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제 - 전쟁과 대운하에 미친 중국 최악의 폭군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전혜선 옮김 / 역사비평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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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고구려 침략의 원흉으로 잘 알려진 수양제(隋煬帝, 재위 604~618)는 중국사에서 폭군의 대명사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후한(後漢)이 멸망하고서 수백 년 동안 이어진 분열을 끝내고 중원을 통일한 수(隋) 제국은 건국한 지 40년이 채 안 돼 수양제의 학정으로 무너졌고, 수많은 백성이 도탄에서 허덕였습니다. 그런데 중국사를 연구한 일본의 역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 1901~1995] 선생은 수양제를 가리켜 "근본부터 악한 인물은 아니었"으며, "아주 평범하면서도 동시에 여러 가지 약점을 지닌 인간이었다"라고 평가합니다. 어떻게 평범한 사람이 중국 최악의 폭군이 될 수 있었을까요?



미야자키 선생이 1965년에 쓴 『수양제 - 전쟁과 대운하에 미친 중국 최악의 폭군』은 수양제를 이야기하면서도 수양제만 이야깃거리로 삼지 않았습니다. 수양제의 아버지 수 문제(文帝, 재위 581~604)와 무천진 군벌 출신인 그의 가문 그리고 남북조 시대의 천자들까지 이야기하며 수양제가 폭군이 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 무엇이었는지 따져 봅니다. 이것은 미야자키 선생의 명저 『대당제국(大唐帝国)』(국내에는 '중국중세사'라는 제목으로 출간)이 제목처럼 당 제국의 역사만 다루지 않고, 740년에 걸친 중국 중세사를 두루 살피며 그 흐름 속에서 당 제국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알아내고자 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실 수양제는 최악의 폭군이라는 오명을 얻었으나, 그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못나고 어리석은 천자가 수두룩했습니다. 특히 남북조 시대는 남조든 북조든 가리지 않고 폭군과 암군이 자주 나타난 암흑기였습니다.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천자의 만행을 견디다 못한 신하들이 들고일어나서 천자를 갈아치워도 얼마 못 가서 폭정을 일삼는 천자가 또 나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그 때문에 대부분 왕조가 오래가지 못했고, 천자들의 평균 재위 기간도 짧았습니다. 미야자키 선생은 책의 첫 장에서 남북조 시대에 악명을 떨친 여러 폭군과 암군의 기괴하고 이상한 행태를 늘어놓으며, 수양제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진 존재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한편 북주(北周) 황실의 외척으로 실권을 장악한 양견(楊堅)은 581년에 제위를 빼앗고 수 제국을 세웠습니다. 뒷날 수 문제로 불리는 양견은 강남에 자리 잡은 진(陳)이 방심한 틈을 놓치지 않고, 589년에 진의 수도 건강을 쳐서 마침내 통일 대업을 이뤘습니다. 남북조 시대에 마침표를 찍은 수 문제는 선정을 펴서 기나긴 전쟁으로 생긴 혼란을 수습해 민생을 안정화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는 열심히 정사를 돌봤고, 사치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수 문제가 황제답지 않게 무척 검소하게 생활한 덕분에 국고에는 식량이 넉넉히 채워졌습니다. 확실히 수 문제는 전 시대의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군주들과 격이 다른 명군이었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 수 문제가 어렵사리 기초를 다진 제국이 순식간에 허물어진 까닭은 가정 교육에 철저히 실패한 탓이었습니다.


수 문제에게는 아들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모두 어딘가 비뚤어져서 제국의 앞날에 먹구름을 드리웠습니다. 무엇보다 수 문제의 뒤를 이어야 할 맏아들 양용(楊勇)은 황태자로서 모범을 보이기는커녕 바람직하지 못한 행실로 아버지의 속을 썩였습니다. 그러자 둘째 아들 양광(楊廣)은 부모님 앞에서는 효자인 양 '코스프레'를 해서 부모님의 환심을 사는 동시에 뒤에서는 형이 모반을 일으키려 했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양광의 모함은 성공하여 양용은 황태자 자리에서 쫓겨났고, 양광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해 버렸습니다. 형을 밀어내고 새 황태자가 된 양광은 수 문제가 죽고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형을 죽이고 자기에게 위협이 될지도 모를 막내아우를 힘으로 내리눌렀습니다.


"이로써 수문제의 다섯 아들 가운데 천자가 된 차남 수양제를 제외하면 장남 폐태자는 수양제에게 살해당했고, 셋째 아들 진왕 양준은 아내에게 독살당했으며, 넷째 아들 촉왕 양수는 수문제의 노여움을 사서 서인庶人으로 전락했는데, 이번에 또 한왕 양량이 유폐됨으로써 하나같이 비참한 처지가 되었다. 이런 결과의 근본 원인을 따지자면 수문제의 가정교육이 실패했다는 문제를 지적할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당시의 사회 환경, 특히 부자연스러운 권력 구조의 왜곡에 따른 문제점도 컸다."



