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서울을 걷다
권기봉 지음 / 알마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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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오스트리아에 살던 어린 시절, 공연으로 비엔나 외각의 작은 도시 Krems에 가게 되었습니다. 빈에 산지는 어느정도 되었지만, 한번도 차를 타고 밖으로 나갔던 적이 없었던지라 참 많이 설렜던 기억이 납니다. 기대가 가득했던 이유는 하나 더 있었는데, 그 당시 제가 가장 좋아하던 작곡가 루드비히 반 베토벤의 생가가 있었기 때문이죠. 가장 위대한 작곡가, 하지만 평생을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지내야 했던 그가 병약해져 인생의 마지막 가을을 보냈던 도시 크렘즈를 방문할 생각에 전날 잠을 설칠 정도였답니다. 그리고 드디어 크렘즈에 도착. 지금 돌이켜보면 공연이나 그 후 행사에 대해서는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답니다. 단지 이 작고 사랑스러운 도시의 좁은 길목을 걸으면서, 어쩌면 몇 백년 전 베토벤도 이 거리를 걸으며 악상을 떠올렸을까 궁금해했던 것이 떠오릅니다.





 어떤 도시가 그만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지 않고, 어떤 도시가 사연이 없을까요? 도시의 크고 작음을 떠나 적고 많은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면서 도시는 세월의 흐름을 나이테처럼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나이테가 균일하고 곧을 때가 있는 반면 한없이 일그러져 고통의 흔적으로 남을 때도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그렇듯, 도시는 좋은 기억도 나쁘고 괴로웠던 기억도 품 안에 간직한 채, 그만의 역사를 만들어갑니다. 
하지만 도대체 "역사"란 무엇일까요? 누가 "이것이 이 도시의 역사다!"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수많은 베일과 거짓말에 가리워 정작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지극히 일부분만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누군가가 우리가 생각하기 바라는 정보에만 의지하여 나름대로의 도시 이미지를 만들어가고 있을지도요. 오늘 소개할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 비록 유년시절과 20대는 대부분 비엔나에서 보냈지만, 서울에서 태어나 자라고, 또 지금도 살고 있으면서도, 정작 이 도시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모르고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수 천년의 역사를 품은 도시 서울의 베일을 하나 하나 걷어가면서 그 새로운 모습을 만날 기대와 함께 읽기 시작한 "다시... 서울을 걷다"를 소개합니다. 


 


객관적 역사는 없다? 

이 책을 지은 권기봉씨는 서울 토박이가 아닙니다. 월악산에서 자란 그는 서울대학교에 합격하면서 서울로 상경하게 되고, 수 많은 역사의 흔적들을 간직한 이 도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서울로 온 98년부터 서울에 대한 글쓰기가 시작되었다고 하니, 그의 역사적 관심은 이미 이 책이 발간되기 몇십년 전부터 결실을 준비한 셈이네요. 




흔히 역사를 "사실적 측면(객관적 역사)"과 "기록된 측면(주관적 역사)"로 분류하곤 합니다. 그리고 회의론자들은 역사란 주관적인 측면만 가지고 있을 뿐 객관적으로 서술되거나 소개될 수는 없다고 단정짓곤 하죠. 저는 회의론자는 아닙니다만 어느 누구도 역사를 지극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야기할 수 없다라는 의견에는 동의하는 편입니다. 인간의 태생적 한계인지라 우리는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저자 권기봉씨가 서울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우리에게 묻고자 하는 것도 이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 미사어구와 아름다운 포장으로 왜곡된 진실들을 되짚어가면서 어째서 그것을 올바르게 다잡는 것이 중요한지 생각하게 합니다.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않고 있다고 해서 그냥 지나쳐넘기고 있던 것들 말입니다.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주장이며, 모순은 없는가. 일단 반민주적인 이승만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4.19를 "혁명"이라 표현한다면, 그런 민의의 결과로 탄생한 제2공화국을 뒤없은 5.16은 "군사정변"이나 "반역"으로 표현하는 것이 옳다. 반대로 5.16을 "혁명"이라 부르고 싶다면 4.19는 "폭동"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둘은 완전히 반대되는 성격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187-188 페이지) 

2012년 2월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문을 연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 대해 저자가 설명한 글입니다. 5.16 혁명을 "민족중흥과 근대화 혁명"이라고 입구에 설명해놓은 것에 대한 비판입니다. 아직까지도 역사적 사건의 부당함을 인정하지 않고 은근슬쩍 좋은 미사어구로 아름답게 꾸며 왜곡하려는 현실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예일 것입니다. 정치적 성향이나 지지하고 있는 정당 혹은 특정 정치인과는 무관하게 잘못된 역사는 잘못되었다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건만, 아직까지도 역사적 사실을 조금씩 다르게 포장하여 눈가리고 아웅식으로 덧발라가는 행위로 인해 역사의 왜곡이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자는 또한 무턱대고 네거티브 유산이라 단정한 뒤 역사를 소실시킨 안타까운 사연도 언급합니다. 바로 옛 서울시청의 철거 사건입니다. 

"사실 일제 잔재라는 이유로 당시의 건물들을 철거한다고 해서 완전히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제아무리 조선총독부를 헐었다 할지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잔재들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일제 때의 건물이라고 해서 옛 서울시청을 철거해버린다면 서울사를 넘어 한국사의 '1급 현장'을 한국인 스스로 지워버리는 셈이 된다. '서울의 오늘'을 있게 한 지하철 건설이나 강남 개발과 같은 굵직굵직한 역사적 결정들이 숱하게 내려진 공간이 바로 태평홀, 그리고 서울시청이기 때문이다." (124 페이지) 

어떠한 사건을 보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기준은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고, 무엇이 옳고 그르다를 판단하는 것은 난해한 일입니다. 한쪽에서는 아프고 괴로운 강점기의 흔적을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것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저자와 같이 네거티브 유산도 유산이므로 지켜야 한다는 입장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처럼 서울시청의 역사와 주요 사건들을 알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저자의 비판으로 인해 비로소 관심을 가지고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언론에서 이 사건에 대해 접한다고 하더라도 이렇듯 구체적으로 역사적 가치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는 드물 뿐더러 언론의 경우 대부분 중립적이기보다는 한쪽의 입장에서 보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 당파 싸움 속에서 오히려 사건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기가 부지기수니까요.  





서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총 4부, 25개의 사연으로 이루어진 이 책을 읽으면서 책의 제목이 참 마음에 와닿는 걸 느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제목 그대로 서울 시내를 "걷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자동차를 타고 달리는 것도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것도 아닌, 좁디 좁은 골목까지 꼼꼼히 걸으면서 서울이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 숨결을 찾아다니듯 저자는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서울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압구정의 땅값이 비싸고 서민들은 살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언제서부터 왜 압구정 일대가 "돈 많은 동네"가 되었는지 알진 못했습니다. 잊을만 하면 다시금 터져나오는 재개발과 지역주민 사이의 첨예한 대립을 익히 들었으면서도, 재개발로 인해, 재개발을 위해 어떤 변화를 겪게 되었는지,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지 구체적으로 궁금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소공동에 한때 수많은 화교들이 모여살던 "차이나타운"이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많이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 혹은 미국, 영국과 같은 강대국 사람들에게 소외당하고 차별당한 이야기는 알아도, 불과 50년 전 소공동의 화교들이 말못할 탄압으로 위협을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부각되지 못했습니다. 창피한 과거는 그대로 묻어두자는 무책임함과 내 일 아니니 상관없다는 무관심 속에 묻혀진 사건들입니다. 

