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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으로, 시베리아 횡단열차 - 일러스트레이터 이다의 카메라 없는 핸드메이드 여행일기
이다 지음 / 미술문화 / 2024년 7월
평점 :
다꾸 좋아하시나요? 저는 일찌감치 아이패드와 전자문서로 거의 모든 생활 패턴을 바꿨지만 꾸역꾸역(?) 트래블러스 노트 다이어리를 가지고 다닙니다. 종이에 쓰는 손글씨와 포스트잇, 손그림의 느낌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에요. 제가 알던 다꾸와는 조금 달라졌지만 거의 모든 것이 디지털화된 지금도 많은 분들이 취미로 다꾸를 하시는 걸 보면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디지털이 편하다고 해도 사람의 손으로 만든 무언가의 기쁨과 가치는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처음 <내 손으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받아 들었을 때 (그리고 펼쳐보았을 때) 탄성이 절로 나왔답니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심지어 ISBN 넘버까지도!) 모두 손글씨고 되어있거든요. 손으로 그린 책이라는 컨셉에 맞게 아주 작은 디테일까지도 사람의 손길이 스며있는 책입니다. 여행하며 스크랩한 티켓이나 마스킹테이프 같은 것을 제외하면 이 책에 있는 모든 그림과 글을 저자가 직접 그렸다는 거죠. 적지 않은 분량인데 정말 엄청나지 않나요.
마음이 맞는 친구 세 명이 (물론 끝까지 완주한 건 두 명이지만) 그야말로 갑작스럽게 계획한 시베리아 횡단 여행. 모두에게 초행길이건만 약 20일간의 일정을 촘촘하게 짠 것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 싶었어요. 아무리 구글 번역이 뛰어나고 도움이 될만한 정보가 지천에 널렸다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 러시아 여행을 이 정도로 본격적으로 계획하다니! 그녀들은 모두 능력자임에 분명합니다.
출발하기 나흘 전 거짓말처럼 두 사람에게 찾아온 심한 감기, 결국 러시아 횡단을 마칠 때까지 낫지 않았다고 하네요. 출발 직전부터 끝나는 그날까지 도저히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는 여행기는 마치 한 편의 스릴러(?)를 보는 것 같았어요. 딱히 무서운 장면이나 괴물은 등장하지 않지만 너무 현실적이고 공감이 되어서 함께 마음을 졸이며 읽게 되더라고요. 러시아 물가가 저렴하고 여행 비용도 부담스럽지 않은지라 '어디 나도 한 번?' 용기가 생길 것 같았는데 반쯤 읽을 때 즈음에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제 체력으로는 도저히 무리, 무리다 싶었어요. 그런 면에서 저자를 따라 책으로나마 여행할 수 있었던 게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여행을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부터 준비 과정(이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한 달 정도 남은 출국 전 꼼꼼하게 책을 읽고 러시아에 대해 공부하는 저자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이 여행을 진지하게 준비했는지 알 수 있었어요. 러시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지라 많은 배움과 도움이 되었습니다)부터 준비물, 노하우와 시행 착오 등이 자세하게 나와있기 때문에 시베리아 횡단 열차 여행을 계획하고 계신 분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여행 가이드에도 나와있지 않을만한 내용들인지라 직접 확인해보시길 바라요 :)
367페이지의 분량을 손글씨로 읽는 건 처음인데, 중독될만큼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똥손이라 다꾸는 못할지언정, 저도 이렇게 일상을 기록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진이 단 한 장도 들어가있지 않은데 그 어느 여행기보다 생생한 느낌이 전달되는 특별한 책입니다. 딱 한 가지 조금 불편한 점이 있었는데, 아무리 에세이 형식의 기록이라지만 비속어가 많아 거북했어요(물론 그 상황에서는 그 말 밖에 안 떠오를 것 같다는 데는 십분 동의합니다). 뭔가 조금 더 독자를 배려하는(?) 정제된 언어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한두 번이면 그런가보다 할텐데 나중에는 좀 심하다 싶더라고요.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저도 참 나이가 들었나봅니다.
앞으로도 계속될 저자의 여행을 응원합니다. 그때마다 이런 멋진 책이 나올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겠죠. 저자 덕분에 찌는 듯한 더위에 온 몸이 꽁꽁 얼 것 같은 러시아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으니까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