중국사 최악의 폭군으로 평가받는 수양제(위키백과)


이제 거칠 게 없어진 수양제는 제힘을 뽐내듯 이런저런 사업을 잔뜩 벌였습니다. 대운하를 건설하고, 장성을 보수하거나 개축했습니다. 물론 남북으로 갈라진 중원을 하나로 이을 대운하를 만드는 것은 언젠가 꼭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북방에서 돌궐 등이 침입하는 것을 막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였습니다. 다만 백성들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기면서까지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한 점이 화근이었습니다. 대운하 공사는 그저 물길만 내는 일이 아니라 선착장, 창고, 숙사 이외에 이궁까지 지어야 했기에 백성들에게 엄청난 희생을 강요하였습니다. 당연히 국가 재정은 적자에 시달렸고, 민심은 들끓었습니다. 그래도 아직 반란이 일어날 만큼 분노의 불꽃이 타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고구려 원정을 시작하면서 상황은 달라집니다.


수양제는 중국 천자의 위엄을 외국에까지 보이는 데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외국 군주가 직접 입조하지 않으면 군대를 보내 굴복시켰습니다. 사방의 여러 국가와 종족이 수양제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만은 수양제의 요구를 거부하였습니다. 건방진 고구려에 본때를 보이겠다고 마음먹은 수양제는 612년에 몸소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쳐들어갔으나, 뜻밖에도 성을 하나도 점령하지 못하고 참패했습니다.


약이 오른 수양제는 이듬해 또다시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습니다. 대운하 개통으로 병력과 군수 물자 동원이 옛날보다 좀 더 쉬워지면서 전쟁을 쉽게 여기는 버릇이 들었기 때문일까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누구도 수양제를 말리지 못했습니다. 수양제는 고구려 원정 실패로 구겨진 자존심을 되찾아야 했을지 몰라도 백성들은 달랐습니다. 수십만 명을 한꺼번에 잃은 패전의 상처가 겨우 한 해 만에 나을 리 없었건만, 다시 전쟁을 벌인다는 건 백성들이 보기에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짓일 뿐이었습니다. 요동에서 헛되이 죽지 말라는 뜻이 담긴 노래가 더 크게 울려 퍼졌습니다.

흔들리는 민심을 지켜본 양현감(楊玄感)은 수양제가 원정을 떠나 나라를 비운 사이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한때 자기 측근이던 재상 양소(楊素)의 아들인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수양제에게 큰 충격을 줬습니다. 설상가상 양현감의 벗이자 병부시랑인 곡사정(斛斯政)마저 고구려로 망명하면서 싸움을 이어갈 수 없게 됐습니다. 수양제는 하릴없이 군대를 돌려 양현감의 반란을 가까스로 진압하였으나, 고구려 원정은 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쯤 되면 포기할 법한데, 수양제는 질리지도 않고 세 번째 고구려 원정을 준비했습니다. 3년을 내리 고구려를 친 일은 범상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미야자키 선생은 "실패하면 실패할수록 예전 실패를 만회하려고 초조해하는 점이 수양제의 평범함을 보여준다"라고 지적합니다. 역설처럼 보이는 이 지적대로 수양제는 제국의 운명을 짊어진 황제라고 하기보다 도박꾼이나 투기꾼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이미 양현감이 댕긴 반란의 불길이 온 나라로 번진 상황에서 고구려 원정이 성공하기란 요행이나 다름없었지만,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식으로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것을 알아챈 고구려는 곡사정을 중국으로 돌려보내 수양제의 체면을 세우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하자고 제의합니다. 사관은 그때 수양제가 시늉에 불과한 고구려의 항복을 크게 기뻐하며 받아들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럴 거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시작한 전쟁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전쟁은 흐지부지 매듭지었습니다. 그야말로 용두사미였습니다.


요동에서 회군한 뒤 수양제는 자포자기한 채 의욕을 잃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일어난 반란군을 막기 어려워서 수도 장안까지 위험해지자 그는 강남의 강도로 행차하여 그곳에 머물며 주색에 빠졌습니다. 말이 행차지 사실상 달아났음이나 마찬가지였으니 통일 제국 황제의 위엄은 온데간데없었습니다. 일이 틀어져 과거 남조의 천자들처럼 살게 되더라도 괜찮다는 속셈이었겠으나, 수양제에게 불만을 품은 부하들이 반기를 들면서 그의 운명은 하루아침에 끝장나고 말았습니다. 성난 부하들의 강요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허무한 최후였습니다. 수양제의 죽음과 함께 수 제국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수양제는 남북조시대의 혼란스러운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낡고 고루한 천자였다. (중략) 수나라는 문제 시대에 남북을 통일한 필연적인 결과이기도 하지만, 각종 새로운 정책을 실시했고 그것들이 나중에 당으로 이어졌음은 확실하다. 그러나 새로운 제도가 시작되었음에도 나라를 운영한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여전히 구태의연한 부분들이 있었다. 수양제는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낡은 방식으로 권력을 잡고, 낡은 방식으로 그 권력을 쥐고 흔들었으며, 마지막에는 낡은 방식으로 살해당했다."


