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사람을 두고 한쪽에서는 이렇다고 말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저렇다고 말합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을 둘러싼 이런저런 말이 그러합니다. 인조반정으로 궁궐에서 쫓겨난 '폐주(廢主)' 광해군을, 조선인들은 자기들의 나라가 그 운명을 다할 때까지 혼군(昏君)이었다고 손가락질했습니다. 그렇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 광해군 평가는 정반대로 바뀝니다. 어리석은 임금이 아니라 실용주의와 중립 외교를 실천한 빼어난 군주였다는 것이지요. 극적인 반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 -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는 문제적 인간인 광해군을 재평가한 책입니다. 한 교수는 광해군이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성격을 지녔음에도 냉철한 외교로 후금(後金, 뒷날 청 제국)을 자극하지 않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애썼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국토가 둘로 나뉜 채 열강에 둘러싸인 우리에게 역사로서의 광해군과 그의 시대는 '소중한 거울'이 되리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오항녕 교수의 『광해군 - 그 위험한 거울』은 그런 광해군 재평가에 반기를 든 책입니다. 광해군이 귀감이 아닌 반면교사에 지나지 않는 어리석은 임금이었음을 '그 위험한 거울'이라는 부제에서 은근히 드러냈습니다. 이 책은 오 교수의 전작 『조선의 힘』에 실린 글인 「부활하는 광해군」의 논지를 확장한 것입니다. 한명기 교수를 비롯한 역사학계가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광해군을 높이 평가하는 근거가 된 것은 이른바 실용주의·중립 외교로 요약되는 외교 정책이었는데, 오 교수는 나라 안으로 눈을 돌려 내치를 살폈습니다. 그러면서 광해군의 내치는 엉망진창이었고, 외교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합니다. 오 교수가 바라본 광해군 시대의 풍경은 무척이나 어둡고, 칙칙합니다.



광해군의 시대는 '잃어버린 15년'



광해군 앞에 놓인 시대의 과제가 무엇보다 전란의 상처를 치유하고 민생을 돌보는 것이었음을 우리는 쉬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광해군이 즉위하자마자 한 일은 백성을 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광해군은 역모를 꾀했다는 친형 임해군(臨海君, 1574~1609)을 유배하고 옥사를 일으키며, 새로운 정치의 처음인 신정지초(新政之初)를 열었습니다. 사실 임해군은 여러모로 모자란 위인이었지만, 그가 역심을 품었다는 확증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임해군은 역모 혐의를 벗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때아닌 옥사에 백성들은 임금의 친형이 흘린 피가 섞인 피바람 냄새를 맡으며 불안에 떨었습니다. 더욱이 임해군을 조사하러 조선에 온 명(明) 제국 사신에게 뇌물을 주며 사건을 무마하려고 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굴욕을 자초한 이가 다른 사람도 아닌 외교 전문가라고 평가를 받는 광해군이라는 사실은 왠지 씁쓸합니다.



옥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임해군이 죽고 몇 년 뒤에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도 역모 혐의의 덫에 걸려 유배되어 유배지인 강화도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仁穆大妃, 1584~1632)는 '서궁(西宮)'으로 불린 경운궁(慶運宮, 덕수궁)에 유폐되었습니다. 어머니를 폐하고 아우를 죽인, '폐모살제(廢母殺弟)'의 패륜이 남긴 그림자는 광해군의 뒤를 늘 따라다녔습니다. 이렇게 잇달아 벌어진 옥사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조정에서 쫓겨나면서 광해군은 고립되었습니다.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은 광해군은 자기를 지지한 정인홍(鄭仁弘, 1535~1623)과 이이첨(李爾瞻, 1560~1623)에게 힘을 몰아주었는데, 이들이 주축을 이룬 대북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독주하면서 서인과 남인은 설 자리를 잃었고, 정권의 기반은 날이 갈수록 흔들렸습니다. 충성스러웠으나 외골수인 정인홍은 정적을 끝없이 만들었고, 이이첨은 권력을 탐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리고 광해군은 더욱더 외로워졌습니다.