"서울시는 노후한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화교회관'을 지어 입주시켜준다는 말로 화교들을 회유했다. (...) 그러나 지어준다는 화교회관은 함흥차사였다. 두 달이 지나도 새 건물을 올린다는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았다. 서울시와 한국 정부의 배신이었다. (...) 당장 새 가게를 내야 하는 이들도 있었기에 차선택이라도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화의 제안대로 땅을 모두 팔아버린 것인데, 이는 곧 소공동 화교 축출작전이 성공리에 완료되었음을 의미했다." (47 페이지) 



역사의 올바른 해석이 중요한 것은, 그 역사를 통해 현재의 우리들이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학살의 주범이었던 독일의 경우, 아직도 정신차리지 못하는 일부 네오나치들을 제외하곤 아주 젊은 세대들까지도 인종차별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것인지 배우며 자라납니다. 전 세대가 인류를 상대로 저질렀던 끔찍한 범죄를 통해 그 심각성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한국은 좀 다르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많은 탄압과 고통을 견뎌낸 우리 민족에 초점이 맞추어져 정작 우리 자신이 가해자였던 모습은 잊어버리고 싶어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인종차별을 받았을 때의 고통은 오래 기억하지만, 또 다른 곳에서는 우리보다 힘든 사람들에게 폭력과 차별을 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공동의 화교들이 그랬고, 집없는 노숙자들과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 그리고 타지에서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렇습니다. 부끄러운 역사를 직시하고 그것을 제대로 소화해내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반복되는 것은 아닐까요? 저자는 역사가 왜곡되고 정당화를 위해 눈가리기를 반복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강조합니다. 

"오래되지 않은 역사조차 망각하는 순간, 학교교육에서조차 홀대하고 제외하는 순간, 나아가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E. H. 카의 말을 귓전으로 흘려듣는 순간, 반동의 역사는 반드시 되풀이된다." (195 페이지) 

수많은 '우리들'의 이야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보다 밀접한 관련이 있는 근현대사의 현장을 찾아 다시 서울로 나섰다. 권력자의 시각이 아닌 이 사회를 구성하는 수많은 '우리들'의 입장에서 다시 서울을 걸었다. (...) 얼핏 익숙한 듯하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낯설기만 한 곳을 걸으며 우리가 서울이라는 공간과 역사에 얼마나 무심한지 살펴보았다." (머리말 중, 6페이지)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는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역지사지에도 한계가 있고, 자신이 직접 처한 상황이 아니고선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뉴스 헤드라인과 인터넷에서 쏟아져나오는 '부조리함'과 '억울함' 그리고 '끔찍함' 속에 어쩌면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것들에 귀를 닫아버리진 않았나 싶습니다. 어차피 내가 직접 당한 일도 아니고, 나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오는 것도 아닌데, '이번엔 내가 아니니 다행이군' 하면서 뚜껑을 덮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그렇게 반복되는 무관심 속에 언젠가는 그 피해자가 나 자신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말입니다. 그리고 정작 내가 그 피해자가 되었을 때 다른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무너져내려가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알면서도 눈을 돌리고 알면서도 도와주지 않는 사람들을 탓할 수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도시, 서울. 수 천년의 역사와 수 많은 사건들을 나이테처럼 간직한 서울시에게 어두운 면이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도, 부끄러운 사건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서울시의 한 부분입니다. 그렇다고 저자가 서울시의 어두운 면만을 부각시키며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마치 방랑자차럼 서울시 곳곳을 떠돌며 그 거리가 말해주고 있는 역사에 귀를 기울일 뿐입니다. 그 이야기가 때로는 어둡고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서울시의 한 부분으로서 인정하고 용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자처럼 서울을 "걸을 수" 있도록 마련된 서울시의 지도가 인상적입니다. 책 속에 등장했던 역사적 장소들과 이슈가 되었던 거리까지 보기 좋은 일러스트와 함께 소개되어 있는 이 지도를 들고, 날이 풀리면 저 역시 "서울을 걷고 싶다"는 마음이 드네요. 이 지도에는 이번 "다시, 서울을 걷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의 장소들도 표시되어 있기 때문에 두 권의 책을 읽고 서울에 대해 궁금해졌다면 직접 답사를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지구의 지극히 작은 일부분 대한민국에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중에 정말 작은 한 부분인 자신의 존재가 너무도 힘없고 무의미하게 느껴져 "내가 이렇게 해봤자 뭐가 달라지지"라고 생각했다면, 그렇게 작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서울이 되고, 대한민국이 되는 것을 다시한번 생각해볼 때입니다. 지나온 역사를 소중히 생각하고 그것의 밝고 어두운 면을 편식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모이게 되면, 분명 서울시 전체가 점점 변화하게 될테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되는 날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해 저자는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일견 어두운 그늘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그림자는 그것을 만든 사물을 더욱 뚜렷이 부각시킨다. (...) 이제 필요한 것은 검은 그림자들을 배제하고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역사적이며 문화적인 맥락을 짚어내 씨줄과 날줄로 엮어가는 일이다. 모든 역사는 흘러간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의 가늠자'이자 '미래의 지표'로써 그 가치가 영원하기 때문이다." (33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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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창 - 대한민국은 청춘을 위로할 자격이 없다
임지선 지음, 이부록 그림 / 알마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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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종로에서 늦은 시간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습니다. 버스 맨 뒤에 앉아 휘황찬란한 거리의 조명을 바라보고 있던 중 도로 한가운데 몇몇 사람이 모여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 중심에는 헬멧을 쓴 한 사람이 바닥에 누워 있었고 경찰관 두 분이 곁에 있었습니다. 어렵지 않게 방금 사고를 당한 오토바이 운전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죠. 사고가 난 뒤 이미 상당한 거리를 "날아"온 듯, 주위에 그가 타던 오토바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워낙 막히는 시간대라 조금 의아했죠. 속도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도로에서 어떻게 저런 접촉사고가 벌어졌을까 하고 말입니다. 한 쪽 신발이 벗겨진 채 바닥에 누워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간담이 서늘해졌습니다. 늦은 시간 탓에 잘 보이지 않았던 헬멧 아래 고여있는 피는 이미 그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픈 병은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이고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직면한 문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자신에게는 예민하고 집중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하다는 이야기겠죠. 우리가 "서민들의 삶이 어려워졌다"라고 말하면서도, 기름값이나 전기세 등 스스로가 직접 느낄 수 있는 물가상승을 제외하고는 무엇이 구체적으로 어려운지 별로 알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니, 알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스스로가 살기도 버거운데 다른 어려운 사람들의 짐까지 떠안고 싶지 않아서일까요? 오히려 억울하고 힘든 이야기를 피하고 싶은 경우가 대부분이죠. 

여기, "진짜 서민"들의 어려운 삶이 무엇인지 말하고자 하는 한 기자가 있습니다. 삶의 최저선에서 매일 매일을 고군분투하며 연명해야 하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마이크를 잡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말합니다. "대한민국은 청춘을 위로할 자격이 없노라"고. 그리고 "현실은 시궁창"이라고. 가슴아프고 끔찍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현실을 외면하는 이상 극복할 수 없다고 호소하는 그녀, 임지선 기자의 "현시창"을 소개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흔들리는 청춘, 흔들리는 대한민국.

