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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부원록 강화고려역사재단 학술총서 1
김인호 외 옮김 / 혜안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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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강화도를 바라보니 아득하게 보이는 땅이 바람 속 먼지로 흐릿한데 단지 한 줄기 강물로 떨어져 있을 뿐이다."

- 『개성부원록(開城赴援錄)』에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어우러진 조강(祖江)은 강화도 동북단에 다다라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남으로 흐르는 물은 강화 해협을 지나 인천 앞바다로, 서로 흐르는 물은 예성강과 합류해 교동도를 거쳐 서해로 들어갑니다. 둘로 나뉜 조강 물줄기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그 생김새가 마치 제비 꼬리를 닮았습니다. 풍류를 즐기던 옛사람들은 이 물길이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언덕에 정자를 세우고, 거기에 연미정(燕尾亭)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문자 그대로 제비 꼬리 정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연미정은 여느 정자와 달리 월곶 돈대 안에 자리 잡아 성벽을 울타리같이 둘렀고, 강화 외성의 여섯 개 성문 가운데 하나인 조해루(朝海樓)와 이어졌습니다. 이것은 조선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대에 바다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막고자 월곶진(月串鎭)이라는 요새를 연미정 일대에 구축한 흔적입니다. 한강으로 들어가는 어귀에서 관문 역할을 하던 강화도가 지닌 특성으로 말미암아 연미정은 군사 시설과 어우러진 독특한 경관을 보여 주지요. 그래서 연미정은 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처럼 성에서 군사를 지휘하는 장수가 올라서던 장대와 비슷해 보입니다. 실제로 연미정에 올라 주위를 돌아보면, 김포 문수산부터 개성 송악산까지 한눈에 들어오므로 전시에 지휘소로 삼을 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닌 게 아니라 연미정은 한때 싸움터가 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프랑스 극동 함대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1866년에 개성에서 보낸 군대가 그 앞을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미정과 월곶 돈대를 찾아온 답사객들도 대개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돌아갑니다. 안내판에도 적히지 않을 만큼 널리 알려진 사건이 아닌 탓입니다.

이렇게 사람들 머릿속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는 개성군을 언급할 수 있는 것은 『개성부원록』이라는 책 덕분입니다. 『개성부원록』은 양요가 끝난 뒤 개성에서 참전한 이들이 명령서, 보고서, 회고록 등 관련 자료를 모아 엮은 책으로, 그들이 양요 전후에 어떻게 활동했는지 드러내는 사료입니다. 이 책도 개성군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지난 2015년에 강화고려역사재단이 역주본을 펴내면서 일반인도 찾아보기 쉬워졌습니다. 『개성부원록』은 10월 4일(양력 11월 10일)에 조강을 건넌 개성군이 강화도에 상륙한 직후에 목격한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곧이어 월곶진 앞에 도달하였는데, 이른바 적선이 모두 숨어버리고 한 놈도 발견할 수 없었다. 10여 곳의 포구 부락에는 도무지 젊은 여성은 없었고 단지 병들고 늙은 4~5명의 남자 노인네들이 있을 뿐이었다. 이들은 고목(枯木)과 같은 모습으로 마치 강가에 서있는 나무 같이 빈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김종원(金鍾源)이 진중에 명령하여 좌우의 반열과 전후의 행군대오를 엄숙하게 정렬하여 총을 쏘고 취타(吹打)를 불게 하면서 조해문(潮海門)으로 들어갔다. 조금 쉬고 난 후에 병사들이 먼저 진사(鎭舍)를 살피게 하니 남은 곳이 10군데 중 2~3곳에 불과하였다. 군기고(軍器庫)와 화약고가 모두 잿더미가 되었고, 중문 다락의 돌난간이 깨지고 떨어져 있었다. 성 아래에 진(鎭) 밑에 있던 34가구는 비어서 거주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탐문할 곳이 없었다."

개성군이 월곶진에 닿았을 때 연미정을 감싸던 요새는 프랑스군이 파괴해 이미 폐허가 된 상태였습니다. 그 주변에 살던 백성들은 모두 어디론가 흩어져 버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물어볼 만한 이마저 없었지요. 당시 프랑스 해군 소위 후보생으로 종군한 앙리 쥐베르(Jean Henri Zuber, 1844~1909)가 쓴 기록을 살펴보면, 강화부성에서도 월곶진과 비슷한 광경이 먼저 펼쳐졌다는 내용이 나와 눈길을 끕니다. 쥐베르는 프랑스군이 강화부성을 함락하자 주민 대부분이 달아나 여자는 한 명도 없었고,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 몇몇만 마을에 남았을 뿐이라고 종군기에 적었습니다. 그만큼 조선인들에게 '양이(洋夷)'는 낯설고 두려운 존재였는데, 프랑스군은 강화도 여기저기에서 학살, 방화, 성폭행, 약탈 따위의 범죄를 저질러 조선인들을 공포에 빠뜨렸습니다. 천주교 선교사들을 처형한 조선의 야만스러운 행위를 징벌하겠다는 '문명국' 프랑스의 민낯은 그토록 끔찍했습니다.

연미정을 감싼 월곶 돈대와 조해루(국가유산포털)


그렇다면 월곶진에 머무르던 프랑스군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개성군이 강화도에 발을 딛기 하루 전인 10월 3일(양력 11월 9일)에 양헌수(梁憲洙, 1816~1888)가 이끄는 부대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 정찰대와 전투를 치렀습니다. 이른바 정족산성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프랑스군보다 화력이 열세했음에도 지휘관의 지략으로 전세를 뒤집는 이변을 일으켰습니다. 반면에 프랑스군은 뜻밖의 패배에 충격을 받고 노획물을 챙겨 강화도에서 서둘러 빠져나갑니다. 이처럼 프랑스군의 시선이 강화도 동남쪽에 자리한 정족산성으로 쏠린 덕에 개성군은 아무런 저항 없이 바다를 건넜던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개성군은 그런 전황을 모른 채로 상륙 작전을 벌였습니다. 만약에 개성군이 프랑스군과 마주쳤다면, 전력 차로 참패했을 가능성이 컸을 테니 그야말로 천운이었지요.

