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네기식 휴먼스피치 - 마음을 움직이는 소통의 기술
박영찬 지음 / 시그마북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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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말을 하거나 글로 써 보내는 것은 가장 널리 알려진 - 그리고 널리 사용되는 "소통의 기법" 중 하나이지만, 말과 글만큼 소통을 방해하는 요소도 드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무엇을 말하느냐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전하는지에 따라 확실한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이죠. 어떠한 목적과 이유로 인해 선택한 소통의 방식이 오히려 오해를 일으켜 역효과를 내버리는 것. 누구라도 한번쯤은 경험해본 아쉬운 경험이 아닐까요? 가깝게는 가족 혹은 연인과의 관계에서, 멀게는 직장, 동호회 혹은 어떠한 다른 모임에서 이러한 경험을 반복하게 될 때에 우리는 "소통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데일 카네기 (1888~1955) 는 미국의 작가이자 커뮤니케이션 강사입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데일카네기 인간관계론》, 《데일카네기 성공대화론》, 《데일카네기 자기관리론》, 《데일카네기의 1%성공습관》, 《데일카네기 나의 멘토 링컨》, 《화술 123의 법칙》 등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책들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가 강사로서 그의 가치를 증명하게 된 것은 1912년 YMCA 에서 대화 및 연설 기술에 대해서 강연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인데, 그 때까지만 해도 생소한 개념이었던 "소통의 기술"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 것인지 깨달은 인식이 퍼지게 되면서 약 100년이 지난 오늘, 우리나라에도 카네기의 이름을 딴 연구소가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으며, 이 "한국 카네기 연구소 (www.carnegie.co.kr)"에서는 카네기 프레센테이션 코스, 리더쉽 세미나, 최고 경영자 코스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책 "카네기식 휴먼스피치"의 저자 박영찬 씨 역시 한국 카네기 연수고에서 데일카네기최고경영자(CEO) 코스, HIP (프레젠테이션) 코스, 카네기리더십 코스, 경영전략 코스, 세일즈 코스, CR/EDC 및 대학생 글로벌 리더십 과정, 그리고 청소년 리더십 코스를 강의하는 카네기식 교육전문가로서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데일 카네기의 리더십 노하우를 전파해왔다고 합니다. 수 년간의 노하우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저자의 카네기식 휴먼스피치가 무엇인지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생활을 해나감에 있어서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굳이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사실 소통이 없이 하루를 사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우리는 때로는 몇몇 사람과, 때로는 많은 사람과 소통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이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체계적인 교육은 일반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소통을 한다"는 개념을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것"과 혼동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소통할 수 있다는 뜻은 영어의 문법과 단어 등을 잘 알고 있어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질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맞는 표현일까요? 한국말을 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언어를 할 수 있는 것과 소통하는 것에는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바로 이 차이점에 대해서 설명하며 우리가 우리의 소통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도움을 주는 것이 이 책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입니다. 




당신의 껍질 속에서 나오십시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다름아닌 "저자가 본래 어떤 사람이었냐"는 것이었습니다. 매사에 자신넘치고 유머러스하며 곤경이 닥치거나 곤란한 상황에서도 능수능란하게 위기에 대처해나가는 모습. 이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나랑은 정말 다른 사람이군. 저런 재주가 있다니 참 좋겠어"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나요? 남들 앞에 나서려고 하면 괜히 입이 마르고 심장이 뛰기 시작해 결국은 머리가 하얘진 상태로 무슨 말을 했는지 조차 알지 못한 채 다시 자리로 돌아온 에피소드는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럴 때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나는 원래 내성적이고 소극적이라 이런 건 딱 질색이야. 어떻게 잘 넘겼으니 괜찮은 것이겠지?"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더라도 원하던 원하지 않던 다음 기회가 찾아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에 직장에서, 또는 개인적으로 나서서 이야기하는 것이 참 골치아파질 때가 많습니다. 조금 자신을 계발시켜보겠다고 책을 읽으려고 하더라도 너무 자신과는 동떨어진 이미지에 차라리 책을 덮어버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저자 박영찬씨는 누구보다도 그런 고충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역시, 자신의 단점을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기 전에는 스피치와는 너무도 동떨어져있던 사람이기 때문이죠.



"스피치란 훈련과 다양한 경험을 통해 정복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대학생 시절, 나의 최고 소망은 그저 말 좀 잘해보는 것이었다. [...] 그렇지만 언감생심, 사람들 앞에만 서면 까닭 없이 몸이 오그라들고 이야기의 핵심은 어디로 도망갔는지 중언부언했던 끔찍한 기억들만 떠오른다," (프롤로그 중, 7페이지)


"서울에서 가장 높다는 남산타워에 올랐지만 적당한 장소가 아니다 싶어 타워를 빠져나온 후 남산 정상을 찾아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제발 말 좀 잘하게 해주세요! 제발 용기 있게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물론 시작부터 용기로 충만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 기어들어 가던 목소리는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집중하게 되자 점차 높아지더니 급기야 영화 속 스승의 말대로 악을 써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믿을 수 있겠는가? 얼굴이 축축해 만져 보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고, 그 후련함으로 나의 몸은 벅차올랐다. 그동안 말 못한 서러움과 부담감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프롤로그 중, 8페이지)



이 정도면 저자 박영찬씨가 얼마나 간절하게 자신의 성격을 극복하고 가지지 못했던 것을 열망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말하는 것에 소질이 없다고 생각하고,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으례 굳이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을 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자신의 가장 부족한 부분에 도전하여 결국은 원하는 것을 이루어낸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기에, 우리에게 좋은 귀감이 되어 우리 역시 스스로 한계를 도전하는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21세기에 소통하기