경제가 어려워지고 서민들의 생활이 각박해질 수록 사람들은 "흔들리는 사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회가 흔들리고, 사람들이 흔들리고, 청춘이 흔들리고 있노라고.  신문을 장식하는 크고 작은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반복될 수록 충격에도 익숙해지는 느낌입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 살기 위해 몸과 마음을 내던지고 어렵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뭔가 나 자신과는 동떨어진 것만 같은 이야기를 읽고 난 뒤 잠깐 생각에 잠길 수는 있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릿속에서 잊혀지기 마련입니다.

한겨레 사회부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삶의 여러 모습을 직접 목격한 임지선 기자는 방관자의 모습을 한 우리에게 스물 네가지의 사연을 소개합니다. 가장 낮고 어려운 자리에서부터 삶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서부터 기력을 잃고 방황하는 청춘들의 이야기까지. 그리고 그녀는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그들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라고. 그리고 이 이야기를 직시하고 인정하지 않는 이상, 현실은 나아질 수 없다고. 


"너무 많은 이들이 청춘을 위로하고 치유한다고 나서는 세상이다. 나는 스물네 건의 사연을 내보이며 이래도 세상이 이들에게 '힘내라'는 말을 건넬 수 있겠냐고 반문하려 한다. 이것은 철수와 영희,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나 혼자 잘살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청년이 미래에 대한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사회는 '나쁜 사회'라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7 페이지, 프롤로그 중)


총 네 가지의 테마로 나뉘어진 사연들은 제각각 우리 사회의 비참한 현실을 조명합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여자이기 때문에, 뛰어나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어두운 음지에서부터 현란한 조명 속 외로운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뉴스를 통해서 들었지만, 깊은 사정을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입니다. 전후사정을 알지 못하고 단신으로만 접하는 것과 한 사람 한 사람의 입장이 되어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임 기자는 바로 여기 우리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황 씨가 죽을 때까지 걱정했던 학자금 대출은 고스란히 남았다. '이제 학자금 대출이자 내는 날이 다가오는데, 어떻게 해야 하죠?'라고 여동생은 물었다. 늘 자랑스러웠던 성실하고 착한 오빠가 남긴 것이 빚뿐이라는 사실을 동생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승원 씨를 짓누르던 학자금 대출을 어머니와 여동생이 떠안지 않기 위해서는 사망 직후 3개월 안에 법원에 '상속포기 신청'을 해야 한다. 현실은 냉정하다." (20 페이지)

 


소외받는 소수의 이야기


그렇다고 "현시창"이 누구나 공감하고 공분할만한 사람들의 사연만을 담은 것은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소수의 이야기 역시 임지선 기자의 펜을 피해가지 않습니다. 대대적인 단속으로 생존의 위기에 처한 윤락가 여성들의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타임스퀘어에서 시작한 그들의 질주는 바로 옆 골목 안 집창촌의 스산한 길목에서 끝이 났다. 알몸에 피칠갑을 하고 귀신 분장을 한 여성들은 유리방 앞에 다다라 모두 미끄러져 넘어졌다. '다 같이 죽겠다'며 바닥에 뿌려놓은 석유 때문이었다. 빨간 물감에 석유가 섞여 번들번들해진 알몸의 여성들은 바닥을 뒹굴며 통곡했다." (157 페이지)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몸과 여자로서의 존엄성 그리고 도덕까지 내던져야 하는 윤락가 여성의 삶은 비참합니다. 자신을 속박하는 무서운 "삼촌"들에 종속되어 노예처럼 살아가야 하는 것이 그녀들의 삶. 최소한의 인권 역시 그녀들에게는 사치인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 보는 남자와 한 방에 갇혀 때로는 잔혹하게 살해당하면서도 죽어서까지 낙인찍힌채로 무시당하는 것이 그녀들입니다. 그렇다고 확실히 도덕적으로 판단받지 않을 수 없는 그녀들의 삶의 방식을 지켜보면서 임 기자는 그것이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발버둥치는 삶의 모습을 관찰합니다. 정당하건 정당하지 않건,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는 그녀들의 비참함을 고발합니다. 그녀들의 절규가 유리방 안에서 공허하게 울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도록 말입니다. 


"이 날은 스물여섯 살인 그의 군 입대일이었다. 그는 훈련소 입소를 거부했다. 한국 사회에서 군대를 거부하는 일은 '감옥행'을 의미한다. 종건 씨는 일몰을 바라보며 조용히 기도했다. '제가 담대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215 페이지)


사법고시를 합격한 뒤 사법연수원까지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그가 자신의 앞길을 스스로 침몰시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양심적 병역거부"로 철창 신세도 마다하지 않는 그는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대표적인 이단이자 사이비 종교로 널리 알려진 단체죠.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할것이다"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군대에서 총을 잡는 것을 거부하는 교리 때문에 이미 여호와의 증인에 속한 남자들이 종교적 이유로 감옥에 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합니다. 이들은 "총만 잡지 않는다면 더 오랫동안 군대에 가도 괜찮다"고 호소하지만 현역으로 결정되는 이상 종교적인 이유로 예외가 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임 기자는 역시 이 테마에서도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단체의 타당성이나 부당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철저한 제3자의 객관적인 시선으로 팩트를 나열합니다. 처음에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말에 잠시 눈살을 찌뿌리다가도 종교단체에서 떠나 확실히 법칙에만 매여 모두를 천편일률화하려는 제도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됩니다. 법은 외곬수일 수 밖에 없다지만 이렇듯 "개인"을 무시하고 "전체"를 강요하려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생각해볼 수 있게 됩니다. 



흔들리는 청춘, 흔들리는 나라


"현시창"이 특별한 것은 여기 있습니다. 비참하고, 억울하고, 끔찍한 현실을 지적하면서도, 누군가에게 죄를 돌리지 않습니다. 수많은 언론들이 하는 것처럼 이른바 "공공의 적"을 조성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문제나 죄에 있어서 그 책임을 물을 "희생양"을 만들고 그에게 모든 죄를 씌우며 만족감을 느끼곤 합니다. 때때로 그 "희생양"이 극히 일부의 책임만을 가지고 있었다던가 혹은 아예 무죄한 사람이어도 크게 상관하지 않는 것이 군중심리입니다. 어떤 사건이 벌어지게 되면 교수형대에 매달아야 할 죄인을 찾아나서고 형이 집행되는 순간 사건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원시적인 행위가 지금 (인터넷 덕분에 너무 편해진) 우리의 여론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임 기자는 호소합니다. 특정한 어떤 사람에게가 아닌 우리 모두에게. 어쩌면 그녀는 역으로 우리에게 되묻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고 욕하기 전에, 과연 '나 자신'은 이 일을 위해 무엇을 하고있느냐?"고 말입니다. 정치인이나 관련 책임자를 욕하고 탓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그들만의 책임일까요? 어쩌면 우리나라의 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혹은 알려고 하지 않고)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그저 비판할 대상만 찾아 입과 손가락만 부지런했던 우리들 역시 그 비참한 현실의 일부분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잘 알지 못하면서, 혹은 더 좋은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서 그저 이러쿵저러쿵 욕만 했던 부끄러운 모습 말입니다.