이쯤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더 제기할 만합니다. 9월 8일(양력 10월 16일)에 강화부성을 빼앗긴 지 한 달 가까이 지나서야 개성군이 강화도에 도착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조선 조정은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쳐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해 중앙군 병력을 동원합니다. 이때 순무영 천총(千摠)으로 임명돼 선봉에 나선 이가 바로 정족산성 전투의 영웅 양헌수였습니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개성과 교동도에 지원군을 편성하라고 명령합니다. 한양에서 출발해 통진 방면으로 진군하는 순무영 군사와 협공해 프랑스군에게 빼앗긴 강화도를 되찾겠다는 포석이었겠지요. 개성 유수(開城留守)는 조정의 명령을 받자마자 9월 11일(양력 10월 19일)에 군졸을 징발해 그 이튿날에 출정하게 합니다. 이렇게 보면 크게 나무랄 데 없이 비상사태에 잘 대응한 듯싶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개성은 유수부(留守府)를 둔 큰 고을로, 군적에 적힌 병력이 만 명쯤 됐는데, 막상 전쟁이 터지자 소집된 인원은 겨우 150명 남짓했습니다. 군적에 쓰인 이름은 허깨비인 셈이었지요. 그나마 모인 병사들도 『개성부원록』의 글쓴이가 "급하게 거병을 하니 여유가 거의 없던 백성들은 무기와 군장을 준비한 것도 전혀 없었다."라고 지적할 정도로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더욱이 그들을 이끌어야 할 중군(中軍) 구연홍(具然泓)마저 무능한 지휘관이었습니다. 개성군은 개성과 통진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다가 강화도 땅은 밟지도 못하고, 개성으로 그냥 되돌아가 버렸습니다. 물론 프랑스군이 갑곶진(甲串鎭)과 월곶진 앞에 군함을 여러 척 배치해 조선군이 섬으로 못 들어오게 막았으므로 강화 해협을 넘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엇비슷한 조건에 처한 양헌수가 적정을 살피며 바다를 건너갈 기회를 끊임없이 노렸다면, 구연홍은 그러한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 차이는 나중에 사뭇 다른 결과로 돌아왔습니다. 결국 조정에서는 개성 유수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채 철수한 구연홍을 파면하고 맙니다. 그렇게 아까운 시간이 덧없이 흘러가 버렸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개성부원록』은 개성 사람들이 자신들의 공적을 세상에 알리려고 쓴 책입니다. 이 책은 얼핏 보기에 미완성작이 아닌가 싶을 만치 편집이 깔끔하지 않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적잖지만, 글과 글 사이마다 임금을 향한 충정과 무도한 '양이'를 무찌르겠다는 의지가 짙게 배었습니다. 또한,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경계, 병참, 정찰 등 중요한 임무를 말없이 해냈을 이들의 노고도 엿보이지요. 하지만 『개성부원록』은 글쓴이가 의도한 바와 어긋나게 조선 왕조의 국가 체계가 시나브로 무너지는 모습도 드러납니다.

부족한 병력, 미비한 무장, 무능한 장수 같은 세기말 현상은 개성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나타났습니다. 조선은 19세기에 들어와 파도처럼 거듭 밀려오는 서구 열강에 맞설 만한 역량이 부족해진 지 오래였습니다. 나라를 떠받쳐야 할 사대부들의 인식도 시대에 뒤처졌습니다. 『개성부원록』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은 영웅 소설 속 호걸인 양 그려집니다만, 시대착오에 빠진 그들의 언행을 보면 쓴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이를테면 서생 민치오(閔致五)는 프랑스군을 물리칠 계책으로 화공과 수륙병진을 제안하는데, 작전을 실행하는 데에 필요한 사람도 배도 모자란 상황에서 그것은 쓸 만한 계략이 아니었습니다. 또 제너럴셔먼호 같은 상선이라면 몰라도 프랑스군이 타고 온 군함을 화공으로 불태우기란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습니다.

몇몇 역사학자는 작자 미상인 『개성부원록』이 민치오가 쓴 작품이라고 여길 만큼, 민치오는 책에서 비중이 큽니다. 민치오는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종군하기를 자원해 개성군의 일원으로 활약했으며, 전란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양요라는 사태를 수습하고자 애썼습니다. 적어도 민치오는 사대부로서 책임감을 느끼던 인물이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시대가 변화하는 흐름을 읽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민치오는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침입하기 직전에 과거를 보러 마침 한양에 다녀왔는데, 누군가 그에게 서울 소식을 묻자 태평스러운 기상이라고 답변했습니다. 그때는 프랑스 극동 함대 소속 군함 2척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한양이 코앞인 양화진(楊花津)까지 이르렀다가 중국으로 돌아간 때였습니다. 이양선 출몰로 한양이 소란스러움을 모를 리 없는 그가 서울은 태평스럽다고 했으니 황당할 따름이지요.