예전에는 지인들과 직접 만나거나 전화 혹은 편지를 통해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었다면, 21세기 하고도 12년이 지난 지금은 셀 수 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도 실시간으로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보고, 듣고 있는지 알 수 있는가 하면, 다양한 SNS를 통해 그의 성향, 취미 그리고 주변인물들의 동향까지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수 많은 (때로는 불특정다수의) 사람들과 서로 소통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겠지만, 오히려 소통의 세계가 이렇게 시끄러워진만큼 진정한 소통을 하기는 더 어려워졌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블로그를 운영하고, 누구나 SNS를 사용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누구나 웹 상의 공간을 만들어 자신을 PR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효과적인 소통"은 더욱 어려워진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왠만한 "정보"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이러한 세대의 변화를 포착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저자는 백 년 가까이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데일 카네기의 가르침에서 그 해답을 찾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시대에 맞지 않는, 구닥다리 같은 발상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죠. 하지만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훌륭한 가르침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timeless)" 는 말이 실감 날 것입니다. 세상은 많이 변하고 문화도 변했지만, 인간의 본질적인 성격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죠. 예나 지금이나 (경우에 따라 많은 개체 차이가 있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서로 소통하기를 갈급하고 상대방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근본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사람의 내면에는 친교의 욕구가 있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해 주고 좋아해주기를 바란다." (172 페이지)


하지만 모두가 이런 욕구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욕구를 어떻게 하면 충족시킬 수 있지 알지 못한다면 결국 소통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실제로 수 많은 인간관계가 이러한 장벽에 부딫혀 산산조각이 나곤 하죠. "성격차이"니 "문화차이"니 많은 변명으로 그 원인을 대체할 수 있겠지만, 결국은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소통하는 데에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소통의 방법이 다양해진 만큼 더욱 더 올바른 소통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올바른 소통 방법을 전달하기 위해 자신의 직업을 반영한 "스피치", 즉 "연설"이라는 방법을 통해 그 이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연설이라니, 나와는 정말 관련 없는 일이잖아!'라고 성급하게 결론내릴 필요가 없습니다. 연설은 곧 남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설명하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장소와 취지 그리고 외부적인 요인에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 이 기술이 우리 일상 가운데서 필요한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스피치 커뮤니케이션이란 "사랑을 바탕으로 청중을 배려하고 공감하려는 소통의 능력"이라고 저자는 정의합니다 (154 페이지). 바로 이러한 저자의 관점에 책 제목인 "휴먼스피치"의 핵심이 담겨져 있습니다. 단지 기술적인 측면에서 소통의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 즉 휴머니티를 가미시키는 것이죠. 저자는 기술적으로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인간적인 면이 없다면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없다고 재차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런 "인간적인 면"은 꾸며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열정과 관심 그리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스스로의 인격 양상에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내가 뭐라고 했어!




아무리 멋진 생각이라도,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아무리 획기적인 아이디어라도 이해되지 못하고 알려지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차라리 산 속에 들어가 도를 닦으면서 "나는 참 훌륭한 사람인데"라고 되뇌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이러한 "소통의 어려움"은 어떠한 "변명거리"가 되어버리곤 합니다. '나는 훌륭하지만 말이 서투르고 사람들에게 나서기 힘들어서 이러고 있다' 라던가 '멍청한 세상이 나의 진짜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다' 등... 분명히 억울하고 화가나는 상황이 있을 수 있겠지만, 결국 소통에 실패했다는 것은 양쪽의 책임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상대편의 무지를 탓하기 전에 내가 어떻게 더 발전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건설적이라는 것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모두 내 탓이오" 하는 수동적인 입장이 아니라 결과를 분석하면서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이루려면 어떻게 노력해야 할까 고민하는 것이 21세기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리더들의 미래지향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300쪽이 넘는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저자 박영찬씨가 지금의 자리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끊임없이 열정을 가지고 노력했나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노력과 의지로 인한 지금의 성공은 그에게 당연한 상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소통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회사의 CEO건, 연구원이건, 가정주부건, 아티스트건, 정치인이건, 연예인이건, 교사건, 학생이건, 경비실 수위건 소통을 피해갈 수 있는 삶의 위치는 극히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연습과 경험으로 쌓인 소통의 능력은 확실히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호존중과 이해 그리고 배려를 전제로 하는 "휴먼스피치"는 비단 직장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 점점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변해가는 우리들의 모습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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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르지 말고, 인생을 안단테
호어스트 에버스 지음, 김수연 옮김 / 에이미팩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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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작할 때 가장 어려운 언어 중 하나라는 독일어. 그도 그럴 것이, 워낙에 문법이 복잡하기 때문에 문장 하나를 만드려면 생각해야 할 것이 한 두개가 아니랍니다. 그 때문에 초보들에게는 독작하는 것이 부담스러울뿐더러 혹시라도 창피당하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을거에요. 게다가 영어와는 달리 독일어의 동사는 후치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때는 끝까지 주의 깊게 듣지 못하면 엉뚱하게 오해할 수도 있답니다. 듣고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자신이 스스로 말하려고 하면 더 난감해지곤 합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에서 점점 (어학원 다닐 돈이 없었는지라 사실상 야매로) 독일어에 익숙해지면서, 독일 특유의 유머에 흠뻑 빠져들게 되었답니다. 흔히들 무뚝뚝하고 유머라고는 모를 것 같은 독일 사람들을 비꼬며, "독일 사람들은 오후 5시가 되면 웃으러 간다"라고들 합니다. 너무 무뚝뚝하고 고지식해서 웃는 것에도 시간을 정해놓는다는 농담인데, 그렇게 틀린 말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특유의 고지식함이 오히려 유머로 승화된 것이 바로 독일식 유머인 것 같아요.

 

독일식 유머의 큰 특징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코 "시니컬한 말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토당토 않게 시니컬하게 말을 던지는가 하면 이상한 (하지만 은근히 납득가는) 논리로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 이것을 얼마나 교묘하게 해내냐가 관건인 것 같습니다. 노력하는 천재였던 베토벤이 남긴 많은 편지들을 읽어보면 괴팍하기로 소문난 이 악성 역시 그러한 투박함 속에 유머러스함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해볼까 합니다.