방납의 폐단을 막겠다며 실시한 대동법(大同法)은 경기도 밖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양반 지주들이 대동법을 꺼린 까닭에 광해군 대의 대동법이 경기도 안에만 머물렀다고 설명했으나, 광해군은 대동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대동법을 확대하겠다는 의지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광해군 곁에는 기자헌(奇自獻, 1567~1624)처럼 방납으로 치부한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궁가(宮家)와 권세가들이 하나로 얽힌 방납 세력의 횡포로 백성들의 삶은 고달픈데, 광해군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궁궐 공사였습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불탄 기존의 궁궐들뿐만 아니라 새로운 궁궐들을 짓는 일에도 온갖 정성을 쏟았습니다. 어찌나 꼼꼼했는지 편전 기둥 모양을 네모나게 하지 말고 둥글게 하라는 지시까지 내릴 정도였습니다. 그런 임금에게 대동법은 궁궐 공사에 방해만 될 뿐이었습니다. 오항녕 교수는 광해군이 궁궐 공사에 쓴 돈이 국가 전체 예산의 15~25%였다고 계산했는데, 오 교수의 셈이 얼마나 맞는지 더 따져 봐야겠지만, 이때의 토목 공사로 많은 돈이 쓰였음은 분명합니다. 말 그대로 '삽질'만 하다가 가뜩이나 빠듯한 나라 살림을 말아먹었습니다.



광해군 대를 그린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다음 영화)



문치주의 시스템을 무너뜨린 것도 광해군의 실정이었습니다. 광해군은 아프다거나 날이 너무 춥다거나 반대로 너무 덥다거나 하는 따위의 핑계를 대면서 경연(經筵)을 요리조리 피했습니다. 사관이 "왕이 즉위한 후로 경연을 연 적이 없었고 매양 병 때문이라 하였지만, 죄인을 친국할 때에는 혹 밤늦도록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그리 사람을 죽이는 일은 급히 하면서 학문을 강론하는 일은 등한히 한단 말인가"라고 한탄할 만큼 친국할 시간은 있어도 경연에 나아갈 시간은 없었습니다(관련 자료). 범인이 아닌 만인의 지존이던 임금이 공부를 게을리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경연은 단순한 공부 시간이 아닌 군신이 한자리에 모여 정책을 토론하는 국무 회의와 같은…. 아니, 국무 회의 이상의 중요한 제도로 문치주의 시스템의 한 축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임금이 좀처럼 경연을 열지 않으니 위아래의 소통은 막혔습니다. 공적 토론이 사라지면서 조정은 침묵에 빠졌고, 그 빈자리를 여알(女謁) 정치 같은 베갯머리송사가 대신 차지했습니다. 불통의 시대였습니다.



많은 학자가 광해군의 장점으로 꼽은 외교 정책도 오 교수의 눈에는 중립 외교가 아니라 기회주의 외교로 비쳤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잘못이 아닌 게 없었던 광해군의 시대는 '잃어버린 15년'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광해군의 대후금 정책은 기조나 원칙, 그리고 상황을 제어할 능력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숱한 옥사가 벌어지다 보니 조정에서 일할 인재가 없고, 대동법은 흐지부지되고 궁궐 공사에 국력을 낭비하다 보니 자원과 군비가 허술해졌기에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결과였다."

- 『광해군 - 그 위험한 거울』에서



이처럼 오항녕 교수는 광해군 재평가를 '재평가'하면서 지나치다 싶을 만큼 광해군을 비판합니다만, 실상 오 교수가 겨눈 것은 광해군의 존재 자체라기보다는 광해군 재평가 뒤에 깔린 근대주의 역사관입니다.