아마 민치오는 스스로 보고 듣고 겪은 일을 회고록으로 남긴 듯하고, 그 글은 『개성부원록』의 고갱이를 이뤄 병인양요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 주는 귀중한 사료가 됐습니다. 다만 그는 자신이 기록한 시대가 어디로 나아가는지 몰랐습니다. 민치오는 일개 서생에 지나지 않았으니, 세계정세에 어두워도 크게 탓할 수 없겠지만, 안타깝게도 위정자라고 하더라도 그보다 눈이 밝은 이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서세동점(西勢東漸) 시기에 조선이 맞은 비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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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군인 쥐베르가 기록한 병인양요 그들이 본 우리 15
앙리 쥐베르 외 지음, 유소연 옮김 / 살림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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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가을, 산둥반도 앞바다에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중국 지부항(芝罘港)에서 프랑스 극동 함대 소속 전함 일곱 척이 일제히 닻을 올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향한 곳은 동방에 있는 조선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개항하지 않아 서구 세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그 '미지의 왕국'에서 프랑스인 선교사 아홉 명이 조선인 천주교도들과 함께 처형됐다는 소식이 지난여름 중국에 닿았습니다. 식민지 개척으로 이역만리에 머물던 프랑스인들은 병인박해(丙寅迫害)에 분노했고, 그것은 군사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극동 함대 지휘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 1812~1882) 제독은 천주교를 탄압하는 조선에 보복하고자 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심합니다. 이른바 병인양요(丙寅洋擾)의 서막이었습니다. 로즈 제독은 중국과 일본에 주둔 중인 병력 천여 명을 모았는데, 그 가운데 스물두 살의 젊은이도 한 명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앙리 쥐베르(Jean Henri Zuber, 1844~1909), 뒷날 풍경화를 잘 그리는 화가로 프랑스에서 명성을 떨치지만, 이때만 해도 그는 겨우 해군 소위 후보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햇병아리 군인 쥐베르에게 이번 '원정'은 두 번째 조선행이었습니다. 로즈 제독은 조선으로 쳐들어가기에 앞서 서울로 들어가는 한강 수로를 찾기 위한 정찰 작전을 펼쳤습니다. 이 작전에 선발대로 참여한 쥐베르는 첫 번째 조선행에서 지도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초계함 프리모게호(Le Primauguet)가 강화 해협에서 좌초하는 돌발 상황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프랑스군은 한강 하구에 진입해 조선군의 저항을 뚫고서 서울이 지척인 양화진(楊花津)까지 이릅니다. 정찰 작전은 성공했고, 이제 조선에 본때를 보일 일만 남았습니다. 다만 로즈 제독은 서울이 아닌, 강화도를 공략해 한강을 봉쇄함으로써 조선 조정을 압박하는 전략을 선택합니다.

프랑스의 두 번째 조선 침략으로 드디어 강화도에 발을 디딘 쥐베르는 자기 재능을 살려 눈앞에 펼쳐진 조선의 이모저모를 기록했습니다. 강화도의 군사 시설인 강화외성, 돈대, 강화부성(강화산성)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의 생활상도 세심히 관찰해 글과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이를테면 오늘날 폐허에 가까운 고려궁지(高麗宮址)와는 사뭇 다른, 여러 건물이 들어선 화려한 관아 풍경이 쥐베르가 쓰고 그린 글과 그림 속에 담겼습니다. 또 조선인들이 흔히 쓰던 놋그릇을 "색깔도 매혹적이고 소리 또한 비할 데 없이 맑은 울림"을 낸다며, 자세히 설명하기도 했지요. 그 속에는 화가 지망생 특유의 예리한 관찰력이 깃들었습니다.

쥐베르가 그린 강화유수부(위키문헌)


이러한 기록이 모여 한 편의 종군기로 완성됐고, 마침내 1873년에 여행 잡지 『르 투르 뒤 몽드(Le Tour du monde)』에 「조선 원정기(Une expédition en Corée)」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쥐베르는 독자들에게 낯선 조선을 알려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것을 의도했겠지만, 「조선 원정기」는 병인양요와 19세기 조선 사회를 이해하려면 살펴봐야 할 사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조선 원정기」에는 전투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종군기라기보다는 여행기에 가깝다는 인상마저 들지요. 쥐베르는 조선군이 구식인 화승총으로 무장한 열악한 상황에서도 군사 기술이 좋고 민첩하면서도 용맹했다고 평가했지만, 정작 문수산성 전투나 정족산성 전투 같은 전황을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선 원정기」만 본다면, 병인양요가 어떻게 전개됐는지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프랑스군이 패퇴한 정족산성 전투를 언급하지 않았으니 앞뒤 상황을 모르는 독자들은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점령한 지 한 달이 채 안 돼 갑작스레 철수한 까닭이 무엇인지 의문을 가졌을 것입니다.

물론 "군사적 사건들은 가볍게 훑으면서 특별히 지리와 경치를 상세히 기술"하겠다고 밝힌 대로 쥐베르가 『르 투르 뒤 몽드』의 특성을 고려해 전투 묘사를 일부러 줄였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 점이 없지 않습니다. 『르 투르 뒤 몽드』에 실리지 않았지만, 프랑스군이 갑곶진(甲串津)에 상륙하거나 강화부성을 공격하는 모습을 옮긴 그림이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면, 쥐베르는 전투 현장을 목격했음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가 시간에 꿩, 거위, 오리 따위를 사냥했다는 일화를 소개하거나 풍경화처럼 아름다운 강화도의 자연 경관을 예찬할 따름입니다. 심지어 자기가 강화도에서 경험한 일을 가리켜 아주 오래오래 추억할 만한 '즐거운 소풍'이었다는 감상도 적었습니다. 전쟁이라는 소용돌이 한복판에 있었음에도, 쥐베르의 기록 속 강화도 풍경은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평화롭게 그려집니다. 정말 그랬을까요?