"'현시창'을 '현실을 직시하라, 그리고 창을 들라'라고 새롭게 고쳐읽는다. 그리고 '지금(현)' '노래부르며(시)' '창의적으로(창)' 오늘의 현실을 이겨나가자고 제안한다." (저자의 말 중)

 

청춘이 미래를 보지 못하고, 청춘이 암담한 현실에서 살아가는 나라가 건강할 수 없습니다. 흔들리는 청춘은 흔들리는 대한민국을 뜻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흔들리는 청춘을 도와 서로를 위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은 미래를 원하고, 문제가 개선되기를 원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현실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미화시키려 하지 않고, 누군가만을 탓하려 하지 않고, 비건설적인 태도를 버리고 진정 나아지기 위해 노력할 수 있도록, 출발점을 다지는 것입니다. 임 기자가 말한 것처럼, 위로하기 전 힘들더라도 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총 스물 네 개의 괴롭고 힘든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몇몇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걸까?' 답답한 마음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 현실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합니다. 무작정 '어렵고 힘들다'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어렵고 어떻게 힘든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해야 변화할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해야 할 시간입니다. 선거에 한 표를 행사하며 모든 것을 다 맡겨버린 후 안되면 욕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함께 생각하고 지켜볼 때 비로소 변화가 찾아오지 않을까요? 

나라의 가장 중요한 행사라 할 수 있는 대선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여론도 뜨거워지고 언론플레이도 가중되기 마련입니다.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대한민국 국민들이 더욱 더 첨예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판단할 수 있는 성숙한 국민의식을 가질 수 있기만을 바랍니다. 스스로도 책임전가하며 탓할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을 통해, 부족한 저 자신의 시야를 조금은 더 넓혀준 임지선 기자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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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말하라 - 대중을 사로잡는 소셜 리더들의 소통 전략
미미 고스 지음, 김세진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빈 국립음대에서 작곡과를 다닐 때의 일입니다. 작곡과 음악이론, 지휘, 음향이 한 과로 묶여져 있던 덕에 본인의 전공이 아니더라도 관련분야의 수업이나 리허설 등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참 많았는데요, 오히려 과 수업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운 소중한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학교 오케스트라를 동원한 지휘과의 오페라 리허설은 확실히 대단한 스펙터클이었는데, 오페라 극장에서 직접 관람하더라도 오케스트라와 상당이 떨어져 있을 수 밖에 없는 아쉬움을 충족시킬 수 있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습니다. 편곡, 특히 오케스트레이션을 하다보면 각 악기들이 어떤 음역대에서 어떤 테크닉을 구사할 때 어떤 소리가 나는지 확실하게 알아야 하는데, 오케스트라 리허설은 그런 면에서 가장 이상적인 "실험실"이었으니까요. 원하는 악기들 옆에 자리하고 앉아 악보를 함께 보면서 이것 저것을 관찰하다 보면 그동안 알지 못했던 것들이나 수업 시간에 배우지 못했던 것들을 "산 경험"을 통해 익힐 수 있었습니다.


서론이 길어져버렸는데, 그 때 오케스트레이션 말고도 배운 소중한 지혜가 있었습니다. 지휘 수업의 특성상 오케스트라는 하나지만 지휘자는 매 시간마다 교대하게 되었는데, 각 지휘자마다 리허설을 이끌어나가는 스타일이 다 달랐기 때문에 오케스트라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보는 것도 대단히 흥미로웠습니다. 그러던 중 지휘과 교수님께 중요한 말을 듣게 되었는데요, 바로 "최대한 짧게 이야기하라!" 라는 것입니다.
친절하지만 단호하고 친근하지만 위엄있는 포지션을 소화해야하는 지휘자에게 오케스트라와의 커뮤니케이션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오케스트라라는 거대한 집단 앞에서 한 사람이 어떻게 효과적으로 이끌어나가느냐가 좋은 지휘자가 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니까요. 교수님의 조언은 이어졌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 서면 쓸데없는 말들을 하고 싶다는 유혹이 커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어떻게 가장 적은 말로 가장 효과적인 전달을 할 수 있느냐가 바로 지휘자의 능력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듣고 다시 지휘자들을 살펴보니 분명해졌습니다. 처음 리허설을 시작할 때 어떤 사람은 "좋은 아침입니다. 라 보엠 제 2막부터 시작합니다." 라고 간결하게 말하는 반면 "에, 모두들 안녕하셨어요? 에, 그러니까 오늘 저희가 연습할 곳은, 에, 악보를 보시면, 그러니까 2막있죠? 거기서부터 하겠습니다" 라고 불필요하게 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많은 사족을 붙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오케스트라가 주의력과 집중력을 잃는데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죠.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 그 순간 편한 자세로 고쳐앉거나 잡담을 하고, 휴대폰을 확인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정보만을 간결하게 전달하는 지휘자 앞에서는 워낙 리허설도 컴팩트하게 진행되는 탓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전혀 없었고요.

 

같은 말도 돌려 돌려 말하고, 혹시나 오해할까 두리뭉실 말하기를 즐겨하던 저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집중하지 않는 것을 뭐라고 탓할 것이 아니라, 나 자체가, 내 말 자체가 바뀌어야 하겠구나! 라고 처음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 후로도 자꾸 쓸데없는 가지로 뻗어나가는 성격은 많이 고쳐지지는 않았습니다만). 어쩌면 "한 마디의 위력"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그 때 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간결하고 효과적으로 말해야 할 것인가!"가 궁금해진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위해 명쾌한 해답을 제시할 책을 소개할까 합니다. 단 한 마디로 세상을 바꾼 사람들. 긴 연설이 아닌 단 몇 분 간의 짧은 대화를 통해 원하는 것을 얻은 사람들. 그들의 말에는 어떤 힘이 있었기에 큰 일을 이룰 수 있었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그 스킬을 터득할 수 있을지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가르쳐주는 미미 고스의 "한 마디로 말하라"를 만나보시죠.

 

 

 

 

 

평범함을 버리고 비범함으로 무장하라

 

이상하게 말을 듣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머러스하면서도 지적이고 대쪽같아 보이면서도 친근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죠. 아무리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 틀에 박힌 모습으로 이야기한다면 평범한 대중들은 집중력을 잃기 마련입니다. 반대로 저속하거나 상황에 맞지 않는 태도나 어투 역시 지식의 가치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죠. 그렇다면 어떻게 대중들에게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바로 나를 어필할 수 있을까? 하버드 케네디 대학원의 유능한 강사이자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미미 고스는 "평범한 말이 아닌 결정적 한 마디를 하라"고 조언합니다.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이는 미디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분명하고도 간결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24 페이지)

 

 

 

 

청중이 드러내놓고 지루함을 표현하거나 투덜거리며 자리를 뜨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사실 청중들은 쉽게 지루해합니다.
예의상 자리를 지키며 듣는 척을 한다고 해도 실상은 별로 집중하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어떤 확실한 목적이 있어 청중들 앞에 서서 강연을 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극복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난제 중 하나가 바로 "어떻게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들로 하여금 집중하게 할 수 있을까?"인만큼, 효과적인 소통 전략을 연구하는 것은 리더로써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미미 고스는 모든 것의 열쇠가 결정적 한 마디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자신감과 진취적인 기상을 담아 자신의 메시지와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자신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을 앞에서 발표할 때는 열정은 주제에, 관심은 청중과 한두 개의 핵심 문장에 쏟아야 한다." (83 페이지)

 

한두 개의 핵심 문장을 청중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전략이 필요합니다. 미미 고스는 책 전반에 걸쳐 다각도로 "결정적인" 것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는 말이 있죠. 같은 말이라도 어떻게, 어떤 억양으로 어떤 제스쳐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그 파급력은 천차만별이 된다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성공과 실패의 길이 나뉘게 되는 것이고요.

