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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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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화(神話)와 전설(傳說)의 시대
단, 아래는 개요에 대한 소개일 뿐이며
그 외에도 많은 자료들이 있으므로, 필요하신 분들은 다른 문헌을 참고 바랍니다.
중국의 신화(神話)는 주로 한민족(漢民族)에 의해서 전해졌던 것이었지만
그러나 다른 소수민족들의 것도 포함되어 있다.
3) 요순(堯舜)의 시대
(1) 곡(嚳)
곡(嚳)은 상고(上古) 중국신화 上의 제왕(帝王)이며, 이름은 고신(高辛) 또는 고신(高辛)에 도읍을 두었던 고신 씨(高辛氏)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5제(五帝) 중 한명이었으며, 전욱(顓頊)의 뒤를 이어서 제위에 올랐다고 한다. 곡(嚳)의 아버지는 교극(蟜極)이었고, 그 교극(蟜極)의 아버지는 황제(黃帝)의 아들이었던 현효(玄囂)였다고 했으므로, 결국 곡(嚳)은 황제(黃帝)의 증손(曾孫)에 해당한다.
그리고 또 그의 부인은 진봉 씨(陳鋒氏)의 딸이었다고 하며, 그 사이에서 태어났던 아들이 바로 요(堯)였다. 그리고 또, 취(추)자 씨(娵訾氏)의 딸과의 사이에는 아들 지(摯)가 있었다고 하며, 그리고 그 곡(嚳)도 다른 전설상의 천자(天子)들과 같이 고결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특히 사기(史記)에서는 <그가 태어날 때 자신의 이름을 말할 수 있었을 정도로 명석했던 사람이었다>라고 기록했다.
※ 지(摯)는 상고시대(上古時代) 중국신화에 등장하는 전설상의 군주 중 한사람으로, 후대(後代)에 삼황오제(三皇五帝) 중 한사람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리고 별명(別名)은 주제(朱帝) 또는 백제(白帝) 또는 서황(西皇)으로 알려졌고, 곡(嚳)의 장남(長男)으로도 알려졌다.
그리고 또 사기(史記)에 의하면 <지(摯)가 제위를 물려받는 것은 (다소) 무리(無理)였다>라고 했고, 하지만 또 십팔사략(十八史略)에서는 <지(摯)가 제위를 물려받아서 약 80년간 군주의 자리에 있었고, (현재의)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市)에 매장되었다>라고 했으므로, 그 진위(眞僞)는 알기 어렵다.
그리고 또 일설에 의하면, 삼황오제(三皇五帝)의 가계(家系)를 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소호 씨(少昊氏)의 소호(少昊)와 곡(嚳)이 동일 인물이었다고 하며, 그리고 또 그 곡(嚳)이 바로 순(舜)과도 동일 인물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소호 씨(少昊氏)는 중국신화에 의하면, 성(姓)은 영(嬴)이었고, 다르게는 소호(少皜) 또는 소호(少皞) 또는 소고(少皋)라고도 쓰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중국의 춘추시대(春秋時代)에 번성했던 진(秦) 씨, 등의 조상으로 숭배되었다.
(2) 요(堯)
요(堯)는 중국신화에 등장하는 군주(君主)이며, 성(姓)은 이기(伊祁), 이름은 방훈(放勳)이었다고 한다.
또는 도당씨(陶唐氏).
유가(儒家)에 의해서 신성(神聖)시 되었고, 성인(聖人)으로 숭배되었다. 그리고 사기(史記)의 오제본기(五帝本紀)에 의하면, 요(堯)는 곡(嚳)의 차남(次男)으로 태어났고, 곡(嚳)의 뒤를 이을 형(兄)으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아서 제위(帝位)에 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희중(羲仲), 희숙(羲叔), 화중(和仲) 등에게 명(命)해서 천문(天文)을 관찰시켰고, 그것을 토대로 해서 역(曆)을 만들게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치세(治世) 중에 대홍수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처리할 사람을 뽑았는데, 곤(鯀)이란 사람이 추천되었다. 그러나 요(堯)는 그를 탐탁히 여기지 않았고, 그리고 또 그 곤(鯀)이 요(堯)의 예상대로 치수(治水)에 실패하자(9년간 성과가 없었다고 함) 요(堯)는 그를 죽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후에 곤(鯀)의 아들 우(禹)가 그 일을 이어받았다.
