입니다만, 정 소령도 상부의 지시로 자기 부대 소속 병사들을 민간인으로 꾸며 시내에 숨어들게 했다고 기자들에게 털어놓았으니 수천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거기에 버금가는 수의 정보원이 광주를 돌아다닌 건 사실인 듯합니다. 물론 제대로 훈련받은 정보원은 그보다 더 적었겠지만 말이지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글쓴이는 지역감정을 자극하며 광주 안팎에서 돌아다닌 흉흉한 소문들이 신군부 측에서 정보원들을 통해 슬그머니 흘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의심합니다. 광주 학살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뒤집어씌우려고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을 조작했듯이 유언비어로 살벌한 분위기를 조장하여 광주 시민들에게 위압감, 절망감, 무력감을 심으려는 여론 조작 수법이 아니었겠느냐는 것이지요.


이제 와서 소문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캐내기란 어렵겠지만, 신군부가 광주 시민들의 항쟁을 '폭동'으로 날조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은 것을 보면, 터무니없는 가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신군부가 광주 안 사정을 훤히 꿰뚫어 봤음에도 무력 진압을 선택했다는 것과 5·18 민주화 운동을 왜곡하려는 무리가 여전히 기승을 부린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몇몇 국회의원까지 역사 왜곡에 앞장선 일은 개탄스러울 따름입니다. 광주 학살의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 2017년 9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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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간이 들려주는 백제 이야기 백제문화개발연구원 역사문고 28
윤선태 지음 / 주류성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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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도성인 사비성으로 들어가려면 사비성을 둘러싼 나성을 거쳐야 합니다. 나성의 여러 성문 가운데 가장 큰 문인 나성대문은 도성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쳐서 늘 북적거리는 곳입니다. 이 날은 웬일인지 유난히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나성대문으로 몰렸습니다. 나성대문 바깥에 있는 능사(陵寺)에서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절 앞에서는 제관으로 보이는 한 사내가 제를 지내는 듯했는데, 사내의 손에는 마치 남자의 성기처럼 생긴 나무 막대가 들렸습니다. 축문을 외고 폐백을 바치느라 한동안 바쁘게 움직였던 제관은 갑자기 손에 든 나무 막대를 제단 위에 올렸습니다. 하늘로 우뚝 솟은 나무 막대의 모습은 영락없이 발기한 성기를 보는 것 같아서 왠지 우스웠으나, 사람들은 누구 하나 웃지 않고 숨죽인 채 그 장면을 지켜봤습니다. 조심스레 나무 막대를 세운 제관은 등을 돌려 사람들을 바라보더니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도양(道禓)께서 일어서셨다!!!"


이제껏 제관은 길의 신[道神, 路神]인 양(禓)에게 제사를 지내던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양을 상징하는 나무 막대에도 제관이 외친 것과 같은 말이 한문으로 쓰인 게 눈에 띄었습니다. 긴장한 얼굴로 제의를 보던 사람들도 제관의 외침을 듣고 안심했다는 듯 기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관은 나무 막대를 물웅덩이에 버리면서 제사의 모든 절차를 마쳤습니다. 역병이나 잡귀처럼 도성 안으로 들어오면 안 되는 온갖 나쁜 기운을 물에 흘려보낸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백제에는 정말 이와 같은 도제(道祭)가 존재했을까요? 문헌 사료 어디에도 그것을 증명하는 기록은 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발굴한 목간에 적힌 글은, 백제인들이 길의 신에게 나쁜 기운을 도성 밖으로 몰아내 달라고 빌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부여 능산리사지 출토 남근형 목간의 모습(한겨레)


목간은 종이가 없던 시대에 글을 적으려고 쓰던 나뭇조각을 가리킵니다. 아무래도 나무로 만들었기에 긴 글을 적으면 종이보다 훨씬 무거워진다는 것은 목간의 단점이었지만, 어디에서나 쉽게 재료를 찾아서 쓸 수 있다는 것은 목간의 장점이었습니다. 고대에 목간은 그 쓰임새가 다양해서 문서와 편지, 글씨를 연습하는 학습장 또는 도성을 출입할 때 필요한 통행증 등으로 쓰였습니다. 심지어 종이가 보급된 뒤에도 목간은 꼬리표로 쓰일 정도로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지요. 이처럼 생활 곳곳에서 쓰인 만큼 목간은 고대인의 삶을 그리는 데 빠뜨릴 수 없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목간 하나하나가 작은 역사책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학계에서 목간에 주목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었습니다. 일찍이 수만 점이 넘는 목간을 발굴해서 연구한 중국, 일본과 달리 지금까지 국내에서 발굴한 목간은 수백 점밖에 되지 않습니다. 한국목간학회가 출범한 게 2007년의 일이니 한국에서 목간학(木簡學)은 아직 걸음마 단계인 셈입니다. 그래도 2007년은 여러모로 한국 목간학의 전환점으로 기억해야 할 해입니다. 한국목간학회 창립에 힘쓴 윤선태 교수가 학회가 창립되고서 몇 달 뒤에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 이야기』라는 책을 냈다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이 책은 일반 독자에게 백제 목간뿐만 아니라 한국 목간의 이모저모를 소개한 최초의 책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큽니다.