 

평범한 문장: 저는 세금을 납부하고 있으니 말할 권리가 있습니다.
결정적 한 마디: 저는 이 마이크를 위한 세금을 냈습니다.
(51 페이지)

 

 

 


자신이 아닌 청중을 위한 연설을 하라

 

독일어권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아왔기에 전공은 음악이었지만, 독일 문학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컸습니다. 읽어야 할 책부터 오페라 등의 예술의 근원 또한 문학이었기 때문인데요, 대학원에 들어가 영미권 전문서적을 읽게 되면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내용이 어렵고 존경받는 책일 수록 독일어로 쓰여져 있을 경우 복잡하고 어려운 반면, 영어로 쓰여진 책들은 오히려 문장이 간결하고 읽기 쉽게 되어있었다는 것인데요, 물론 모든 책들을 이렇게 단순하게 나눌 수는 없겠지만, 전반적인 인상이 그랬습니다. 독일어에 비해 영어 실력이 많이 뒤쳐졌지만 전문서적을 읽으면서는 별로 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였습니다. 진리는 표현할 수 없다는 마인드의 독일어권과는 달리 "어떻게 해서든 쉽고 편하게 독자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실력이다!"라는 실용주의의 대비가 극명했기 때문입니다.


문화가 다르고 트렌드가 다르기에 이 두 문화권을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연설에 있어서만큼은 충분히 고려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어려운 전문용어와 복문을 사용하는 사람의 연설을 들으면서 "정말 똑똑해보인다"라고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뭔가 "있어보이는" 말투가 그 지식의 정도를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그것이 그 사람의 의견에 공감하는데 있어서도 도움이 될까요?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한두 문장, 몇 분 그리고 몇십 분의 시간이 흘러가면서 이해하지 못할 수록 집중력도 떨어지고 결국은 관심마저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을 움직인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은 간결한 몇개의 단어로 축약될 수 있었습니다. "I have a dream"이라는 쉽고도 평범해보이는 한 문장은 킹 목사의 신념과 만나 역사에 기록될 결정적 한 마디가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 수많은 사람들을 설득한다고 할지라도 도달하기 어려운 효과가 단 몇 분의 연설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의 슬로건 역시 간결했습니다. "Yes, we can." 이 한 마디는 기적을 꿈꾸던 빈민가 출신의 젊은 정치가를 미국의 대통령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공약이 아닌 머릿속에 각인되는 강렬한 메세지가 미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셈입니다.

 

 

 

 

"사업을 하든, 세임을 하든 상대에게 스토리를 들려주고 공감대를 일깨워라. 그들이 당신을 이해하고 관계를 맺을 수 있게끔 유도해주도록 하라. 상대의 마음속에 떠오른 그 감성을 정확히 짚어주는 한 마디로 상대를 자극하고 당신의 이야기에 반응하게 하라." (124 페이지)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상대방의 공감을 얻지 못하면 무용지물입니다. 이것은 넓은 층을 상대로 한 발언일 때 더욱 상기되어야 하는 사실입니다. 나를 기준으로 한, 나의 지식 혹은 지혜를 뽐내기 위한 연설이 아닌, 상대방의 시선에서, 상대방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 그것이 결정적 한 마디가 지녀야 할 필수조건이라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연설하는 것은 자기 자신일지 몰라도 그 연설의 완성은 그것을 듣고 공감해주는 청중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의 힘

 

바야흐로 SNS의 전성시대입니다. 예전에는 주절주절 자신의 의견을 적어내려가는 것이 유행이었다면, 요즘은 140자라는 제한 안에서 얼만큼 간결하고 효과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가가 관건입니다. 세상이 빨라지고 모든 것의 속도가 올라갈 수록 사람들 역시 인내심을 점점 잃어가기 마련입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굳이 나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여달라고 하려면 결정적 한 마디가 필요합니다. "낚시성 문구"가 아닌, 신념과 정보를 훌륭히 대변해주는 한 마디가 사람들의 마음에 꽃힐 때, 비로소 궁금함과 흥미를 가지고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하게 될테니까요.

 

 

 

 

"한 마디로 말하라"의 장점은 많은 예문들을 통해 결정적 한 마디를 위한 감각을 키우고, 저자의 조언을 곱씹으며 자신의 신념을 정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한 마디로 말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자부심과 책임감이 필요합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무한하고 공간이 무한하다고 생각하면 중언부언하거나 생각나는대로 말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제한을 주면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압축하고 다듬는다는 것은 그만큼 연설에 대한 책임감이 커지는 것을 뜻합니다. 확고한 의견을 가지고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더욱 노력하게 된다는 것이죠.

 

꼭 사업가나 정치인이 아니라 연설할 기회가 없다고 할지라도, 인간관계에 있어서 결정적 한 마디의 힘은 큽니다. 그것이 가족이든, 연인이든, 동료든 혹은 친구든 확실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곧 상대방을 배려하는 일일테니까요. 저 자신도 워낙 한 번 말을 하기 시작하면 길어지기 십상이고 자꾸 곁가지로 뻗어나가는 버릇이 있는지라 이 책을 읽으며 많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한번 든 습관을 고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미미 고스가 제안하는대로 연습하면서 자신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다듬는다면, 분명 좋은 결과를 얻을 날이 머지 않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책이 빠르게 더 빠르게 돌아가라고 재촉하는 세상에서 고군분투하는 많은 분들께 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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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
올리버 색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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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의미를 함축한 한 마디가 구구절절 설명보다 강렬하게 와닿을 때가 있습니다. 단지 한 문장을 읽었을 뿐인데도 머릿속에 그 내용이 펼쳐지는 구절처럼요. 책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제목은 그런 면에서 대단히 중요하고, 작가들 역시 자신의 작품에 어떤 제목을 붙일까 고민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독서를 하면서 사실 영향을 받지 않으려 해도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이 제목입니다. 그렇게 책을 읽으려 샀다가 "낚인" 경험도 자주 있었고, 책의 제목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아 실망했던 적도 있었지만, 요즘도 역시 제목의 유혹에 넘어가곤 합니다. 그만큼 제목의 파급력이 대단하거나, 경험에서 배우지 못한 저의 무능력함일 수도 있겠네요.

오늘 소개할 책이 그랬습니다. 제목을 읽고는 "아, 이 책은 읽어야겠다!"라는 생각이 든 책이죠. 그렇게 상세설명을 읽던 중 정말 읽어야 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뮤지코필리아>를 통해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된 저자 올리버 색스 박사의 실제 이야기를 엮은 책이니 말입니다. 강렬한 제목으로 눈길을 끄는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 를 소개합니다!





이것은 실화다!


