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2) 


 4. 신화(神話)와 전설(傳說)의 시대

 단, 아래는 개요에 대한 소개일 뿐이며
 그 외에도 많은 자료들이 있으므로, 필요하신 분들은 다른 문헌을 참고 바랍니다.

 중국의 신화(神話)는 주로 한민족(漢民族)에 의해서 전해졌던 것이었지만
 그러나 다른 소수민족들의 것도 포함되어 있다.

 1) 천지개벽(天地開闢)의 시대

 (1) 반고(盤古)

 반고(盤古)는 중국신화의 신(神)으로, 우주개벽의 창세신(創世神)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도교(道敎)가 발전함에 따라서 그의 이름은 '원시천왕(元始天王)'이라거나 '반고진인(盤古眞人)'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반고(盤古)에 관해서 기술된 것으로 처음 나타났던 것은 오대(吳代-3世紀)에 성립되었던 신화집 '삼오역기(三五歷紀)'에서였고, 그곳에서는 천지가 생기기 이전이었던 계란의 속(中) 같이 혼돈(混沌)되었던 상태에서 그가 출현했다고 기술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제(齊-4世紀後半) 경(頃)에 쓰였던 '술이기(述異記)'에 따르면, 그 후에 천지(天地)가 형성되자 반고(盤古)가 죽었고, 그러자 또 그의 사체(死體)로부터 만물(萬物)이 생성되었다고 전했다고 한다.

 참고: 술이기(述異記)는 중국 남조(南朝) 양(梁) 때, 임방(任昉)이란 사람이 선찬(選撰)했던 지괴소설집(志怪小說集)으로 2권(卷)이 있으며, 임방(任昉)의 생애는 460년에서 508년, 그리고 그는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문학자(文學者)였으며, 자(字)는 언승(彦昇)이었다. 그리고 출신은 낙안박창(樂安博昌-현, 산동성 壽光市), 경릉팔우(竟陵八友) 중 한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산문(散文) 분야에서 최고라고 평가되었으며, 저작으로 술이기(述異記)와 문장연기(文章縁起) 등이 있었다지만, 그러나 위작(僞作) 설도 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그의 왼쪽 눈으로부터는 태양(太陽)이 생성되었고, 오른쪽 눈으로부터는 달(月)이, 그리고 머리와 몸으로부터는 중국의 신성한 산인 '오악(五岳-泰山 등)'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것과 유사한 것으로는 '리그베다'의 원시거인(巨人) '푸()루샤(purusha)'가 있으며
 그래서 또 그 이야기는 그 '푸루샤'로부터 전파되었던 것이란 설(說)도 있다.

 참고: 리그베다[(산스크리트어)RigVeda]는 고대 인도 브라만교의 근본 경전 중 하나로, 10권 1,028장(章)의 운문 찬가로 되어 있으며, 기원전 1500년에서 1000년에 성립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내용은 천지자연의 신에 대한 찬가와 아리아 인에 의해서 건국된 인도건국의 과정이 전개되어 있다고 하며, 그리하여 인도사상의 원천이 되고 있다고 한다.

 (2) 복희(伏羲)

 복희(伏羲-紀元前 3350年에서 紀元前 3040年)는 고대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신(神) 또는 전설상의 제왕(帝王)이며, 복희(宓羲), 포희(包犧), 포희(庖犧), 복희(伏戱) 등으로도 쓰였다. 그리고 또한 복의(伏義), 복의(伏儀)라는 표기로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또 삼황(三皇) 중 한명으로 거명(擧名)되는 일이 많으며, 남매(男妹) 또는 부부(夫婦)로 여겨지는 여와(女媧)와 같이 사신인수(蛇身人首-뱀의 몸과 사람의 머리)의 모습으로 묘사 된다.


<伏羲氏와 女媧氏>


 그리고 천지(天地)의 이(理)를 깨달아서 팔괘(八卦)를 그렸다고 했으며, 결승(結繩-結繩文字)으로 정치를 했던 것은, 황제(黃帝) 시대의 사관(史官)이었던 창힐(蒼頡)이 개발했던 한자(漢字) 이전의 문자로서는 아주 중요한 발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는 거미의 집을 본떠서 어망(魚網)을 발명했다고 하며, 그 후, 한대(漢代)의 반고(班固)가 편찬했던 '백호통의(白虎通義)'에서도 가축의 사육과 조리(調理)법 그리고 어로법(漁撈法)과 사냥법 그리고 철제(鐵製)를 함유했던 무기의 제조를 개발했으며, 혼인의 제도도 정했다고 한다.