돌이켜 보면, 이상한 부분이 한둘이 아닙니다. 쥐베르가 조선의 가옥 구조를 상세히 서술할 수 있던 것은 그가 집주인의 뜻과 상관없이 집안에 마음대로 들어갔기 때문이지 않았을까요? 또한, 쥐베르가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있다고 언급한 "주목할 만한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는 몇 권의 장서들을 포함하여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책들"은 프랑스군이 약탈한 외규장각(外奎章閣)의 의궤가 아니었을까요? 프랑스군은 강화도에서 약탈, 방화, 성폭행 등의 범죄 행위를 저질렀으나, 쥐베르는 그것을 애써 감췄습니다. 굳이 드러낼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감춘다고 모든 것을 감출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사대부가 여성으로 전쟁을 몸소 겪은 나주 임씨(羅州林氏)의 증언에서 쥐베르가 숨긴 진실을 일부나마 엿봅니다.

"남동 이참판의 손자 이철주도 거기에서 살았는데, 비록 가난하였지만 좋은 집에서 살림살이 치장이 찬란하였더니, 급한 지경에 이르자 다 버리고 부인네들을 총각 모습으로 꾸미고는 손목을 맞잡고 도망하였다. 결국 그 집도 불에 소실되고 살림살이가 다 부서졌다. 양인들은 이 마을 저 마을로 떼 지어 다니며 여인들을 욕보이고 살림살이들을 탈취하였는데, 남자들 옷과 쇠붙이와 돈이며 양식을 빼앗아 갔다. 또 소를 잡아먹었으며 닭은 더 좋아하였다. 집을 잠그고 도망친 집은 다 부수고 혹 불도 질렀다. (중략) 양인들은 여인을 보는 족족 욕을 보였으니 상계집이 얼마나 되는지 수를 모르겠으나 사대부가 황이천 집 부인과 우리 동네 양반 심선달 부인 둘이 욕을 보았다고 한다."

나주 임씨는 전쟁 직후에 쓴 『병인양란록(丙寅洋亂錄)』에서 프랑스군이 저지른 전쟁 범죄를 밝힙니다. 『병인양란록』에는 양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하지 않으려고 남장한 여인들과 프랑스군의 약탈로 폐허가 된 마을 모습이 생생히 나옵니다. 「조선 원정기」에는 나오지 않는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사실 「조선 원정기」를 살펴보면, 쥐베르는 선량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는 초라한 초가집에서 사는 조선 서민들의 처지를 동정하고, 논에서 농사일하다가도 프랑스군이 지나가면 넙죽 엎드리던 농부들을 바라보면서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방관하거나 침묵했을지언정 전쟁 범죄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세계 곳곳 온갖 분야에 침투하고 있는 유럽의 영향을 보면서 어느 정도 아쉬움"을 느낀다면서 다양성을 말살하는 제국주의 시대를 비판하는 생각도 지녔습니다. 그렇지만 쥐베르가 종군기를 마무리하면서 남긴 마지막 문단은, 이런 사람마저 제국주의 시대의 광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획일성이 세계 도처로 퍼지기까지는 내달려야 할 길이 아직 멀고, 또 여행가들의 온갖 욕망에 부응할 아직 탐험되지 않은 나라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그러니 우리는 공사가들의 공연한 미련 따윌랑은 한쪽으로 제쳐 놓고 오직 프랑스에 바라는 게 있으니, 지나치게 욕심 없는 역할은 이제 그만 버리고 나날이 전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는 유럽 국가들의 통상 움직임에서 보다 더 큰 몫을 차지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프랑스가 지나치게 욕심이 없다니……. 대영 제국보다 덜하다는 뜻일까요? 지독한 농담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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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明 2025-07-06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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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 올린 서평 후기입니다.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 금요일엔 역사책 1
장지연 지음, 한국역사연구회 기획 / 푸른역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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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에는 왕건(王建, 877~943)이 태어나기 전에 그와 얽힌 신비로운 이야기 하나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왕건의 아버지 왕륭(王隆, ?~897)은 송악(松嶽, 개성의 옛 이름)에 새집을 지었는데, 마침 도선(道詵, 827~898) 스님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기장[穄]을 심어야 할 땅에다 어찌하여 삼[麻]을 심었는가?"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부인에게서 그 말을 전해 들은 왕륭은 스님을 뒤쫓아가서 그를 붙잡고 대화를 나눕니다. 스님은 왕륭에게 풍수지리에 맞춰 집을 지으라고 일러 주고서 뒷날 삼한을 통일할 인물을 아들로 얻을 테니 그 이름을 왕건으로 지으라고 예언합니다. 왕륭이 새집을 지은 이듬해 스님이 예언한 대로 왕건이 태어나고, 우리가 잘 알다시피 왕건은 고려 왕조를 세운 태조(太祖)로서 후삼국을 통일하는 업적을 이룹니다.


고려 후기에 활동한 문인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왕건의 탄생담이 사실이 아니며, 누군가 나중에 지어냈으리라고 의심하면서도 우리말에서 기장은 왕(王)과 서로 비슷하다는 김관의(金寬毅)의 해설을 인용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도대체 어디를 봐서 기장과 왕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인지 현재 우리의 언어 감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기장과 왕, 전혀 닮아 보이지 않는 두 단어를 이을 실머리는 뜻밖에도 『천자문(千字文)』에서 나타납니다. 『천자문』은 옛날부터 한문 학습 입문서로 널리 쓰인 만큼 여러 가지 판본이 있는데, 그 가운데 1575년(선조 8)에 간행한 판본은 전라도 광주에서 간행했다고 해서 『광주천자문(光州千字文)』이라고 부릅니다. 『광주천자문』은 그보다 조금 뒤에 간행한 『석봉천자문(石峯千字文)』과 계통이 달리합니다. 같은 한자라고 하더라도 독음과 새김이 『석봉천자문』의 그것과 사뭇 다른 까닭입니다. 이를테면 '왕(王)' 자의 새김이 『석봉천자문』에서는 '님금'이지만, 『광주천자문』에서는 '긔ᄌᆞ'입니다. '님금'은 '임금'으로 형태가 바뀌어서 오늘날까지 이어졌기에 우리에게 낯익으나, '긔ᄌᆞ'는 현대 국어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형태이기에 낯섭니다.