그 요(堯)에게는 단주(丹朱)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러나 요(堯)는 그를 후계자로 하지 않고 신하들로부터 추천을 받았다. 그러자 순(舜)이 추천되었고, 그는 인품이 높았던 사람이었다. 그러자 요(堯)는 자신의 두 딸을 순(舜)에게 강가(降嫁-위 신분에서 아래 신분으로 시집감)시키고는 그를 지켜보았다. 그러자 역시, 순(舜)은 요(堯)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그러자 요(堯)는 순(舜)을 후계자로 정했다. 그리고 그 8년 후에 그는 붕어(崩御)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십팔사략(十八史略)에서는 요(堯)가 평양(平陽=現 桂陽県=湖南省 郴州市에 위치한 縣)에 도읍을 정했을 때, 무척 검소한 생활을 했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또 다른 전설에서는 <한때 하늘에 해가 10개가 떴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세상은 불지옥 같았다고 한다. 그러자 요(堯)는 당시 활의 명인(名人)이었던 예(羿-姓은 后)에게 시켜서 그것을 해결하라고 명했다. 그러자 그 예(羿)는 9개의 태양을 맞추어서 떨어뜨렸고, 그러자 사람들은 요(堯)를 칭송하면서 왕으로 맞았다>고 한다.
하지만 후세에 함께 요순(堯舜)으로 불렸던 그 성천자(聖天子)에 대한 전설은 춘추시대 말(末)에야 세상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이 실존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그러나 또 2000년에 중국의 인민일보(人民日報)가 산서성(山西省)에서 그 요순(堯舜)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던 바 있었고, 그리고 또 그 앞 1993년에는 '곽점1호초기(郭店一号楚墓=湖北省 荊門市에 있는 陵墓)'에서 발견되었던 죽간(竹簡)에 그 요순(堯舜) 시대의 기록이 나왔다고 해서 주목되었던 바 있었다.
하지만 당대(唐代)의 역사가 유지기<劉知幾=661年(龍朔 元年)-721年(開元 9年)>는 자신의 저서 사통(史通)에서 그 요순(堯舜)의 전설을 부정했고, 산해경(山海經) 등에서는 수요성(囚堯城)과 제단주(帝丹朱)가 기술(記述)되어 있으며, 그로부터 또 상정(想定)을 해서 <요(堯)는 당시의 실력자였던 순(舜)에게 강제적으로 퇴위를 당했고, 그 수요성(囚堯城)에 유폐되었다>라고 기록을 해두었다. 그리고 또 그로부터 얼마 후에 <순(舜)은 단주(丹朱-帝丹朱)도 퇴위시킨 후에 잠시간 사람들의 지지를 모았고, 그리하여 자신이 즉위했(지 않았겠는가)다. 그리하여 그 다음부터는 그렇게 덕(德)이 높은 대인물(大人物)들이 계속해서 나왔(던 것이 아니었겠는가)다>라고 했다.
