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기사를 병치시켜 놓고 보니 재미있다.
특집 : 동아시아에서 조선 성리학의 지위
중국이 우러러 본 조선의 理 철학
2004년 04월 17일 이기동 성균관대
이기동 / 성균관대·동양철학
동아시아 삼국의 문화는 그 특징이 매우 뚜렷하다. 한국의 문화는 형이상학적 성격이 강하고, 일본의 문화는 형이하학적 성격이 강하며, 중국의 문화는 양면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 한국, 일본에 동시에 전개된 불교나 성리학을 비교해보면 확실히 증명이 된다. 중국의 역사가 문관과 무관에 의해, 한국의 역사가 문관에 의해, 일본의 역사가 무관에 의해 주도돼온 것을 보더라도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형이상학은 주로 철학이나 종교의 영역에 속하고 형이하학은 주로 물질과학이나 사회과학의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동아시아 삼국 중에서 종교가 가장 발달하는 나라는 한국일 것이고, 과학이나 경제가 가장 발달하는 나라는 일본일 것이며, 둘 다 적당히 섞여 있는 나라는 중국일 것이다. 오늘날 상황에서 보더라도 교회의 수가 가장 많은 나라는 한국이고 가장 적은 나라는 일본이며 중국이 그 중간이다.
형이상학 성격 강한 조선의 성리학
이러한 구도에서 볼 때 동아시아 사회에서 차지하는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의 위상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성리학은 고려말에 중국에서 수입된 송학에서 비롯된다. 송학은 중국 당나라 때 韓愈 등에 의해 주창된 신유학 운동이 북송을 거치면서 발전하다가 남송의 주자에 이르러 완성된 사상체계다. 송학은 송나라 때 완성된 학문체계라는 뜻에서 일컬어진 말인데, 주자에 의해 완성된 것이라 해서 주자학이라고도 하고, 程子와 주자가 중심이라 해서 정주학이라고도 하며, 性과 理가 중심개념이라 해 성리학이라고도 하고, 理가 중시된다고 해서 理學이라고도 하며, 道의 실천을 목적으로 한다고 해서 도학, 聖人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해서 聖學, 새로운 유학이라 신유학이라고도 한다.
한국의 성리학은 송나라 때 바로 수입되지 않고 송나라가 망한 뒤 송을 이어 일어난 원나라에서 수입된다. 고려말 안향에 의해 원나라로부터 수입된 성리학은 순조로운 발전을 거듭하다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된다.
중국의 성리학은 형이상학적 성격과 형이하학적 성격이 조화를 이룬다. 한유에 의해 주창된 형이하학적 특징은 歐陽修와 司馬光을 거치며 발전하고, 이고에 의해 주창된 형이상학적 특징은 주돈이, 張載, 정이 등을 거치며 발전한다. 그리고 이 두 계열은 주자에 의해 하나로 통합된다. 그러므로 주자에 의해 통합된 중국의 성리학은 형이상학적 성격과 형이하학적 성격이 통합된 종합적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한국에 수입된 성리학은 이고 계열의 형이상학적 성격의 성리학이 주로 수용되고 한유 계열의 형이하학적 성격의 성리학은 그다지 수용되지 않았다. 이는 한국인의 정서로 볼 때 지극히 당연한 귀결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의 성리학은 형이상학적 성격에 치중했기 때문에 그 깊이는 주자의 수준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하버드대 뚜웨이밍 교수는 특히 조선의 퇴계를 주자의 진정한 후계자로 지목한 18세기 일본 지성들의 견해에 동조하면서도 퇴계가 고봉과 벌인 사단칠정론에서 밝혀낸 理 사상은 중국의 유학자들에서 촉발된 것이 아닌 독창적인 것이었음을 밝힌다. 이러한 평가는 퇴계뿐만 아니라 조선 성리학자들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평가는 당시 명나라에서도 많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온 사신이 율곡을 만났을 때 "天道策을 쓴 그 율곡인가?" 하고 물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중국에서 조선 성리학자들의 글들을 읽고 있었으며 조선의 성리학자들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존중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명나라가 국력을 기울여가면서까지 조선을 돕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명나라가 멸망하지 않고 계속 발전했더라면 조선 성리학과 성리학자들의 위상은 중국에서 계속 유지됐을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의 멸망과 함께 형이상학적 성격이 강한 성리학이 쇠퇴하고 실학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자 중국에서는 한국 성리학에 대한 관심이 없어질 수밖에 없었다. 우암 송시열을 비롯한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들이 청조를 거부하고 끝까지 명나라의 연호를 고집했던 이유도 이러한 현상들과 맥락이 통한다. 그러나 청나라에서도 조선 성리학자에 대한 존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청나라 말기의 대표적 지성인인 양계초는 퇴계를 극찬하면서 '삼백년 내려온 그 명성을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 흠모하게 됐다'라고 했다.
