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방일기
지허 스님 지음 / 여시아문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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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이란 주제와 함께 선객들의 이야기가 뭇사람들의 입담꺼리가 되고 있다. 선방의 아취와 여유, 자연과 벗하며 무애한 자유를 누리고 욕심없이 사는 삶을 그들은 부러워 한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알 것인가? 선객들은 속세에서의 절박감에 스무곱절은 더 절박한 마음을 가지고 열반의 길을 향해 혹독하게 매진하고 있음을... 따라서 어설픈 여유부리기로 선방의 정신을 기웃거리는 짓은 정신의 레크레이션 활동에 불과할 뿐이다.

선방의 삶은 결코 속세의 삶과 차원이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자만심과 시기심, 경쟁심과 이기심이 속세 못지 않게 여전히 얽혀 들어와 있다. 다만 그들은 끊임없이 그런 자기를 갈아업으면서 새로운 자기를 찾아 떠나고 있음이 다를 것이다. 그 찾아 떠남의 끝은 어디인가? 초월인가? 초인인가? 아니다. 그들이 종국에 다다르고자 하는 경지는 가장 인간적이면서 자연적인 경지이다. 불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중생(인간)에서 시작해서 도인(인간)으로 끝난다. 부조리한 백팔번뇌 속의 인간이 조화로운 열반에 이르기 위한 길을 마르고 닳도록 되밟을 뿐이다.

항상 화두에 끌려가는 자는 화두를 끌고 가는 자보다 저만치 앞서간다. 화두에 끌려가는 자는 화두에 끌려 제 정신을 놓아버린다. 일종의 무아적 유희이다. 창조적 예술가가 무목적적인 유희의 결과로 내어놓는 신품처럼 화두에 끌려 놀아나는 선객은 깨달음의 경지가 더 깊어진다. 그래서 화두를 억지로 끌고 가는 자는 모자르트 앞의 살리에르처럼 절박한 초조감 속에 쌓여 살 수 밖에 없다. 화두에 고삐를 채우지 말고 화두를 앞세우고 그저 끌려서 가라. 이는 선방에서만 통용될 이야기가 아니니 나도 따라 새겨듣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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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의 길
마루야마 겐지 지음, 조양욱 옮김 / 현대문학북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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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지의 이야기엔 유독 여성비하적인 발언이 많더군요. 여성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여성적인 것'에 대한 격렬한 혐오가 잔뜩 뭍어 납니다. 선 굵게 진실로 육박해들어가는 강한 역동성을 추구하는 사람이니 소위 여성적인 것이라고 불리우는 것, 즉 주변부를 어슬렁거리며 미사여구에 빠져드는 꼴이 싫다이거지요. 거기에 집단적 삶에서 부산되는 위선과 허식도 거부하지요.

아직 그의 작품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창작에 있어서의 근기는 아주 투철한 작가인 듯 합니다. 문학애호가 집안의 독특한 분위기에서 그 분위기를 역겨워하다 못해 깔보던 그가 아쿠타가와상이란 엄청난 상을 받고 도리어 스스로가 문학인으로 변신하게 되다니...

참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내...내... 후기를 쓰신 이문재 시인의 말대로 압도적이고 압도적이군요. 나름대로 즐거운, 주먹에 힘이 들어가게 만든 만남이었습니다. 아참 겐지는 (실명을 거론하지 않지만) 자살한 미시마 유키오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자살을 자기 기만적인 엽기적 희극 쯤으로 치부하고 있는 듯 한데 제가 보기엔 겐지 마저도 그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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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화 그 섬세함의 뒷면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34
박현수 지음 / 책세상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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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한 영화 비평가가 한국 대중영화에 나타나는 이상한 현상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었습니다. [편지], [하루] 등과 같은, 거의 한국영화 속에서 하나의 장르처럼 굳어져 가는 양식의 영화들이 생겨났는데, 그 특성을 들어보자면, 가족 상실, 사회상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집착과 같은 것이고 할 수 있지요.

혹자는 영화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가족 역을 할 사람의 출연료 절약, 사회적 배경 말소를 통한 세트비 절약, 이도 저도 다 생략디되어 싱거워진 상황을 죽음이란 쇼킹한 충격으로 기적적으로 극복함^^) 그랬을 것이라고도 하지만, 그 비평가의 말처럼 그것이 한국 관객에게 씨가 먹힌다면 그 기저에는 어떤 집단적 심리 상황에 깔려 있다고 느껴질 수도 있을 겁니다. 그 비평가는 그 정향이 일본 문학계 특유의 사소설적 트랜드와 너무도 유사하다고 간파했지요.

좀 사적이면 뭐 어떻냐? 감동만 주면 되지 않느냐? 누가 뭐랍니까? 하지만 한 단계 더 깊숙이 생각해 보자는 거죠. 이 책은 사소설적 정향이 지니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따져 보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일본 근대 소설의 기원이라는 명치유신 시절 전후의 사소설들이 왜 그렇게 극단적인 섬세함의 미학에 빠져든 것일까? 이것은 바로 천황제를 정점으로 한 관료제가 사회적인 영역을 모두 흡수해버린 상황에서 근대적인 자아가 종국에 다다를 수 밖에 없는 막다른 길이 아닐까?

이것이 핵심이지요. 즉 시민들이 자신들의 삶의 문제를 다른 보통 사람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해결해내는 영역을 구성해내지 못했을 때, 이런 사람들에게 남는 자율적인 영역이란 결국 개인의 심미적 주관으로 제한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이지요.

