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모토 타다오씨는 《정신분열증의 세계》에서 정신분열증이라는 것이 문학·회화라는 예술적 창조에까지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넓은 시야에서 쓴 것으로,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이상‘한 부분이 있으며 ‘정상‘과 ‘이상‘의 미묘한 균형이 잡혔을 때라야만 참다운 ‘건강‘이 성립된다."라는 기본적인 견해에 공감한다. 나아가 "분열증의 경우, 보통은 ‘자폐‘로 불리며 주위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잃은 것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그러나 (중략) 사실은 전혀 그 반대가 많다. 즉 그들의 마음은 애처로울 정도로 주위, 특히 인간세계를 향해 있으며, 또 인간 세계로부터의 여러 가지 통신과 자극에 매달려 있다."라는 지적이 가슴에 와닿는다. 분열증으로 시달리는 덕혜의 내면을 짐작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 지적을 기억하면서 고찰해가려 한다.

한 사례를 증거로 들자면, 《햄릿》에 나오는 오필리어의 광기는 정신의 갈등 끝에 초래된 분열증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덕혜옹주의 경우는 이보다 더 가혹한 갈등, 즉 민족적 고난과 정치적 압력의 틈바구니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말살당한 고독한 영혼의 고뇌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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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러한 역사적 문화권의 동아시아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지표는 어떤 것들이까. 일단 ① 한자문화, ② 유교, ③ 율령제, ④ 불교 등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그중 한자문화는 중국에서 제작된 문자인 한자가 중국에서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언어를 달리하거나 더욱이 아직 문자의 사용을 모르는 인접한 여러 민족에게도 전래되었다. 한자를 통해 상호의 의지 전달이 가능해짐과 동시에 중국의 사상·학술전파도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다른 공통 지표인 유교·율령제·불교만 하더라도 이 한자를 매개로 하여 이 세계에 확대된 것이기 때문에, 한자는 동아시아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지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유교는 춘추시대의 공자의 가르침에서 시작되어 한대에 국교로 인정받고 이후 오랜 시기 동안 중국 왕조의 핵심적인 지배사상으로 자리매김해왔다. 이후 중국 왕조의 정치사상이나 사회윤리사상에 영향을 준 것은 물론이고, 주변의 여러 민족 특히 한반도와 일본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율령제는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지배구조가 완비된 법체계의 보장을 받으며 운용되는 것으로 중국에서 탄생한 정치체제이다. 이것이 한반도·일본·베트남 등에서 채용되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세계에 공통하는 정치체제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불교는 인도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경유하여 중국에 전래되었다. 중국문화 속에서 불교는 여러 요소가 변화된 채 받아들여졌으며, 이 중국화한 불교가 한반도·일본·베트남 등에 전해지고 이에 동아시아 불교권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권을 형성했다. 또 종교로서의 불교뿐만 아니라 그에 동반하는 건축·조각·회화 등 불교미술의 보급에도 지대한 영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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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오랑캐의 옷을 입었소 - 이릉과 소무
도미야 이따루 지음, 이재성 옮김 / 시공사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흉노에 붙잡힌 두 사내, 이릉과 소무가 나눈 우정을 웬만한 소설 못지않게 핍진하게 그렸음에도 그 감동을 조금 깨게 하는 마지막 반전은 우리에게 기록된 역사는 모두 사실이라고 할 수 있는지 새삼 되묻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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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보를 들은 후 이릉이 한 말은 실로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왜 자신이 대역부도죄를 뒤집어썼는지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혹시 이릉은 지금까지 전쟁의 역사와 제도로 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비극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이것이 지나친 억측일지는 모르겠으나 그래서 이릉은 한 내지는 무제 개인에 대해 분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저주하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이릉의 비탄과 절망은 무제에 대한 분노라는 차원보다 더 크고 더 깊은 것이 아니었을까?

이제 이쯤에서 고개를 드는 의문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릉이 보낸 편지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 ‘한 통의 편지‘에는 무제의 가혹한 처사에 대한 이릉 자신의 원망과 분노가 토로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설명해 왔던 대역부도 혹은 족형 등의 언급은 전혀 없고 오히려 편지의 세계는 소설 이릉의 그것과 더 닮아 있는 듯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릉의 편지, 흉노 땅에 있는 이릉이 장안의 소무에게 보낸 편지는, 후세의 누군가가 이릉의 이름을 빌려 만든 가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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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혈마를 획득하고 이것으로 흉노군을 때려 눕히겠다고 만전을 기해 시작한 천한 2년의 총공격은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무제와 한 제국에게 이것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한은 10년 전의 전쟁에서 흉노를 궤멸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그 연장선에서 시작한 것이 이번의 전쟁이었다. 더욱이 이전에는 없었던 신무기까지 사용한 총공격이었으니 한은 반드시 승리해야 옳았다.

그러나 기대했던 전과를 올리지 못한 책임을 이광리와 공손오 두 사람에게 물을 수는 없었다. 왜냐 하면 그들 두 사람이 꼭 이것이라고 할 만한 죄를 범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제가 분통이 터져 어찌할 바를 몰라하던 그 순간에 이릉의 투항 소식이 전해진 것이었다.

투항한 이릉은, 이러한 조정이 울분을 터뜨릴 수 있는 속죄양이었다. 물론 사서에는 이에 대해 아무런 기록도 없다. 하지만 실상은 이러했으리라 추측된다.

그들이 이릉에게 화를 내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격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느낀 사람이 조정에도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이릉에게 비난이 집중되자 감히 이릉을 변호하고자 나섰다.

"이 장군은 부모에게는 효성스럽고 동료에게는 신의가 두터우며 언제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평소에 지니고 있는 품격으로 보건대 그는 정말이지 국사(國士)라고 할 만큼 훌륭한 무장입니다. 그러나 지금 무운이 여의치 않자 일신의 보전을 바라는 무리가 그의 작은 결점을 거론하며 온갖 비난을 퍼붓고 있습니다. 통탄할 일입니다. 이 장군은 고작 5천의 보병을 이끌고 고비 사막 깊숙한 곳까지 가서 수만의 적을 상대로 사투를 다하지 않았습니까. 과거의 명장들도 그에 미치지 못할 바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은 것은 틀림없이 공을 세워 설욕하려는 생각일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한 사람은 바로 『사기』의 저자 사마천이었다. 그리고 이 발언이 화근이 되어 그는 감옥에 갇혔고 사형을 언도받았다. 하지만 자신이 저작하고 있던 『사기』의 완성을 위해 사마천은 죽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남자로서는 가장 치욕스런 형벌이라는 궁형(宮刑, 남녀의 생식기를 거세하는 극형)을 사형 대신 선택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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