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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화(神話)와 전설(傳說)의 시대
단, 아래는 개요에 대한 소개일 뿐이며
그 외에도 많은 자료들이 있으므로, 필요하신 분들은 다른 문헌을 참고 바랍니다.
중국의 신화(神話)는 주로 한민족(漢民族)에 의해서 전해졌던 것이었지만
그러나 다른 소수민족들의 것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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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황제(黃帝)와 염제(炎帝)의 시대
(1) 신농(神農)

신농(神農)은 고대 중국의 전설에 등장하는 황제이며,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삼황(三皇) 중 한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백초(百草)를 시험하여 그 효능을 확인했으며, 그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의료를 베풀었고, 농경의 기술도 가르쳤다고 한다. 그리하여 또 그는 농업과 약(藥)에 관해서 심대(甚大)한 공헌을 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그를 신농대제(神農大帝)라고 칭했다거나, 또는 의약(醫藥)과 농업을 주관하는 신으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또 그는 기원전 2740년경 고대 중국의 왕이었다고 하며, 120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세계 최고(最古)의 본초서(本草書)인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 그 이름을 남겼다.
그리고 또 전설에 의하면, 그의 몸은 뇌(腦)와 사지(四肢)를 제외하고는 모두 투명했으며, 그래서 내장(內臟)까지도 훤히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또 그는 백초(百草)를 연구했을 때, 만약에 독을 시음(試飮)했을 때는 그의 내장이 검게 변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것으로 그는 독(毒)의 유무(有無)와 약초의 효능을 밝혀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의 몸에는 많은 독(毒)이 쌓이게 되었고, 그래서 또 궁극적으로 그 때문에 사망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아무튼, 그리하여 그 '신농 씨(神農氏)'는 중국에 있어서 최초로 부락연맹(部落連盟)의 이름이 되었다고 하고, 그 수령(首領)을 염제(炎帝)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신농(神農)부족' 최후의 염제(炎帝)는 황제(黃帝)와 연합해서 '화하족(華夏族-漢族의 主體)'을 성립시켰다고 한다.
(2) 황제(黄帝)

황제(黄帝)는 고대 중국 신화전설상에서는 삼황(三皇)의 치세(治世)를 이었고, 중국을 통치했던 5제(五帝) 중 최초의 황제(皇帝)라고 알려져 있다. 기원전 2510년부터 기원전 2448년.
그리고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국어(國語)・진어(晋語)>에 의하면, 그는 소전(少典)의 아들이었고, 희수(姬水) 근처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성(姓)을 희(姬)로 했다고 하며, 또는 희공손(姬公孫)으로도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또 이름은 헌원(軒轅), 그리고 또 제홍 씨(帝鴻氏)라고도 불렸다는데, 산해경(山海經)에 등장하는 괴신(怪神) 제홍(帝鴻)과도 동일인물이라는 설도 있다.
그는 또 치우(蚩尤)를 토벌하고 제후들의 인망(人望)을 모았으며, 그로써 신농 씨(神農氏)를 이어서 황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기(史記)에서는 그 치세를 말하기를 <따르지 않는 자는 토벌하여 길을 열었고, 후세(後世)였던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에 해당되는 영역을 통치했으며, 그 시대는 개국(開國)한 황제의 시대였다>라고 묘사했다.
그리고 또, 그 이후의 4인의 오제(五帝)와 하(夏), 은(殷), 주(周), 진(秦)의 시조(始祖)들을 시작으로 해서, 많은 제후들이 그의 자손으로 여겨졌다고 하며, 그리하여 또 현재에도 많은 수의 한민족들은 그를 선조로 추앙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청대(淸代) 말기에는 혁명파들이 그가 즉위했던 해를 기원(紀元)으로 했던 <황제(黃帝)기원(紀元)>이라고 칭했던 달력을 사용하는 것으로써, 청조(淸朝)에의 대항의식을 고취(鼓吹)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후, 신해혁명(辛亥革命) 후에 이르자, 그 혁명지지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황제(黃帝)의 존재를 부정하는 주장들이 높아졌고, 그 결과로 또 일본(日本) 등에서도 그를 부정하는 의견들이 제시되기도 했다.