聞一多(1899년 11월 24일-1946년 7월 15일)
중국의 시인(詩人), 고전론가(古典論家)
구명(舊名)은 聞多였지만, 대학 때
학우였던 潘光旦의 권유로 문일다가 되었다
자(字)는 友三


 그리고 최근, 홍수신화(洪水神話) 중국고전론자(中國古典論者)였던 '문일다(聞一多)'가 운남성(雲南省)을 중심으로 했던 설화(說話)를 채집했는데, 그에 의하면 복희(伏羲)와 여와(女媧)의 아버지가 아주 오래전에 뇌공(雷公)을 가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뇌공(雷公)은 복희(伏羲)와 여와(女媧)에 의해서 해방되었고, 그러자 뇌공(雷公)은 그들의 아버지와 싸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뇌공(雷公)은 홍수를 일으켰고, 그 결과로 복희(伏羲)와 여와(女媧)만 남긴 채 이 세상의 모든 인류를 멸망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또 그때, 그 두 사람은 뇌공(雷公)을 도와주었을 때 미리 받아두었던 씨(種)를 땅에다 심었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주 거대한 표주박이 되었고, 그러자 또 그 두 사람은 그 안으로 숨어들어가서 그 피해를 면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 그 두 사람은 결혼을 했고, 그렇게 해서 이 땅에 다시 인류가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문일다(聞一多)는 복희(伏羲)가 때로는 포희(庖羲)로도 쓰였던 점에 주목해서, 그래서 그 복희(伏羲)란 말이 방주(方舟)를 의미했고, 그러자 또 여와(女媧)가 그 배에 올라타서 홍수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하고 추론(推論)했다.

 그리고 또, 그 홍수신화와 더불어서 중국의 소수민족 중 묘족(苗族)이 신봉했던 신으로도 그들은 추측되고 있으며, 일본의 아이누족도 복희(伏羲)의 1부족이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학자도 있다.

 (3) 여와(女媧)

 복희(伏羲)에서 일부 설명이 되었으나, 여화(女媧)는 고대 중국신화에 등장하는 여신(女神)으로, 삼황(三皇) 중 한명이었다는 설도 있다. 성(姓)은 봉(鳳=), 복희(伏羲)와는 남매 또는 부부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초사(楚辭)' '천문(天問)'에는 여와(女媧) 이전에는 사람이 없었다고 쓰여 있으며, 인간을 만든 창조신(創造神)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또 그 외에도 후한(後漢) 시대에 편찬되었던 '풍속통( 風俗通)'에 의하면, 그녀가 황토(黃土)를 주물러서 인간을 만들었다고 하며, 회남자(淮南子)의 '설림훈(說林訓)'에는 농업신(農業神)의 성격을 가졌던 것으로도 묘사되었다.