한편 조선 성리학의 일본에 대한 영향은 지대했다. 일본에 성리학을 정착시킨 최초의 인물은 후지와라 세이까(藤原惺窩)다. 그는 불교의 승려였으나 조선에서 온 사신 허산전과 만난 후 성리학으로 돌아섰다. 세이까는 조선에서 포로로 잡혀간 姜沆에게 배우면서 영향을 받았지만, 허산전이 퇴계학의 학맥을 잇는 사람이었으므로 세이까가 수용한 성리학은 주로 퇴계학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아베요시오(阿部吉雄)의 '일본 주자학과 조선'이라는 저서에 상세하게 설명돼 있다.
일본에 미친 퇴계학의 강력한 영향
일본 성리학의 완전한 수용기에 이르면 퇴계학의 존숭은 극에 달한다. 일본 성리학의 대가인 야마자끼안사이(山崎闇齋)는 퇴계를 존숭한 나머지 퇴계의 초상을 그려놓고 매일 아침 경배를 드렸다고 한다. 큐우슈의 오오쯔까타이야(大塚退野)는 자신의 호를 퇴계의 退를 따서 타이야(退野)로 정했을 정도였다. 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 성리학에서의 퇴계의 위상은 조선 성리학에서의 주자의 존재와도 같은 대단한 것이었다. 퇴계 외에도 율곡이나 양촌이 일본에 소개돼 연구됐으나 퇴계만큼의 영향력을 갖지는 못했다.
퇴계학을 중심으로 한 한국 성리학의 일본 수용은 한국 성리학 그 자체가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일본의 정서에 맞게 형이하학적으로 변용된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 성리학의 일본에서의 위상은 대단했다. 이러한 위상으로 말미암아 조선시대의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에게 지극한 환대를 받았다. 일본인들이 조선의 사신을 만나 글씨를 하나 받으면 그것이 그대로 가보가 됐다. 그래서 당시의 일본인들은 조선의 사신을 만나기 위해 조선의 사신이 묵는 여관 앞에 장사진을 쳤다. 이것을 국제적인 망신이라 여긴 일본 정부는 사적으로 조선의 사신을 만나는 것을 금하는 국법을 정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일본인들이 한국인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고, 나중에 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는 경계할 일이다.
필자는 동아시아 전통사상에 대한 비교연구를 많이 해왔다. 논문으로 '일본유학에서 중세적 사유의 형성과 극복', '한국유학과 21세기', '퇴계학과 일본의 주자학' 등이 있고, 저서로 '조선조 성리철학의 구조적 탐구', '도올논어 바로보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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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통유학이 일왕중심 변질”
[한겨레 2004-05-03 21:23]
[한겨레] ‘황도유교’ 비판 학술발표회
유학의 친일 또는 왜색 문제가 학계의 전면적인 비판대에 올랐다. 비판철학회(회장 양재혁·성균관대)는 지난 1일 이 학교 경영관에서 ‘황도유교(皇道儒敎) 비판’이란 주제의 학술발표회를 열었다. 이날 발표회에서는, 조선의 정통 유학이 일제 식민강점기 시절 일왕의 통치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는 황도유교로 변질됐으며 해방 이후에도 황도유교의 영향을 받은 학풍이 역대 독재정권의 극우반공 정책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하는 도구로 전락해왔다는 비판들이 쏟아졌다. 유림의 본산이라 할만한 성균관도 신랄한 비판에서 비껴가지 못했다.