아무튼, 그 요(堯)가 제위에 있었던 수십(數十) 년 간은 고복격양(鼓腹擊壤-배를 두드리고 땅을 발로 두드리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생활이 안락하고 세상이 태평스러움을 의미함)의 평화의 시대였다고 하고, 그러자 또 오히려 요(堯)는 세상이 정말로 잘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불안했다고 한다. 그래서 하루는 요(堯)가 변장을 해서 암행(暗行)을 나서게 되었는데, 그런데 도중에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잘 들어보니 그것은 자신을 찬양하는 소리였고, 그에 요(堯)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또 길을 가게 되었는데, 그런데 이번에는 어떤 노인이 자신의 배를 두드리는 것으로 장단을 맞추면서(鼓腹擊壤) 아주 즐겁게 노래하는 것을 들었고, 그 내용은 또 아래와 같았다고 한다.(단, 본인의 역이므로, 참고만 할 것)
해가 뜨면 일하고(日出而作)/ 해가 지면 쉰다.(日入而息)
우물 파서 (물) 마시고(鑿井而飮)/ 밭 경작해서 (곡식을) 먹는다.(耕田而食)
(그러니) 임금의 권력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나 있을 것인가
(帝力何有於我哉 또는 帝力何有于我哉)
해가 나오면 일을 하고/ 해가 떨어지면 쉰다
우물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서 먹는다
임금의 권세가 있기나 하는 것인가
있다고 해도 (그만), 없다고 해도 (그만)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한가지다
그러자 요(堯)는 그때서야 자신이 세상을 평화롭게 통치하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참고: 예(羿)

<달로 도망가는 嫦娥>
예(羿)는 중국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활의 명수(名手)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아내였던 상아(嫦娥=姮娥)에게 배신을 당한 후, 결국에는 제자(弟子)였던 봉몽(逢蒙)에게 살해당했다고 했으므로, 비극적인 영웅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 상아(嫦娥 또는 姮娥)는 중국신화에 등장하는 예(羿)의 아내였으며, 회남자(淮南子)의 남명훈(覽冥訓)에 의하면 <그녀는 처음에는 선녀(仙女)였지만, 그러나 지상(地上)으로 내려오면서 불로불사(不老不死)의 능력을 잃었기 때문에, 예(羿)가 서왕모(西王母)에게서 얻어왔던 약을 훔쳐 먹고 달로 도망을 가서, 그곳에서 두꺼비가 되었다>라고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는 <예(羿)가 헤어졌던 상아(嫦娥)를 좀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서 달을 향해서 공물(供物)을 바쳤던 것이 달구경의 유래>라고 했고, 그리고 또 도교(道敎)에서는 상아(嫦娥)를 월신(月神)으로 생각하고는 태음성군(太陰星君)이라거나, 월궁황화소요원정성후태음원군(月宮黄華素曜元精聖後太陰元君) 또는 월궁태음황군효도명왕(月宮太陰皇君孝道明王)이라고 부르면서 중추절(中秋節)에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그리고 또 원래의 자(字)는 항(姮)이었지만, 전한(前漢) 문제(文帝)의 이름이 항(恒)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피휘(避諱)로서 상(嫦) 자(字)를 사용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상아 상>
그리고 또 그에 대한 전설은 대체적으로 2가지가 있다고 하며, 그 하나는 <영웅의 전설>로 앞에서 설명되었던 태양을 활로 쏘아서 떨어뜨렸다는 전설이며, 그 내용은 또 제준(帝俊-嚳 또는 舜과 동일 인물로 봄)에게는 희화(羲和)라는 아내가 있었는데, 그녀와의 사이에서 나중에 태양(太陽)이 되는 아들 10명이 생겼다.
※ 희화(羲和)는 중국 고대의 지리서(地理書) 산해경(山海經)에 의하면, 태양(太陽)의 모신(母神)이었다고 하며, 당시 염제(炎帝-불의 신) 관리 하에 있었던 동이인(東夷人=은 만주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 등이 속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여기서의 정확한 대상은 알 수 없음)의 선조(先祖)에 해당했던 제준(帝俊)의 아내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의 본국(本國)은 중국의 입장에서, 동해(東海) 바다 밖, 감수(甘水) 근처에 있었다고 하며, 그래서 그녀는 그곳에서 나고 자랐으며, 세계수(世界樹=生命樹-설명은 아래 참조)인 부상(扶桑) 아래에 살았던 여신(女神)이었다고 한다.
♣ 세계수(世界樹) 또는 생명수(生命樹)는 생명의 원천 또는 세계의 중심 또는 인류의 발상지가 된다는 나무로, 그 사상은 예로부터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그리고 이란과 인도 그리고 북부 유럽과 아시아 등지의 민간 신앙과 신화 또는 전설 속에서 널리 분포되어 있는 <수목 숭배>의 한 형식이며,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지혜의 나무> 같은 것이 그에 속했다고 하며, 부상(扶桑)은 해가 뜨는 동쪽 바다를 의미하고, 일본(日本)의 다른 이름 또는 옛날 중국의 전설에서 해가 뜨는 동쪽 바다 속에 있다고 하는 상상의 나무 또는 그 나무가 있다는 곳을 의미한다고 함.