 그리고 또 참고로, 그 회남자(淮南子)의 '남명훈(覽冥訓)'에서는 그녀가 천하(天下)를 보수(補修)했다는 설화(說話)가 실려 있다고 하며, 그 내용은 또, 한때 하늘을 받치고 있던 4기둥이 쓰러져서 세상이 위기에 처했는데, 그런데 그때 그녀가 오색(五色)의 돌로 하늘을 보수(補修)했고, 큰 거북의 다리로 사주(四柱)를 다시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흑룡(黑龍)의 몸으로 대지(大地)를 수복(修復)했으며, 갈대를 태운 재(灰)로 홍수를 막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녀는 복희(伏羲)와 마찬가지로 묘족(苗族)이 신봉했던 신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그래서 또 사기(史記)의 '삼황본기(三皇本記)'에서는 그 '세계수복신화'에서 세계가 위기를 맞게 되었던 원인을 당시 강족(羌族)이 신봉했던 수신(水神) 공공(共工)이 난폭하게 굴었던 때문이라고 했으므로, 그래서 또 당시, 묘족(苗族)과 강족(羌族)의 갈등이 그 신화에 반영되었던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참고: 공공(共工)은 고대 중국신화에 등장하는 신(神)으로, 삼황(三皇) 중 한명이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그는 인면사신(人面蛇身)의 모습으로 주색(朱色)의 머리카락을 가졌으며, 홍수(洪水)를 일으키는 수신(水神)으로 묘사되었다. 그래서 그 홍수(洪水)의 홍(洪)은 바로 공공(共工)의 이름에서 취해졌던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그는 여와(女媧) 시대부터 신화(神話) 상에 때를 거듭해서 몇 번이나 나타나서는 패배(敗北)하는 악신(惡神)으로 묘사되었고, 그것은 또 당시 중원(中原)을 본거지로 했던 정권과, 그에 대해서 장기(長期)에 걸쳐서 적대관계에 있었던 강족(羌族)이 그 공공(公共)을 신봉했던 때문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래서 또 그 여와(女媧) 시대에 공공(共工)은 천하의 패권을 노렸고, 그리하여 또 당시 구수인면사신(九首人面蛇身) 중 하나였던 상류(相柳)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축융(祝融-불을 다스리는 신)에게 패했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때, 그는 너무도 노한 나머지 난폭하게 천하를 돌아다녔고, 그러다가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 있던 불주산(不周山)에 머리를 들이받았다. 그러자 그 때문에 천주(天柱)가 쓰러졌고, 천하는 서북(西北) 쪽으로 기울고 말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때문에 중국의 강들은 모두 동남(東南) 방면으로 흐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국어(國語)에서는 그 공공(共工)이 지상(至上) 제(帝)로서 천하를 다스렸는데, 하지만 치세(治世)에 실패를 하자 복희(伏羲)와 여와(女媧)가 그것을 수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또 초사(楚辭)의 천문(天問)에서는 그가 강회(康回)로 불리면서 오제(五帝) 중 하나였던 전욱(顓頊)과 제(帝)의 지위를 놓고 다투다가 패했는데, 그러자 그 분을 이기지 못해서 불주산(不周山)으로 가서 천주(天柱)를 부셔버렸던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그 후에 그는 요대(堯代)에서 유주(幽州)에서 처형되었다고 하며, 그리고 회남자(淮南子)에서는 순대(舜代)에 홍수를 일으키는 난동을 피웠기 때문에, 앞과 같이 유주(幽州)로 추방되었다고 했고, 그리고 또 산해경(山海經)에서는 우(禹) 시대에도 나타났었다는 등, 그는 항시 신화(神話) 속에서 천년(千年)을 넘나들면서 계속해서 등장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또 참고로, 상류(相柳)는 고대 중국신화에 등장하는 괴물(怪物) 중 하나이며, 9개의 사람 머리를 가졌고, 몸은 큰 뱀으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또 그는 공공(共工)의 사주를 받아서 몸에서 독(毒)을 분출했으며, 그로써 주변 대지(大地)를 오염시켰다고 한다. 그러자 또 영웅 우(禹)가 그를 퇴치했으며, 그러자 또 그때, 대량의 피가 흘러서 광범위했던 토지를 오염시켰다고 한다.


<에도시대에 일본인들이 묘사했던 상류>      

  
 (4) 전욱(顓頊)

 전욱(顓頊)은 상고(上古) 중국신화 상(上)의 제왕(帝王)이며, 이름은 고양(高陽), 또는 고양(高陽)에 도읍을 두었던 고양 씨(高陽氏)라고 알려졌다. 그는 오제(五帝) 중 한명이었으며, 황제(黃帝)를 계승해서 제위에 올랐고, 그 재위(在位)는 78년이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창의(昌意) 그리고 어머니는 촉산 씨(蜀山氏)의 딸 창복<昌僕-그러나 창박(昌僕) 또는 창부(昌仆)라고 기술된 곳도 있으므로, 참고 바람>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의 아버지 창의(昌意)는 황제(黃帝)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황제(黃帝)의 손자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아들 궁선(窮蟬)이 있었지만, 그러나 제위(帝位)은 증손(曾孫)이었던 곡(嚳)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는 다른 전설상의 천자(天子)들과 같이 아주 고결한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사기(史記)에서는 그가 제사(祭祀)를 자주 주관했던 왕으로 묘사했으며, 그리고 또한 인품이 차분하고 고상했으며 항시 심모(深謀)를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는 일반 백성들이 신(神)과 통교하는 싫어해서 증손(曾孫)이었던 중(重)과 여(黎)에게 하늘로 통하는 길을 닫으라고 명했고, 그리하여 신(神)과 사람이 구별되도록 했는데, 그것은 또 당시, 계급 자들이 제사(祭祀) 권을 장악하려 했던 의도로 볼 수 있으며, 그로써 또 그는 신권(神權)정치 의 선구(先驅)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참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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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1)