 

"이 넝마주이 남작아,

자네 눈이 나쁜게 차라리 고맙군.

앞으로는 가끔 내가 유쾌한 기분일 땐, 그 기분 좀 잡치지 말아주게나.

어제만 해도 츠메스칼 도마노베치스식 개똥철학을 듣고 나니 무척 울적해졌어. 악마에게나 잡혀가게."

(1798년 츠메스칼 남작에게 보낸 편지)

 

글로만 읽으면 마치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지만 베토벤과 츠메스칼 남작은 무척이나 각별한 사이였으며, 베토벤은 그에게 이런 장난스런 편지를 줄곧 보냈다고 합니다. 또 다른 편지는 이렇습니다.

 

"크리스티네,

내 초상화에 대한 얘기를 어제 들었소. 당신이 이 일을 좀 더 신중하게 처리하기를 바랍니다.

만일 그것을 F를 통해 되돌려준다면, 그 불유쾌한 B나 왕얼간이 요제프가 중간에 끼어들어 나를 골탕먹이는 일에 사용하지 않을까 걱정이에요.

그렇다면 정말 짜증나는 일이 아니겠소. (중략)

신문사에 글을 내어 이제부터 내 승낙 없이는 어떠한 화가도 내 초상화를 그릴 수 없도록 하겠소. (중략)

안녕, 악마가 당신을 데려가길."

(1798년 크리스티네 제라르디에게 보낸 편지)

 

마음에 들지 않는 초상화가 그려졌다는 사실을 알고 화가난 베토벤이 쓴 편지입니다. 개인적으로 베토벤의 편지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편지 중 하나네요. 뭔가 화가 난 상황에서도 욕지거리를 하거나 호통을 치는 것이 아니라 특유의 시니컬함으로 펴부어대는 것, 독일 사람들의 큰 매력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독일식 유머"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는 오늘 소개할 책에서 도저히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유머이기 때문입니다. 저자인 호어스트 에버스 (Horst Evers) 씨는 스스로를 "베를린의 스토리텔러"라고 소개하는 독일의 카바레티스트 (우리나라의 "카바레"와 혼동하시면 큰일입니다^^ 고유의 장르인 카바레트에 대해서 더 알고 싶으신 분들은 클릭! 해주세요^^) 이자 작가입니다. 전통적인 카바레트 문화를 가지고 있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에서는 에버스 씨 같은 카바레티스트의 인기나 영향력은 정치인과 비교되기도 합니다. 인기 카바레티스트의 경우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많은 반향이 일어나고는 하니까요.

 

 

 

저자 Horst Evers씨

 

 

"서두르지 말고, 인생을 안단테" (원제: Für Eile fehlt mir die Zeit - 직역하면 "서두르기엔 시간이 없군" 정도가 되지 않을까요) 는 에버스 씨의 따끈따끈한 신간입니다. 원본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생생한 번역에 읽는 내내 정말 유쾌하고 즐거웠답니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적어나가는 형식의 에세이 한 편 한 편은 나름의 기승전결을 가지고 진행됩니다. 가끔은 기발하고 가끔은 재미있지만 가끔은 "제발 이 일은 현실이 아니길!" 이라고 외치게 되는 재앙같은 에피소드를 읽어나가면서, 이것이 과연 그가 직접 경험한 일인지 아니면 재미를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인지의 경계가 모호해집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이야기가 현실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국 에버스씨가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겪은 경험담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 다른 사람의 위선을 비웃으면서 우리 자신도 고수하는 위선의 가면들, 불공평한 현실에 대처하는 불공평한 우리들의 모습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이 비판에 마음 상할 일이 없는 것은 아마도 그의 지나치게 "악의없고 선량한" 접근방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놀림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웃어버리게 되는 것이죠.

 

에버스 씨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지인이나 이웃들이지만 이들 역시 에버스 씨의 (때로는 눈물나는) 신랄함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문화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일 수도 있겠네요. 동거녀 (독일어로는 Lebenspartner, 즉, 인생의 동반자라고 한답니다) 와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에 대해 쓸 때도 뭔가 애틋하거나 미화하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아마도) 그들의 실제 모습보다 극대화시켜 회화화 한 느낌이 드는 정도니까요.

 

천신만고 끝에 그가 그라사우 (바이에른의 소도시) 에서부터 베를린까지 가지고 온 도자기 접시를 본 그녀의 여자친구가 말합니다.

 

"우웩,뭐가 이렇게 안 예뻐! 당장 지하 창고에 갖다 놔."

나는 내가 아는 절박한 단어들을 총동원해, 일주일 동안 어떻게 이 접시를 끌고 바이에른 주 전역을 돌아다녔는지 설명했다. 그러자 자애로운 여자 친구가 공감하며 말해주었다.

"아...... 그랬구나? 그러면 지하 창고로 내려가는 계단 몇 개쯤은 대수도 아니겠네. 그런데 잠깐! 이거 무슨 냄새야?"

나는 다시 한 번, 하지만 이번엔 훨씬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 넓은 바이에른 주의 산골마을들을 이동하는 내내 이 접시를 끌고 다녔고, 그것을 위해 팬티와 티셔츠가 희생돼야만 했다고 알려주었다.

여자친구는 비당하게 말했다. "베를린 장벽을 만들 때도 우린 많은 희생을 치렀고, 많은 노동력과 시간을 투자했어. 그것을 완성하는 데는 분명 7일보다 더 거렸승ㄹ 거야. 그렇지만 그런 이유로 베를린 장벽을 계속 그대로 놔둬야 했을까?"

나는 장시간 설명으로 짐짓 쉰 목소리로, 분단과 자유로운 이동을 막는 장벽이자 민간인 대상의 발포 명령을 상징하는 '베를린 장벽'과 아무런 죄도 없는 '도자기 접시'를 비교하는 것은 범주의 오류라고 중얼거렸다.