생전에 수양제는 자신이 '흙수저'로 태어났어도 황제가 됐을 거라는 식으로 허풍을 떨었지만, 실상 그는 천하를 담을 만한 그릇이 못 되는 사내였습니다. 공을 세우면 부하들에게 상을 내리겠다는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곧잘 어기고, 의심과 질투심까지 강한 그의 곁에는 믿을 만한 신하가 거의 없었습니다. 전쟁광이었음에도 겁도 많았습니다. 평범하게 살았어야 할 인간이 분수에 넘치는 권력을 쥔 셈이니 천하를 잃고 제 몸까지 망치는 뻔한 결말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인간 수양제를 통해 모순으로 가득 찼던 한 시대가 저물어가는 풍경을 엿봅니다.


이처럼 어둡고 무거운 수양제의 삶이지만, 『수양제』는 무척 재미있는 책입니다. 그것은 글쓴이인 미야자키 선생이 뛰어난 역사학자이자 타고난 이야기꾼인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수 문제가 고구려를 힐문하는 편지를 보낸 때를 597년이라고 한 것이나 영양왕(嬰陽王, 재위 590~618)을 요동왕으로 책봉한 이듬해에 고구려가 요서에 쳐들어온 일을 보복했다고 한 것은 오류입니다. 수 문제가 고구려에 편지를 보낸 때를 597년이라고 한 중국 사서의 기록은 틀렸으므로 590년으로 고쳐야 옳습니다(관련 자료). 또한, 영양왕이 요동왕에 책봉된 해는 591년이며, 수 문제가 고구려를 침공한 해는 598년입니다. 따라서 영양왕을 요동왕으로 책봉한 이듬해에 고구려를 쳤다는 기술은 잘못입니다. 미야자키 선생이 중국사 연구자로서 중국 측 기록을 주로 참고하다 보니 생긴 옥에 티가 아닌가 싶습니다.

- 2016년 9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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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부터의 통신 - 금석문으로 한국 고대사 읽기
한국역사연구회고대사분과 엮음 / 푸른역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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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는 한국 고대사를 연구할 때 빼놓을 수 없지만, 그 속에 그려진 시대보다 훨씬 뒤인 고려 시대에 쓰였다는 한계가 뚜렷합니다. 이와 달리 고대에 만들어진 금석문은 고대인들이 스스로 쓴 당대 기록입니다. 후대에 편찬된 사서에서 빠진 고대사의 빈틈을 메우는 데 큰 도움을 주는 아주 값진 자료이지요. 그러나 이 오래된 글들은 많은 것이 축소되었거나 생략되어서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불친절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고대인인 그들과 현대인인 우리를 둘러싼 맥락이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글을 두고도 역사학자마다 해석이 엇갈리는데, 단어 하나와 글씨 하나에서 옛날에는 미처 모르던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기도 하고, 그에 따라 기존 연구 결과가 뒤집히는 일도 잦습니다.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의 『고대로부터의 통신』은 <광개토왕릉비>나 <사택지적비> 같은 고대인들의 목소리를 담은 여러 금석문의 내용을 풀어내어 고대사의 일면을 보여 준 책입니다.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가 이전에 펴낸 『문답으로 엮은 한국고대사 산책』과 『삼국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가 고대사 연구의 결과물을 대중이 알기 쉽게 소개했다면, 『고대로부터의 통신』은 금석문을 연구하는 과정을 독자들에게 알려서 읽는 맛이 조금 다릅니다. 연구 과정이라고 하니까 왠지 딱딱하고 어려운 책이라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뜻밖에도 책에 담긴 사연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아주 작은 단서로 고대사의 커다란 비밀을 풀어 나가는 학자들의 모습은 마치 탐정이나 수사관처럼 보입니다.


광개토왕(廣開土王, 재위 391~412) 대에 활동한 고구려의 중급 귀족인 모두루(牟頭婁)가 묻힌 무덤에는 모두루의 내력을 쓴 글이 새겨졌니다. 안타깝게도 무덤 속 글은 세월의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많은 글씨가 지워졌습니다. 학자들은 희미하게나마 남은 글씨를 읽으며 이제는 보기 힘든 글의 전체 내용을 알아내려고 애썼습니다. 그리하여 모두루 가문의 중시조인 염모(冉牟)가 북부여 지역에서 외침을 막고 반란을 평정하는 위대한 공적을 쌓았고, 그 덕분에 모두루 가문이 번성하였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염모와 모두루는 역사책에서 이름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기에 묘지명(墓誌銘)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고구려 땅에 살았다는 것조차 몰랐을 것입니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의 모습(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옛 신라 땅에서 천여 년 만에 발견한 <포항 냉수리 신라비>(<영일 냉수리 신라비>)와 <울진 봉평 신라비>는 요즘으로 치면 판결문이었는데, 신라사를 공부하는 학자들에게 돌로 된 판결문은 신라 6부 체제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엿보는 '창'이 되었습니다. 정작 두 비석을 세운 신라인들은 어떤 재물이 누구 것이며,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게 어떤 벌을 내렸다는 일 따위를 적은 공문서를 후손들이 그러한 목적으로 읽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겠지요. 울산 변두리에 있는 계곡으로 피서하려고 놀러 간 신라 왕실 사람들이 기념으로 남긴 낙서도 글쓴이들의 원래 의도와 달리 지금은 둘도 없이 귀중한 보물이 되었습니다.