"이쯤 되면 20세기에 광해군이 복권된 배경을 이해하기는 쉽다. 빨리 중세를 해체하고 근대로 와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지체되었다. 지체 요인과, 지체 요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광해군 복권보다 시간적, 논리적으로 선행한다. 그 요인, 즉 조선을 유지시킨 요인은 바로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가 즉위했던 계해년(1623)의 반정이었다. 근대주의적 역사관에 의해 인조반정이 부정적으로 인식된 결과, 광해군이 재평가받으며 부활할 수 있었다. 식민사관을 특권화하는 듯하여 자꾸 거론하기가 저어되지만, 일제 식민사관에서 조선 후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출발 시점에 광해군을 띄운 것은 우연이 아니라 정확한 논리적 장치였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광해군은 운 좋게 뜬 것이다."

- 『광해군 - 그 위험한 거울』에서



오항녕 교수의 지적대로 광해군을 처음 띄운 사람은 일제의 어용학자였던 이나바 이와키치[稲葉岩吉, 1876~1940]였습니다. 이나바는 광해군을 가리켜 "실용주의 외교로 백성들에게 은택[澤民]을 입힌 군주"라고 했는데, 그런 호평 속에는 식민사관의 그림자가 어른댑니다. 광해군을 띄우는 척하면서, 그를 임금 자리에서 쫓아낸 뒤에 병자호란의 굴욕을 겪고 근대로 이행하지 못한 조선 사회를 깎아내리려고 한 것이지요. 그리고 힘의 강약에 따라 대세인 후금을 좇으려고 한 광해군처럼 식민지 조선인들도 일본제국에 대들지 말고 알아서 기라는 깊은(?) 뜻을 그 속에 담았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한명기 교수도 "이나바가 광해군을 '띄웠던' 것은 한국사의 자주성을 부인하는 만선사관의 틀 속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는 것입니다. 오 교수는 한 교수가 이나바의 문제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만, 광해군 재평가의 근원이 식민사관에 닿아 있으면서도 그것과는 다른 다양한 해석의 결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광해군의 외교를 좋게 본 한명기 교수가 "내치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라며, 오항녕 교수가 열거했던 광해군의 실정들을 이야기한 것(물론 오 교수보다 비판의 강도가 떨어지지만)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잣대는 누구에게나 공정해야 한다



어쨌든 역사학계(그리고 우리 사회 전체)가 근대주의 역사관의 틀에 갇혔다는 오 교수의 주장은 공감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한편으로 오 교수가 광해군을 비판하는 데 집중한 나머지 스스로를 인조(仁祖, 재위 1623~1649)나 그의 반정공신들과 동일시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인조를 '잃어버린 15년'의 피해자로만 여기기 어렵기에 균형 감각을 잃은 듯한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너뜨릴 때'에는 광해군대에 대한 부정을 표방했으면서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광해군대의 관행을 답습하려 했던 것, 거기에 인조반정 주체들의 모순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중성이 훗날 그들의 발목을 잡게 된다."

- 『광해군 -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에서



한명기 교수의 말처럼 인조와 반정공신들이 권력을 잡은 뒤에 저지른 잘못은 광해군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습니다.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줄타기하던 광해군의 외교 정책을 인조도 거의 따랐고, 오항녕 교수도 『조선의 힘』에서 "누구도 명에 대한 사대와 후금에 대한 기미책을 부정하지는 않"으며, "이런 점에서는 반정 이후 인조 정권도 마찬가지였다"라고 했으니,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광해군만 기회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또 오 교수는 심하 전투에서 진 까닭은 광해군이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객군으로 남의 땅에 들어간 조선군으로서는 주군인 명군이 전멸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심하 전투 패배의 책임은 엄연히 작전을 잘못 세운 명군의 지휘관들에게 있는데, 그 잘못까지 광해군에게 떠넘기는 것은 억지가 아닐까요?



광해군의 재평가에 '거품'이 끼었다는 주장을 우리가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인조가 옳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광해군이나 인조나 시대의 과업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광해군의 '잃어버린 15년' 때문에 인조가 선택지가 몇 없었다고 해도 "역사는 의도가 아니라 행위로 평가되는 것"이므로 인조는 인조대로 비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광해군과 인조는 좋든 나쁘든 '거울'입니다.

- 2014년 9월 22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