하지만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재까지도 중국 의학(醫學)의 시조로서 숭배되고 있으며, 그리하여 중국 최고(最古)의 의학서인 <황제내경소문(皇帝內經素問)>과 <황제내경영추(黃帝內徑靈樞)>도 그의 저작으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3) 치우(蚩尤) 
<漢代의 石刻画>
치우(蚩尤 또는 蚩蚘)는 고대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신으로, 삼황오제(三皇五帝) 중 한명이었다고 하며, 염제 신농 씨(炎帝神農氏)으로 자손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는 병기(兵器)의 발명자였고, 안개(霧)를 다루는 힘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또 그 용모는 수신(獸身)에다 동(銅)으로 된 머리, 그리고 쇠(鐵)로 된 이마(額)를 가졌었다고 하며, 사목(四目-네 개의 눈)에다 육비(六臂-팔이 6개)였다고도 하며, 사람의 몸에다 소(牛)의 머리를 했고, 그리고 또 발굽이 있었다고도 하고, 머리에 뿔도 있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또 그는 노사(路史)에 의하면 성이 강(羌)이었다고 하며
그 모습 또한 '술이기(述異記)' 권상(卷上)에 의하면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그는 동(銅)의 머리에 철의 이마를 했고, 철석(鐵石)을 먹으며... 사람의 신체지만, 소의 발굽과 네 개의 눈을 가졌고, 여섯 개의 손을 가지고 있었으며... 진한(秦漢)시대의 말(說)에 의하면, 치우(蚩尤) 씨(氏)의 귀밑머리는 칼이나 창 같았고, 머리에는 뿔을 가졌다...>
그리고 또한 그 '술이기(述異記)' 권상(卷上)에는 그 외에도
<서산(西山)의 태원지방(太原地方)에 나타났던 치우(蚩尤)는 거북이의 다리와 뱀의 머리를 했다>
라고도 따로 기술해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외의 많은 책에서도 그는 괴물로 묘사되고 있으며, 그래서 또 그가 초능력을 가졌었다든지, 용감하고 인내력이 강했었다든지, 그리고 또 그의 형제들도 그와 같은 용모에다 81인 또는 72인이 있었다든지, 그들 또한 스스로 무기를 만들어서 천하를 횡행(橫行)했었다는 이야기들이 있었고, 그리고 또 그의 머리가 말머리였다든지, 또는 머리가 2개였다, 그리고 다리가 8개였다는 등, 그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러하자 당시에는 아직 황제의 자리에 앉지 못하고 있었던 황제(黃帝)가 그를 토벌하려고 하였지만, 그러나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자 또 황제(黃帝)는 제위에 오르자 본격적으로 그와의 대결에 임했고, 그리하여 그 결전을 현재 하북성(河北省) 장가구시(張家口市)인 탁록(涿鹿)에서 치르게 되었다고 한다.
<탁록(涿鹿)의 싸움-史記의 五帝本紀와 山海經의 大荒北經에는 冀州의 들판이라고 했음>
※ 산해경(山海經)은 중국 최고(最古)의 공상적(空想的) 지리서(地理書)이며, 그 내용은 산천(山川)의 지리와 동식물과 광물(鑛物) 그리고 산악(山岳)과 제사(祭祀)에 관한 것, 그리고 또 변방의 나라들과 이형(異形)의 사람들 그리고 전설상의 제왕들의 계보 등에 관한 것들을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또 그 중에는 기괴한 모습을 한 동식물들과 신(神)들에 관한 것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후세에 그 책은 괴물(怪物)사전(事典) 정도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그리고 또 그것을 누가 언제 무엇을 위해서 썼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고, 그리고 또 그것의 중요한 부분은 전국시대 말기까지 성립되었다고 하며, 그 성립된 장소에 관해서는 종언(從言)처럼 초(楚)나라뿐만이 아니라 제(齊)나라의 일부 학사(學士)들도 관여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지만, 그러나 또 그 근본적인 것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정설(定說)은 없다. 하지만 또 그에 대해서 일치하는 의견으로는 <단 한사람이 한 번에 쓴 것은 아니다>라는 것인데, 그것은 또 각권(各卷)의 내용과 문체들이 다 다른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또, 그것을 정리했던 사람은 극히 소수의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현재 추정하고 있다. 