 1. 원모원인(元謀原人=Yuanmou man or Yuanmou ape man)

 중화인민공화국 운남성(雲南省)의 원모(元謀)에서 발견되었던 중국 최고(最古)의 인류(人類)라고 말해지고 있다.


<운남성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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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1965년-운남성 북부 험산(險山)에 있는 원모현(元謀県) 상나방촌(上那蚌村)의 서북(西北) 쪽에 있는 낮은 언덕 위에서 사람의 턱과 앞니가 발견되었다.

 1973년-그 이(齒)가 발견되었던 근처 지층(地層)에서 7개의 석영(石英)으로 만든 석기(石器)와 동물화석(動物化石) 그리고 탄화(炭化)된 불(火) 사용 흔적이 발견되었다.

 1976년 7월 25일-그 화석(化石)들은 고자기측정(古磁氣測定)에 의해서 약 170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단, 50에서 60만 년 전으로 보는 학자도 있음

 그리고 그 이(齒)의 화석(化石)은 그 이면(裏面)의 형상(形狀)으로 추측했을 때, 아프리카에서 아시아로 진출했던 '호모에렉투스'로 생각되고 있으며 '북경원인(北京原人)'보다도 오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현재의 중국인 또는 동아시아인들의 선조는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참고로 현재의 선조로 추정되는 아프리카인이 탄생되었던 시기는 약 20만 년 전으로 생각되고 있다고 하므로, 역시 그들이 아시아로 진출했던 것은 그로부터도 훨씬 뒤의 일이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2. 남전원인(藍田原人)

 중화인민공화국의 협서성(陝西省)에서 발견되었던 인류(人類).


<협서성 위치도> 


 태령산맥(秦嶺山脈)에 있는 남전현(藍田県)의 '공왕령유적(公王嶺遺跡)'과 '진가와유적(陳家窩遺跡)'에 의해서 구성되는 '남전유적(藍田遺跡)'에서 사람의 두개골(頭蓋骨)과 하악골(下顎骨-아래턱뼈)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두개골은 추정(推定) 약 800cc 정도의 뇌 용량을 가졌던 평균적인 원인(原人) 호모에렉투스의 화석(化石)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그 시기는 약 100만 년 전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또, 그 새로운 지층(地層)으로부터 스크레이퍼(scraper-연마석 等) 등의 석기도 발견되었고, 그리고 그 남전원인(藍田原人)도 북경원인(北京原人) 등과 같이 아시아로 진출은 했었지만, 그러나 자손을 남지지 못하고 절멸(絶滅)되었던 '호모에렉투스'의 일군(一群)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엄밀히 말하자면 현대 인류의 조상으로 볼 수는 없다고 한다.


<남전원인 턱 부분 화석> 


 3. 북경원인(北京原人=Homo erectus pekinensis)

 중화인민공화국 북경시(北京市) 방산현(房山県) 주구점(周口店) 용골산(龍骨山)의 삼림(森林)에서 발견되었던 화석인류.


<1929년에 주구점에서 발견된 최초의 북경원인 두개골(복제)>

<북경시 방산구의 위치도>

<주구점>

 현재는 호모에렉투스(Homo erectus)의 아종(亞種)으로 취급되고 있으며, 그리고 그 북경원인을 포함했던 호모에렉투스가 살았던 시대는 갱신세(更新世)였다.