나의 논리적인 응수에, 여자친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조용히 다시 말을 꺼냈다.

"네가 접시를 지하 창고에 갖다 놓는 동안,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해볼께." (48~49 페이지)

 

단순한 접시를 가지고 그들이 벌이는 논쟁은 엉뚱하다 못해 기발하기까지 합니다. 사소한 것 하나에도 신념을 가지고 주장을 굽히지 않는 에버스 씨. 아마 그런 그의 모습에서부터 세상의 너무 당연한 일에 "왜?" 라는 궁금증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두번째 봄으로 이어지면서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이러한 그의 엉뚱한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줍니다. 자신의 딸이 너무 똑똑해질까봐 교육을 방해하는가 하면 옆집 아버지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위키백과를 조작하기도 합니다. 아주 작고 사소해보이는 일도 그에게는 대단히 철학적인 주제로 변신하곤 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짜증나고, 화나고, 불편한 일들이 오히려 우스운 일들로 바뀌는 것이 유쾌하기까지 합니다.

 

작년 한국으로 들어온 이후 한국의 문화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하곤 했는데, 그중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시도 때도 없는 욕설" 이었습니다. 예쁘장한 얼굴의 중고등학생서부터 46단 콤보로 육두문자를 날리는가 하면, 욕설이 섞이지 않은 문장을 찾는 것이 오히려 힘들 정도로 지나친 욕의 일반화는 예나 지금이나 참 불편한 부분입니다. 물론 나름 적응해서 많이 신경쓰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독일어권에서는 심한 욕설을 쓰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니컬을 넘어 야유를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가끔 남을 놀리거나 비판하느라 싸우는 것을 보면 창의적이다! 라는 생각마저 들곤 합니다. 개인적인 취향과 문화의 문제이지만 굳이 욕을 하고 싶고 화를 내고 싶은 경우가 있다면 이런 식으로 풀어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합니다 ㅎㅎ

 

 

 

 

애초에 이 책의 서평을 쓰기 시작하면서 "되도록 많이 적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본의 아니게 이것 저것 이야기하다보니 글이 다시 길어져버렸네요. 하지만 더 빨리, 더 멀리, 더 높이에 지친 당신이라면, 삐딱하게 부지런한 개미들을 비웃는 현대판 베땅이 호어스트 에버스 씨의 책을 읽으면서 잃어버렸던 유머와 여유를 되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한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을 읽는 동안 그것이 실소이건 폭소이건 아니면 비웃음이건, 시종일관 입가에 미소를 띄고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바쁘고 각박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자신을 위해 마련할 수 있는 최소한의 휴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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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에 만난 지혜가 평생을 먹여 살린다 - 젊음의 가능성과 한계, 그 경계선 뛰어넘기
로랑스 드빌레르 지음, 이주희 옮김 / 명진출판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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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입시 철이 다가오고 입시 준비에 바빠지는 입시생들을 지켜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과연 저들은 무엇을 기대하고 대학에 가려고 하는 것일까? 무슨 이유로 대학에 가고 싶어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과연 자의일까 아니면 타의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자의 반 타의 반? 이상한 질문 같지만, 실제로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어보기 시작하면 그렇게 빗나간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학 입시 시험을 치루면서 면접을 할 때 시험관들이 자주 묻는 질문은 "어째서 이 대학 (혹은 학과) 에 지원하게 되었습니까?"라고 합니다. 작곡과 예비과정을 다니면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꼭 준비해두라는 지도교수님의 말씀에 좀 의아했었습니다. 아니, 국립음대에 시험을 치러 왔으면서 자기가 왜 왔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시험 당일이 되어 초조한 마음으로 대기실에서 기다리면서, 이 질문이 결코 누구에게나 "당연한" 질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본 것만으로도 열 명에 일곱 혹은 여덟 명 정도가 이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하나같이 이 질문이 던져지자마자 우물쭈물 거리면서 결국은 진부하거나 엉뚱한 대답을 하곤 했답니다. 누가 시켜서 온 입학시험도 아니면서 참 이상한 일이죠?

 

흔히들 너무 쉽게, 그리고 너무 단순화시켜 교육의 문제를 논하고는 합니다. 특히 우리나라 교육에 대해서는 너무 획일화 되어있다, 너무 주입식이다, 비자율적이고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혹평들이 쏟아져나오고는 합니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경우, "선진국 어디는 이렇게 하고 있고 다른 나라에서는 학생들이 이렇다"라는 비교를 근거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물론 확실히 교육방침에 따라서 대단한 차이가 있고, 그것은 학생 대부분에게 큰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그리고 교육을 하는 입장에서는 멈추어서거나 고이지 말고 어떻하면 더 발전해나갈까 날마다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들을 수 있는 "선진국과 우리나라의 교육 차이"가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일방적인 것일까요?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책 "스무 살에 만난 지혜가 평생을 먹여살린다"를 지금 공부를 시작하는 모든 대학 새내기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 책을 쓴 젊은 여성 철학가 로랑스 드빌레르는 현재 파리 가톨릭 대학과 파리 예수회 신학원인 상트르 세브르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총 세 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모두 20개의 "지혜"를 선사하는 이 책은 그녀가 집필한 첫 대중서라고 하는데, 그것이 믿겨지지 않을만큼 그녀의 문체는 간단명료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그야말로 쉽고 대중적인 문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독서 경험을 많이 쌓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즐겁게 읽을 수 있을텐데요 (오늘 뉴스에 의하면 대한민국 청소년의 네명 중 한명은 전혀 독서를 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만큼 이제 사회에 들어서는 "예비 어른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 아닐까 싶네요.