"특히 신라시대의 각종 명문에는 문헌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당시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모습이 담겨 있다. 원명과 추명만 하더라도 사훼부의 갈문왕 일족이 천전리 계곡을 찾아왔다는 단편적인 기록에 불과하지만, 그 이면에는 신라 왕실 내부의 사정을 비롯하여 신라 사회의 여러 중요한 측면들이 반영되어 있다. 6세기 전반이라는 특정한 시점에서의 갈문왕의 성격, 정치체제의 변동 양상, 왕권의 성장과 집권적 지배체제의 성립 과정 등 정치사와 관련한 주요 문제들이 바로 이 짧은 기록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공책에 아무렇게나 끼적거린 낙서도 어쩌면 뒷날에는 현대인의 생활상을 들여다보는 사료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왕이면 도움이 될 만한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엉뚱한 사명감이 갑자기 생깁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 하나 나왔습니다. 「고구려 건국설화가 모두루무덤에 묻힌 까닭은」이라는 글로 <모두루묘지명>을 설명한 여호규 교수는 고구려가 서력기원 전후에 부여를 함락했다는 이야기는 북부여를 영원히 신성한 땅으로 간직하고 싶은 5세기 고구려인들의 염원이 만든 역사 왜곡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부여가 "매우 부강하여 선대로부터 일찍이 (적에게) 파괴된 일이 없다"라고 밝힌 『위략(魏略)』을 인용한 『삼국지(三國志)』에 근거한 견해인 듯합니다(관련 자료).


하지만 『삼국사기』는 22년에 대무신왕(大武神王, 재위 18~44)이 이끈 고구려군이 괴유(怪由)의 활약으로 부여 왕 대소(帶素)를 죽이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훈련이 잘된 부여군에 에워싸여 전멸할 위기에 빠졌다가 짙은 안개가 낀 틈을 타서 가까스로 포위를 뚫고 탈출하였다고 전합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고구려의 부여 '정벌'은 실패한 셈이지요. 『위략』과 『삼국사기』 기록이 서로 모순되지 않다고 해석할 만한 대목입니다. 『삼국사기』만 봐도 부여가 고구려보다 국력이 강하였음을 고구려인들도 인정하는데, 정말 그들이 역사를 왜곡했다면 부여를 경솔하게 공격했음을 후회하는 대무신왕의 고백까지 꾸며 냈을까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관련 자료).


책에는 거의 10년 간격으로 국보급 금석문이 나타났다는 속설이 나오는데, 재미있게도 『고대로부터의 통신』이 나온 2003년 뒤에도 새로운 비석들이 잇따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2009년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라 비석으로 보이는 <포항 중성리비>를 발견한 데(관련 기사) 이어서 2012년에는 (위작이라는 의심도 받지만) <지안 고구려비>를 중국에서 발견하였습니다(관련 기사). 고대인들이 우리에게 보내는 통신은 아직도 이어지는 모양입니다.

- 2014년 1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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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사산책
한국역사연구회고대사분과 지음 / 역사비평사 / 199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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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으로 고대사는 중세사나 근대사보다 역사 기록이 부실합니다. 고고학의 힘을 빌린 발굴 성과는 역사 기록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을 우리에게 알려 주지만, 그것조차 역사 기록의 빈틈을 아주 완벽히 메울 만큼 충분하지 않습니다. 많은 역사적 사실과 진실이 시간 너머로 사라졌기에 고대사에 다가가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대사를 배울 때는 여러 물음이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릅니다.



