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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수업 - 품격 있는 삶을 위한 예술 강의
문광훈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3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참 이상하죠. 어렸을 때는 관심도 없던 철학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공감하고 관심을 갖게 되면서, 급기야는 철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하지 않고는 어떤 학문도 심도깊게 다룰 수 없을 것이라는 다소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수천년동안 이어져내려온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탐구의 역사를 공부하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생각을 내놓는 자체가 어리석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반면 미학은 (뭔가 철학과 비슷하면서도 비슷하지 않은 덕분에) 30대 후반을 향해 가는 지금까지도 저에겐 "이해할 수 없는 학문"으로 남아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예술임을 생각해봤을 때 더욱 아이러니해요. 미학과 친해지기 위해 시시때떄로(?) 노력해봤지만 아직까지도 이것이 과연 하나의 학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인지, 적어도 납득할 수 있을만한 범위 안에서 평준화되어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분야인지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잘나고, 잘 알아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 개인적인 의견이 그렇다는 말이에요 ㅎㅎ
때문에 이 <미학 수업>을 읽기 시작한 건, 다시 한 번 미학 입문에 도전하며 미학과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컸어요. 책 표지에 쓰여진 "예술은 삶의 한계 속에서 어떤 자유를 느끼게 하고, 그 자유가 얼마나 고귀한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름다움에 대해 끝없이 질문해야 하는 이유입니다"라는 저자의 말이 마음에 와닿았기에 기대도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결국 이번에도 미학과 친해지는 건 실패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이 나쁘다거나, 내용이 부실하다던가 하는 문제는 아니에요. 분명 저자는 폭넓은 예술 분야를 탐닉하며(사실 대부분이 시각예술에 한정되어있다는 아쉬움이 들긴 하지만) 깊이 사유한 끝에 글을 쓰셨겠지만, 나름 예술을 업으로 감고 있는 사람으로서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이 참 많았어요. 물론 아름다움이라는 것 자체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개념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지만 저자가 말하는 예술과 아름다움의 근거가 (제 생각으로는) 상당히 협소하고 주관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에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시작은 (책 표지에 쓰여지기도 했던) 저자가 말하는 예술의 정의, 나아가 예술의 가치부터였는데요.
예술은 삶의 한계 속에서 어떤 자유를 느끼게 하고, 그 자유 이상의 책임을 떠올려주며, 이런 책임 속에서 다시 자유가 얼마나 고귀한지를 절감케 한다. 자유와 책임 중 하나라도 누락된다면, 예술은 미망에 불과하다. 대중을 우매한 집단으로 변질시킨 파시즘의 예술 스펙터클은 이 점 - 집단적 광기로서의 예술을 잘 보여준다.
저자가 말하는 예술은 너무나도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어서, 이대로라면 어디가서 감히(?) 예술하는 사람이라고 입도 못 뗄 것 같습니다 ㅎㅎ 정말 예술이 자유와 그 자유 이상의 책임을 떠올려주어야만 한다면, 그렇지 않은 것은 예술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일까요? 자유와 책임을 통감하기 위해 예술 안에서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은, (무려 100년의 시간이 다 되어가는) 1923년 쇤베르크가 12음계를 선포하며 음악을 더이상 "아름다운 것"의 범주에 가두지 않았던 것과는 상당히 상반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일까요. 저자의 레슨에 등장하는 작품들 역시 현대 작품보다는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작품들이 대부분입니다. 두 꼭지만 허락된 음악 분야에서는 19세기 낭만주의의 대표주자 슈만과 브람스가 전부죠.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책만 읽어서는 2019년에 출간되었는지 1919년에 출간되었는지 헷갈릴 것 같습니다. 마치 적어도 지난 100년간의 예술사는 건너뛴 그런 느낌이죠.
(오해를 막고자 첨언하자면 음악 분야가 그럴 뿐 미술과 문학에서는 20세기의 작품들이 다수 출연합니다. 비중이 크진 않더라도요)
얼마 전 극단 <미추>의 뜻을 듣고 감명을 받았어요. 아름다울 미에 추할 추. 극단에게 이보다 더 명료하고 어울리는 이름이 있을까 싶었답니다 (도올 선생이 만들어주신 이름이라고 하더군요). 추한 것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이 있고, 아름다운 것이 있기에 다시금 추한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굳이 작품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거나 메타텍스트를 찾지 않더라도 개인적인 감동과 경험을 통해 스스로 아름다움(혹은 추함)을 사유하는 것이 미학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술을 닿을 수 없는 경지에 올려놓고 조건에 부합하는 것들에만 아름다움을 논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어요. 사실 그 조건에 부합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주관적인, 어찌보면 비논리적인 과정인데 말이죠.
어찌 써놓고 보니 책에 대해 어줍잖은 비판만 늘어놓은 것 같네요. 본심은 그게 아니고... 그저 이번에도 미학에 입문하는 걸 실패한 넋두리라고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자의 지성을 의심하는 것도, 미학이라는 학문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라 그저 이 책을 통해 공감하고 예술과 그 아름다움에 대해 사유하는 게 좌절된 소수의 의견일 뿐입니다 ㅎㅎ 어쩌면 가장 큰 탓은 "멈춰 있는 삶을 일깨울 격조 높은 통찰의 시간을 만나다!"라는 카피 문구에게 해야할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