<산해경의 일부>
아무튼, 그리하여 치우(蚩尤)는 그의 형제들 외에도 무수히 많은 이매망량(魑魅魍魎-온갖 雜鬼)들을 그 싸움에 끌어들였고, 그리고는 바람과 비와 연기 그리고 농무(濃霧)를 일으켜서 황제(黃帝)를 괴롭혔다. 그래서 처음에는 치우(蚩尤)가 우세했는데, 그때의 상황을 또 '용어하도(龍魚河圖)'에서는
<아무리 인의(仁義)가 두터웠던 황제(黃帝)였어도, 치우(蚩尤)를 제압하지는 못했다>
라고 했고, 그러자 또 산해경(山海經)의 대황북경(大荒北經-大荒海內經 卷 十七)에서는
<치우(蚩尤)는 무기를 만들어서 황제(黃帝)를 공격했다. 그러자 황제(黃帝)는 응용(應龍)에게 명해서 치우(蚩尤)를 기주(冀州) 들판으로 오게 해서 결전에 임했다. 그러자 치우(蚩尤)는 풍백(風伯-바람의 신)과 우사(雨師-비의 신)를 끌어들여서 폭풍우를 휘몰아치게 했는데, 그러자 또 그에 대해서 황제(黃帝)는 자신의 딸이었고, 햇볕의 신이었던 발(魃 또는 妭)을 하늘에서 불러 내려서 그에 대항시켰다. 그러자 풍백우사는 발(魃)에 졌고, 드디어 치우(蚩尤)도 토벌되었다>
라고 했다.
※ 응용(應龍)은 용(龍) 중에서도 날개가 있었던 용(龍)이라고 하며, 비를 내리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응용(應龍)은 중국의 고서(古書) 산해경(山海經)에 등장하는 괴물이며, 용(龍)의 일종(一種)이었고, 그리고 또 중국신화에서는 황제(黃帝)의 직속(直屬)이었다고 하며, 매(鷹) 같은 날개가 있었고, 발에는 3개의 발가락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천지(天地)를 왕래하는 일이 가능했었다고 하며, 특히 물을 저장했다가 비를 내리게 하는 능력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황제(黃帝)가 치우(蚩尤)와 싸웠을 때, 폭풍우를 일으키는 것으로 황제(黃帝)의 군사들을 도왔다고 한다. 그러나 치우(蚩尤)와의 싸움에서 살생(殺生)을 저질렀기 때문에 사기(邪氣)를 품게 되었고, 그러자 또 그로 인해서 신(神)들이 거주하는 하늘로 올라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그 후, 응용(應龍)은 중국의 남부지방에서 숨어살았는데, 그 때문에 응용(應龍)이라는 남부의 땅에서는 비가 많았고, 그 외의 지방에서는 한발(旱魃)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리고 또 술이기(述異記)에는 <이수(泥水-흙탕물)에서 자란 복(蝮=長魚)이 500년이 지나면 교(蛟=蛟龍=이무기=蛟螭=雨龍)가 되고, 그 교(蛟)가 또 1000년이 되면 용(龍-成龍)이 되는데, 그 용(龍)이 또 500년이 지나면 각용(角龍-뿔을 가진 용)이 되고, 그 각용(角龍)은 또 1000년이 지나면 응용(應龍)이 되며, 그래서 또 그 응용(應龍)이 늙으면 황용(黃龍)이라고 부른다>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또 서응기(瑞應記)에서는 <그 황용(黃龍)은 신(神)의 정(精-精氣)을 (가지며), 그리고 응용(應龍)은 4룡(龍)의 장(長)이고, 4룡은 또 창용(蒼龍-靑龍)과 적용(赤龍-紅龍) 그리고 백용(白龍)과 흑용(黑龍)이다>라고 써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응용(應龍)은 천마(天馬)를 생산하며, 비룡(飛龍)은 봉황(鳳凰)을 낳는다고 전해진다. 
<응용>
그리고 또 용어하도(龍魚河圖)에서는
<천제(天帝)가 보냈던 현녀(玄女-黃帝가 蚩尤와 싸울 때, 병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神女)>로부터 황제(黃帝)가 병신신부(兵信神符)라는 주부(呪符-부적)를 받아서 그 싸움에서 승리했다>
라고도 했다.
아무튼 그때, 황제(黃帝)는 지남차(指南車)를 사용해서 방위를 알게 되었고(그때, 蚩尤가 안개를 일으켜서 방향감각을 잃게 만들었으므로), 그러자 마침내 황제(黃帝)는 치우(蚩尤)를 잡아서 죽일 수 있었다고 한다.

<지남차의 예, 모형>
참고로, 지남차(指南車)는 수레가 이동하더라도 수레 위에 세워놓은 인형의 손가락이 항상 남쪽을 가리키도록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며, 黃帝가 만들었다고도 하고, 주공(周公)이 만들었다고도 함
그리하여 처형된 치우(蚩尤)를 매장했던 무덤은 산동(山東)의 수장(壽張) 또는, 같은 산동(山東)의 동평육(東平陸)에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일설(一說)에는 또, 한쪽에는 머리와 몸을 그리고 다른 쪽에는 수족(手足)을 매장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또 술이기(述異記) 권상(卷上)에서는
<기주(冀州-河北)의 사람이 동철(銅鐵)로 된 해골을 발굴했는데, 그것이 바로 치우(蚩尤)의 것이었다>
라고 했고
<그 이빨의 길이는 2촌(寸-약 6센티 정도)였으며, 너무 단단해서 부수려했어도 부수어지지 않았다>
라고도 했다.
