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산책
한국역사연구회고대사분과 지음 / 역사비평사 / 199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상대적으로 고대사는 중세사나 근대사보다 역사 기록이 부실합니다. 고고학의 힘을 빌린 발굴 성과는 역사 기록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을 우리에게 알려 주지만, 그것조차 역사 기록의 빈틈을 아주 완벽히 메울 만큼 충분하지 않습니다. 많은 역사적 사실과 진실이 시간 너머로 사라졌기에 고대사에 다가가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대사를 배울 때는 여러 물음이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릅니다.



연(燕)에서 건너온 망명자였음에도 조선의 준왕(準王)을 몰아내고 왕위까지 차지한 위만(衛滿)이라는 사나이는 중국인이었을까? 아니면 조선인이었을까? 한(漢)의 무제(武帝, 재위 서기전 141~서기전 87)가 조선을 무너뜨린 뒤에 세운 낙랑군(樂浪郡)은 어디에 있었으며, 그것은 중국의 식민지였을까?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중부 지방까지 아우르는 너른 땅을 다스렸음에도 왜 삼국을 통일하지 못했을까? 발해를 세운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 재위 698~719)은 고구려인이 아닌 말갈인이었을까? 대조영이 말갈인이었다면 발해는 우리 역사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에서 지은 『문답으로 엮은 한국고대사 산책』은 이런 물음들에 대답하는 형식의 책입니다. 나온 지 벌써 20년이나 되었지만, 이 책에 나온 답변들은 전혀 케케묵지 않았습니다. 민족주의에 기운 이들은 흔히 우리 조상들이 광대한 영토를 '정복'한 '영광'스러운 고대사를 꿈꾸기 마련이나, 책을 함께 쓴 역사학자들은 "역사는 욕심이나 바람만으로 판단할 문제가 결코 아니"며 "역사는 현재의 도피처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과장되고 허구화된 그리고 영광스럽기까지 하다는 과거 역사, 특히 고대사로의 도피여행을 그만두고 일반 민중이 창조하고 발전시킨 역사의 진실을 올바르게 이해하고자 할 때, 과거 역사는 진정으로 살아있는 역사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 고대사의 풍경은 위서인 『환단고기(桓檀古記)』를 신봉하는 이들이 보는 그것뿐만 아니라 국사 교과서가 그린 그것과도 사뭇 다릅니다. 몇 가지 보기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식민주의 역사학에 물든 일제 어용학자들은 위만이 중국인이므로 위만 조선은 중국의 식민 정권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한국인 학자들은 위만이 조선에 들어올 때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었으므로 위만은 조선인이었다고 반박합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20세기식 관념인 '국적'에 집착하여서 위만의 출신이 어디인지를 따지는 일부터가 잘못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보다는 고조선의 사회 성격이 어떠했으며, 이전 사회와 어떤 차이를 갖는지 밝혀야 한다고 말하지요.


또한, 낙랑군을 근대의 식민지와 같은 것으로 보고 그 위치를 어떻게든지 한반도 바깥으로 밀어내려는 주장에 대해서도 글쓴이들은 제국주의 국가의 강고한 정치적·군사적 침략과 경제적 수탈을 받는 식민지 지배를 고대에는 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고 논박하며, 낙랑군은 평양 부근에 있었다고 못 박습니다. 그러면서 낙랑군은 한때 중국 세력이 미친 곳이기는 했지만,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국사 교과서가 낙랑군을 비롯한 한 군현(郡縣)을 애매하게 기술하는 것에 견주어 보면, 이런 주장은 매우 신선합니다.


이처럼 『문답으로 엮은 한국고대사 산책』은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감정, 특히 민족적 감정을 역사 속에 그대로 투영"하는 일을 경계합니다. 누군가는 아마도 이 책을 가리켜 '반민족적'이라며 못마땅하게 여기겠지만, 환상이 아닌 사실에 바탕을 두고 역사를 판단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른바 백제의 요서경략설을 둘러싼 논쟁을 바라보는 글쓴이들의 결론은 그것을 새삼 일깨웁니다.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낙랑 유물을 퇴출하자는 목소리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조선일보)



"우리는 흔히 '임나일본부설'이 거론되면 적극적으로 부정하려고 애쓰면서도, 백제의 대륙진출설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긍정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더욱이 감정에 치우친 나머지 분명히 확정하기 어려운 사실을 가지고 찬란한 역사를 운운한다거나, 더 나아가 '고토 회복' 등의 복고적 국수주의를 선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백제 대륙진출설도 '광대한 영토의 장기간에 걸친 보유'라는 그릇된 선입견에서 벗어나, 먼저 그 사실부터 확인해야 하고, 또 그 사실이 백제사의 발전과정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를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답으로 엮은 한국고대사 산책』은 여러모로 민족주의의 주술에서 벗어나 고대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다만 그림이나 사진과 같은 시각 자료를 충분히 갖추지 못한 것은 이 책의 흠으로 꼽을 만합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를 빼면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은 모두 흑백인데, 화질이 또렷하지 않고 흐릿한 사진이 많아서 시각 자료로서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공동작업의 산물이라지만 각 항목과 주제의 초고를 작성한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점도 불만스럽습니다.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는 이 책을 쓴 뒤에 『삼국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와 『고대로부터의 통신』을 쓰면서 학계의 고대사 연구 성과를 대중에게 소개하는 데 이바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삼국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의 개정판을 2005년에 낸 뒤로부터는 새로운 책을 세상에 내놓지 않아서 아쉽습니다. 그들이 들려줄 새로운 고대사 이야기가 언제 나올지 궁금합니다.

- 2014년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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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明 2018-05-12 0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지난 2017년에 『문답으로 엮은 한국고대사 산책』의 전면 개정판인 『한국 고대사 산책』이 출간되었음을 밝히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