『광주천자문』에 나온 '王' 자의 새김(디지털한글박물관)


비록 현대 국어로 이어지지 못하고 사라졌으되 '긔ᄌᆞ'는 '임금'처럼 왕을 뜻하는 고유어 단어였습니다. '긔ᄌᆞ'는 광주 지역에서 오랫동안 내려오던 백제어 단어일 가능성이 큰데, 다행히 그러한 추측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외국에 남았습니다. 중국의 역사서인 『주서(周書)』에는 백제 백성들이 왕을 '건길지(鞬吉支)'라고 부르고,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백제왕을 '코니키시(コニキシ)'라고 일컫는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건길지'와 '코니키시'는 다른 자료까지 참고해 보면, '건+길지'와 '코니+키시'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백제어에는 왕을 뜻하는 단어 '긔ᄌᆞ'가 있었고, 이것을 중국에서는 '길지'로, 일본에서는 '키시'로 표기한 셈입니다.

또한, 이 말은 고구려에서도 쓰인 듯합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왕봉현(王逢縣)'과 '왕기현(王岐縣)'이라는 지명이 각각 고구려의 '개백현(皆伯縣)'과 '개차정현(皆次丁縣)'을 바꾼 것이라고 나와서 고구려어에서 왕이라는 말이 '개(皆)' 또는 '개차(皆次)'와 비슷했음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개차'가 '길지'와 '키시'처럼 '긔ᄌᆞ'를 달리 표기한 형태였다고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왕륭과 왕건 부자의 근거지인 송악은 옛 고구려 땅이었습니다. 왕건이 태어났을 무렵까지 송악에 고구려어의 영향력이 미쳤다고 헤아려 볼 만합니다. 그렇기에 도선 스님이 고구려어에서 왕을 뜻하는 단어인 '개차'와 발음이 유사한 단어인 '기장'을 비유법으로 활용했겠지요. 왕건의 탄생담에서 언급된 땅에 기장을 심으라는 말은 왕의 씨를 낳으라는 소리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처럼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에서 우리는 지금은 사라진 옛말 하나가 역사에 남긴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문으로 적힌 『고려사』만 읽었다면, 거의 눈에 띄지 않았을 희미한 흔적입니다.

"이렇듯 토착 언어와 문자에는 토착 지식이 담겨 있다. 토착 언어나 이를 표기하는 수단이 끊기면 그 지식 역시 단절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문을 통해 그런 지식이 전해질 수 있긴 했겠지만, 문자의 장벽, 언어 및 지식의 위계 등을 비롯한 여러 이유로 쉽지 않았다. 이렇게 수많은 과거의 지식이 이제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 수도 없는 채 사라졌을 것이다."

장지연 교수의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는 한자가 주류 문자이고, 한문이 보편 문어로 기능하던 시대에 한자가 아닌 구결, 이두, 향찰, 훈민정음 등으로 기록한 역사에 주목합니다. 우리말로 기록한 역사는 한문으로 기록한 역사와 다른 풍경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토착 언어와 문자에는 토착 지식이 담겼기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한자로 쓴 『한경지략(漢京識略)』과 한글로 쓴 <한양가(漢陽歌)>는 조선의 수도 한양의 19세기 모습을 동시대에 다뤘음에도 글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아주 다릅니다. 또 똑같은 대상을 가리키지만, 한자어인 '경사(京師), 경성(京城), 도성(都城), 왕경(王京)' 등과 고유어인 '서울'은 그 속뜻이 같지 않습니다. 장지연 교수가 지적한 대로 한문 자료에서 과도하게 당대의 상을 뽑아내는 것은 위험한 일임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푸른역사의 '금요일엔 역사책' 시리즈로 나온 첫 번째 책인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은 그 밖에도 흥미로운 내용이 많습니다. 특히 조선 시대에 남성은 한문으로, 여성은 언문으로 문자 생활을 했다는 통념을 깨는 분석이 눈길을 끕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선 시대 남성들은 한글을 제법 잘 썼고, 한문으로 글을 쓰다가도 자기감정을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면, 그 속에 '뒤쥭박쥭('뒤죽박죽'의 옛말)' 같은 고유어를 한글로 섞어 쓰기도 했습니다. 임금이 모후나 옹주에게 정성껏 쓴 한글 편지를 부치기도 했으니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나 정약용(丁若鏞, 1762~1836)처럼 언문을 익히지 않은 것이 드문 경우였습니다.

이렇게 한문으로 기록한 역사 너머의 또 다른 역사를 살펴보고 싶다면,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를 읽으면서 주말을 보내면 어떨까요?

※ 이 서평은 푸른역사에서 제공한 책을 토대로 작성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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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明 2023-08-24 0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만 이 책에서 한 가지 옥에 티가 있다면, ‘삼세불배(三世佛拜)‘의 문장 성분을 설명한 부분을 꼽겠습니다. 장지연 교수는 ‘삼세불배‘의 어순이 ‘목적어+동사‘라고 했는데, ‘부사어+서술어‘가 정확합니다. 어순은 문장 성분의 배열에 나타나는 일정한 순서이므로 문장 성분이 아닌 품사인 동사로 어순을 설명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삼세불배‘를 우리말로 풀이하면, ˝삼세의 여러 부처에게 절하다.˝이므로 부사격 조사 ‘에게‘가 붙은 ‘삼세의 여러 부처‘는 목적어가 아닌 부사어로 분석해야 합니다. 이다음에라도 이 부분이 고쳐지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전쟁과 인간 - 군국주의 일본의 정신분석
노다 마사아키 지음, 서혜영 옮김 / 길(도서출판)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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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왜 적잖은 일본인은 일본 제국이 침략 전쟁을 벌였다고 인정하지 않을까요? 전쟁을 일으켜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괴롭힌 일을 어쩌면 그리 쉽게 잊었을까요?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자기들도 전쟁 피해자라고 우기는 일본인들의 저의는 무엇일까요? 일본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되풀이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정신 의학자인 노다 마사아키[野田正彰]는 일본군으로 동원되어 중국 등지에서 복무한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정리해, 침략 전쟁을 부인하는 일본인들의 물구나무선 논리, 그 밑바닥에 깔린 심리를 분석한 책인 『전쟁과 인간 - 군국주의 일본의 정신분석』(원제는 '戰爭と罪責')을 펴냈습니다.