 

 

대학에서 배울거라 생각했지만 배우지 않은 것

 

엄청난 고난과 역경(?)을 딛고 대학에 입성한 새내기들. 하지만 일 년, 이 년이 지나면서 부풀었던 마음은 점점 사그라들고 하나 둘 실망하기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지금까지 워낙 강력한 주입식 교육을 받았던지라 강압적이기보다는 자발적인 강의 방식에 점점 느슨해지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포괄적인 의무교육을 끝내고 이제 드디어 자신의 전문분야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시기인데 오히려 헤이해져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다니 정말 대단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학교나 선생님이 분명히 정해준 것"에 익숙해졌던 학생들은 대학에 들어와서도 그러한 수동적인 자세를 이어나가고는 합니다. 즉, 스스로 자신의 전공을 위해 발전하려고 하기 보다는 "결국 대학 들어와서 배우는 것도 없고 쓸데없는 짓이었어!"라고 푸념하는 것이죠. 드빌레르는 말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 밖의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것에 주력한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언제나 분수와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한다. 게다가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데에는 인색하다." (194 페이지)

 

그녀의 이 짧은 문구는 가슴 깊숙이 파고 들어왔습니다. 사실 그랬습니다. 배우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은 순간적으로 자신을 잘나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 알량한 자기합리화일 뿐입니다. 또한 이렇게 올바르지 못하고 잘못된 것만 지적하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비판하는 행동 외에는 진취적이거나 건설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드빌레르가 던지는 질문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지혜는 이렇듯 정곡을 찌르면서도, 우리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돌아볼 수 있도록 따뜻한 설명과 권유를 잊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글을 읽다보면 어느새 그동안 자만, 자신없음, 게으름, 위선에 가리워있던 자신을 다시한번 성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녀의 말이 직선적이라 할지라도 결코 우위에서 던지는 핀잔이 아닌 상냥한 지적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일까? - 사춘기 시절 나 자신에게 던진 질문

 

"사람들은 자신이 어느 지점에서 만족하는지 잘 모른다. 그냥 그 순간의 본능에 충실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본능은 언제나 과도함을 추구한다." (226 페이지)

 

사춘기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자아를 찾아가는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수 많은 "왜?"라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채워가면서 혼란스러워지는 시기죠. 왜 내가 공부를 해야 하며, 왜 세상은 이런 것이며, 왜 이것을 하지 않으면 안되며…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궁극적인 난관에 봉착한 채, 불안정하면서도 위태로운 정신적 성장통을 피할 수 없는 시기인 사춘기.

하지만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20대가 된 지금, 그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은 상태입니까? 아니면 자연스럽게 시간이 지나면서 불안정하고 불투명한 세계에 "익숙해" 진 상태입니까?

 

 

"스무 살에 만난 지혜가 평생을 먹여살린다"가 인생에 입문하는데 있어 소중한 경험이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가 학업, 성공이라는 통상적인 주제 뿐만 아니라, 20대에게는 빠질 수 없는 중요한 테마, 연애와 사랑 그리고 인격양성까지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매우 주관적으로 상대를 보는 건데 객관적으로 본다는 건 이미 사랑이 시들었다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객관성은 더이상 사랑하지 않을 때에만 가질 수 있는 현명함이다." (20 페이지)

 

"원래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고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게 어리석고 음흉한 자의 수법이다" (68 페이지)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그녀가 라 로슈푸코를 인용하며 도달하는 "좋은 사람"에 대한 정의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오류 중 몇가지만 꼽자면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착한 것"과 "올바른 것"의 혼동일 것입니다. 사실 이 "착하다"는 가치관은 20대뿐만 아니라 인생에 걸쳐 직면하게 되는 트라우마와도 같은데, 특히나 요즘에는 "착하다"라는 말이 "무능력하다"와 거의 동일시되면서 "차라리 못될지언정 절대 손해보아서는 안된다"라는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것 같습니다. 드빌레르는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무력함이나 무능력으로서 표현될 것이 아니라 "자제"라는 능력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란 화내기가 얼마나 쉬운지, 심지어 남을 괴롭히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를 알면서도 그것을 자제하며 선하게 사는 사람이다" (라 로슈푸코 인용, 169 페이지)

 

모두가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 싸우고 남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금방 정글처럼 변할 것이라고 그녀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매일 뉴스 일면을 장식하는 기사들을 접하면서 우리는 그녀의 이러한 우려가 실제로 이미 대다수 현실이 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악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총과 칼로 무장하고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베어버리는 것은 슬프고도 잘못된 선택일 것입니다. 드빌레르는 이제 스스로의 행동을 책임져야할 "어린 어른"들에게 진심어린 충고를 보냅니다.

 

"인간의 이기적인 용망 때문에 분란과 다툼은 끝없이 일어난다. 이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해결책은 '내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다." (180 페이지)

 

스스로가 자기 자신이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성찰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남의 입장이 되어보며 관용과 이해를 배워야 할 나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 속된 말로 "나이값을 못하는" 어른들을 보면서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고자 하는 인생의 새내기들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그녀가 하고픈 조언일 것입니다.

 

 

20대인 그대가 철학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

 

 

프롤로그에서 드빌레르는 어째서 철학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용적 수단"인지 설명합니다. 철학을 단순히 어려운 것, 복잡한 것, 실용성 없는 탁상 공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해서 그것을 내 생활에 실제적으로 필요한 지혜로 바꿀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수 많은 철학자들과 그들의 아포리즘을 소개하면서 드빌레르는 철학에 담겨있는 "실용의 광맥"에 대하여 말합니다.