 참고: 갱신세는 신생대 제4기의 첫 시기로, 인류가 발생해서 진화한 시기이다. 그리고 그때는 지구가 널리 빙하로 덮여있었기 때문에 몹시 추웠으며, 매머드와 현재의 식물들이 생육하였다.그리고 같은 말로는 플라이스토 世(Pleistocene) 그리고 비슷한 말로는 홍적기 또는 홍적세(洪績世) 또는 최신세(最新世) 등이 있다. 그리고 그 시기는 약 180만 년 전에서 160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까지이다.


"Johan Gunnar Andersson"


 그리고 그 주구점(周口店)의 북경원인유적(北京原人遺跡)은 현재 유네스코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으며, 그 최초의 발견은 스웨덴의 지질학자였던 요한<Johan Gunnar Andersson. 1874년7월3일-1960년10월29일. 스웨덴의 지질학자, 고고학자, 웁살라(Uppsala)대학 졸업. 중국명은 안특생(安特生)>이 인류(人類)의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이(齒) 화석을 발견했던 것이었다.


<裴文中>

 
 그리고 그 후였던 1929년 12월2일의 조사에서 중국의 고고학자 배문중(裴文中)이 완전한 두개골을 발견했으며,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합계 10 수인(數人) 분(分)의 원인(原人) 뼈가 발굴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중일전쟁이 격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화석의 조사를 위해서 미국으로 수송하게 되었다지만,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것은 분실되고 말았다.


"Weidenreich, Franz-1873-1948"


 하지만 또 그 전에, 그곳 의학원(醫學院)의 객원해부학교수로 와있었던 독일의 프란츠(Weidenreich, Franz)가 그 상세한 기록과 연구를 남겨두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바탕으로 복제(replica)가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또한 오늘날의 자료가 되고 있다.<그리고 전후(戰後)에도 소수(小數)의 뼈가 그곳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또, 근래까지 그 북경원인(北京原人)이 현생인류(現生人類-아시아인)의 선조(祖先)라고 여겨왔지만, 그러나 현재에는 현대인의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 DNA 계통해석에 의해서 그것은 부정되고 있다. 그리하여 현재 그 북경원인(北京原人)은 아프리카에 기원(起源)을 둔 원인(原人) 중 하나였던 것으로 여기고는 있지만, 그러나 어떤 이유로 나중에 절멸(絶滅)되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한 그때, 석기(石器)와 노(爐)의 흔적이 함께 발견되었던 것으로 미루어서, 그들이 석기와 불을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또, 그 근처에서 동물의 뼈들이 발견되었던 것으로 미루어서는, 그들이 화식(火食)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도 있다.

 그리고 또한 유력한 설(說)로는, 그들의 뼈들이 산산조각 난 채로 발견되었던 것으로 해서, 그들 간에 식인(食人)의 풍습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하지만 또 그에 대한 반대의견으로는, 그 식흔(食痕)으로 미루어봤을 때, 하이에나 류(類)에 의한 흔적일 것이라는 설(說)도 있다.

 아무튼 그 후에, 남경(南京)사범(師範)대학과 미국의 퍼듀(indiana州 purdue)대학의 연구에 의하면, 그들의 기원은 약 78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며, 약 20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탄생했던 원인(原人)이, 약 100만 년 전 경에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에 도착을 했고(자바 원인), 그들이 다시 북쪽으로 진출했던 것이 바로 그 북경원인(北京原人)이었다고 한다.
 




 <참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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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연대・연


 사건


 70만년전 경


 ~60만 년 전 경-남전원인(藍田原人=Lantien man), 원모인(元謀人) 출현

 ※남전원인
1963~64년 중국의 남전(란티엔)에서 발견된 인류(人類) 화석으로, 약 50~60만 년 전의 인류로 보이며, 베이징원인보다 더 오래된 인류(화석)이다.