글쓴이가 만난 이들은 대부분, 전쟁을 기획하고 주도한 A급 전범들 아래에서 전쟁을 직접 수행한 B급 전범이나 C급 전범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범'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에 걸맞지 않게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글쓴이는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괴물'이 되었다가 '인간'으로 되돌아왔는지 알아내고자 그들이 걸어온 삶을 성장 과정부터 하나하나 되짚어갔습니다. 전범들이 글쓴이에게 털어놓은 죄들은 하나같이 큰 충격을 줍니다. 이를테면 중국인 부하에게 '염라대왕'이라고 불린 한 병사는 다음과 같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근처 상사아구코우(上下峪口) 마을에서는 농민 8명을 빨간 술이 달린 창으로 엉덩이를 찔러 죽였다. 3명을 그가 찔러 죽이고 나머지는 부하들에게 흉내내도록 했다. 또 원시현 헝쉐이진(橫水鎭)에서는 남자 한 사람을 고문한 뒤, 마차 뒤에 밧줄로 묶어 질질 끌고다녀 죽게 했다. 불에 달군 젓가락으로 음경을 자르거나, 물고문으로 부풀어오른 배를 발로 짓밟는 고문도 즐겼다. 또 비위애현(泌源縣) 정중(正中) 마을에서는 겁에 질려 굴 속에 숨어있는 여자와 아이 열두 명을 찾아내, 마른풀로 태워 죽였다. 그가 죽인 중국 농민은 특별군사법정에서 기소된 사건만 해도 111명이다. 그 자신은 200명이 넘는다고 말하고 있다. 실로 염라대왕이 따로 없을 뿐더러, 본인도 그렇게 불리는 것이 아주 싫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온갖 만행을 저지르던 일본군 장병들은 일제가 패망하자 하루아침에 포로 신세가 됩니다. 그래도 이들은 스스로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몰랐습니다. 죄책감은 없었습니다. 일본군 포로들은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흔하고 자기들은 높으신 분들이 내린 명령을 따랐을 뿐인데, 그런 자기들을 전범으로 취급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기며, 되레 불만을 품었습니다. 만주 사변(1931)과 중일 전쟁(1937) 그리고 태평양 전쟁(1941)으로까지 이어지는 '15년 전쟁'이 침략 전쟁이었음을 부인하는 논리가 전쟁이 끝나자마자 나왔던 것입니다.


난징 대학살 당시 중국인을 참수하려는 일본군의 모습(위키백과)



그러나 중화 인민 공화국의 '이인자'인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 총리는 일본군 포로들에게 관대 정책을 베풀라고 지시하였습니다. 포로들을 고문하거나 폭행하는 따위의 가혹 행위는 전혀 없었고, 포로들이 배가 고프다고 하면 밥을 더 주고, 아프다고 하면 귀한 약을 아낌없이 썼습니다. 당시 웬만한 중국 인민들보다 일본군 포로들이 더 대접을 받은 셈입니다. 그동안 중국인들을 벌레 보듯 하며 멋대로 죽인 자기들을 손님처럼 따뜻하게 보살피는 중국 지도원들의 태도에 일본군 포로들은 크게 당황합니다. 처음에는 전범이 된 게 억울해서 허세를 부리며 반항하던 일본군 포로들은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내림을 느끼며, 하나둘씩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고백합니다. 이른바 탄바이[坦白, 죄행의 고백]였습니다.


"리우 반장은 싱긋싱긋 웃으며, 우리들의 맨 앞에서 걷고 있었다. 마음의 빗장이 열렸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 같았다. 눈물이 넘쳐흘렀다. 스스로도 주체할 길 없었다. 눈앞이 희뿌옇게 흐려졌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휘청휘청 리우 반장 앞으로 다가갔다. 나는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양손을 바닥에 대고 무릎을 꿇었다."


전범들은 죄를 죄로 인식하는 능력을 겨우 갖추게 되었습니다만, 아직 그것은 머리로만 생각해서 나온 결론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죄가 아니었지요. 이들이 쓴 반성문을 읽으면, 설명과 분석이 너무 많아서 반성문이라기보다 마치 보고서를 보는 듯합니다. 오랫동안 군국주의 문화에 젖어 감정이 마비된 이들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피해자가 죽으면서 느꼈을 슬픔과 아픔은 추상화되어 희미하게 다가왔을 뿐이고, 원한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중국인들이 보여 준 인내심이 아니었다면, 전범들이 죄를 자각하는 일조차 불가능했을지 모릅니다.