그리고 또, 산서(山西)의 해주(解州)에는 소금 못(鹽池)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래서 그곳에서는 특산품인 하동염(河東鹽)을 생산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소금이 붉은 빛을 띠는 이유가 바로 그 치우(蚩尤)가 죽었을 때 흘렸던 피 때문이었다고도 전해진다.
아무튼 그리고 또 그때, 또 다른 치우(蚩尤)의 편으로, 아주 용감했던 전쟁의 고수(高手) 족(族)이었던 구려족<九黎族-먀오(苗族) 족 또는 H'Mông의 선조로 알려져 있다>과 거체(巨體)의 과부족(夸父族)도 있었다고 하며, 최후에 포로가 되었던 치우(蚩尤)는 도망갈 것을 염려해서 수갑(手匣)과 족갑(足匣)이 채워졌고, 재갈까지 물린 채로 끌려 나가서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때, 그가 흘렸던 피가 그가 차고 있던 수갑(手匣 또는 족쇄)을 붉게 물들였고, 그러자 또 그 후에 그것은 단풍나무가 되었다고 하며, 그리하여 매년 가을이 되면 단풍나무들에 그의 한(恨)이 스며들어서 붉게 물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또 적기(赤旗)를 치우기(蚩尤旗)라고 부른다고 하며, 일찍이 유방(劉邦)이 그것을 군기(軍旗)로써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당시, 치우(蚩尤)의 지배하에 있었던 민중(民衆)들은, 그 치우(蚩尤)가 처형된 후에 선량(善良)한 사람들은 추도(鄒屠)의 땅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 즉, 흉악한 사람들은 유북(有北-북쪽의 寒冷 不毛地)로 이주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추도(鄒屠)의 땅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은 추도(鄒屠) 씨(氏)로 불리게 되었고, 그 후에 추(鄒) 씨와 도(屠) 씨로 분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전진(前秦)의 왕가(王嘉)가 찬(撰)했다던 습유기(拾遺記)에 의하면, 제곡(帝嚳) 고신 씨(高辛氏)의 왕후는 바로 그 추도(鄒屠) 씨 출신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그 전쟁이 모두 끝나자 구려족(九黎族)은 도망을 가서 삼묘(三苗)가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삼묘(三苗)는 현재 중국을 중심으로 한 그 주변의 동남아시아제국을 의미하여
또는 그 중의 일부가 미국(美國)으로 망명, 이주했다는 묘족(苗族)이었다고 한다.
그러자 황제(黃帝)는 그들을 경계해서 그들 모두를 죽여 없애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 뿌리를 다 뽑지를 못해서, 결국 그 후에 그들은 중국을 집요하게 괴롭히게 되는 고민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또, 초(楚)는 바로 그 삼묘(三苗)의 귀족 계급들이 건국했던 나라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국어(國語)의 초어(楚語)와 그 주(注)에 따르면
<치우(蚩尤)를 죽였던 황제(黃帝)의 아들 소호금천 씨(少昊金天氏)의 세상이 쇠(衰)하자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 주도자들이 바로 구려족(黎氏의 9人)이었고, 그들은 치우(蚩尤)의 추종자들이었다>
라고 했다.
그리고 또 진(秦)의 시대까지 치우(蚩尤)는 5병(兵-다섯 종류의 병기)의 창시자로 알려졌으며, 그리하여 병주신(兵主神)으로 불리면서 제사(祭祀)로 모셔졌다고 한다.(史記에서도 兵主神 또는 전쟁의 신으로 취급함)
그리하여 또 후일, 천하를 통일했던 시황제(始皇帝)는 태산(泰山)에서 봉선(封禪)을 올린 후, 동쪽의 해안지방에서 제사 올렸던 8신 중 하나였던 병주신(兵主神)의 제사를 치우(蚩尤)의 무덤에서 올렸다고 했고, 그 후에 유방(劉邦)도 거병(擧兵)했던 당시에 치우(蚩尤)를 모셨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치우(蚩尤)는 전쟁에서 필요한 모든 무기 즉, 도끼나 방패 그리고 활과 화살 등, 거의 전부를 아주 훌륭하게 발명했다고 하며, 그의 사후(死後)에는 반란을 억압하는 법이 새로 제정되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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