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 지음, 최승자 옮김 / 까치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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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이 말 사이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말이 침묵사이에 있는 것일까? 나의 일상을 돌아보면 전자가 맞는 듯하다. 침묵은 말 사이에 있는 참을 수 없는 불안의 영역이다. 그러나 저자 막스 피카르트는 이 말을 '소음'이라고 말한다. 침묵을 단순히 말없음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말도 결국 소음으로 전락시킨다. 그 사람은 불안을 밀쳐내기 위해 끊임없이 소음을 생산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침묵은 말이 있기 이전부터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창세기에 존재들은 '- 있으라'하는 로고스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인간에게 로고스의 진정한 모습은 침묵이었다. 신은 존재를 내어놓고 존재에 침묵을 그려넣었다. 일상의 차원을 넘어서는 순간, 말과 침묵사이의 선후관계와 포함관계, 위계관계는 뒤집어진다. 그리고 이 침묵의 존재론적 양태를 보지 못하면 우리는 쉽사리 함정에 빠져든다.

미셀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나는 ...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자가 바로 타자라고 했다. 타자는 침묵한다. 대신 타자를 힘있는 자들이 대신 말해준다. 그들은 타자의 침묵 사이에 변변치 않은 말들을 끼워넣고 그들을 도매급으로 정의해버린다. 침묵을 배워야 한다. 침묵을 배우는 것은 우리의 말을 소음의 영역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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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지혜 동문선 현대신서 14
알렝 핑켈크로트 지음, 권유현 옮김 / 동문선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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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정신현상학에 인정투쟁이란 유명한 구절이 있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 주체가 되느냐 객체가 되느냐, 보는 자가 될 것이냐 보이는 자가 될 것이냐... 이런 구도로 인해 타자는 결국 나에 의해 정복되어야 할 대상, 나에 의해 굴복되고 재단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떨어져 버리고 만다.