처음 이 책의 소개글을 읽고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미 "뮤지코필리아"를 통해 관심을 갖게 된 저자 올리버 색스 박사가 사고를 당해 쓴 책이라니! 나이도 많으신 분이 산에서 사고를 당하셨으니 얼마나 심각하려나 하고 말이죠. 하지만 이런 (순진무구한) 오해는 책의 첫 페이지를 넘기자 마자 해소되었는데, 이 책은 색스 박사가 1984년 출간한 책으로, 1991년 새로운 후기를 덧붙여 재출간한 책을 번역한 것입니다. 결국 한국어 번역판의 출간이 늦어졌을 뿐, 2007년에 첫 출간된 뮤지코필리아보다 33년 전의 책이라는 것이죠. 우리나라에서는 색스 박사의 대표작 "뮤지코필리아"를 비롯해 "깨어남", "편두통" 등을 이미 선보인 알마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 책날개에는 올리버 색스 박사의 근간 소식도 담겨져 있어 다음에 꼭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이미 뮤지코필리아를 읽어본 분들이라면 알고 계시겠지만 올리버 색스 박사는 저명한 신경과 전문의로 대단한 음악애호가로 알려져있습니다. 음악을 향한 그의 열정으로 탄생된 책이 뮤지코필리아인데요, 뮤지코필리아를 읽어보면 색스 박사가 음악에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글을 쓰는데에 있어서도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뮤지코필리아가 상당수 전문적이고 어려운 내용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 의학적인 지식이 전무한 사람도 즐겁게 읽어갈 수 있습니다.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이 책은 저자의 직접적인 경험과 환자라는 "이색적인" 환경을 주제로 한만큼 재치있는 그의 이야기가 더욱 돋보이는 책입니다. 노르웨이의 산을 홀로 오르다가 갑작스럽게 조난당한 색스 박사는 자신의 왼쪽 무릎근육이 처참하게 찢겨져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얼마 전 홀로 산행하던 사람이 두 다리가 부러진 채로 사망하여 일주일만에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지라 그 순간만큼은 너무도 죽음이 가까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도움을 줄 수 있을만한 사람들이 2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도 겁이 질린 것은 그 통증 때문이라기보다는 무릎이 힘없이 툭 꺾어지는데도 내가 그것을 막거나 다리를 통제할 길이 전혀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다리가 마비된 듯한 느낌도 무서웠다. 그런데 한 순간 그토록 압도적이던 두려움이 나의 '전문가다운 태도'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래. 의사 양반.' 나는 혼잣말을 했다. '다리를 좀 진찰해보겠소?" (20 페이지)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서도 시종일관 유머러스함을 잃지 않고 지나치게 "전문가답게" 대처하는 그의 모습은 '이것이 정말 실화일까?'마저 궁금하게 합니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데도 그는 특유의 여유로움으로 침착하게 해야 할 일들을 하였고, 다행스럽게 구조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드라마가 끝난 것이 아니었으니, 의사로써, 의학 박사로써 이미 오랜 경험의 소지자인 그에게 이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닌 오랜 여정의 시작이었기 때문입니다.



의사에서 환자로


"나는 갑자기 버림받은 사람처럼 쓸쓸해져서 환자들 특유의 본질적인 고독을 느꼈다. 병원에 입원한 뒤로 처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았다. 산에서도 그런 고독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반드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어떻게든 안심이 되는 말을 듣고 싶었다. 힘들고 당혹스러운 상황에서도 자신이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말을 꺼낸 그 젊은 환자와 같았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내 주치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100 페이지)





흔히들 의사라는 직업을 "천직"이라고 합니다. 진심으로 사명감과 비전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수행할 수 없는 하늘이 주신 직업이라는 거죠. 거의 모든 의사들이 이러한 "소명"을 가지고 공부하고 또 자격을 얻었겠지만, 매일 매일의 사투 속에서 그 소명을 기억하고 실천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에 등장하는 의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색스 박사에게 절대적인 연민과 동정심을 가진 독자로써 책을 읽으면 그야말로 "악덕 의사들이군!" 하며 욕을 할 수 밖에 없지만, 실상은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자신의 주치의에게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던 색스 박사도 결국 인정하는 부분이죠. 색스 박사의 주치의들은 더이상 자신의 왼쪽 다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색스 박사의 말을 들어주거나 기분을 이해해주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저 기계적으로 "수술은 잘 끝났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할 뿐입니다. 그나마도 주치의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는 것은 지나치게 짧은 한정된 시간 뿐, 그 외에는 주치의가 전하는 "전달사항"에만 의지해야 합니다. 색스 박사는 주치의가 자신에게 어떤 악감정이 있어서 고의로 자신을 피한 것이 아니라, 그가 단지 의사라는, 주치의라는 그의 임무에 충실했을 뿐인 것을 깨닫습니다.


"그동안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던 것은 두 가지였다. 아마 모든 환자들이 나와 똑같은 처지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환자의 조건이니까 말이다. (...) 하나는 나의 존재와 공간이 유기적으로 단호하게 부식되는 신체적인 ('신체-존재론적인') 장애였다. 나머지 하나는 환자로 전락하면서 생겨난 마음의 문제 (그다지 적절한 단어는 아니다)로, 특히 '그들'과의 갈등 및 '그들'에게 항복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여기서 '그들'이란 의사, 병원 체제 전체, 병원 자체를 뜻한다." (189 페이지)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병원들을 보면 주인공에게 세심한 배려와 관심을 보여주기 마련이지만 (아니면 반대로 악덕 의사와 간호사들이 주인공을 괴롭히기도 합니다만) 병원에 입원해본 사람이라면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것은 의사나 간호사들이 못되거나 직업의식이 투철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의 일상적인 업무가 힘들고, 환자들의 호소나 불만이 대부분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것을 일일히 대꾸하기에는 이미 그들의 경험과 지식이 "쓸모없는 일"이라고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성적으로 유쾌하고 낙천적인 올리버 색스 박사가 직접 환자가 되어 겪은 체험은 후에 그의 전반적인 의사 인생에 있어서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역지사지의 감정을 제대로 알기 어려운 법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당시만 해도 정신착란이나 유별난 행동으로 치부되었던 "신체이미지장애""신체자아장애"를 색스 박사 자신이 직접 경험하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큰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뛰어난 의사이자 학자인 그가 이 분야를 새롭게 연구하고 학계에 보고함으로써 이후 많은 환자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절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신적 질환이 아니라 신경단절로 인한 지극히 정상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색스 박사가 밝혀주지 않았다면, 아직도 많은 환자들의 호소는 일방적으로 무시되지 않았을까요.



흥미진진한 의학 드라마


예전에는 미드 <닥터 하우스>의 대단한 팬이라 절대 놓치지 않고 매 회를 챙겨보던 기억이 납니다. 시즌 3까지는 정말 열심히 보았던 것 같은데, 조금 더 바빠지면서 어쩔 수 없이 "포기"하게 되었죠 (라고 말하면서도 언젠가 시즌을 몰아 볼 생각은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괴팍한 성격의 하우스와 그 주변인물들이 펼치는 인간관계도 흥미로웠지만 주요 관심사는 역시 "진단학과"라는 특수 상황의 설정이었습니다. 물음표만 던지는 희귀병 앞에서 고민하는 하우스. 그리고 의학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조금만 집중하면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친절한 "시뮬레이션" 설명 (하우스를 안 좋아하는 지인들의 경우 상당히 이러한 시뮬레이션 장면에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이더군요), 그리고 결국은 비밀의 열쇠를 찾아내고야 마는 천재 의사. 의학 드라마가 이렇게 재미있는 것인지 처음 알게 해 준 작품입니다.