<재현>

※ 원모원인-중국의 운남성 원모에서 발견된 인류화석으로
중국 최고의 인류라고 말해지고 있다



 50만년전 경

 북경원인 출현(北京原人出現)

 ※ 북경원인=중국 북경의 주구점(周口店) 용골산(龍骨山)에서 발견된 화석인류

<주구점 북경원인 유적=1987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


 BC7000 경

 장강유역(長江流域) 팽두산문화<彭頭山文化-初期 稲作農耕(초기 벼 재배)> 등장

 ※ 팽두산문화(péngtóushān wénhuà, Pengtoushan culture)
     기원전7500년 경-기원전 6100년 경.
    중국의 장강중류 호남성(湖南省) 북서부에 걸쳐있던 신석기시대의 문화를 말함



 BC5000 경

 장강유역을 중심으로 하모도문화 등장
 河姆渡文化의 稲作農耕確立(벼 재배 농경 확립 또는 정착)

 ※ 하모도문화(Hémŭdù Wénhuà, Hemudu Culture)
     기원전 5000-기원전 4500년 경



 BC4000 경

 앙소문화(仰韶文化) 등장

 앙소문화(양사오문화=영:Yangshao culture 漢:Yǎngsháo)
     기원전 5000-기원전 3000년 경.
    
중국 황하중류전역에 존재했던 신석기문화를 말함

<출토된 올빼미 얼굴 유물>
 


 BC2300 경

 용산문화(竜山文化) 등장

 ※ 용산문화(룽산문화=Lóngshān wénhuà=기원전3000-기원전2000년 경)
 중국 북부(華北)의 황하중류에서 하류에 걸친 넓은 지역에 분포했던 신석기시대의 후기문화. 흑도(黒陶-검은 도자기)가 발달했던 것으로 해서 <흑도문화>라고도 부른다.


<1976년 산동성 출토> 


 BC1600 경

 은 왕조성립(殷王朝成立)

 은 왕조(기원전 17세기 경-기원전 1046년)
 중국의 왕조로, 문헌(文獻)상으로는 하(夏)왕조를 멸하고 성립했다고 되어있으며, 고고학(考古學)적으로도 실재(實在)가 확인되고 있는 중국 최고의 왕조이다. 그러나 기원전 11세기에 주(周)에 멸(滅)했다고 한다. 또는 상(商)이라고도 말해지고 있다.


<은의 분포도>


 BC1050 경

 주 왕조 성립<周王朝成立=殷周革命(은주혁명)>

 주 왕조(기원전 1046년경-기원전 256년)
 중국 고대의 왕조 중 하나이며, 은을 멸하고 왕조를 열었다. 당시, 은(殷)은 고종(高宗) 이후에 들어선 최후의 왕이며, 폭군이었던 신<辛=주왕(紂王)>이 달기(妲己)라는 미녀에게 빠져서 폭정을 일삼았고 그러자 주(周)의 무왕(武王)이 그를 살해하고 주(周)를 열었다고 함.



 BC841

 사기(史記)>에 기록된 공화원년(共和元年)

 ※ 사기는 중국 전한(前漢) 무제(武帝) 시대에 사마천(司馬遷)에 의해서 편찬된 중국의 역사(歷史)서이다. 정사(正史) 중 제일(第一)로 손꼽히며, 24사(史) 중 하나이다. 합계 52만 6천 5백 자. 저자 자신이 이름 붙인 서명(書名)은 <태사공서(太史公書)>이며, 그러나 후세에 <사기(史記)>라고 불렸으며, 이후 그것이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다. 책의 구성은 본기(本紀) 12권, 표(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으로 완성된 기전체(紀傳體)의 역사서이며, 그 서술범위는 전설상의 오제(五帝) 중 일인(一人)인 황제(黃帝)로부터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까지이다. 그러한 기술의 방법(식)은 중국의 역사서, 특히 정사기술(正史記述)의 모범(양식)이 되고 있다.

<사기>

 공화(共和=周)
 주(周)의 여왕(厲王)이 도망을 간 후부터 선왕(宣王)이 즉위했을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그 공화원년부터 사기(史記)의 12제후연표가 시작되어있다. (즉, 사기 중에서는 최고 연대의 기술에 해당된다) 서력(西曆=西紀)으로는 기원전 841년부터 기원전 828년까지로 되어있다. 사기(史記)의 주본기(周本紀)에 의하면 주(周)의 려왕(厲王)이 국민의 폭동에 의해서 출분(出奔-도망)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왕석(王席)이 부재함에 따라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정무(政務)를 맡게 되었는데, 그래서 그때를 공화(共和)라고 칭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혹은, 그때 정무를 맡았던 인물이 공백화(共伯和)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또 그 공백화(共伯和)는 시기(時期)를 추측해봤을 때 위무공(衛武公)이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그 시기에 왕은 없었고, 제후들의 합의로 국정이 운영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근세에 들어서 일본인들은 그 공화(共和)란 단어를 서구(西歐)의 '리즈 퍼브리커(res pubica=국가, 공화국, 사회)'와 같이, 국왕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귀족이나 의원 등, 유력자들의 합의로 국정을 운영하는 뜻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의미가 확장된 그 단어는 곧 중화문명권전체에 퍼지게 되었고, 그리하여 또 일반화되어버린 그 단어가 이제는 더욱 의미가 확장, 보편화되어서, 지역이나 시대를 불문하고 세습권력자의 부재(不在) 정체(政體)를 가리키는 말이 되고 있다고 한다.(共和制)