 

"철학을 안다는 것은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아는 것이고 본질을 알고 나면 더는 그 대상이 두렵지 않다" (프롤로그 중)

 

자신에게 닥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가장 마지막에 떠오르는 것이 "훌륭한 사람들은 이것을 어떻게 극복해나갔는가?"가 아닐까요? 연애에 실패하여 좌절했을 때, 원하는 대학에 몇 년 째 합격하지 못해 실의에 빠졌을 때, 경제적으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환경이 대단히 특수하며 난해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럴 때일 수록 나의 문제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듯한 세상이 더욱 더 무례하고 뻔뻔하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드빌레르는 철학에서 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나는 나보다 먼저 태어나 치열하게 고민했던 세상의 모든 철학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우리가 그들보다 나중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우리는 늦게 태어난 덕분에 그들이 평생을 바치며 이루어놓은 고민의 결과물을 아이스크림처럼 입안에서 녹여먹기만 하면 된다. 내 머리가 소크라테스보다 뛰어날 리 없는데 그와 같은 고민을 평생 머리 싸매고 한다 해서 더 나을게 있을까?" (프롤로그 중)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타의적으로 성장해온 시기를 마치고 이제는 자발적으로 살아야 할 시점에 다다른 20대에게 철학이 필요한 것, 그리고 방대하고 복잡한 철학을 어떻게 실생활에 적용시키며 실용적인 "지혜"로 사용할 수 있는지. 이것이 바로 저자가 이 한권의 책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당신이 선택하고 결정한다

 

"나는 어쩔 수 없었어",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어". 살면서 이러한 변명을 얼마나 많이 하고 얼마나 많이 듣게 되는지 모릅니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참 효과적인 변명인데,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초월적인 힘 (혹은 상황) 을 개입시키며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은 그 정당성만큼이나 비겁한 행동일 것입니다. 드빌레르는 철학자 사르트르를 인용합니다.

 

"상황이 나를 표현한다"

 

결국 내가 그러고 싶었건 그러고 싶지 않았건 그러고 있는 것은 나의 결정이며, 이것이 나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는 뜻이죠. 어떠한 조건에서건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은 고스란히 자신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지금의 상황이 되어버렸어!"라고 변명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드빌레르는 말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했다면 선택에 대한 책임과 선택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즉, 노력이 필요하단 뜻이다 (…) 그런데 기권보다 더 나쁜게 있다. 그것은 바로 선택을 유보하는 것이다." (107 페이지)

 

많은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면서도 "성격적인 단점"이기 때문에 묵인되곤 하는 우유부단함. 그녀는 이 우유부단함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시간은 흐르고 어느새 선택이든 기권이든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코앞에 닥친다. 그런데도 여전히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은 채 어정쩡한 상태로 있다면 그것은 타인의 선택에 따르겠다는 것과 같다. 이것은 기권조차 스스로 결정할 수 없을 만큼 무능력하다는 뜻이다. 이는 선택할 능력도 기권할 용기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택을 유보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타인의 선택에 모두 내맡기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108 페이지)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고 남의 선택에 따라 인생을 산 것에 대해 불만을 품어서는 안 된다. (…) 원하는 것을 선택해야 할 때 기권했거나 다른 이의 선택에 맡긴 것은 바로 자신이니까 말이다." (109 페이지)

 

이것이 아마도 그녀가 이 한권의 책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결정적인 메세지가 아니었을까요? 이제는 "내가 나를 책임져야 할 시간이다. 나의 선택과, 행동과 생각 그리고 미래를 위한 노력까지. 더이상 남에게 좌지우지되거나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기대서거나 의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스스로, 진취적으로,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할 때다"라는 도전적 메세지. 20대 뿐만 아니라, 나이는 더 들었어도 아직까지 이 숙제를 달성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필수불가결한 조언일 것입니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 원하는 학과를 졸업하고 나면 막연히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노력해온 학생들에게 이 책은 다소 거슬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몇 년 인생의 선배로서 그들에게 던지고 싶은 충고는 다름아닌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깨닫는 것이 큰 발걸음이 될 것이다" 입니다. 저 역시 세 개의 학사학위와 하나의 석사학위를 졸업하면서 이런 막연한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있다가 실망한 경험이 있습니다.

고등학교까지 모든 학생이 "같은 것에 대한 지식"을 교육받았다면, 이제 대학생이 된 지금부터는 스스로가 자신의 발전을 위해 발벗고 뛰어나갈 차례입니다. 이것을 빨리 깨닫고 올바른 방향을 잡은다면 불필요한 시간낭비와 실망을 건너뛰고 보다 힘차게 날개를 펼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내일의 행복 따위는 없다. 행복할거라는 기대감만 있을 뿐이다. 왜냐면 당신은 현재에 충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23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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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큐 포 더 무비 - 고단한 어른아이를 위한 영화 같은 위로
신지혜 지음 / 시드페이퍼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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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바타"가 대 히트를 기록하면서 3D 열풍이 영화계를 강타했습니다. 상업적 영화라면 (그리고 특히 액션물이라면) 3D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가고 있고,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던 고전들이 3D화 되어 재개봉하는 일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기술의 발달과 함께 영화는 꾸준히 관객들의 오감을 충족시키기 위한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때로 더 자극적이고 더 폭력적이거나 더 선정적인 방향으로 흘러나가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경험하지 못한 것을 더욱 더 현실감있게 경험할 수 있게 해주고자 하는 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던 – 그러니까 모든 영화가 2D였던 시절, 아니 영화에 색채도 없고, 음악도 없던 시절부터 영화가 우리에게 의미했던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을 바라보는 창"이라고 생각합니다. 사각진 스크린에 비추어지는 영상을 통해 알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알게되고, 가보지 못한 곳의 풍경을 바라보며 경험하지 못했던 사건을 함께 겪을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책을 펼칠 때마다 또 하나의 여행이 시작된다는 비유는 영화에 있어서도 비슷한 맥락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편의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 깜깜한 극장 안에서 잠시 현실 세계를 잊고 영화 속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니까요.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책 – "땡큐 포 더 무비" – 을 읽으면서 '영화는 왜 존재할까?'라는 질문이 수차례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지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만족시키며 여가생활을 즐기기 위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생활과 이야기를 엿보며 만족감을 얻는 일종의 관음증 때문에? 아니면 알지 못하는 주인공과 알지 못하는 상황에 우리의 삶을 투영시키고 접목시키며 공감을 얻기 위해?