연(燕)에서 건너온 망명자였음에도 조선의 준왕(準王)을 몰아내고 왕위까지 차지한 위만(衛滿)이라는 사나이는 중국인이었을까? 아니면 조선인이었을까? 한(漢)의 무제(武帝, 재위 서기전 141~서기전 87)가 조선을 무너뜨린 뒤에 세운 낙랑군(樂浪郡)은 어디에 있었으며, 그것은 중국의 식민지였을까?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중부 지방까지 아우르는 너른 땅을 다스렸음에도 왜 삼국을 통일하지 못했을까? 발해를 세운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 재위 698~719)은 고구려인이 아닌 말갈인이었을까? 대조영이 말갈인이었다면 발해는 우리 역사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에서 지은 『문답으로 엮은 한국고대사 산책』은 이런 물음들에 대답하는 형식의 책입니다. 나온 지 벌써 20년이나 되었지만, 이 책에 나온 답변들은 전혀 케케묵지 않았습니다. 민족주의에 기운 이들은 흔히 우리 조상들이 광대한 영토를 '정복'한 '영광'스러운 고대사를 꿈꾸기 마련이나, 책을 함께 쓴 역사학자들은 "역사는 욕심이나 바람만으로 판단할 문제가 결코 아니"며 "역사는 현재의 도피처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과장되고 허구화된 그리고 영광스럽기까지 하다는 과거 역사, 특히 고대사로의 도피여행을 그만두고 일반 민중이 창조하고 발전시킨 역사의 진실을 올바르게 이해하고자 할 때, 과거 역사는 진정으로 살아있는 역사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 고대사의 풍경은 위서인 『환단고기(桓檀古記)』를 신봉하는 이들이 보는 그것뿐만 아니라 국사 교과서가 그린 그것과도 사뭇 다릅니다. 몇 가지 보기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식민주의 역사학에 물든 일제 어용학자들은 위만이 중국인이므로 위만 조선은 중국의 식민 정권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한국인 학자들은 위만이 조선에 들어올 때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었으므로 위만은 조선인이었다고 반박합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20세기식 관념인 '국적'에 집착하여서 위만의 출신이 어디인지를 따지는 일부터가 잘못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보다는 고조선의 사회 성격이 어떠했으며, 이전 사회와 어떤 차이를 갖는지 밝혀야 한다고 말하지요.


또한, 낙랑군을 근대의 식민지와 같은 것으로 보고 그 위치를 어떻게든지 한반도 바깥으로 밀어내려는 주장에 대해서도 글쓴이들은 제국주의 국가의 강고한 정치적·군사적 침략과 경제적 수탈을 받는 식민지 지배를 고대에는 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고 논박하며, 낙랑군은 평양 부근에 있었다고 못 박습니다. 그러면서 낙랑군은 한때 중국 세력이 미친 곳이기는 했지만,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국사 교과서가 낙랑군을 비롯한 한 군현(郡縣)을 애매하게 기술하는 것에 견주어 보면, 이런 주장은 매우 신선합니다.


이처럼 『문답으로 엮은 한국고대사 산책』은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감정, 특히 민족적 감정을 역사 속에 그대로 투영"하는 일을 경계합니다. 누군가는 아마도 이 책을 가리켜 '반민족적'이라며 못마땅하게 여기겠지만, 환상이 아닌 사실에 바탕을 두고 역사를 판단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른바 백제의 요서경략설을 둘러싼 논쟁을 바라보는 글쓴이들의 결론은 그것을 새삼 일깨웁니다.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낙랑 유물을 퇴출하자는 목소리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조선일보)



"우리는 흔히 '임나일본부설'이 거론되면 적극적으로 부정하려고 애쓰면서도, 백제의 대륙진출설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긍정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더욱이 감정에 치우친 나머지 분명히 확정하기 어려운 사실을 가지고 찬란한 역사를 운운한다거나, 더 나아가 '고토 회복' 등의 복고적 국수주의를 선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백제 대륙진출설도 '광대한 영토의 장기간에 걸친 보유'라는 그릇된 선입견에서 벗어나, 먼저 그 사실부터 확인해야 하고, 또 그 사실이 백제사의 발전과정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를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답으로 엮은 한국고대사 산책』은 여러모로 민족주의의 주술에서 벗어나 고대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다만 그림이나 사진과 같은 시각 자료를 충분히 갖추지 못한 것은 이 책의 흠으로 꼽을 만합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를 빼면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은 모두 흑백인데, 화질이 또렷하지 않고 흐릿한 사진이 많아서 시각 자료로서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공동작업의 산물이라지만 각 항목과 주제의 초고를 작성한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점도 불만스럽습니다.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는 이 책을 쓴 뒤에 『삼국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와 『고대로부터의 통신』을 쓰면서 학계의 고대사 연구 성과를 대중에게 소개하는 데 이바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삼국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의 개정판을 2005년에 낸 뒤로부터는 새로운 책을 세상에 내놓지 않아서 아쉽습니다. 그들이 들려줄 새로운 고대사 이야기가 언제 나올지 궁금합니다.

- 2014년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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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明 2018-05-12 0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지난 2017년에 『문답으로 엮은 한국고대사 산책』의 전면 개정판인 『한국 고대사 산책』이 출간되었음을 밝히는 바입니다.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연구총서 30
노태돈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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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전야.



641년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이보다 적절한 말도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641년은 많은 변화를 예고한 해였습니다.