 ※ 二十四史는 中国 王朝의 正史 24書를 말한다. 전설상의 제왕 황제(黃帝)로부터 명(明)이 멸망한 1644년까지의 역사를 포함하고 있다.

 <참고 : 26史 - 단, 참고일 뿐이므로, 설명과 한글표기는 생략함>

 <二十六史一覧>


1

史記

前漢・司馬遷

紀元前91年

130巻 本紀12巻、表10巻、書8巻、世家30巻、列伝70巻

2

漢書

後漢・班固

82年

100巻 本紀12巻、列伝70巻、表8巻、志10巻

3

後漢書

宋・范曄

432年

120巻 本紀10巻、列伝80巻、志30巻

4

三国志

晋・陳寿

3世紀末

65巻 魏国志30巻(本紀4巻,列伝26巻) 蜀国志15巻, 呉国志20巻

5

晋書

唐・房玄齢他

648年

130巻 帝紀10巻・載記[1]30巻、列伝70巻、志20巻

6

宋書

南斉・沈約

488年

100巻 本紀10巻、列伝60巻、志30巻

7

南斉書

梁・蕭子顕

6世紀前半

59巻[2] 本紀8巻、志11巻、列伝40巻

8

梁書

唐・姚思廉

636年

56巻 本紀6巻、列伝50巻

9

陳書

唐・姚思廉

636年

36巻 本紀6巻、列伝30巻

10

 魏書

北斉・魏収

554年

114巻 本紀14巻、列伝96巻、志20巻

11

北斉書

唐・李百薬

636年

50巻 本紀8巻、列伝42巻

12

周書

12唐 ・
令狐徳棻他


636年

50巻 帝紀8巻、列伝42巻


13

隋書

唐・魏徴
長孫無忌

656年

85巻 本紀5巻、志30巻、列伝50巻

14

南史

唐・李延寿

659年

80巻 本紀10巻、列伝70巻

15

北史

唐・李延寿

659年

100巻 本紀12巻、列伝88巻

16

 旧
唐書

後晋・劉昫他

945年

200巻 本紀20巻、列伝150巻、志30巻

17

 新
唐書

北宋 ・
欧陽修, 宋祁

1060年

225巻 本紀10巻、志50巻、表15巻、列伝150巻

18

 旧
五代史


北宋 ・
薛居正他


974年

150巻
梁書24巻、唐書50巻、晉書24巻、漢書11巻、周書22巻、志12巻


19

 新
五代史

北宋・欧陽修

1053年

74巻
本紀12巻、列伝45巻、考3巻、世家及年譜11巻、四夷附録3巻

20

宋史

元・脱脱他

1345年

496巻 本紀47巻、志162巻、表32巻、列伝255巻

21

遼史

元・脱脱他

1345年

116巻 本紀30巻、志32巻、表8巻、列伝45巻、国語解1巻

22

金史

元・脱脱他

1345年

135巻 本紀19巻、志39巻、表4巻、列伝71巻

23

元史

明 ・
宋濂, 高啓他

1370年

210巻 本紀47巻、表8巻、志58巻、列伝97巻

24

明史

清・張廷玉等

1739年

332巻 本紀24巻、列伝220巻、表13巻、志75巻、目録4巻


25

新元史

中華民国 ・
柯劭忞

1919年

267巻 本紀26巻、表7巻、志70巻、列伝154巻

26

清史稿

中華民国・柯劭忞

1927年 

536巻[3] 本紀25巻、志142巻、表53巻、列伝316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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