"백제목간은 신라목간에 비해 출토점수는 비록 적지만, 매우 다양한 정보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질적인 측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특히 기존의 백제사 연구에서 불모지로 남아있었던 백제의 율령, 문서행정, 심지어 도성 내외의 경관(景觀) 등에 대해서도, 목간자료를 제대로만 활용한다면 접근이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백제목간의 발굴은 백제사 연구에 일대 혁신을 가져올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 분명하다."


백제 목간에 담긴 정보를 바탕으로 글쓴이가 그린 사비성 안팎의 풍경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사비성의 한가운데에는 남북대로가 깔렸습니다. 사비성의 주작대로인 궁남로(宮南路) 북쪽 끝에는 왕궁이, 남쪽 끝에는 궁남지가 있었고, 그 사이에는 오층 석탑이 들어선 정림사가 자리 잡았습니다. 궁남로를 중심으로 남북과 동서를 가르는 여러 개의 작은 도로가 사비성을 바둑판같이 나눴습니다. 이렇게 도로가 만든 구획에 따라 도성에 상부(동부), 전부(남부), 중부, 하부(서부), 후부(북부)의 5부(部)를 뒀고, 5부 아래에는 다시 5항(巷)을 뒀습니다. 그리고 나라에서는 왕경인들을 신분에 따라 사는 곳을 달리하도록 했습니다.


이를테면 궁남지에서는 서부후항(西部後巷)에 '귀인(歸人)'이라고 불린 이들이 살았다는 목간이 나왔는데, 이것은 사비성 안에 귀화인들이 따로 모여 사는 구역이 있었음을 뜻합니다. 실제로 『수서(隋書)』에는 백제에 신라인, 고구려인, 왜인, 중국인 등이 살았다는 기록이 보입니다(관련 자료). 그런데 이 궁남지 목간에서 귀인을 '부이(部夷)'라고도 불렀다는 사실이 눈길을 끕니다. 부에 사는 오랑캐라는 뜻의 부이라는 용어는 백제인들이 백제를 중화로, 주변국을 번이로 인식한 중화사상을 지녔음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백제인들은 도성 안팎에 여러 장치를 설치해 자신들의 소중화 의식을 드러냈습니다. 부이들이 사는 특수 행정 구역이 도성 안에 설치한 장치였다면, 사비성 좌우에 우이(嵎夷)와 신구(神丘)라는 지명을 붙인 것은 도성 밖에 설치한 장치였습니다. 우이는 해가 돋는 곳이고 신구는 서왕모(西王母)가 사는 곤륜산인데, 도교의 냄새가 짙은 이 지명들에서 우리는 사비성을 천하를 통섭하는 세계의 중심 공간으로 표상하려 했던 백제인들의 의지를 엿봅니다. 뒷날 신라와 당(唐) 제국이 '우이도행군총관'과 '신구도행군대총관'이라는 직책을 앞세워 백제로 쳐들어왔음을 떠올린다면 우이와 신구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었습니다.


"사비도성을 동서에서 수식했던 우이와 신구는 그 작명 속에 분명히 도교적인, 신비주의적인 세계관이 깃들여있다. 이러한 공간편성방식은 이 시기 백제가 사비도성을 천하의 중심으로 연출하기 위해 진행했던 일련의 작업들, 예를 들어 신선사상(神仙思想)에 바탕을 둔 사비도성 주변의 삼산(三山) 배치, 그리고 그곳 삼산에 신인(神人)이 살면서 서로 왕래하였다는 내러티브(narrative), 백제의 사방계산(四方界山)과 오악(五嶽)의 성립,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모방한 궁남지 건설, 오제(五帝)에 대한 제사체계의 성립 등과 맥락이 닿아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작업은 궁극적으로 신비주의를 통한 백제왕권의 절대화를 지향하였다고 생각된다."


그 밖에도 백제가 신라보다 훨씬 빨리 중국의 정중제(丁中制)를 받아들였으며, 고구려나 신라와는 다른 경로로 중국의 문물을 들여왔다는 사실이 목간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중국인들이 "관리의 일도 잘 본다"라고 평가한 백제의 행정 수준도 목간으로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사료가 적어 늘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 목간이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한 것이지요.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백제사의 수수께끼를 목간을 실마리로 삼아 풀어 본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 이야기』는 고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읽어 볼 만한 책입니다.


책 속에서 윤선태 교수는 "봇물 터지듯, 백제목간이 발굴"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는데, 그만큼은 아니지만, 해마다 꾸준히 백제 목간을 발굴하는 상황입니다. 특히 얼마 전에는 구구단이 적힌 구구표 목간을 확인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관련 기사). 앞으로 더 많은 목간을 찾고 연구 결과를 쌓는다면 또 다른 '백제 이야기'를 듣는 날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2016년 6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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