그러한 질문들이 책을 읽을 때에 따라다니는 것은, 무엇보다도 저자 신지혜씨가 바라보는 "영화"라는 장르가 많은 감수성을 깨우고 새로운 오감을 자극하는, 그런 매개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CBS 음악 FM에서 매일 오전 11시부터 약 한시간 가량 만날 수 있는 "신지혜의 영화음악". 우리나라 라디오 프로그램 중 영화음악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정규 프로그램으로서는 유일무이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프로그램은 1995년 시작되어 올해로 무려 18년째 이어지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정해씨 등 많은 DJ이들이 거쳐갔으며, 이 책의 저자인 신지혜씨는 1998년부터 진행하기 시작하여 올해로 15년째를 맞고 있다고 합니다. 빨리 생겨나고 빨리 사라지는 요즘에는 보기 드문 일이죠. 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무엇이 이 프로그램을 (그리고 신지혜라는 진행자를) 이토록 오랜 시간동안 꾸준한 사랑을 받게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일곱가지 테마, 마흔 아홉 개의 영화

 

 

"마음을 어루만지는 약손"이라는 수식어는 신지혜씨의 문체에 더없이 잘 어울립니다. 그녀의 감성적이고 따뜻한 문체는 마치 아날로그 사진집을 펼쳐보는 듯한 느낌을 주며, 그녀가 들려주는 영화의 이야기는 그 예술성과 완성도를 떠나 그야말로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키워드로 수식되는 테마를 소개하며 그에 연관된 영화를 찾아 때로는 심리치료사처럼, 때로는 오래된 친구처럼, 때로는 감성적인 소녀처럼 설명하고 이야기해나가는 과정은 책을 읽는 동안 하나의 따뜻한 휴식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그녀가 선택한 영화의 키워드 (테마) 만 보아도 그녀가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별 (farewell)

고독 (solitude)

기억 (memory)

인정 (acceptance)

치유 (healing)

용서 (forgiveness)

사랑 (love)

 

영화를 바라보고 정의하는 관점은 참으로 다양하겠지만, 신지혜씨에게 있어서 영화는 감성을 투영하는 창 같습니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에게 있어 영화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영화는) 행복하고 아름다운 도피처이자 환상의 통로 (196페이지)

 

"방송은 목표, 영화는 꿈"이라는 문구를 항상 품고 다녔다는 그녀. 책을 읽으면서 그녀에게 있어 영화는 정말 "꿈과 환상"이며 일상에서 얻지 못하는 풍부한 경험과 감성 그리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성찰할 수 있게 해주는 훌륭한 매개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선택한 키워드 안에서 영화를 풀어나가면서 때로는 비범하게 그녀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영화는 당신에게 무엇입니까?

 

예전엔 음악을 듣기 위해서 콘서트 홀을 찾을 수 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손쉽게 집에서 언제든지 원하는 음악을 (그리고 때로는 영상과 함께) 들을 수 있게 되었다면, 영화 역시 인터넷의 발달과 매체의 다양함으로 인해 예전보다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굳이 영화관에 가거나 DVD를 빌려보지 않아도 VOD 방식으로 원하는 영화를 즉석에서 다운받아 관람할 수 있는가 하면, 지하철을 타고 가는 짜투리 시간에도 핸드폰이나 태블릿으로 영화를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렇듯 영화에 대한 접근성이 쉬워진 것은 그렇게 긍정적이지만도 않습니다. 특별한 이벤트였던 영화 관람은 이제 일상적인 것으로 전락해버렸고 그렇기 때문에 영화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세지의 효과는 감소한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채널이 많아지고 시간을 때우기 위한 편성 드라마가 많아진 것은, 좋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감성마저 점점 무뎌지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고전"이 그 가치에 있어서 높게 평가받는 것은 단순히 시간이 오래 되었고 예전에 나왔던 작품이라서가 아니라, 깊은 고뇌와 사유 끝에 탄생한 하나의 세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지혜 씨의 칼럼 (이 책을 읽다보면 연관성을 가진 칼럼들을 키워드로 묶어내었다는 설명이 더 적절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에서 소개하는 한 편 한 편의 영화들. 이미 본 영화라면 추억을 꺼내볼 수 있는 기회가, 아직 보지 못한 영화라면 이 기회에 관심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하나의 영화를 소개하는 과정이 조금은 짧은 감이 있어, 충분히 그 영화에 빠져 함께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지 않았나 합니다. 특히 직접 보지 않은 영화라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줄거리가 금방 이해가 가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함께 테마를 생각해볼 수 있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되네요.

 

마지막으로 "땡큐 포 더 무비"는 과연 누구를 위한 책인가 생각해보았습니다.

한 편의 조용하고 작은 휴식같은 이 책은 영화매니아들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되짚어볼 수 있는 기회가, 감성적으로 메말라있는 사람들에게는 충전의 기회가, 또 영화를 좀 더 알고 싶고 궁금해하는 분들에게는 좋은 가이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뜻한 위로가 절실한 시대, 책 한권의 여유로 힘들었던 마음에게 작은 선물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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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시대
이사야 벌린 지음, 안규남 옮김 / 미다스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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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긴 철학역사에 있어서 마르크스만큼 널리 알려져 있으면서 수많은 오해와 편견 그리고 선입견에 고생(?)하는 철학자는 드물 것 같습니다. 막연히 그의 업적이나 사상에 대해서 들어보았지만 (사실 철학 사상이 대부분 그렇듯이) 직접 연구하고 깊게 생각해보지 않는 이상 스스로 어떠한 판단이나 설명을 하기 꺼리게 되는 마르크스. 오늘 소개할 책은 바로 이 마르크스에 대해 쓰여진 평전 중 최고라는 극찬을 받는 이사야 벌린의 "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시대" 입니다. 사실 "최고의 평전"이라는 찬사는 의미가 깊은데, 이 평전이 무려 73년 전인 1939년에 출간되었기 때문입니다. 철학사의 중심 인물 중 하나인 마르크스에 대해서 활발하게 연구되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벌린의 평전을 뒤집을 만큼 뛰어난 평전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벌린의 뛰어난 업적을 더욱 더 빛나게 하는 듯 합니다.
 