이 책의 저자 앙리 핑켈크로프트는 앞서 말한 헤겔식의 타자인식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엠마뉴엘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을 이야기한다. 타자와의 대면은 의식이전의 경험이고 원초적이며 초월적인 만남이다. 타자는 광활한 우주 아니 카오스이며, 그 광대한 카오스 앞에서는 나는 한 낯 연약한 존재에 불과해 진다. 레비나스는 이런 막강한 힘을 지닌 타자의 얼굴을 아우슈비츠에서 우리를 향해 얼굴을 돌렸을 수 많은 희생자들의 얼굴들 속에서 발견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며,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책임에 몸을 바쳐야 한다. 또한 나는 함부로 타자의 얼굴을 명석판명하게 그려낼 수 없다. 그것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모든 시도는 지난한 고통의 과정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이웃에 의해서 자기로부터 깨어나고 또 다른 모든 이웃에 의해서 그 이웃으로부터 눈 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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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유럽의 역사적 상상력 현대의 지성 56
헤이든 화이트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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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에 따르면 역사가들은 보통 역사책 속에 들어있는 허구적인 요소를 보지 않으려고 한다. 오히려 그들은 역사라는 학문분야에 엄격한 지침을 설정함으로써 허구를 초월했다고 믿기를 원한다. 따라서 모든 학문이 그러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역사학은, 그 전공자에게 허구적인 서술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을 기술하려는 모든 시대는 '상상적이고 상상적일 수 밖에 없는 삶의 상의 일관성, 성실성, 충실성과 끝맺음을 보여주는 화술'에 필연적으로 의존한다. 역사 서술에 허구적 상상적 차원이 담겨 있다는 것은 사건이 실지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기술하는 모든 시도는 다양한 형식의 상상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더구나 역사적 실재에 대한 모든 설명은 불가피하게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이다. 즉 사실을 배열하여 그것을 의미 있는 이야기로 만들고 그 배후에 존재하는 연관성을 발견하려는 시도에서, 역사가들은 비경험적인 사고 유형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특징적인 논증형식과 플롯의 구성형식을 채택하며 그 과정에서 심미적이고 윤리적인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가들이 철학자나 문학가와 자신을 구분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학과의 구분을 단순하게 인정할 수 만은 없다. 역사 서술의 허구적인 요소를 인정한다는 것은 전통적인 역사가들에게 위협이 될 것임을 화이트는 인식하고 있지만, 오히려 역사가들이 인습적으로 나누는 사실과 허구 사이의 구분에 도전하는 것이 역사학을 더욱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학문으로 만들 것이라는 희망을 헤이든 화이트는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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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바타 그리고 가상세계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9
정기도 지음 / 책세상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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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현실세계일까 가상세계일까? 영화 [매트릭스]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 보자. 주인공처럼 우리는 가상세계를 구별해내고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분석철학자 힐러리 퍼트남에 의한 '통 속의 뇌의 논변'에 따르면 가상세계는 현실세계에 대해 열려있지만, 현실세계는 가상세계에 대해 닫혀있다는 점을 들어 가상과 현실의 구분이 가능하다고 본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가상현실 세계에 접근하고 참여할 수 있지만, 가상현실 속의 존재가 현실세계에 접근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번엔 머그게임을 통해서 살펴보자. 머그게임의 캐릭터를 통해 현실세계는 나는 게임의 세계로 접근할 수 있다. 하지만 게임케릭터가 나의 세계에 끼여들 수는 없다. 여기엔 분명 위계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머그게임의 세계와 나의 세계란 두 세계만을 고려했을 때의 위계일 뿐이다. 나의 세계 위에 또 하나의 상위 위계가 있을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때도 나의 세계가 현실세계라고 할 수 있을까?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로 넘어가 보자. 거칠게 비유적으로 이야기해 본다면 결국 그의 정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아주 잘 짜인(일관되고 무모순적인) 체계라고 했을 때 이 체계에는 체계에 의해 증명이나 반증할 수 없는 (무전제의, 그래서 자폭적인) 문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주장하는 어떤 문장은 우리 세계에서 증명이나 반증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계가 현실의 세계인지 또는 누군가의 꿈속에서 그려진 세계인지 우리 세계에서는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현실인지 꿈인지를 결정하려면 이 문제가 논의되는 체계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조건하에서 비로소 우리는 우리 세계의 정체성을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거울같은 반사체 없이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듯이 우리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체계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자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나와 이 세계에 대해 도데체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이건 황당한 문제다. 실제보다 더 현실적인 하이퍼리얼한 가상세계가 확장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문제는 황당하지만 꼭 다루어야 할 문제이다. 이 작은 책을 통해 그 문제를 살펴볼 몇가지 길들을 잠깐 살펴 볼 시간을 같는 것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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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란 무엇인가?
앙드레 바쟁 지음, 박상규 옮김 / 시각과언어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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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바쟁은 사르트르, 메를로 퐁티, 그 중에서도 특히 후자의 '애매성의 철학'에 심취했던 흔적을 그의 리얼리즘 영화론으로부터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그가 현실에 대한 애매성의 의식을 영화에 되돌려 주려고 한 까닭은 적어도 우리가 사람들에 관해 내리는 판단의 의미에서 볼 때, 실재는 궁극적으로 애매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애매성은 몽따주에서는 불가능한, 롱테이크(혹은 미디엄 롱테이크) 숏 스타일에서만 오직 가능한 만큼, 몽따쥬보다도 롱테이크 스타일이 보다 더 진실되게 현실을 반영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인간 심정의 궁극적인 신비'를 꿰뚫어, 적어도 타자를 판단하고 해석함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닫게 하는 실존적 현상학의 태도가 영화 기법에서 '편집'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비도덕적인 해석 형태인가 하는 회의로 연결되고 있다.

바쟁은 무성영화 시대의 거장들, 이를 테면, 스트로하임, 무르나우, 플래허티 등도 역시 몽따쥬가 아니라 롱테이크 구성의 활용을 통한 '현실' 공간의 연속성을 긍정한 공간적 리얼리즘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러한 바쟁의 실존적이고 윤리적인 태도는 오늘날 속칭 예술영화라고 불리우는 카테고리에 자주 적용되어 왔다. 그래서 무엇이든 무섭도록 상투화시켜 버리는 문화아이콘 수입국인 한국에서 '롱테이크=예술=거장'이라는 등식으로 천연덕스럽게 적용되기도 했었다.

때때로 어떤 영화학자는 이런 판에 염증을 느끼고 모든 롱테이크에 침을 뱉는 짓도 서슴치 않았다. 하지만 잘못은 깊은 성찰없이 껍데기만 차용하는 수입업자들과 허영심많은 소비자들에게 있는 것이지 롱테이크와 바쟁의 에토스에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그런 의미에서 바쟁의 글을 한 번 진지하게 읽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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