당(唐) 제국이 비단길에 자리 잡은 고창국을 멸망시켰다는 소식이 닿은 그해, 고구려는 뒤숭숭한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당 태종(太宗, 재위 626~649)은 천하를 손에 넣겠다는 야심에 찬 황제답게 숙적 고구려를 치겠다는 의지를 신하들 앞에서 공공연히 드러냈는데, 고구려도 눈과 귀가 있으니 당 태종의 야망을 까맣게 모를 리 없었습니다. 위기감이 커진 고구려 조정은 20여 년 만에 다시 현실로 다가온 통일 중국 왕조와의 전쟁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으나, 내부에서 불거진 문제로 골머리를 썩였습니다. 동부대인 연개소문(淵蓋蘇文, ?~665)이 위험인물로 떠올랐기 때문이지요. 왕과 대신들은 연개소문을 제거해 화근을 미리 없애려고 했지만, 그러한 움직임을 눈치챈 연개소문은 반격할 기회를 엿봤습니다.


한편 같은 해에 백제의 무왕(武王)이 세상을 떠나고 태자 부여의자(扶餘義慈, 재위 641~660)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백제는 새 시대를 맞았습니다. 부왕처럼 호전적인 성향을 지닌 부여의자, 즉 의자왕(義慈王)은 용감하고 대담하며 결단성이 있었다는 평가대로 즉위하자마자 친위 쿠데타로 권력을 강화하였고(관련 자료), 신라로 쳐들어갈 태세를 갖췄습니다.


이듬해인 642년,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해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합니다. 곧이어 낙동강의 요충지인 대야성도 빼앗았습니다. 신라로서는 뼈아픈 패배였습니다. 뒷날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이 되는 김춘추(金春秋, 602~661)는 대야성의 성주이자 사위인 품석(品釋)과 딸 고타소랑(古陁炤娘)을 한꺼번에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마음속에 칼을 품은 김춘추는 백제에 복수하고자 고구려로 들어갑니다. 마침 대야성이 함락되고서 얼마 뒤에 고구려에서 정변이 일어났는데, 김춘추는 이것을 고구려와 협상할 기회로 여겼습니다. 김춘추는 신라가 연개소문 정권을 지지하는 대신에 고구려의 군사를 빌리겠다는 속셈으로 고구려행을 자원한 듯합니다.


삼실총에 그려진 공성도(문화콘텐츠닷컴)



하지만 정변을 일으켜 왕과 대신들을 죽이고 권력을 거머쥔 연개소문은 김춘추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연개소문은 몸소 병력을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며, 신라와 뜻을 같이할 마음이 없음을 확실히 합니다. 고구려와 손잡고 백제를 고립시키려던 신라는 되레 고구려와 백제의 압박으로 곤경에 빠졌고, 협상에 실패한 김춘추도 곤혹스러운 처지가 됩니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습니다.


645년,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이 뜻밖에도 요동의 작은 성인 안시성에 가로막혀 실패하면서 각국의 정세는 숨 가쁘게 돌아갑니다. 고구려, 백제, 왜의 연계에 맞서려면 신라는 당과 동맹을 맺어야 했고, 고구려를 무너뜨리려면 제2 전선을 구축해야 함을 절감한 당도 신라의 존재를 새삼 주목하였습니다. 648년,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간 김춘추는 당 태종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신라와 당의 이해관계가 일치함을 확인합니다. 이제 전쟁은 전에 볼 수 없는 양상으로 바뀝니다.


"삼국통일전쟁은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된 삼국의 사회적 변화와 국가적 발전의 귀결인 동시에 동아시아 국제전의 면모를 띠었던 전쟁이었다. 삼국 외에 당과 왜가 직접 참전하였으며, 돌궐(突厥), 철륵(鐵勒), 해(奚) 등 북아시아 유목종족들이 당군의 일원으로 동원되어 참전하였다. 거란족과 말갈족은 일부는 고구려에 일부는 당에 가담하여 전투하였다. 그리고 몽골고원의 유목민 국가인 설연타는 직접 개입하여 한반도나 만주지역에서 전투를 벌이지 않았지만, 고구려와 연결하여 당에 대항하는 정책을 취해 오르도스 방면에서 당과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직접 군대를 파견하여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토번(티베트)의 발흥은 이 전쟁의 추이에 바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노태돈 교수의 『삼국통일전쟁사』는 제목 그대로 삼국 통일 전쟁의 전후사를 다룬 책입니다. 이 책에서 노 교수는 고구려, 백제, 신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와 종족이 얽혀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삼국 통일 전쟁을 담담한 필치로 그렸습니다. 고대 동아시아 세계 대전이라고 불러도 좋을 삼국 통일 전쟁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전투 못지않게 그 배후에서 벌어진 외교전도 치열한 전쟁이었습니다. 예컨대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관련 기사)가 암시하듯 고구려는 당을 견제할 만한 세력을 찾아 머나먼 중앙아시아까지 사람을 보냈습니다.