하지만 하우스만큼이나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가 흥미진진한 것은 바로 이것이 "뛰어난 의사가 직접 겪은 희귀한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하우스에서처럼 극적인 전개나 숨겨진 반전은 없다 할지라도, 색스 박사가 아주 작은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고 보고하는 병상 기록은 드라마 못지 않은 전개를 자랑합니다. (이것 역시 색스 박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메모를 쉬지 않는 메모광이었다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겠죠)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환자는 드물기 마련입니다. 행여 언변이 뛰어나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의학적인 전문지식 앞에선 한없이 약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언변이 뛰어나고 의학적인 지식이 풍부한" 색스 박사가 너무도 무력하게 "병원 권력" 앞에 무너지는 것을 보며 의아하기도 하고 조금은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색스 박사도 이 정도인데, 역시 나는 아무런 것도 할 수 없는 것이었어"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문득 몇년 전 급작스러운 목디스크 통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19 구조대에 실려갔던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알게 된 상황이지만 그 때 갑작스럽게 일어날 수 없고 움직일 때마다 말못할 고통에 시달렸던 것은 목 부근의 척추 한마디가 삐져나온 상태였기 때문이라 하더군요. 관절이 삐져나온 것이 그렇게 아프다니, 도대체 목이 부러지고도 살아남은 분들은 어떤 고통이었을까 섬뜩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잠옷 바람으로 119에 실려와 응급실로 이송되었는데, 꽤나 추웠던 날씨임에도 불구 병원 간이침대에 누인 채로 한참을 기다렸던 기억이 납니다. 응급실에는 저를 포함, 두 세 명의 환자 밖에 없었는데도 말이죠. 간신히 엑스레이를 촬영하고 제 담당의사라는 사람이 들어와 한다는 말이 "뼈가 안 부러졌어요. 안아프니 그만 일어나세요" 였습니다. 맨발도 시리고 잠옷도 창피하니 누구보다도 일어나서 집으로 가고 싶었던 것은 저였는데 그렇게 말을 하니 얼마나 야속했는지. 게다가 머리 정수리 부근을 두드리면서 "이러면 아파요?"하고 물어오는데 몸만 멀쩡했다면 멱살이라도 잡아주고 싶은 심정이더군요. 얼마나 아픈지 눈물이 나와 말도 할 수 없었는데 말입니다.

강한 진통제를 투여받고 약간의 물리치료를 마친 뒤 집으로 돌아오며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고통을 피력하지 못한 스스로에게 화도 나고 연민도 들었습니다. 제대로 이야기만 했다면 의사가 좀 더 알아주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 때문에 분하기도 하더라고요. 하지만 결론적으로 보자면 의사의 소견대로 "안 부러졌기 때문에" 무사히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러기까지 약 3개월의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그리고 그동안 혼자 거동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느낄 수 있었지만) 말입니다.


무력하고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환자의 신분으로 오랜 시간 병원에 머무르면서 색스 박사는 확실히 의사로서 "새롭게" 태어난 듯 합니다. 남의 고통이 아니라 자신도 겪어본, 체험해본 고통이기에 작은 말이라도 허투루 듣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해하려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더 나아가 이것이 하나의 "영적인 드라마"였다고 회고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나의 경험은 종교적인 것이었다. 확실히 나는 문제의 다리를 잃어버렸을 때 그 다리가 하느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으며, 다리를 되찾았을 때는 초월적인 의미의 회복이라고 생각했다. 그 경험은 또한 황홀한 과학적 경험이자 인지적 경험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과학과 인지의 한계를 초월했다. 아무래도 이것이 나를 영원히 바꿔놓을 것 같았다. 나로 하여금 과학적 열정과 엄격함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은 채 철학과 종교에 공감하게 만들 것 같았다." (228 페이지)





다행스럽게도 색스 박사의 여정은 해피 엔딩으로 끝나게 됩니다만, 그는 여기서 머무르지 않고 자신이 겪은 신경단절에 의한 현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한 진짜 해피 엔딩은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네요. 앞서 말했듯, 색스 박사가 스스로 이런 경험을 한 것은 의학계의 시선으로 보자면 대단한 행운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색스 박사는 그로 인해 참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겪어야 했지만 말입니다.

사건의 개요와 결말을 알고 읽었는데도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흥미진진했던 책이었기에 오히려 끝났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는데요, 다행스럽게도 글쓰기에 부지런한 색스 박사의 다른 근간을 위로삼기로 했습니다. 사건의 진행과 함께 길어지는 색스 박사의 독백은 의학적 지식이 전무한 저로써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습니다만, 워낙 친절한 부연설명과 옮긴이의 추가 설명으로 무리없이(?) 완독할 수 있었답니다. 오히려 신경학이라는 다소 생소한 분야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고요.

의학에 관심이 많은 분들도, 드라마를 즐겨 보시는 분들도, 색스 박사의 저서를 감명깊게 읽으시는 분들도 모두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책 -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 그 진짜 흥미진진함은 그것이 "실화"라는 것과 뛰어난 문장력으로 마치 독자 스스로가 사건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듯 흡입해오는한 색스 박사의 저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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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다른 사람들 - 인간의 차이를 만드는 정서 유형의 6가지 차원
리처드 J. 데이비드슨 & 샤론 베글리 지음, 곽윤정 옮김 / 알키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한 번 잘못 알려진 사실을 뒤집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저번에도 언급했던 월터 리프먼의 명언 "모두가 비슷하게 생각할 때, 아무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에서도 알 수 있듯, 너무나도 당연하게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그것의 부당성을 지적한다면 오히려 상식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질타를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태양이 아닌 지구가 돈다는 것을 주장하고 나서자 그는 생명의 위협까지 받게 되었던 것처럼요.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의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잊어버리거나 리스크를 방지하기 위해 혼자서만 조용히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과학과 혁신은 용기 있는 몇몇 사람들의 끊임없는 투지와 연구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당시 그들은 수많은 고초와 수난을 겪었을지 모르지만, 훌륭한 과학자들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진실"에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이제는 태양이 돈다고 주장한다면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 취급을 받겠지만, 이런 관점의 변화와 의식의 개선이 이루어질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지나야 했습니다. 어디엔가 숨겨진 "진실"을 찾아 진정한 과학자들은 오늘날에도 비난과 조롱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여기 오랜 시간 굳혀져온 고정관념과 싸운 또 한 과학자가 있습니다. 현재 위스콘신 대학에서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리처드 J. 데이비드슨 교수 역시 자신의 의문과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오랜 시간 싸워야 했고 수많은 연구를 거듭해야 했습니다. 뇌과학을 비롯한 신경과학의 세계적인 전문가이자 탁월한 심리학자인 그의 저서 "너무 다른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머리와 가슴이 서로 다른 세상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데이비드슨 교수가 자신의 연구를 시작했던 1980년대에는 머리와 가슴은 서로 전혀 다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었습니다. 즉, 머리는 이성을, 마음은 감성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데이비드슨 교수는 이미 1970년 이전 EGG (뇌전도 혹은 뇌파를 측정하기 위해 전기신호를 감지하는 센서를 두피에 부착하는 기기) 실험을 통하여 인간의 뇌파가 감정 변화에 따라 특정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뇌와 감성이 연결되어있다는 것과 정서가 인간의 행동패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학계에 전혀 알려진 바도 연구된 바도 없었기에 그는 자신의 주장을 인정받기 위해서 인내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당시 행동주의자들은 우울증이나 양극성 장애, 정신분열증과 같은 심각한 정신질환을 '보상과 벌'이라는 말도 안 되는 관점에서 비난하고 있었던 것이다. 행동주의자들은 망상이나 기분장애를 앓는 사람들이나 자살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그렇게 행동할 때 보상을 받고, 정상적으로 행동할 때 벌을 받기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그러한 주장이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울 뿐만 아니라 생물학, 특히 뇌를 무시하는 주장이라며 강력하게 비난했다." (49 페이지)