그러자 나중에 그 아들(太陽)들은 하루에 한명씩 교대로 지상(地上)을 비추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그랬던 것이 요(堯)의 대(代)에 이르자 10개의 태양(太陽)이 한꺼번에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자 또 지상(地上)은 곧 작열(灼熱)지옥(地獄)으로 변해갔고, 논밭의 작물(作物)들도 모두 고사(枯死)하고 말았다. 그러자 요(堯)는 예(羿)에게 그 대책을 의논했는데, 그러자 또 예(羿)는 그 태양들에 위협을 가해서 그들이 처음처럼 교대로 나타나게 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효과가 없었다. 그러자 그는 하는 수 없이 단 한 개의 태양만 남겨두고 9개의 태양은 활로 쏘아서 떨어뜨려버렸다. 그러자 다시 지상(地上)에는 평온(平穩)이 찾아왔고, 그리고 그 후에 예(羿)는 중국 각지에서 수많은 마물(魔物-妖物)들을 퇴치했으며, 그리하여 사람들에게서 그 위업(偉業)을 칭송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일로 해서 아들들을 잃게 된 상제(玉皇上帝-그러나 여기서는 上帝로 나옴)는 그 예(羿)를 멀리했고, 그리하여 예(羿)는 신적(神籍-神의 名簿)에서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때부터 불로불사(不老不死)의 몸이 되지 못했는데, 그런데 그때, 그의 아내였던 상아(嫦娥) 역시도 신적(神籍)에서 제외되었으며, 그래서 그녀 역시도 불로불사(不老不死)의 몸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자 상아(嫦娥)는 예(羿)를 원망했고, 그러자 또 예(羿)는 곤륜산(崑崙山) 서쪽에 살고 있던 서왕모(西王母)를 찾아가서 그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영약을 구해서 가져왔다고 한다.

<서왕모-漢代의 작품>
♣ 서왕모(西王母)는 중국 고래(古來)로부터 신앙(信仰)으로 모셔졌던 여선(女仙) 또는 여신(女神)이었으며, 성(姓)은 양(楊) 이름은 회(回)였다고 한다. 그리고 구령태묘구산금모(九靈太妙龜山金母) 또는 태령구광구대금모(太靈九光龜臺金母) 또는 요지금모(瑤池金母)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왕모(王母)는 조모(祖母)의 의미이며, 그래서 또 서왕모(西王母)는 서방(西方)에 살고 있는 여성이라는 존칭이었다. 그리고 또 그녀는 그곳에서 모든 선녀들을 거느렸다고 하며, 남자 신선들을 거느렸던 동왕부(東王父)와 대응(對應)했다. 그리고 주(周)의 목왕(穆王-5代王)이 서쪽을 순부(巡符)해서 곤륜(崑崙)에 들었을 때, 그곳에서 서왕모(西王母)를 만났던 적이 있었다고 하고, 그러자 그는 다시 돌아가는 것을 잊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가 장생(長生)을 원했을 때, 그 서왕모(西王母)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선도칠과(仙桃七顆)를 주고 갔다고도 한다. 그리고 또 현재의 서왕모(西王母)의 이미지는 도교(道敎)가 완성된 후에 묘사된 이상화(理想化)된 모습이며, 원래의 모습은 천려오잔(天厲五殘-疾病과 5종류의 형벌)을 주관했던 귀신(鬼神)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또 산해경(山海經)의 서산경(西山經)과 대황서경(大荒西經)에서는 <(그녀는) 사람의 모습이었지만, 그러나 표범의 꼬리를 가졌고, 호랑이의 이빨을 드러내면서 자주 으르렁거렸던 반인반수(伴人反獸)의 몸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머리는 다 헝클어진 쑥대머리였으며, 그 위에다 옥(玉) 보석으로 장식을 했고, 굴(穴) 같은 곳에서 살았다>라고 했다. 그리고 또 해내북경(海內北經)에서는 세 마리의 새가 때마다 서왕모(西王母)의 식사를 날랐다고 했는데, 그 새의 이름은 대목(大鶩)과 소목(小鶩) 그리고 청조<靑鳥-파랑새 또는 밀화(密話)부리라고 하며, 반가운 사자(使者)나 편지 등의 뜻이 있는데, 그것은 또 푸른 새가 온 것을 보고 동방삭(東方朔)이 서왕모(西王母)의 사자라고 했다던 한무(漢武)의 고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장자(莊子)에 의하면, 그녀는 득도(得道)를 한 신선(神仙)으로, 그리고 또 회남자(淮南子)에서는 앞에서 소개했던 대로, 그녀가 가졌던 불사(不死)의 약을 상아(嫦娥)가 훔쳐서 달로 도망을 갔다고 기록했다. 