430쪽에 육박하는 방대한 분량의 평전을 소개하기 전, 먼저 이 책의 저자인 이사야 벌린에 대해 몇 가지 언급하고자 합니다. 지난 97년 서거한 벌린은 세계적인 전기작가이자 사상가로 영국의 옥스포드, 왕립 아카데미를 기반으로 수많은 저서를 집필했습니다. 그의 마르크스 평전에 있어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책을 집필할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28세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마르크스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어 대학 강의를 위해 자본론을 힘들게 읽은 것이 전부라고 합니다. 하지만 1933년 마르크스 평전을 쓰라는 제의를 받은 후 본격적으로 그의 사상과 생애 연구에 착수했고, 이 평전을 시작으로 그는 뛰어난 전기작가로서의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시대와 사상을 막론하고 풍부하고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저술해나가는 벌린의 평전을 읽다가 보면, 지금까지는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인식되어왔던 마르크스를 새롭게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포괄적인 연대기
 
부제가 "생애가 시대"인만큼 벌린은 단순한 평전이라기보다는 칼 마르크스의 사상 세계와 그것이 정립될 수 있었던 (혹은 정립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사상 뿐만 아니라 동시대 인물들과 그들의 배경, 사상을 폭넓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위인전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철학 논문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렇다고 문체가 복잡하다던가 읽기 어려운 책은 아닙니다. 물론 마르크스와 그와 연관된 주요 키워드 (자본론, 프랑스 혁명, 프롤레타리아 등) 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다면 쉽게 읽어내려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벌린은 이러한 연관테마들에 대해 기본적인 설명을 생략하고 있기 때문에 보다 원활하게 평전을 읽으려면 먼저 이러한 테마들을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벌린의 챕터 맥락은 연대적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챕터 안에서 설명하고 있는 사건의 발단와 전개에 있어서 굳이 이것에 의한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어쩌면 제약을 받는다는 자체가 설명하는데 있어 불가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인과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시대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것 같습니다.
마르크스의 삶에서 만나고 이별한 수 많은 인물들과의 관계들, 또한 마르크스의 생활환경 (그의 경제적 상황, 가족관계 등) 을 그의 사상의 발전과 접목시켜 이해해보려 하는 관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벌린은 "그가 이러이러한 일을 했기 때문에 훌륭하다 (혹은 훌륭하지 않다)"라는 전반적인 위인전의 관점과는 달리 "그가 이러이러한 일을 하게 된 배경은 이러했다"라고 설명함으로써 객관성을 유지하면서도 그 인과관계를 훌륭히 나타내보입니다.
 
 
명료하지만 단정적이지 않게
 
당시까지만 해도 스스로를 마르크스 전문가로 인식하지 않고 있었으면서도 벌린의 평전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마치 그가 마르크스 시대의 흐름을 타고 그와 함께 사유하는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그만큼 그의 문체는 단호하면서도 명료한데, 그런 와중에도 최대한의 객관성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인상적입니다.
 
"그(이사야 벌린)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인물들의 개성을 그려내지만, 그러면서도 독자들이 알고싶어 하는 것은 흥미진진한 결혼 이야기나 옷에 대한 취향이 아니라 그 인물들의 사상이라는 것을 잠시도 잊지 않는다." (415 페이지, 앨런 라이언의 추천사 중)
 
앨런 라이언의 이 한 문장은 벌린의 접근방식을 유머러스하면서도 압축적으로 훌륭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벌린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중심으로 기술하면서도 여러가지의 관점을 통해 "칼 마르크스"라는 인격체를 입체적으로 구성합니다. 독선적이고 타협이라고는 모르는 일차원적인 모습 뿐만 아니라 사상을 정립해나가는 도중에도 수많은 유혹과 갈등에 시달린 그의 인간적 모습과 그 양면성의 재생은 특별히 탁월합니다.
(여담이지만 벌린의 평전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경우 책의 맨 마지막에 수록된 라이언의 추천사를 먼저 읽어보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벌린에 따르면 그의 초기 원고는 출판물의 두 배 가량의 분량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편집자들의 엄격한 요구에 의해 대부분의 철학적, 경제학적, 사회학적 쟁점들에 대한 논의를 삭제했다고 하는데, 책을 읽어본 지금 원래의 구성은 어땠을지 더욱 궁금해지네요. 벌린은 이로 인해서 주로 지적 전기에 중점을 두고 재구성했다고 합니다.
 
 
칼 마르크스 - 그에게 헌정하는 평전
 
"한평생 그의 사명은 어떤 식으로건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시키는데 기여하는 것 (...) 오늘날의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에 기여하는 것이었습니다" (404페이지,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추모식에서)
 
복잡하고도 방대한 마르크스 사상에 있어 이 평전이 훌륭한 입문서이자 참고서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벌린은 단호하지만 객관성을 유지하며 fact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어 (혹은 어떠한 주장을 할 경우 그에 합당한 증거와 근거를 제시하고 있어) 역사상 가장 중요한 철학자 중 한 명이자 (아마도) 가장 많은 오해와 선입견으로 인식되곤 하는 마르크스를 구체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마감기간을 지키기 위해 이 책을 한번 읽은 시점에서 글을 쓰고 있지만, 벌린의 평전은 충분히 두세번 다시 곱씹으면서 공부하고 연구할 가치가 있는 책임에 분명합니다. 철학이 전문분야도 아닌지라 여러모로 아쉬움도 많이 남는 서평입니다만, 마르크스와 그의 사상에 입문하려는 분들 뿐만 아니라 철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 모두에게 꼭 추천하고픈 책입니다. 명작은 시간을 초월한다고 하는데, 그 사실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벌린의 평전. 이 기회로 다른 저서들도 꼭 찾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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