황도유교는 1903년 조선 정부 초청으로 한성중학교(현 경기고등학교) 교사로 건너온 다카하시 도오루가 퇴계 성리학을 재구성한 일왕 중심의 유학 체계다. 그 내용은 대강 이렇다. △조선의 유교는 중국의 아류이며,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 건설을 위해 공맹의 정치적 이상인 왕도유교는 일본을 국체로 한 천황 중심의 황도유교로 바뀌어야 한다 △왕도 유교가 ‘충’과 ‘효’를 분리해 ‘효’를 강조한 것이라면, 황도유교는 충효 일치가 기반이다 △중화사상은 주변국을 오랑캐로 간주해 포용력이 없지만 일본은 세계정신으로 황화(皇化)천하를 선포하며, 조선 병합은 포용의 사례다.
다카하시는 1920년대 대구고보(현 경북고) 교사와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 설립 간사 및 교수로서 식민지 조선의 교육방향을 주도했다. 1930년 경학원(구 성균관)을 황국신민 양성을 위한 명륜학원으로 바꾼 뒤, 1940년 11월 내선일체정신을 강조한 ‘왕도유도에서 황도유도로’라는 논문을 발표했으며, 1944년 명륜학원을 명륜연성소로 바꾸고 자신이 소장을 맡았다.
김원열 한국기술교육대 강사는 ‘황도유교의 사유체계와 방법론적 문제점에 대한 비판’에서 “황도유교는 일왕을 정점으로 한 봉건적 위계 구조를 바탕으로 한 전체주의적 지배 이념”이라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다카하시는 ‘조선유학대관’(1923)에서 퇴계 이황을 ‘침잠하는 사색력’을 들어 조선 제일의 학자로 평가했다. 다카하시가 조선 유교사를 정리하면서 노린 것은 “현실의 정치적 권력의 문제를 외면한 채 공허한 논의로 일관하는 것이 일본의 식민지배에 유리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다카하시의 방법론은 자신의 제자이자 서울대 교수와 성균관대 유교대학장을 역임한 박종홍에게로 이어졌다. 김씨는 “박종홍이 대구고보 교사 시절 쓴 ‘퇴계의 교육사상’이란 논문은 일제 식민지 시기 교육현실을 ‘경(敬)의 결여’로 파악하면서 이황의 ‘경 사상’을 추앙했으나 이런 진단은 민족구성원의 독립투쟁을 가로막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양재혁 교수는 ‘황도유교 비판-유교의 종교화에 대하여’에서 “황도유교가 일본 제국주의 확장을 위한 ‘내선일체, 일시동인(一視同仁)’ 이념을 바탕으로 일왕을 우리 민족의 조상으로 체계화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조선의 정통유학은 정치와 하나였으나 일제의 정-교 분리 정책으로 유교를 이념으로 한 조선조의 실체였던 정치가 파괴되고, 정치의 규범을 담당했던 예(禮)만 종교의 형식으로 남게 됐다고 분석했다. 한국 유교가 황도유교의 국시 아래 종교로 포섭돼 사회과학적 현실정치 문제를 배제했다는 것이다. 현 성균관이 교육인적자원부 산하의 교육기관이 아니라, 문화관광부 산하의 종교분과에 속해 있는 것이 단적인 사례다. 그는 “사회 구성이 예의 체계였던 조선시대와 달리 법과 민주 체제가 정착된 지금도 유교가 신분계급사회였던 조선조 규범인 예를 이상으로 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공맹의 논리가 그 시대의 제왕독재를 비판한 것처럼 오늘의 유교 연구도 현실정치 비판을 통한 구체적 삶을 주제로 선택해야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권인호 대진대 교수는 ‘박종홍의 퇴계철학 비판-황도유교와 국가주의 철학의 원류’에서, 퇴계 철학의 현실과 동떨어진 형이상학적 관념성이 후대에 악용되는 논리구조를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천지·남녀·군신·부자·부부 등을 상호보완적 관계가 아니라 상하질서 관계로 변질시킨 주자의 성리학의 ‘이존기비(理尊氣卑)’론이 이황의 성리학에서 재현됐으며, 다카하시는 이 점을 적절히 포착했다. “퇴계 성리학이 일제 강점기에 유교적 사회질서와 절대권력의 정치지배를 정당화하면서 그것에 기생하는 학문연구 풍토를 조성”했을 뿐 아니라, 이후 ”친일-친미-반공 독재자들의 충효교육 및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이용됐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황도유교의 충효교육 논리가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제국헌법·군인칙유·교육칙어 등과, 한국에서는 박종홍과 박정희의 합작품인 10월 유신과 국민교육헌장, 가정의례준칙과 호주제 등과 사상적 맥락이 닿아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