아무튼, 그렇게 인간의 비참한 최후를 관장했던 사신(死神)으로서의 그녀였다지만, 그러나 또 <그녀를 숭배하고 제사를 올리면, 그런 비통한 죽음을 면할 수 있다>라고 하는, 그러한 공포로부터 발생했던 신앙에 의해서 그녀는 서서히 불로불사(不老不死)의 힘을 주는 여신(女神)이라는 이미지로 변화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도교(道敎)가 성립되자 그녀는 마침내 그런 괴물이나 귀신에서 천계(天界)의 아름다운 최고 선녀(仙女)로 완전히 변신하게 되었으며, 불로불사의 선도(仙桃)를 관리하고,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하늘의 여주인으로서, 절대적인 신앙을 모으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약은 2명이서 나누어 마시면 불로불사(不老不死)의 몸만 될 수 있었지만, 그러나 혼자서 그것을 다 마셨을 때는 다시 승천(昇天)해서 신(神)이 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예(羿)는 자신 스스로 신(神)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아내와 함께 불로불사(不老不死)하려고 생각했었다지만, 그러나 상아(嫦娥)는 그것을 가지고는(또는 혼자 다 마시고는) 도망을 가고 말았다. 하지만 또 그 상아(嫦娥)는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주저(躊躇)해서 일단 달(月)에 먼저 갔는데, 그런데 예(羿)를 배신한 죄가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두꺼비로 변하고 말았고, 그대로 그 달에서 살게 되었다.

<두꺼비>
그 후, 예(羿)는 사냥이나 하면서 살았다지만, 그러다가 가복(家僕)이었던 봉몽(逢蒙)이란 자에게 활 쏘는 법을 가르쳤다. 그러자 그 봉몽(逢蒙)은 예(羿)에게서 기술을 전부 전수 받고나자 그 예(羿)를 사살(射殺)해버렸고, 그것은 또 그 예(羿)만 없으면 자신이 천하제일(天下第一)의 명인(名人)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그 일로 해서 <온몸으로 배신당했다>라는 의미의 말을 <예(羿)를 죽인 것은 봉몽(逢蒙)>이라고 말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에 그러했던 예(羿)의 처지를 딱하게 여겼던지 <보름달이 뜬 밤에 경단(瓊團)을 올려서 달에 제사지내고, 그 상아(嫦娥)의 이름을 세 번 부르자 상아(嫦娥)가 다시 돌아와서 부부로 살게 되었다>라는 이아기가 부가(附加)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전설은, 하(夏)나라를 일시적으로 망하게 했던 것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또 그 이야기도 잠시 더듬어보면... 옛날, 태강(太康-夏朝 3대왕)의 치세 때, 태강(太康)은 정치에는 관심이 적고 매일 수렵(狩獵)에만 열중했었다고 한다. 그러자 예(羿)는 무라(武羅), 백인(伯因), 웅곤(熊髡), 방어(尨圉)란 자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서 태강(太康)을 쫓아내고 그 나라를 빼앗아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 후에 예(羿)는 한착(寒浞)이라는 간신(奸臣)을 중용(重用)했고, 그리고는 그 역시도 정치보다는 수렵(狩獵)에 열중했기 때문에, 그래서 나중에는 한착(寒浞)에게 죽임 당했다고 한다.
아무튼, 위의 두 전설(傳說)이 신빙성이 있는가 없는가 또는 서로 관련이 있는가 어떤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그러나 일본의 학자 시라카와시즈카(白川靜-1910년 4월 9일부터 2006년 10월 30일. 漢文学者・古代漢字学으로 著名했던 東洋学者)는 후자(後者)의 전설에서, 그 예(羿)를 모셨던 부족(部族)이 하(夏)로부터 영토를 탈취했던 것을 시사했던 것이라고 했다.
<참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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