<당염립본왕회도>에 그려진 고구려, 백제, 신라, 왜 사신들의 모습(문화일보)



고구려, 백제보다 뒤처졌었던 약소국 신라는 돋보이는 외교 성과를 거두며 최후의 승자가 되는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김춘추는 고구려, 왜, 당 등을 돌아다니며 신라가 불리한 상황을 뒤집으려 애썼고, 그 노력은 열매를 맺어 마침내 백제와 고구려를 잇달아 꺾었습니다.


신라의 기민한 외교 전략은 670년에 발발한 나당 전쟁에서도 빛을 발합니다. 이미 고구려의 평양성이 무너지기 직전부터 왜에 사신을 파견해 왜와 화해하고 머지않아 일어날 당 제국과의 전쟁에 대비하던 신라는 조공·책봉 관계를 역이용해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갑니다. 당군의 공세가 거세다 싶으면 당에 '사죄'한다고 하여서 적의 발을 묶고, 그 틈에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하기를 되풀이하며 전력의 열세를 극복했지요. 초강대국인 당 제국도 신라의 능구렁이 같은 양면 전술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결국, 한반도에서 당군을 몰아내고 삼국 통일을 이룬 신라는 이후 오랫동안 평화와 번영을 누립니다. 그것은 수십 년에 걸친 전쟁으로 커다란 피해와 고통을 겪어야 했던 삼국의 백성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보상이었습니다.


민족주의 성향이 짙은 사람들은 신라가 외세인 당을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인 고구려와 백제를 쳤다고 비판하며 신라의 삼국 통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심지어 삼국 통일이나 통일 신라라는 용어를 부정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민족이라는 개념이 생기지 않은 전근대를 외세와 동족이라는 구도로 바라볼 수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중국인들의 눈에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는 풍속이 비슷한 '삼한의 백성'으로 보였다지만, 정작 신라의 입장에선 고구려와 백제도 당과 마찬가지로 '외세'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노태돈 교수는 오히려 한민족의 기본 틀을 형성한 것이 삼국 통일 전쟁의 역사적 의의라고 설명합니다. 전쟁을 치르면서 삼국의 주민들이 동질성을 자각했고, 통일은 동질성을 강화했다는 것입니다. 전쟁의 역설이라고 해야 할까요?


또 노 교수는 삼국 통일 전쟁이 대외 관계 측면에서도 큰 영향을 남겼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7세기 말 8세기 초 발해가 등장하고 당과 관계가 개선되자 신라는 일본과의 관계 재정립을 시도하였다. 신라로선 대일관계는 대당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당과의 안정적인 조공·책봉관계를 맺게 된 신라로선 이제 현실적으로 안보를 위해 일본의 동향에 더 이상 매달릴 필요가 없어졌다. 일본은 인국으로서 같은 당의 조공국이니, 당연히 양국은 대등한 인국으로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점에 일본이 반발하니 양국은 점차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신라의 대외정책은 당과는 사대관계로, 일본과는 교린관계로 설정하였다. 이런 대외정책의 기조는 그 뒤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한국 왕조의 대외 정책의 기본 틀이 되었다."


이러한 삼국 통일 전쟁의 유산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알게 모르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삼국 통일 전쟁이 한국 전쟁과 아울러 "한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전쟁"이라는 평가는 지나치지 않습니다.

- 2016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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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제1공화국 - 해방에서 4월 혁명까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1
서중석 지음 / 역사비평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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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은 1948년 8월 15일에 출범하자마자 시련에 부딪혔습니다. 처음으로 국회 의원을 뽑은 5·10 총선을 전후하여 제주 4·3 사건과 여순 사건이 잇달아 터졌습니다. 불길한 출발이었습니다. 정부를 수립한 지 2년도 채 안 돼 터진 한국 전쟁은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때까지 '북진 통일'을 외쳤던 정부는 정작 전쟁이 벌어지자 나흘 만에 서울을 잃었고, 한강 철교를 끊고 야반도주한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대통령이었음에도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이승만이 실정을 거듭하는 가운데 정권이 들어설 무렵부터 정부 형태와 국무총리 지명을 둘러싸고 그와 관계가 험악해진 민주국민당(한국민주당의 후신이자 민주당의 전신)은 대통령 중심제를 내각 책임제로 바꾸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야당의 움직임을 알아챈 이승만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 부산정치파동으로 맞받아쳤습니다. 이태 뒤인 1954년에는 삼선을 위한 개헌안이 한 표 차이로 부결되자 이승만은 '사사오입(반올림)'이라는 기적의 논리를 들고나와 끝내 자기 뜻대로 헌법을 바꿨습니다.


이렇게 이승만은 권좌를 위협하는 위기를 여러 차례 넘기며 불굴의 권력 의지를 드러냈는데, 운도 따랐습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자리를 놓고 맞붙었던 민주당의 신익희(申翼熙)가 선거를 치르기도 전에 갑자기 죽는 바람에 이승만은 힘들이지 않고 경쟁자를 물리쳤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경쟁자인 조봉암(曺奉巖, 1898~1959)이 뜻밖의 돌풍을 일으키며 선전하면서 이승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습니다. 투표에 지고 개표에 이겨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이승만은 이때의 '수모'를 잊지 않고, 뒷날 진보당 사건을 조작해 조봉암을 법살(法殺)하였습니다.