즉 시민의 사회적 무능력이 그 일본적 섬세함의 기초가 아닌가 하는 의심입니다. 이는 바이마르와 나치시절의 독일 사회에 대해 비판의 칼을 들이댔던 한나 아렌트의 시각과도 일치합니다. 그녀의 말을 빌자면, 이는 '무사회적 고립자'들의 향연입니다. 그리고 이 향연은 사회적 무능력의 방증이며, 결국에는 독일식의 집단 영웅주의나 일본식의 천황제하의 가미가제 정신에 나약하게 굴복할 수 밖에 없겠죠. 극단적 심미주의자인 미시마 유키오가 할복하며 외친 것이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이었다는 점을 함께 상기할 때 이 무사회적 고립자의 섬세함의 미학은 모골을 송연케 하는 잔인성의 이면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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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황홀 - 우리시대의 지성 5-014 (구) 문지 스펙트럼 14
송상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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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기 플라톤은 시인 추방으로 모든 예술가들의 원성의 근원이었지만, 송상용은 오히려 시에 이해가능한 질서를 부여하고 사회속의 일원으로 포함시킨 아리스토텔레스야말로 시의 적이 아니었느냐고 따집니다. 그가 생각하는 시란 바로 무(nothingness)를 향한 발버둥, 즉 황홀로, 플라톤이 생각하는 국가(질서)의 영역과는 대척점에 있는 것이었죠. 시가 국가의 적수였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시의 위력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볼 수 있죠.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를 옹호하는 척 하면서 시를 국가에 종속시켰죠. 더 이상 시는 국가의 적수가 못되는 위치로 타락한 것이죠.

저자는 서양 고전에서 불교 경전까지 아우르면서 국가와 황홀이란 테마아래 시란, 예술이란 바로 무의 향연, 적멸로의 돌진, 열반의 황홀로 자리합니다. 근래에 보기드문 아주 무게있고 밀도있는 산문이군요. 강력히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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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
전시륜 지음 / 명상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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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신입생들에게서 여유가 사라졌습니다. 입학하자마자 도서관에 와서 토익책과 자격증책을 갈아먹느라 혈안이 되거나, 아예 작정하고 새벽 출근증을 끊으며 고시공부로 자신을 내던지는 아이들의 비율이 자꾸 늘어나고 있지요. 글쎄... 무엇을 위해서 저러나? 그들에게 이 책을 권해주고 싶습니다. 그 살기 힘든 시절에 넉살좋게 철학을 공부했고 비록 그 철학으로 밥 먹고 살지는 못했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열심히 그리고 긍정적이면서도 여유롭고 호탕하게 사신 전시륜 선생님을 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여유를 더욱 더 가속적으로 잃어버리는 듯 합니다. 하루하루가 생존을 위한 전쟁인데 무슨 얼어죽을 여유냐고 콧방귀를 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꼼짝없이 '돼지'입니다. 이 말은 작고하신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님의 것입니다. 이왕 읊은 김에 김현의 글 '여유있는 생존'에서 몇 자 옮겨보지요.

'나는 여유를 사랑한다. 세계가 엉망진창이기 때문에 나는 여유를 사랑한다. 소설을 쓰는 것이 돈이 잘 벌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를 쓰는 사람들의 여유를 그러므로 나는 사랑한다. 구원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여유를 나는 사랑한다. 위태위태한 의식의 혼란 속에서도 요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여유를 나는 사랑한다... 물론 나는 그렇지 못하게 하는 많은 원인들이, 환경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여유를 좋아한다.'

여유는 어느 때 오는가? 그것은 자기 자신을 멀찌감치 떨어져 볼 때 옵니다. 무언가 맹렬히 좇고 있는 자가 있다면 여유는 내가 왜 그걸 좇고 있는가를 보게 해줍니다. 무언가에 맹렬히 좇기고 있는 자에게 역시 여유는 내가 왜 그것에 좇기고 있는가를 보게 해줍니다. 여유가 없으면 이유도 모르고 좇고 좇깁니다. 그것은 구정물 속에서 건더기 하나라도 더 건지려고 곤죽이 되도록 싸우는 돼지들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요?

하지만 어느 순간인가부터 우리 대학에는 이 여유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여유는 취업한 다음에 생각할 일이라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글쎄요... 제가 감히 묻노니 과연 당신이 취업한 후에 한 호라도 여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찾을 수 있다면 당신을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우리가 전투적으로 삶에 임하는 이유는 다를 것 없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는 행복의 노예가 되어 무엇이 우릴 행복하게 하리라고 소문을 내면 그것에 불나방처럼 달려듭니다. 그것을 먼저 쟁취하려고 모든 행복을 전폐하고 맹렬한 레이스에 아낌없이 몸을 던지지요.

그러나 전시륜 선생은 대뜸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은 삶이 의당히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우연히 얻게 되는 선물입니다.' 행복은 영광스런 전리품이 아니라 반가운 손님일 뿐입니다. 손님이 오면 즐겁고 떠나면 다시 오길 기다리면 되는 겁니다. 안달복달하며 가슴조일 이유가 없죠. 덕택에 귀한 인생론을 배웠습니다.

전시륜 선생님은 그 자체로 담대한 김현 식의 '여유'의 화신입니다. 세상에 번드르한 영웅들과 위인들이 넘쳐 나지만 자기 삶에 대해 이렇게 담대한 여유를 보여주면서 자기 삶을 적극적으로 즐기며 돌파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은 듯 합니다. 왜 달리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달리는 레밍즈떼 같이 전락하고 있는 우리들이여, 이 책을 통해 뭔가 신선한 삶의 전회를 얻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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