중국 정부는 전범들의 인죄(認罪, 죄를 인정함)를 받아들여서 한 사람도 사형하지 않고, 1956년부터 1964년까지 약 8년에 걸쳐서 일본군 포로들을 모두 일본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일본 사회는 고국으로 돌아온 귀환자들을 세뇌된 빨갱이로 낙인찍었습니다. 귀환자들은 자기들이 꺼내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일본 사회의 공감력 결핍에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악명 높은 731 부대에서 생체 해부를 해서 전범이 된 군의관 유아사 겐[湯浅謙]은 패전 후 11년 만에 본 동료 군의관이 생체 해부를 한 사실을 까맣게 잊은 것에 놀라서 일본이 처한 현실에 눈을 떴습니다. 유아사를 비롯한 귀환자들은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중국인들이 자기들을 바라보며 느꼈을 감정을 비슷하게나마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옛날에 마음속에서 사라진 '슬픔을 느낄 힘'을 되찾은 것이지요. 귀환자들은 '중국귀환자연락회(중귀련)'라는 모임을 만들어 일본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기들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며 평화 운동에 앞장섭니다.


명령자가 시켜서 억지로 한 전쟁이 아니라 스스로 한 전쟁임을 뒤늦게 깨닫고 실행자로서 자기가 지은 죄를 짊어지고 사는 귀환자들과 달리 대부분의 일본인은 과거의 잘못을 제대로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만든 전후 일본 사회는 경제 발달로 풍요로웠지만, 죄의식을 억압하고 공격성을 강화하는 문화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글쓴이는 "직접 전쟁에 관여한 자를 모두 우순 전범관리소에 넣는 것 이외에는, 표면적이나마 그들 일본인을 바꿀 길이 없었던 게 아닐까 싶다"라며 절망감을 드러내면서도, 지금이라도 전후 세대는 그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전쟁에 나가 무엇을 했는지 묻고 알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는 '강한 인간(책에서 자주 나오는 '강함'이라는 개념은 일상적인 쓰임새와 다르게 부정적인 뜻을 품고 있습니다)'이 되기보다는 울고 웃을 줄 아는 '느끼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버지 세대가 숨겨왔고 때로는 폭력으로 왜곡시켜온 침략전쟁의 사실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은 음침한 일이다. 그 음침함은 사실인 자학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부인하려 했던 아버지 세대의 자세로부터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이 음침함을 청명하게 벗겨내지 않는 한, 감정의 풍요로움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감정의 풍요로움이 없는 한, 상처 입은 사람들의 얘기를 들을 능력은 생기지 않는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강제로 연행하고 학대하고 죽인 데 대해서도, '듣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상하느냐 마느냐, 보상액을 얼마로 하느냐만이 문제가 된다. 피해자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그러면 눈을 돌려서 우리를 살펴보면 어떨까요? 일제 강점기를 겪은 우리는 이 책을 번역한 서혜영 씨의 말대로 우리 스스로를 피해자 자리에 앉히는 데 익숙하지만, 과연 그럴 수만 있을까요? 윤해동 교수는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에서 "제국 일본 속에서 이등국민의 가능성을 엿보던 조선인들은 제국주의자로서의 욕망을 가슴속에 감춘 '새끼' 제국주의자"였다며, 이런 '새끼 제국주의자'들을 낳은 "식민지 분열 현상은 해방 후 민간인 학살을 이해하는 키워드가 될 수 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현대사가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는 역사임을 말한 것이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국민 보도 연맹 사건(1950)이나 거창 사건(1951) 같은 해방 후 한국 전쟁 시기에 일어난 민간인 학살을 잘 알지 못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데, 피해자의 마음을 알기란 더더욱 어렵습니다. 침묵을 깨고 슬픔을 느낄 힘을 키워야 하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군국주의 일본의 심리를 분석하는 일은 우리의 심리를 분석하는 일과 다르지 않음을 새삼 깨닫게 합니다.
- 2014년 9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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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부장들 - 개정 증보판 남산의 부장들
김충식 지음 / 폴리티쿠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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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부터 1994년까지 『동아일보』에 인기리에 연재된 글을 묶은 『남산의 부장들』은 총 세 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됐습니다. 그 가운데 1992년에 나온 1권과 2권은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일한 김충식 교수가 썼는데(나머지 3권은 김 교수와 마찬가지로 『동아일보』 기자였던 이도성 씨가 썼습니다), 김 교수가 맡은 부분은 20년 만인 지난 2012년 개정하고 증보하면서 800쪽이 넘는 두툼한 한 권짜리 책으로 새로 나왔습니다. 과거 '남산'이란 속칭으로 불리며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중앙정보부(이하 중정)'의 뒷이야기를 담은 『남산의 부장들』은 한국 현대사의 사료가 될 만한 값어치가 있는 우리 시대의 명저입니다.



대체로 1권(개정 증보판의 1부)은 제3 공화국 시기를, 2권(개정 증보판의 2부)은 10월 유신 이후 제4 공화국 시기를 다뤘는데, 박정희 정권과 흥망성쇠를 함께한 중정의 부장들이 이야기의 주조연으로 등장합니다. 박정희 소장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키고서 중정을 세웠음에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외유를 떠나야 했던 김종필(金鍾泌 1926~2018), 한 달 남짓 남산에 머물다가 덧없이 떠난 김용순(金容珣, 1926~1975), 육군 사관 학교(이하 육사) 5기를 대표해서 육사 8기 김종필을 견제한 김재춘(金在春, 1927~2014), 권세만 믿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가 자기가 모시던 윗사람에게 끝내 버림받은 채 프랑스 파리에서 영원히 '실종'된 김형욱(金炯旭, 1925~1979?), 샌님같이 대가 약해 노회한 야당 정치인들에게 휘둘린 김계원(金桂元, 1923~2016), 능수능란한 처세술로 장면(張勉) 내각 사람이라는 약점을 극복하고 박정희의 오른팔이 된 이후락(李厚洛, 1924~2009), 법을 칼처럼 휘두른 신직수(申稙秀, 1927~2001),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金載圭, 1926~1980) 등이 만든 사건들을 글쓴이인 김충식 교수는 여러 관계자의 증언과 기록을 엮어서 생생하게 그렸습니다. 음모와 계략 그리고 배신이 뒤섞인 박정희 시대의 드라마는 소설 못지않게 흥미진진합니다.