4월 혁명 이후 시민들이 끌어내린 이승만 동상(시사저널)


그렇지만 하늘 높은 줄 몰랐던 이승만과 자유당의 권세는 하루아침에 끝장나고 말았습니다. 장기 집권을 꾀한 이승만 정권은 1960년 제4대 대통령과 부통령을 뽑는 3·15 정부통령 선거에서 경찰과 공무원을 동원해 엄청난 부정을 저질렀는데, 거기에 반대하는 시위가 마산을 기점으로 하여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졌습니다. 그로부터 달포가 지나서 시민의 저항을 견디지 못한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스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른바 4월 혁명이었습니다.


이승만과 대권을 다툰 민주당의 조병옥(趙炳玉)이 4년 전 신익희처럼 선거를 앞두고 급사했고, 조봉암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 상황에서 일어난 놀라운 반전이었습니다. 단단해 보였던 이승만 정권은 왜 그토록 쉽게 무너졌을까요? 서중석 교수는 『이승만과 제1공화국 - 해방에서 4월 혁명까지』에서 언론이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설명합니다.


"3~4월 항쟁에서 언론이 학생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지적도 있지만, 이 정권과 박 정권은 언론 포섭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이 정권은 야당보다도 언론으로부터 더욱 시달렸다. 기실 야당이 여당을 공격하는 데는 언론의 뒷받침이 컸다.


(중략) 1950년대는 신문의 시대였다. 라디오 보급률이 낮았고, 그나마 유행가나 만담, 연속극에 귀 기울이는 정도였다. 정보와 판단의 기준은 대부분 신문에 의존했는데, 해방 직후 좌우 싸움의 선봉장으로 극렬한 논조를 폈던 신문은 불평불만이 많은 도시 중산층과 서민을 주된 구독자로 하고 있어서 야당 성향이 강했다. 무엇보다도 정부·여당이 비리·부정·부패가 많았기 때문에 정치면 위주였던 당시 신문은 주로 그런 기사를 많이 쓸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이승만 국부론을 펼치는 『조선일보』가 이승만이 하야하자 1960년 4월 26일 자 석간 1면에 큼지막하게 '만세! 민권은 이겼다!'라는 제목을 새겨 넣으며 감격했을 정도니 당시 언론이 얼마나 이승만 정권을 적대했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물론 『경향신문』을 강제로 폐간한 일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승만이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을 가만히 둘 리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승만 정권의 언론 탄압은 어수룩한 면이 있어서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언론 탄압에 견주면 매우 '소박한' 수준이었습니다. 언론계 내부를 갈라놓은 후대의 언론 탄압과 달리 이승만 정권이 언론을 탄압하면 탄압할수록 언론인들은 더 똘똘 뭉쳤고, 독자들은 권력에 맞서는 언론에 성원을 보냈습니다. 결국 『경향신문』 폐간은 효과가 없었습니다.


또 이승만 정권은 시위를 대처하는 능력이 모자랐으며, 군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습니다. 군인들이 중립을 지키고, 사태를 지켜보던 미국마저 자기를 지지하지 않으니 이승만이 기댈 곳은 점점 사라졌습니다. 아무리 권력욕이 센 이승만이라고 하더라도 버틸 수 없었지요.


이러한 이승만의 몰락을 눈여겨본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통령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 정권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권력 유지와 관련하여 이승만 정권의 문제점을 자세히 검토했습니다. 사찰 경찰만으로는 정부 비판 세력과 언론 등을 통제하기 어렵다고 여긴 박정희 정권은 중앙정보부를 만들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여야 정치인부터 학생·언론 등 '권력'을 가지고 있거나 비판하고 저항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회유하고 분열시키고 감시했으며, 수사권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은 후기에 깡패를 자주 동원해 민심 이반을 가속화시켰는데, 박 정권은 그것도 제도 속으로 끌어들였다. 중앙정보부에 끌려온 사람은 얼마나 당할지 두려워했고, 밖에 나가서 그곳에서 당한 일을 감히 발설하지 못했다.


박정희는 정보정치에 의존했고, 그래서 중앙정보부장은 대개 권력에서 제2인자라는 말을 들었다. 박정희는 청와대 비서실과 경호실도 이승만 정권과는 비교가 안 되게 큰 규모로 강화해 통제정치, 밀실정치를 펴나갔다."


그러나 중앙정보부를 앞세워 강력한 일인 독재 체제를 구축한 박정희 정권도 이승만 정권처럼 몰락하는 운명을 맞았습니다. 그것은 박정희 정권에 이어서 등장한 전두환 정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4월 혁명이 뿌린 자유의 씨앗은 독재의 시련에도 잠들지 않고 깨어나 민주주의의 꽃을 피웠습니다.

- 2016년 4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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