 

젊지만 확신에 찬 그의 연구는 시간이 지날 수록 그 가치와 효과를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책이 출간되는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무려 275편의 논문과 13권의 책을 집필한 그의 열정은 수 많은 수상 경력으로 이어졌는데, 현재 데이비드슨 교수는 미국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신경과학계에서는 전후무후한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통속적인 "머리와 가슴" 이론에 대한 반박이 오늘날의 그가 되기까지의 첫걸음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서론과 첫 몇 장 동안 연구의 계기와 시작 그리고 검증과정이 소개되어 있는데, 지치지 않고 연구를 위해 모든 것을 건 그의 모습에 감동받았습니다. 그러한 노력과 열정이 있었기에 깊이 자리잡고 있던 "잘못된" 지식을 정정할 수 있던 것이 아닐까요. 

 


정서 유형의 여섯 가지 차원

 

감성, 감정과는 상극으로 여기어졌던 뇌가 정서를 지배한다는 그의 주장은 책 전반에 걸쳐 의학적으로, 하지만 너무 어렵지 않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뇌과학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의 논증을 따라가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는 것이 이 책의 큰 장점입니다. 또한 그가 소개하는 정서 유형의 여섯 가지 차원 역시 어렵고 심오한 전문용어가 아닌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하고 추측할 수 있을만한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정서 유형의 여섯 차원 역시 특정한 뇌 회로의 활동을 반영한다. 각 차원에는 관점에서의 긍정이나 부정과 같은 양극단이 존재하는데, 이는 특정 뇌 회로의 활동이 증가하거나 감소함으로써 나타나는 결과이다." (121 페이지)

 

 

 

 

머리와 가슴이 서로 나뉘어져있다던 예전의 주장에 확실히 반대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방식이 뇌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은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뇌의 특정 부분에 손상을 입게 되면 정서적인 큰 변화를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빨리 극복하고 다시 삶의 페이스를 찾을 수 있는 성격의 사람은 특별히 긍정적인 마인드나 의지를 가진 것이 아니라 뇌의 전전두엽피질과 편도체가 빠른 신호를 주고받는다는 해석은, 마치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 몸에 일어나는 화학작용을 의학적으로 분석한 것만큼이나 이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순수과학이 그렇듯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사명감"에서 많은 연구가 시작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데이비드슨 교수의 연구는 우리에게 있어 형이상학적인 개념이었던 "정서"를 손에 잡힐 수 있는 척도로 해석할 수 있게 만들어주니까요.

 

- 회복탄력성 (Resilience)
- 관점 (Outlook)
- 사회적 직관 (Social Intuition)
- 자기 인식 (Self-Awareness)
- 맥락 민감성 (Sensitivity to Context)
- 주의 집중 (Attention)

 

이 여섯가지 파라미터들이 합쳐서 정서 유형을 만들고 각 사람은 해당 파라미터의 눈금이 얼마나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치우쳤냐에 따라 특정한 정서 유형으로 나뉘어질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연구의 진정한 가치는 어떤 사람을 어떤 정서 유형에 분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겪는 특정 "정서 변화" 및 "감정" 을 과학적으로 분석함으로 아직 까지 많은 의문과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심리학의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울증이나 반사회적 경향 혹은 자폐증 같은 지금까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분야를 보다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에 있어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또 한 가지, 데이비드슨 교수는 "타고난 정서"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은 그 뿐만 아니라 신경과학의 저명한 학자들이 함께 의견을 나누고 있는 것으로 선천적인 유전자보다는 후천적인 환경과 교육이 한 사람의 정서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이미 수 차례의 실험을 통해 검증된 바 있습니다. 그는 각자가 처한 환경에 따라 특정 유전자의 특성이 그 사람의 정서에 나타나거나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변화를 줄 수 있다고 덧붙입니다.

 

"환경이 단지 행동이나 뇌의 기능을 변화시키는 것만은 아니다. 어느 유전자가 켜지고 꺼지는지 그리고 이에 따라 어떤 유전적 특성이 발현되는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188 페이지)

 


정서적 삶의 열쇠

 

"정서 유형의 차원에서 극단에 해당하는 경우 병리적인 상태가 될 가능성이 크다. (...) 누군가가 정신질환에 걸릴 가능성이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정서 유형을 고려해야 한다. 정서 유형 그 자체가 정신질환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정서 유형이 정신질환 발병 가능성을 결정짓는 다른 요인과 상호작용하는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229 페이지)

 

정신질환은 말 그대로 정신적인 장애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 외국보다 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정신적인 상태나 건강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려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폐쇄적인 사회가 정신적으로 연약한 사람들에게 불리한 환경을 제공하게 되고, 어쩌면 아무렇지도 않게 회복될 수 있었을 만한 상황도 극적으로 치닫을 수 있는 만큼 보다 정확하고 올바른 인식이 절실합니다.

 


저자는 정서 유형을 파악함으로 인해 어떤 사람의 잠재적인 위험성을 파악하고 예방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이런 주장은 윤리적으로 볼 때에는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어 보입니다. 단지 어떤 사람에게 정신질환의 위험요소가 예측된다고 하여 그 사람을 "위험군"으로 분류하는 것은 무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쪽에서 생각해보면 "정서 유형"을 파악하는 것은 확실히 정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입니다. 특히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의 경우, 자신만이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세상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뇌의 장애 혹은 오류라고 생각을 전환하게 되면 보다 긍정적으로 치료에 임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과학과 가장 동떨어진 것처럼 보였던 "명상"에 대한 저자의 예찬은 기대 이상입니다. 저자는 달라이 라마와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며 동양 명상에 관심을 가졌고, 그것이 정서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오랜 기간 다양한 명상 연구를 걸쳐 알게 된 결과는 (동양인으로써) 예측은 했지만 그래도 상당히 놀라웠습니다. 명상훈련을 통해 주의 실종이나 선택정 주의 집중 등 기초적인 정신 기능이 향상될 수 있다는 것은, 저자가 궁극적으로 "명상을 통해 더 나은 정서건강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은 뒤, 정서를 파악함으로 인해 보다 나은 정신적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에는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게 되었습니다만, 확실히 아직 상당한 의문이 남는 것이 사실입니다.
데이비드슨 박사의 연구 결과를 보면서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들에 얼마나 많은 맹점과 모순이 있는지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신경과학의 깊은 연구를 담고 있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비전문가 역시 함께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대중적입니다. 또한 다루고 있는 분야 자체도 현대인들이 가장 궁금해한다는 "핫"테마 심리학과 교차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즐겁게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단 이 책의 원제인 "The Emotional Life of your Brain (당신의 뇌의 정서적 삶)"을 "너무 다른 사람들"이라고 의역한 것은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인데요, 제목 때문에 원서의 과학적인 측면이 부각되기 어렵지 않나 하는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인간의 차이를 만드는 여섯 가지 정서적 유형의 차원. 이 연구가 계속되어 날마다 새로운 진실에 다가서게 된다면 언젠가 심리학과 신경과학이 한 곳에서 만나는 날이 올까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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