그렇지만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은 역시 특유의 용인술로 중정 부장들을 쥐락펴락한 박정희(朴正熙, 1919~1979) 전 대통령입니다. 중정이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것도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 뒤에서 밀어줬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안보파수꾼·외교주역에서부터 정치공작, 선거조작, 이권배분, 정치자금징수, 미행, 도청(盜聽), 고문 납치, 문학·예술의 사상평가, 심지어 여색(女色)관리, 밀수, 암살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올마이티(almighty)의 권력중추"인 중정을 앞세워 국가를 통치하였습니다. 그는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바꾸는 것 빼고는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던 중정 덕분에 승승장구하며 18년 동안 장기 집권했지만, 우리 사회는 그 때문에 너무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5·16 이후 박정희 정치의 특징은 '친위 정보기구를 통한 정치 인멸(湮滅)'이었다. 정보부를 비롯한 권력기구, 행정 체계 및 돈을 총동원해 선거의 공정성을 무너뜨리고 공작으로 정치 타협의 룰을 훼손했던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여당 정치인은 힘에만 빌붙고 야당 정치인은 돈과 공작에 놀아나는 천박한 존재로 굴러 떨어졌다.


박정희는 스스로 빚어놓은 그 천박한 정치와 정치인상에 또 역겨움을 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박 전 대통령은 스스로 정치인이었음에도 다른 정치인을 혐오했으며, 의회 정치를 불신했습니다. "부질없는 정쟁(政爭)으로 인한 국력손실을 막고 경제 도약을 해보자고 유신을 한 거야"나 "시끄럽게 떠드는 건 학생과 정치인뿐"이라는 말에서 그러한 생각이 언뜻 드러나지요. 박 전 대통령은 자유로운 선거와 투표로 빚어지는 번거로움도 꺼렸습니다. 그래서 선거와 투표의 '폐단'을 줄인 유신체제가 들어서면, '정치적 낭비'가 없는 부국강병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978년 8월 28일, 태릉사격장에서 사격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동아일보)



하지만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목소리는 나날이 커졌습니다. 정적들의 동태에 신경이 예민해진 박 전 대통령은 '정보중독증상'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정보 정치에 더욱 기댔습니다. 측근이자 조카사위인 김종필조차 믿지 못해서 중정을 통해 감시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종말의 날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정보 정치의 고갱이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손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정치 폐허 위에 쌓은 유신의 성은 하루아침에 허물어졌습니다.


『남산의 부장들』의 또 다른 주인공은 박 전 대통령의 '친위대'이던 전두환(全斗煥, 1931~)입니다. 책 들머리에 1961년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난 직후 권력의 향방을 좇아 바쁘게 움직이던 전두환 대위의 모습을 비춘 김충식 교수는 1980년 중정의 사실상 '마지막' 부장이 된 전두환이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서 권좌에 오르는 광경을 보이면서 글을 마무리 짓습니다. 이야기의 기와 결을 전두환 한 사람이 장식한 셈이지요. 김 교수는 이 놀라운 수미일관의 구성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박정희 시대는 다시 말하면 초급장교 전두환이 최고회의 민원비서관과 중정 인사과장으로 부임하면서 열려, 전두환 소장이 보안사령관일 때 닫혔다. 그리고 전 장군이 80년 중앙정보부장(서리)으로 남산에 되돌아옴으로써 박정희 시대는 소멸되었다."


이처럼 책에서는 우연인 듯 우연 아닌 필연이 된 장면이 몇 가지 나옵니다. 예컨대 전두환을 비롯한 육사 11기 출신 정치군인들이 1963년에 이미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었고, 그들을 조사한 이가 당시 방첩대장인 정승화(鄭昇和, 1929~2002)였다는 대목은 뒷날 벌어질 12·12 군사 반란을 불길하게 예고합니다. 또한, 육사 11기들이 꾀한 쿠데타 계획은 1990년대 초까지 이어진 군사 정권의 씨앗이 박정희 정권 초기에 뿌려졌음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현시점에서 『남산의 부장들』을 다시 읽으면, 책 속에서 조연으로 잠깐 나오는 박근혜(朴槿惠, 1952~), 김기춘(金淇春, 1939~), 최태민(崔太敏, 1912~1994) 같은 몇몇 이름이 자연스레 눈에 띕니다. 그때 그 사람들이 몇 년 전에 온 나라를 뒤흔든 사건과 얽힌 것을 보면, 우리는 아직도 박정희 시대의 그늘 속에서 사는 듯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안타까우면서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중정도 '국가 안전 기획부(안기부)'와 '국가 정보원(국정원)'으로 두 차례나 이름을 바꾸고, 기관이 자리 잡은 곳을 서울 중구 예장동에서 서초구 내곡동으로 옮겼으나, '정치공작사령부'라는 본질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박정희 시대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정보기관이 대선에 개입하고, 민간인을 사찰하고, 간첩을 조작하는 행태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민주화 이후에도 정보 정치의 폐단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확연히 드러냅니다. 아마도 정권 안보가 국가 안보라고 여기는 헛똑똑이들이 조직을 이끈 탓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잇달아 일어난 것이겠지요. 하지만 중정의 역사가 말하듯 그런 믿음은 우스꽝스러운 착각일 뿐입니다. 정보기관이 정권의 시녀 노릇이나 하는 흑역사는 앞으로 끝내야 마땅합니다. 『남산의 부장들』은 예나 이제나 그것을 잘 보여 줍니다.

- 2016년 1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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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 2020-06-08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놀고있네 아주

解明 2020-06-09 09:18   좋아요 0 | URL
네, 아주 잘 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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